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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책 읽는 남자

2010.04.30 22:3604.30

  책 읽는 남자

  DOSKHARAAS(도스까라아스)

  방은 온통 책으로 가득했어.

  그래서인지 책 곰팡내가 심했는데, 그 사람은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야.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무릎 위까지 이불을 덮고 책을 보고 있었어. 책을 넘길 때랑 이불을 끌어올릴 때, 그리고 코를 훌쩍이다가 휴지에 코 풀 때 말고는 길가에 떨어진 큰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어.

  책꽂이에 코 푼 휴지 뭉치들이 굴러다니고, 방의 네 면 중 세 면은 책을 쌓아 만든 벽이 채우고 있었고, 책꽂이에는 책이 잔뜩 꽂혀 있었어. 빽빽해서 남은 공간은 한 뼘도 없었어.

  책에는 알아먹기도 힘든 제목이랑 저자 이름이 새겨져 있었지. 아직 아무도 안 읽은 순결한 책들이었어.

  그 사람은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탑처럼 쌓아두었어. 그 다음엔 새로운 책을 손으로 더듬어서 꺼냈지. 책을 꺼낼 때는 눈을 꼭 감고 재빨리 슉, 하고 꺼내들어. 글자를 안 읽으면 눈알이 터져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누가 쓴 건지, 무슨 내용인지, 목차에는 뭐가 써 있는지, 이런 것도 확인 안 해.

  그 사람이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면 빈 자리에서 새 책이 태어나서는 빈자리를 채웠어.

  그 사람은 밥도 안 먹나봐. 만날 앉아서 책만 읽었어. 책을 읽기만 해도 신진대사가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건지도 몰라. 화장실도 안 가고, 물도 안 마시고, 가끔은 숨도 안 쉬고 책을 읽더라고.

  책도 오래보면 머리가 아프고 어질어질하잖아. 이 사람도 사람이긴 한지, 머리가 어질어질한지, 눈을 꼭 감고는 안경을 벗더니 눈물샘 있는 데를 손가락으로 주무르면서 숨을 한 숨 길게 내쉬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알아?

  -내가 언제부터 이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더라?

  이러는 게 아니겠어? 나 참 별 싱거운 양반 같으니라고. 그거야-나도 기억이 안 나. 언제부터 내가 저 양반을 보고 있었더라? 언제부터 저 양반이 이 방에 와 있었더라?

  아니 애초에 이 방은 뭐지? 난 누군데 저 양반을 보고 있지?

  나도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한참을 기다렸지. 대답이 들릴 때 까지. 대답은 들리지 않았어. 당연하지. 그곳에는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 사람이 자기가 질문 한 게 맞는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것 같더라고. 사람이 말을 하면 자기 귀에도 그 소리가 남잖아. 그 아저씨는 귀에 남은 잔향이 자기가 한 말인지 상상한 건지 헷갈리는 것 같았어. 헛것을 들었나보지, 중얼거리더니 다시 안경을 집어 썼어. 어디까지 읽었나를 찾아보더라고. 손으로 훑어가며 읽었던 기억을 더듬고 있었지.

  그런데 못 찾더라고?

  책을 아예 덮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기억 자체가 안 나는 것 같았어. 보던 책이 이 책이 맞는지, 책을 보던 것은 맞는지. 한참을 멍 하니 있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간이며 심장이며 뚝 떨어질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 양반도 놀랐나봐. 책을 툭 떨어뜨리고, 입을 쩍 벌리고 고개를 갸우뚱 했지.

  누가 갑자기 말을 한거야. “내가 언제부터 이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더라?”라고. 맹세코 난 아니었어. 그 양반도 아니었고. 그 양반이 복화술을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머리 속이 복잡해지더라고. 게다가 상황은 더 나빠졌어. 책 탑이 무너져서 애벌레처럼 막 기어 다니기 시작했거든. 나는 소리를 막 질렀어.

  -이 양반아 정신 차려!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

  발을 쾅쾅 구르고 소리를 벼락같이 질러댔지 그런데도 안 들리나 봐.

