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타인의 섬

2010.01.31 10:0601.31

- 1 -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맑고, 그리고 높다. 눈이 부신 탓에 손을 구부려 빛 가리개를 만들면서도 기주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타타타, 저 멀리서 느릿한 속도로 오는 낡은 배를 선착장에 선 채 시선을 내려 물끄러미 보았다. 저건가.
“저거군요.”
속으로 한 생각이 밖으로 나와 그 대답을 들은 듯 하여 기주는 흠칫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뿔테의 동그란 안경을 우스꽝스럽게 콧잔등에 걸친 남자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선채 기주의 등 뒤에 와 있었다. 약간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기주가 한 발짝 물러서 남자와 마주서자 남자는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춤추는 나비입니다.”
“아.”
기주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자신을 춤추는 나비라고 소개한 남자가 악수라도 청하듯 손을 내밀자 기주는 남자의 손을 마주잡았다. 순간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음흉하고 음울해 보이면서도 스스로는 즐거워죽겠다는 아주 모호한 미소였다. 기주를 응시하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기주 작가님이시군요. 얼마 전 스릴러물 [SCAR-상흔]을 발표하신.”
남자의 말에 기주는 그제야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기주는 씨익 웃으며 마주잡은 남자의 손을 흔들었다. 배우의 애드리브에 당황하지 않고 받아 쳐 주는 것도 상대배우의 예의라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주는 정말로 연기라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물었다. 기다렸던 답이 나왔는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아주 심한 굳은살이 보이더군요. 보통 볼펜이나 연필을 많이 쓰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현상이죠. 그런데 일반적인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라는 것은 결국 왼손잡이. 게다가 30세 전 후반의 외모로 보아 학생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연필이나 볼펜을 과도 하게 쓰는 직업이라면 상당히 한정되어 있죠. 사실 이 자리에 오늘 나올 사람은 단 다섯 명. 그 중에 이기주 작가님이 속해 있다는 것은 동호회 공지에서 봤죠. 연필을 쓰는 직업, 작가, 이기주, 이것들이 연결이 되는 것은 알파벳 A다음 B가 오는 것처럼 굉장히 쉬운 일이죠.”
허리가 구부정한 남자는 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한 미성이었다. 마치 어딘가에 목소리 조작기를 달고 말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목소리에는 냉정함과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기주는 남자에게 호감이 생길 듯 하였다.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의 다음 소설에 등장시켜도 되지 않을까.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제인마플처럼 독특하고 재미있는 인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기주는 싱긋이 웃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셜록홈즈군요.”
남자 역시 벙긋 웃어 보였다.
“그렇죠. 셜록홈즈의 흉내를 잠깐 내 보았답니다. 사실은 굳은살이고 뭐고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이기주 작가님이 오신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사진을 봤으니까요.”
마치 마술을 공개하고 그 비밀을 알려주는 tv쇼 프로그램처럼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기주는 이미 그가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왼손을 쓸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는 사실 양손잡이였다. 그래서 왼손에 눈치를 챌 만큼의 굳은살은 없었다. 단지 남자의 연기에 동조해 준 것뿐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분들은?”
기주는 시선을 이리저리로 돌리며 선착장을 둘러보았다. 다른 세 명이 더 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나그네님과, 사냥모자님, 그리고 왕관님이 남았군요. 곧 오실 겁니다. 저기에서 저렇게 배가 오고 있으니 말이죠.”
춤추는 나비의 말을 들으며 기주는 좀 쓰게 웃었다. 배가 정착해 있기로 한 시간은 단 십분. 십분 내에 오지 않으면 와 있는 사람만을 태우고 섬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세 명이 오지 않는다면 춤추는 나비라는 저 사람과 단 둘이 섬에 들어가 게임을 하여야 하는가. 기주는 좀 싫은 기분이 되었다.
추리동호회에 오늘의 이벤트가 제안되어 진 것은 한 달 전쯤이었다. 이런저런 소설의 소스도 얻을까 싶어 가입을 했는데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맥주도 한잔씩들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며 가끔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분위기의 카페였다.
거기서 사귄 사람들끼리 기주는 오늘 이곳에 모이기로 하였다. 다섯 명의 사람이 모여 모든 휴대폰은 선착장에 맡겨두고 인적이 없는 섬으로 들어간다. 물론 섬 안에도 외부로 연락할 방법은 없다. 섬까지 그들을 실어다 준 배는 다음날이 되어야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다섯 명은 범인을 정한다. 물론 그 범인은 어떠한 방법으로 지목된 당사자만 알뿐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범인은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키고 그 범인을 추리해내는 것이 나머니 네 명의 임무라면 임무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배안에서 서로 추리해낸 범인을 지목해 밝혀내자는 것이 이번 이벤트의 주요 내용이었다.
처음 그 공지를 보았을 때 기주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렸다. 공지를 올렸던 <나그네>역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요.”
별안간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기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배는 선착장에 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려 보니 키가 큰 여자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내리며 기주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려 인사해 보였다. 기주 역시 얼떨결에 짧은 목례로 응수하였다.
“왕관이에요.”
도도적인 목소리로 여자가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렇군. 기주는 천천히 여자를 훑어보았다. 붉은색 원피스에 붉은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섬에 가는데 저런 차림을 하다니 마치 모델 쇼라도 보러 온 사람 같군.
“잠시 만요! 저도 여기 있어요!”
춤추는 나비와 기주, 그리고 왕관이라던 여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저쪽 편에서 한 남자가 소란스럽게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운동선수처럼 보이는 근육질의 남자였다.
“하악하악, 사냥모자에요.”
허리를 굽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동시에 셋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터넷동호회에 가끔 글을 올리는 닉네임이었는데 카페의 성격에 맞지 않은 글들을 올려 가끔 수다스러운 면모를 보이고 있던 사람이었다.
사냥모자의 거칠고도 눅진한 숨이 왕관의 다리 맨 살결에 닿는 모양인지 왕관은 슬쩍 다리를 뒤로 빼내었다. 그들은 이제 남은 한 사람 [나그네]를 기다렸다.

“약속대로 십 분이 지났군요. 이제 출발해야겠어요.”
기주는 몸을 돌려 나머지 세 명에게 말하였다. 역시 약속은 약속이었으므로 이의를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세 명의 고갯짓에 기주가 제일먼저 몸을 돌려 승선하였고, 그를 위시하여 뒤로 남은 세 명이 일렬로 따랐다. 왕관, 그리고 왕관의 다리를 연신 훔쳐보는 사냥모자, 그리고 굽은 허리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춤추는 나비였다. 배에 올라탄 춤추는 나비는 배의 난간을 꾹 부여잡고는 푸른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모임의 주최자가 오지 않다니. 흠.”

- 2 -
배의 내부는 생각보다 좁지만은 않았다. 밖에서 볼 때는 굉장히 오래되어 타는 것조차 불안하게 여겼을 정도였는데 갑판으로 올라서니 꽤 넓은데다가, 항해는 아주 안정적이었다. 기주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 명의 참여자가 모여들었다. 기주는 잠시 곤혹스러운 얼굴로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주최자가 오지 않았으나, 여기까지 왔으니 계획대로 진행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좋아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냥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였다. 기주가 추리작가 이기주라는 것을 알게 된 사냥모자는 기주의 열렬한 팬임을 표명한 후부터 마치 기주의 말이 하늘의 뜻이라도 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아무래도 한명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그 사람이 행사의 주최인이라는 것이 영 찜찜하게 여겨졌는지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왕관역시 이왕 배까지 탔으니 어쩔 수 없다 싶은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기주는 아직 대답이 없는 춤추는 나비를 돌아다보았다. 구부정한 허리가 몹시도 불편한지 그는 갑판의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기주의 시선이 느껴지자 목고개를 스윽 돌렸다. 거칠어진 바람 때문에 부서질 듯 흩날리는 그의 흰머리가 기기묘묘하게 느껴졌다.