  십 수 마리의 책 탑들이 오만 것을 다 갉아먹기 시작했어. 시간이며 공간까지 야금야금 집어먹었어. 자기가 덮은 이불이며 발가락까지 갉아먹게 생겼는데도 계속 고민만 하고 앉아있더라고.

  내가 고함을 한 번 더 지르려고 했는데 갑자기 목이 턱 막히더니 말이 안나오는 거야. 내가 놀라가지고 숨도 못 쉬고 있는데 유리 깨지는 것 마냥 세상이 다 깨지더라고. 공간이 이슬 부스러지듯이 흩어지고 그 틈으로 새까만 어둠이 들어왔어. 배에 물 들어오듯이 차갑고 깜깜한 게 막 들어오더라고. 휩쓸리고 흔들리고 난리도 아니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정적. 어둠. 무. 공. 그 무엇. 이름표를 붙여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어떤 이름표도 될 수 있거든. 그 상태는 말이야. 뭐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아무 것이나 다 될 수 있는 상황이었어. 그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가 가라앉았지. 그리고 난 사라졌어. 그리고 질문 만 남았어.

  -그런데 이 끓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나는 누구지?

  정적. 소음. 폭발. 안정.

  나는 정신을 차렸어. 잠에서 갑자기 깨어났을 때 머리 속이 잠시 상쾌해지잖아? 그 때처럼 상쾌하고 모호한 기분이 들었어.

  주위를 둘러보았지. 책으로 가득한 방이었고 난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어. 무릎 위에는 이불이 덮여 있었지.

  콧물이 흘러나와. 훌쩍. 방이 어둡네.

  나는 손으로 얼굴을 비볐어. 피곤했거든. 눈을 감고 손에서 나오는 온기를 느꼈지.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더라고.

  눈을 떴어.

  양 손에 글자가 가득 쓰여 있었어. 뭐야 이게.

  놀란 나는 팔을 걷어봤어. 팔에도 온통 글자가 써 있었어. 이불도 들쳐 올렸어. 옷을 다 벗어던졌어. 손목이며 팔목이며 가슴팍이며 다 글자가 써 있었어. 어느새 옷에도 온통 글자고 벽에도 책에도 바닥에도 천장에도 다 글자인 거야. 블록 조립 한 것처럼 죄다 글자로 되어 있었단 말이야. 내 손과 팔과 발과 다리도 죄다 글자를 조립해서 만든 것처럼 변해 있었어. 눈을 감으면 어둠 위로 검은 글자가 보였고. 글자로 된 책 탑, 글자로 된 책, 글자로 된 책꽂이, 글자로 된 나, 글자로 된 시간, 그리고 공간, 글자로 된 글자.

  나는 글자가 되었어. 내가 글자를 더 이상 안 읽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닐까, 갑자기 무서워져. 글자로 된 소름이 돋았어.

  난 화가 났어. 내 눈을 막 때렸어. 눈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냐. 그냥 화가 났어.

  주먹으로 오른쪽 눈을 꽝 때렸어. 모세혈관이 터졌나봐. 시야가 빨갛게 변했어. 대신 오른쪽 눈으로 보는 세상은 예전처럼 보였어.

  왼쪽 눈으로만 보면 세상은 글자 천지였어.

  벽이며 책이 녹기 시작했어. 도망쳐야해. 문이 보였어. 그제야 방문이 있는 줄을 알았어. 그 동안 수 만 번은 문이 있던 자리를 봤을 텐데 왜 몰랐을까?

  나는 방문을 열었어.

  똑같은 방이었어. 누가 앉아 있었지. 그 사람은 나랑 똑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눈은 왜 그렇게 다친 거요?

  그 사람이 나한테 물었어.

  눈은 내가 때려서 그런 거라고 대답했지. 난 내 소개를 하려고 했어. 그런데 난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어. 당황했어. 왼쪽 팔뚝 위로 식은땀이라는 글자가 흘러내렸어.

  -이상한 글자네요.

  -당신도 내가 글자로 보이십니까?

  -댁은 안 그래요? 난 댁이 글자 덩어리로 보이는데.

  -나는 뭐라고 써 있습니까?

  -이 양반이 미쳤나. 그걸 이야기하면 당신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나더러 그걸 읽어달라고 하는 거요? 속으로 읽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소리를 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소.