그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엄지와 검지의 끝을 붙여 동그라미 형태를 만들어 기주에게 보이며 벙긋 웃었다. 기주 역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오케이.
“그렇다면 범인을 정해야겠죠.”
셋의 시선이 기주에게로 쏠렸다. 기주는 머쓱한 듯 턱을 긁으며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었다. 선장에게 다가가 메모지를 빌려온 기주는 다른 세 명이 보는 곳에서 일번부터 사번까지의 번호를 적어 넣고 같은 크기로 접었다.
“여깄소.”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기주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춤추는 나비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그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자, 여기 일번부터 사번까지 적힌 종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개의 번호씩을 각각 나누어 갖게 될 거요.”
“그걸로 뭘 하는 거죠?”
신고 있던 하이힐이 발바닥을 자극해 다리가 아픈지 구두를 벗어 옆에다 내려놓고는 바닥에 조심스레 주저앉는 왕관이 그에게 물었다. 기주는 잠시 설명을 좀 들으라는 듯 검지를 입술의 중앙에 붙였다. 왕관이 입을 비쭉거리긴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의할 것은 우리가 이것을 나눠 갖고 나서 각자 가진 번호를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 여기 주사위가 있습니다. 이것을 던져 우리는 범인을 정할 거예요. 일번부터 사번까지는 우리의 번호이고, 숫자 오나 육이 나오면 다시 던지기로 합니다. 일번부터 사번까지의 번호가 나오면 자신의 숫자가 나왔는지는 들고 있는 사람만 알겠지요. 그렇게 정해진 사람이 범인이 되는 겁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듯 다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들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이었다. 기주는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그들을 한번 쓰윽 훑어본 후 숨을 크게 쉬고는 팔을 들어올렸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주사위가 던져졌다. 기주를 포함한 춤추는 나비, 왕관 그리고 사냥모자의 시선이 주사위를 따라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번이군요.”
다들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춤추는 나비가 제일먼저 입을 열었다. 기주는 침묵을 지킨 채 주사위를 집어 들었고 사냥모자의 표정은 결연해져 있었다.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왕관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기주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메모를 몸을 돌리고 서서 조심스레 펴 보았다. 그는 이번이었다. 그의 입가에 쓰윽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이 범인이었다면 머릿속을 부유하던 이런 저런 일들을 직접 일으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범행을 추리하는 자리 역시 나쁘지는 않았다.
“곧 섬에 도착합니다!”
조종실에 있던 배의 선장이 거무튀튀한 얼굴을 작은 창으로 내밀고 소리를 쳤다. 기주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는 조심스런 손길로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점점 섬이 커다랗게 보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기주는 바다 바람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배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채 다가오는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시작이군.

파도가 워낙 높아 섬에 배를 대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다들 섬에 발을 딛고 섰다. 바다의 중간쯤 올 때까지만 해도 잔잔하였던 바다는 섬에 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지 파도를 높이하고 있었다. 섬에 내리자마자 사냥모자가 구석으로 달려가 토악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사냥 모자를 기다리는 동안 기주는 시선을 빙 돌려 섬을 훑어보았다. 인적이 드물다더니 정말 사람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질 않았다. 웬일인지 차가운 기운이 엄습하였다. 선뜩해지는 어깨를 가볍게 떨고서 몸을 돌리는데, 춤추는 나비가 비틀거리며 기주를 스쳤다. 쓰러진다! 순간 그렇게 판단한 기주는 춤추는 나비의 팔을 잡았다.
“억!”
“괜찮습니까?”
기주는 걱정스레 물었다. 워낙 노쇠하여 배가 그에게는 힘겨웠을지 몰랐다. 춤추는 나비는 기주의 손에서 팔을 쓰윽 빼고는 그 구부정한 허리를 숙이며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자, 이제 모두들 들어가죠. 공지에 보니 이곳에 숙식을 할 수 있는 낡은 집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조금 올라가봅시다. 그리고 집을 찾으면 그때부터 우리의 게임이 시작되는 걸로 하죠.”
기주의 말에 저마다 눈을 반짝였다. 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답게 이런 상황들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기주 역시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니. 역시 이 모임에 가입한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마련되어 있다는 숙소를 찾은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야트막한 둔덕에 올라서자 바로 삼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적어도 지은 지 이십년은 족히 넘은 것으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여관 정도의 용도로 사용되다 섬의 주민들이 하나 둘 이주함에 따라 버려진 듯 보였다.
둔덕위에 하나 둘 올라온 사람들은 멍하니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 관리를 받지 않은지 오래 된 듯 보이는 그곳은 양 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초목에 척 보기에도 음습한 기운이 풍겼다.
“하하……. 농담이지? 정말 저런 곳에서 지내야 한단말야?”
왕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다리로 체중을 옮기며 말하고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와우! 이거 정말 실감나는데요. 은근히 두근두근 하네요.”
사냥모자가 양손을 비비며 잔뜩 흥분하여 즐거운 듯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런 그를 살짝 흘겨보는 왕관으로부터 기주는 시선을 돌렸다. 둔덕 위에 오른 뒤부터 춤추는 나비가 조용하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기주는 섬에 도착할 무렵부터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는 신경 줄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푸른 안광. 살기라기보다는 조금 더 예의바르고, 흥미라기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형용할 수 없는 빛이 춤추는 나비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주는 조금 더 그를 관찰하다가 이내 여관 건물을 향해 바로섰다.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범인이 누가 되었든 간에.”
그의 한마디에 긴장감이 그곳을 부유했다.

똑똑.
여관 2층의 방을 배정받은 기주는 가지고온 작은 짐을 풀어 삐거덕거리는 서랍에 집어넣고 있었다. 조심스런 노크소리를 들은 기주는 손을 멈칫하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네.”
그의 대답이 이어지자 삐거덕하고 낡은 문이 기겁을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곳에는 춤추는 나비가 허리를 구부정히 하고 서 있었다.
“식사준비 다됐소.”
“아.”
간단히 대답을 한 기주는 서둘러 서랍을 닫았다. 식사 당번은 두 명씩 두 조로 나뉘어 번갈아 가며 하기로 하였다. 춤추는 나비와 왕관이, 기주와 사냥모자가 한조가 되었다. 늙은이는 싫다며 왕관이 기주와 같은 조가 되겠다는 앙탈을 간신히 떼어낸 기주였다.
“빨리 나오슈.”
찬바람이 돌 정도의 차가운 어조로 말한 뒤 춤추는 나비는 등을 돌려 천천히 그의 방을 벗어났다. 대충 짐을 밀어둔 기주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2층 계단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춤추는 나비의 움직임이 사뭇 조심스럽다. 잔뜩 구부러진 허리로 경사가 심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상당한 공포일지 몰랐다. 지팡이를 짚지 않고서 앞으로 내려가기에는 상체가 쏠리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춤추는 나비는 오른쪽 옆의 난간을 붙잡고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밟아 아래로 내려갔다.
기주는 춤추는 나비가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설 때까지 계단의 중간에서 팔짱을 한 채로 내려다보았다. 허리는 구부정한 채로 긴 계단을 내려 설 때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그의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기기묘묘한 장면이었다.
그러던 기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흐응, 그렇게 된 거로군.
“빨리 내려오세요! 드디어 X의 활동이 시작됐어요!”
주방에서 달려 나온 사냥모자가 흥분을 한 채 기주를 향해 외쳤다. 기주는 소란스러운 사냥 모자의 행동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알겠다는 뜻으로 오른손을 들어 응수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웬 엑스. 지 맘대로…… 촌스럽게.”