  -모르는데요.

  -뭐? 몰라? 허 이거 원 큰일 낼 양반일세. 이봐요, 절대 남의 몸에 난 글자 함부로 읽지 마쇼.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까.

  뭘 사단을 치른다고 이 난리인지.

  궁금해서 그 양반을 입으로 읽어봤다. 이름, 뭐뭐뭐. 말도 채 끝나기 전에 그 양반은 사라져버렸어. 방도 녹아내리더라고. 무섭더라. 도망가야겠더라고. 잘못하단 나도 사라질 것 같았어. 그래서 들어왔던 방을 봤어. 문이 없어졌더라고? 그 대신 아까 내가 있던 방에 문이 있던 자리 있잖아? 거기에 문이 있는 거야. 아깐 없었는데. 난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

  밖은 아까랑 똑같은 방이었어.

  전에 있던 방에 문이 있던 자리에는 벽이고 문이 없었어. 내가 문을 닫으면서 뒤를 돌아봤어. 문이 쾅 닫혔어. 문이 닫히자마자 사라졌어. 고개를 돌려 벽을 봤지. 문이 생겼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입니까?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 사내가 안락의자에 앉아 이불을 덮고 코를 훌쩍거리면서 책을 읽고 있었어. 이 사내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라고.

  -당신, 얼굴에 문신이 뭐 그리 많아요?

  -문신? 난 그런 것 한 적 없는데요?

  -그래요? 뭐라고 써 있는데요?

  아차, 난 속으로 실수했다고 생각했어. 이 인간이 내 얼굴의 문신을 읽으려고 입을 열었어. 나는 선수를 쳤지. 먼저 이름을 읽어버렸어. 이 친구가 녹아내려버리더라고. 오른쪽 눈으로 보니까, 아이스크림 녹듯이 흘러내려서 죽처럼 녹아버렸어. 왼쪽 눈으로는 ‘죽’이라는 글자가 푹 퍼져있었지만.

  그런데 이 ‘죽’이 기어오기 시작하는 거야. 날 잡아먹을 것 같더라고. 꿈틀거릴 때 마다 원망에 찬 소리-글자를 내뱉었어. 그 소리-글자는 가장자리나 모서리가 날카로워서 따끔따끔했지. 나도 질세라 벽이며 바닥에 붙은 글자를 떼다가 던졌어.

  죽은 점점 커졌어. 주위 나는 아까처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 문을 닫았어. 문 뒤로 비명이 들렸어. 녹아내리고 있겠지.

  그 방은 6면이 전부 문이었어. 벽이라는 큰 글자에 문이라는 글자가 붙어있었지. 각 벽 마다 중력이 있는 것 같았어. 내가 머리 위로 뛰어 오르면 발이 자동으로 벽에 착, 붙었거든. 난 몇 번을 공중을 뛰고 벽을 걸어 다녀 보았어. 가끔은 기어보기도 했어. 물구나무 서 보기도 하고. 하지만 어느 벽을 걷거나 기어도 내가 스파이더 맨처럼 벽에 붙어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어. 내 눈에는 그냥 평소에 땅 위를 걷거나 기는 거랑 다르지 않았으니까. 난 금방 시시해졌어.

  아무 방문이나 열어 봤어. 그 곳에는 무대가 있었어. 풋라이트가 켜져 있었어. 관객석은 없었어. 왼쪽 눈으로 보니 무대 위에 누군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이름은 그림자였어. 그림자라는 글자가 세로로 써 있었지. 난 입으로 발음해선 안 될 것 같아 그냥 속으로만 읽었어.

  오른쪽 눈으로 보니 역시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어. 나는 왼쪽 눈만 뜬 채로 말을 걸었어.

  -뭐하고 계십니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었어. 내가 좀 더 다다가자 풋 라이트가 팍, 하고 깨졌어. 불이 꺼졌어. 난 두 눈을 다 떴어. 형체와 글자가 뒤섞인 모습으로 세상이 보여 어지러웠어.

  컴컴한 무대 위에 하얀 형체가 있었어. 배 부근에 그림자라고 쓴, 전신 타이즈를 입은 것 같은 사람이 춤을 추고 있었어. 유연한 동작이었어. 무슨 거대한 낙지가 꿈틀꿈틀 하는 것처럼 느리지만 단호한 동작이야.