그리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춤추는 나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난간을 붙잡고 한 계단 한 계단을 정확히 밟아서 말이다.

- 3 -
주방의 내부는 생각보다 단출하였다. 입구 옆으로 죽 늘어선 장식장 들이 주방을 더 좁게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와 이따금 린넨 커튼이 흔들거렸다. 기주가 안으로 들어서자 원탁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주는 그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 마지막에 사냥모자의 이것 좀 보라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성큼 그들에게로 다가서자 사냥모자가 조금 옆으로 물러나며 그가 설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테이블로 다가선 기주는 당혹감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의 입가가 가늘게 경련하였다.
“풉! 푸하하하하! 이게 뭡니까? 크큭큭.”
애써 웃음을 참으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배를 붙잡고 한참이나 소리 내어 웃은 뒤에야 기주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참 귀여운 장난이군요.”
기주의 말에 다들 조금씩 웃었다. 기주는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다섯 개의 음식접시가 세팅되어 있었다. 동그란 은제 뚜껑이 네 개에는 아직 덮여 있었고, 하나만 뚜껑이 없었다. 설핏 시선을 돌리니 왕관의 손에 들려있었다. 왕관이 뚜껑을 가장 먼저 열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음식이 놓여 있어야 할 그곳에는 미키마우스 인형이 들어있었다!
기주는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는 춤추는 나비, 사냥모자, 왕관의 눈을 일일이 맞추며 입을 열었다.
“게임이 시작되었군요. 그런데 게임은 공평해야겠죠? 저에게 여기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기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냥모자가 신이 나 상체를 그에게로 기울였다.
“음식준비는 왕관님이 하셨구요, 접시 세팅은 저와 춤추는 나비 할아버지가 도왔죠. 그렇죠?”
동의를 구하듯 사냥모자가 고개를 쓱, 돌리자 춤추는 나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미간이 조금 찡그려져 있었다. 소란스러운 사냥모자 때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춤추는 나비할아버지가 이기주 작가님을 부르러 갔구요, 그 사이 제가 촛불이라도 킬까 하여 촛대를 찾는데 왕관님이 먼저 뚜껑을 여시고는…….”
“미키마우스를 발견했다?”
기주가 수다스러운 사냥모자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하였다. 사냥모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주는 흠, 하며 턱을 긁었다.
“왕관님은 왜 먼저 뚜껑을 여셨죠? 그것도 본인 자리 것이 아닌 다른 사람 자리의 접시를 말이에요.”
일순, 왕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물어온 것은 기주가 아닌 춤추는 나비였다. 오, 꽤 예리한데, 하고 속으로 감탄하던 기주는 그 순간 춤추는 나비의 눈에 스친 빛을 보았다.
“그, 그건……. 음식에 소스를 빼먹은 것 같아서 열어본 것뿐이에요. 누구 거든 상관없이 확인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가장 가까운걸 열었을 뿐이라고요.”
그녀의 말은 약간 격앙되어 있었다. 과연 오븐 쪽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춤추는 나비의 자리였다. 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키마우스가 담긴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메뉴가 뭐였습니까?”
“예?”
“메뉴요.”
“아……. 바게트와 야채수프, 그리고 샐러드였어요.”
샐러드와 야채수프는 멀쩡하였다. 바게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애꿎은 미키마우스 인형이 있었지만 말이다. 기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게 된 거군요. 약속한 대로 각자 범인을 유추하기로 하고 이만 저녁식사들을 하시죠. 안타깝게도 오늘 저녁은 샐러드와 야채수프만으로 견뎌야겠어요. 다음부터는 식사는 건드리지 않아줬으면 좋겠군요.”
그의 장난스러운 어조에 다들 소리 내어 웃었다.
“에잇, 저녁도 뺏긴 셈인데 미키마우스 인형이라도 챙겨야겠어요. 조카 가져다주면 좋아하겠군요.”