  무대 위에서 비가 내리듯 글자가 떨어졌어. 의미가 없는 글자들이었지. 아마 감탄사 같은 것 같아. 그는 그 글자들을 교모하게 피해가며 부드럽게 발을 움직였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발을 보고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는데 무의미한 글자들이 눈이 쌓이듯 쌓이기 시작했어.

  글자들은 이제 댄서를 가릴 만큼 쌓였지. 난 춤을 보고 싶었어. 그래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계속 구경했어. 그런데 쌓인 글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대가 무너졌어. 쾅 하는 글자가 수십 조각으로 쪼개져 날아갔어. 난 댄서가 걱정 되서 달려갔지. 글자 조각을 손으로 치우면서 댄서를 찾았어.

  -괜찮아요, 그림자 씨?

  아차. 그는 녹아내렸어.

  내가 그를 죽인 거야.

  여자 웃음소리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내 등을 찔렀어. 난 웃음소리를 내는 사람을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주먹을 허공에 흔들었지.

  -나와! 누구야!

  하지만 누군지 밝힐 리 가 없지. 그랬다간 자기가 죽을 테니까.

  내 어깨와 머리 위로도 글자는 계속 쌓였어. 난 글자를 털어내며 무대를 빠져나왔어. 그런데 바닥이 뻥 뚫린 것처럼 쑥 빠지는 거야.

  내가 엉덩방아를 찧은 곳은 책으로 만든 방이었어. 벽이 모두 책으로 되어 있었지. 책으로 만든 침대 위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어. 내 왼쪽 눈으로도 이름이 표시되지 않았어. 난 무서워졌어.

  그녀는 벽에 타일처럼 붙은 책을 한 조각 떼어내어 우아하게 맛보았어. 그녀는 매우 비대했지만 아름다운 외모였어. 얼굴의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속눈썹은 길었어. 입술은 약간 두툼한 느낌이 들었지.

  난 그녀에게 다가갔어.

  그런데 아무리 다가가도 다가갈 수 없는 거야. 바닥에 늘어나는 것 마냥.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았어. 숨이 턱 까지 차올랐어.

  이상하잖아. 뭔가.

  그래서 난 가만히 섰어. 몸이 뒤로 막 물러서더라고.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그렇게 한바퀴 돌아 그녀의 침대 위로 떨어졌지.

  -안녕.

  내가 말했어. 그런데 그녀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 마냥 행동했어. 난 그녀가 날 무시할수록 반비례해서 끌렸어. 그래서 그녀의 관심을 끌 기 위해 온갖 이상한 짓을 다하고 소리도 벼락같이 질렀어. 그런데도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어. 가끔 내 쪽으로, 그래, 그건 나를 본 것도 아니고 내 쪽 방향이었을 뿐이야, 어쨌든 시선을 돌려서 살짝 비웃듯 웃고는 다시 벽에 붙은 책을 뜯어 먹기 바빴어.

  난 화가 났어.

  그래서 왼쪽 눈 만 뜨고 눈에 보이는 모든 글자를 다 읽어버렸어. 글자들이 사라졌어. 그녀를 읽어버릴 수 는 없었어. 그녀는 공백이었으니까.

  난 심통이 났어. 마구 난리를 치면서 글자를 막 읽었어. 미친 사람 마냥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그러다 갑자기.

  깜짝 놀랐어. 갑자기 아래로 떨어졌거든. 바닥이 없었어. 새까만 바닥만 있었어. 떨어지면서 위를 봤더니 위로 깜깜했어. 난 내 발밑까지 읽어버린거야.

  나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어.

  오른쪽 눈으로도, 왼쪽 눈으로도 시커먼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나는 무한한 공간을 떨어지다 보니, 떨어지는 것인지 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었어.

  고개를 들어보니 마구 진동하는 푸른색의 5차원 초입방체가 보였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면 왼쪽 눈으로 그 이름이 보였거든. 난 아까 내가 있던 곳이 저기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난 심통이 났어.

  -5차원 초입방체!