사냥모자가 자신의 자리에 놓인 접시의 뚜껑을 열고 미키마우스 인형을 집었다. 이미 뚜껑이 열린 춤추는 나비도 자신의 접시에서 미키 마우스 인형을 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손녀딸을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빙글 빙글 웃던 사냥모자는 기주의 접시 뚜껑까지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미키마우스인형을 집어 기주에게 내밀었다.
“기주 작가님도 챙기세요. 여자 친구 가져다주시면 좋아하실 걸요? 여자들은 이런걸 좋아하니까요.”
기주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여자 친구 따위는 없었지만 대충 얼버무려도 좋겠지.
그런 그들을 보던 왕관이 자신의 접시를 덮고 있는 뚜껑의 손잡이를 잡았다.
“내건 내가 열겠어요. 나도 미키마우스 좋아하는데…… 꺄악!”
순식간의 일이었다. 종달새처럼 신이나 재잘거리던 왕관이 뚜껑을 열어젖히자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극심한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부들부들 떨다 이내 주저앉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주와 다른 사람들이 왁, 하고 그녀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왕관이 보았던 것을 그들도 발견하였을 때,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접시에는 죽은 개구리의 시체가 담겨 있었다. 마치 해부학 실에 있는 모형처럼, 배가 갈린 채였다.

“무서워요. 집에 가고 싶어요.”
사냥모자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왕관은 아직 울음을 그치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의 뒤를 따르며 기주는 안타깝게 말하였다.
“하지만 이미 할 수 없어요. 배는 내일 들어오기로 했으니 오늘 밤만 참아요.”
그녀를 달래면서도 기주는 왕관의 행동에서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녀를 들여보낸 뒤 낮은 한숨과 함께 기주와 사냥모자는 돌아섰다. 그러다 둘은 동시에 멈칫하였다. 복도 끝에서 춤추는 나비가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사냥모자가 묻자 멀거니 그의 눈을 응시하던 춤추는 나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쥐를…… 버리고 왔소.”
버렸다고? 기주가 그를 살폈다.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옆에 서 있던 사냥모자가 호들갑스레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이참, 그걸 버리면 어떻게 해요! 중요한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사냥 모자의 언성에 춤추는 나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냥 모자의 어깨가 일순 움찔거렸다.
“아, 아니 뭐…… 버렸으면 할 수 없구요.”
사냥 모자가 말을 정정하자 춤추는 나비는 그제야 몸을 돌려 일층으로 내려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를 기다렸다가 사냥모자는 기주에게 말하였다.
“정말 음침한 노인네에요.”
기주는 그가 사라진 계단의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으음…….”
몸을 뒤척이던 기주는 눈을 찌를 듯한 밝음에 미간을 좁히며 눈을 살풋떴다. 현실감이 없는 듯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던 기주는 몸을 반듯이 누이고 천정을 바라본 뒤에야 자신의 방에 누워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몇 시나 된 걸까. 기주는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정신이 맑아지자 그는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를 두어 번 쓸어 넘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복도에 몰려와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이것보세요. 작가님.”
역시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사냥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기주는 사냥모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또 뭔가요. 이번에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인가요?”
기주의 말에 모두들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왕관의 방 문 겉에 흰색 페인트로 커다랗게 원 표시가 되어 있었다. 기주는 슬쩍 왕관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어제보다는 기분이 좋아진 듯하다. 그는 손뼉을 탁탁 치며 주의를 끌었다.
“좋아요. 이번 범인역할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일을 충분히 해주었군요. 다들 마음속에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춤추는 나비와 사냥모자, 그리고 왕관은 서로의 눈치만 볼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게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한 침묵이었다.
“약속대로 배로 돌아가 육지로 가는 동안 우리 각자의 추리를 풀어 놓도록 하죠. 다들 어서 짐을 챙겨요.”
기주의 지시에 다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섬에 도착했을 때 하선했던 그곳으로 나가자 이미 배는 정착해 있었다. 담배를 물고 기주일행을 기다리던 선장이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그가 내민 손을 기주가 맞잡자 주최자인 나그네로부터 참가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연락이 왔다고 하였다. 참고로 나그네와 자신이 먼 사촌지간이라고 선장은 덧붙여 주었다.
“그렇군요. 괜히 긴장했어요. 혹시 소설처럼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거든요.”
사냥모자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얼핏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티는 내지않았어도 정말 걱정은 했었나보군. 기주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네 명은 차례대로 배위에 올랐다. 기주가 제일 먼저 탔고 그 뒤로 사냥모자와 왕관이 승선하였다. 춤추는 나비도 배위에 오르기 위해 판자에 발을 디뎠다.
“자요. 잡고 올라와요.”
춤추는 나비는 자신의 얼굴 앞에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기주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됐소. 내가 알아 타지.”
“잡고 올라오세요. 할아버지.”
기주는 춤추는 나비가 뭐라 대답을 할 사이도 없이 그는 춤추는 나비의 손목을 낚아채 획하니 잡아끌었다. 마치 나비가 춤을 추듯 한 번에 휙 딸려 올라왔다.
모두 탄 것이 확인되자 선장은 휘파람을 불며 선장실로 들어가 배를 출발시켰다. 타타타타, 적막한 바다 위로 배의 소음이 흩어졌다. 자신들이 머물던 섬이 점점 작아지며 멀어지는 것을 보던 기주는 몸을 돌려 나머지 세 명의 앞에 섰다.
“자, 그럼 우리 본론을 꺼내볼까요? 혹시 추리해 보일 수 있는 분 있습니까?”
기주가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말하였다. 수다스럽던 사냥모자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기주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제 생각을…….”
“내가 먼저 말해보겠소.”
기주의 말허리를 끊으며 춤추는 나비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이런 노인네가 풀었단 말이야?’라는 눈으로 왕관과 사냥모자가 춤추는 나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들과는 반대로 기주는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주었다.
춤추는 나비는 그들의 중간에 선채 시선을 들어 그들을 휘 둘러 보았다.
“이번 행사의 범인은…… 왕관님, 당신이지.”
침착한 어조와는 반대로 춤추는 나비의 눈은 반짝거렸다. 그의 말에 왕관의 어깨가 살짝 움찔하였다.
“왕관님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뭐죠?”
사냥 모자가 한 발짝 나서며 물었다. 순간, 춤추는 나비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사냥모자는 의기양양하게 말하였다.
“설령 왕관님이 범인이 맞더라도, 이유를 대지 않으면 맞았다고 할 수 없어요. 그렇죠, 기주님?”
사냥모자가 기주에게 동의를 구하였다. 기주는 약간 곤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앙!”
갑자기 왕관이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왕관은 커다랗게 소리를 내어가며 울고 있었다. 당황한 사냥모자가 그녀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왜 그래요?”
“나, 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춤추는 나비님이 내가 범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기는 우리 말고 또 다른 한사람이 있었단 말이에요!”
“예?”
덩달아 사냥모자의 어조도 격앙되었다. 왕관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네, 제가 범인 맞아요. 미키마우스 장난, 제가 친 것 맞아요. 그런데 그 개구리 시체는 내가 아니에요.”
“하지만 아침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은…….”
“전 그 개구리 시체가 나왔을 때, 우리 말고도 섬에 다른 사람이 더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건 제가 친 장난이 아니니까요. 너무나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가 밝혀버렸다가는 그 다른 사람의 존재가 저를 해칠까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평상심을 유지하고 아침에 그런 장난을 다시 친 거예요.”
그 순간의 공포가 떠오르는지 왕관이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어느새 사냥모자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왕관은 다시 울기 시작하였다. 그때 왕관의 어깨를 누군가가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위로의 손길. 왕관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주였다.