  하고 소리를 질렀어.

  뿅,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뿅 하는 글자가 어울리게 5차원 초입방체는 사라졌어.

  난 무한히 자유낙하하면서 하늘에 간간히 보이는 별을 보았어. 별들은 서로 무한히 떨어져 있다가 서로서로 뒤엉켜 있고 다시 무한히 떨어져 있었어. 고르게 분포하고 있지 않았지.

  난 졸음이 왔어.

  눈을 감았어. 잠이 들었어.

  잠이 깼어. 내 얼굴 위에 무언가가 올라와 있었어. 내 얼굴을 덮고 있는 무게를 들어올려 보니 책이었어. 내 시야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어. 꿈이었을까?

  방에는 온통 책이 가득했어.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그동안 읽은 글자들이 서로 뒤엉켜 거대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는 거. 영화에서나 보던 괴물이, 글자로 가득한 모습으로 있으니. 문신을 가득 새긴 괴물 같았어.

  다행히 그 괴물은 먼저 책을 집어삼켰어. 그럴수록 덩치가 더 커졌어. 예전에 철을 먹는 괴물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그 괴물처럼 이 녀석은 글자를 집어먹는 것 같아. 기침을 하며 집어먹는데 그럴 때 마다 침 대신 글자가 바닥에 튀었어.

  나는 그 녀석의 이름을 읽어버리려고 했어. 그런데 그럴 때 마다 글자가 조금씩 모양을 바꿔버려서 읽을 때 가 되면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린 꼴이 되었어. 게다가 내가 바뀌기 전 이름을 부른 탓인지 괴물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어. 방 안은 온통 괴물로 가득 찼어. 내 방은 위상기하학적 공간에 떠 있는 입방체 마냥 계속해서 커졌어. 녀석들이 늘어갈 때 마다 내 방의 크기도 커졌어. 나는 녀석들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않았지만, 녀석들은 자체적으로 자신들을 재생산했어.

  이 괴물 놈들은 자기와 닮았지만 어딘가 다른 무언가를 계속해서 쏟아냈어. 나는 숨 쉴 공간도 부족해졌어. 이 녀석들이 스스로를 쏟아내기 시작할 때부터 공간은 다시 줄어들었거든. 압축. 축소. 응축. 줄어들고 줄어들었어. 인크레더블 쉬링킹 맨! 아이가 줄었어요!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중첩되기 시작했어. 손에 손을 맞잡고 있는 종이 조각 본 적 있어? 종이를 잘라서 만드는 건데 여러 번 접은 종이를 가위로 싹둑 싹둑 하면 생기는 거야. 어질어질할 때 보는 경계선이 여러 개인 환각 같은 느낌도 들었어.

  숨이 막혀왔어. 내 입에서 혀가 튀어나왔지. 그러다가 그 괴물의 피부, 문신 같은 문자로 가득한 피부를 맛보게 되었어.

  음.

  난 글자를 뜯어먹었어. 녀석들은 점점 중첩되고 있고 응축되고 있어서 얼마 걸리지 않았지. 난 자궁 속에 웅크린 것처럼 웅크려서 이제는 콩알 만해진 단어들을 집어삼켰어.

  이제는 내가 줄어들기 시작했어.

  나는 콩알같이 작아졌어.

  나는 글자가 되었어.

  그 글자가 뭐냐면.

  -잠깐.

  ?

  -그 글자는 이미 다른 글자로 바뀌어버렸어. -당신은 누구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왜? -어차피 그것도 하나의 글자거든. 그렇지만 글자에 달려있는 의미는 또 다른 것으로 바뀔 거거든. 사실 계속 바뀌고 있기는 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괜찮아. 나도 모르거든. 난 그저 어떤 역할을 맡아 어떤 연기를 하는 것일 뿐이야. -연기? 그럼 나도 연기를 하는 건가? -그렇지. -그럼 연기를 하는 건 누군데? -그건 말이지. -잠깐. -왜?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왜? -나도 모르겠어.

  말할 수 없는 그것이라는 말 알아? 난 몰라.

  지금까지 내 말을 들어주느라 수고 많았어.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나를 모르거든. 이 책은 여기서 끝나.

<劇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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