“그 비밀은 내가 풀죠.”
“예?”
왕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처음부터 그 개구리 장난은 우리가 정한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죠. 왜냐하면 앞선 미키마우스 장난과는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었으니까요. 다시 말해 또 하나의 범인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어요.”
듣고 보니 그렇다. 사냥모자의 목에서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났다.
“또 하나의 범인이라뇨? 왜 우리의 이벤트에 낀 거죠?”
물어오는 왕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진짜 범인을 유추해 내기 위해서죠.”
“네에?”
“진짜 범인이 꾸며놓은 장난말고도, 자신이 하나 더 준비해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 당황하는 진짜 범인의 표정을 포착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표정의 변화를 확실하게 캐치하기 위해 일반적인 장난이 아닌 그런 끔찍한 것을 준비한 거구요.”
“그, 그런……. 그럼 그게 누구죠?”
왕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주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는 돌연 몸을 홱돌려 자신의 뒤쪽에 서있던 춤추는 나비에게 손을 뻗었다. 춤추는 나비가 어찌해볼 새도 없이 기주는 그녀의 뺨에 손톱을 박았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피부조직을 뜯어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주의 손에 의해 뜯긴 그것은 피부조직과 흡사한 것이었다!
노인의 주름진 피부가 뜯겨나가자 안에서 뽀얗고 말간 피부가 나왔다. 왕관과 사냥모자는 경악을 금치 못해 제자리에 얼어붙었고 춤추는 나비도 일순 당한 공격에 입을 약간 벌리고 멍하니 있었다. 웃고 있던 것은 기주뿐이었다.
“당신이죠? 춤추는 나비…… 아니, 25세의 아가씨, 채주연양?”
춤추는 나비, 아니 주연이라 불린 여자는 입을 턱 벌리고 말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어, 어떻게 그걸…….”
“처음엔 나도 감쪽같이 속을 뻔 했죠. 그런데 어제, 당신을 부축했을 때 난 당신이 남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아무리 노인이라지만 그렇게 가벼울 수도 없는데다가 손목이 그렇게 가늘 수도 없었죠. 혹시 변장한 게 아닐까 생각하던 순간 몇 달 전 나에게 팬레터를 보냈던 채주연이라는 아가씨를 떠올렸죠. 특수 분장사가 꿈이라던 아가씨 말입니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주연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개구리 시체 사건이 일어났죠. 처음엔 나도 당황했어요. 미키마우스 장난과 극명하게 다른 일이라 왕관님처럼 나도 이 섬의 타인이 들어온 걸까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왕관님을 진정시키는 사이 당신이 와서 말했어요. 개구리는 치웠다고요. 우리는 추리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함부로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버릴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만약 당신이 채주연이라는 사람이라면 앞뒤가 맞는다는 거였어요. 특수 분장 기술을 이용해 개구리 시체를 만들긴 했으나 자세히 보면 티가 난다, 그래서 버려야만 했다. 이렇게 말이죠.”
기주의 말에 주연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남은 특수 분장의 껍질을 벗겨 내며 허리를 쭉 폈다. 이제 눈물이 그친 왕관과 사냥모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주름진 노파가 아니라 너무나 생기가 넘치는 이십대의 아가씨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켰네요. 맞아요. 제가 두 번째 범인이에요. 처음 이 이벤트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작정을 한거에요.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그런 잔인한 일을 꾸민 것도 맞고요.”
주연의 인정에 왕관과 사냥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배멀미를 시작한 왕관과 그녀를 보살펴야 한다며 부득불 왕관의 꽁무니를 쫓은 사냥모자가 객실로 들어가 버렸다. 갑판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바닷물의 포말을 바라보던 기주의 옆으로 주연이 다가왔다. 주연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특유의 상큼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정말 너무 하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특수 분장을 그렇게 뜯어내 버리다니. 열 시간 넘게 만든 거란 말에요.”
기주는 고개를 돌려 주연을 바라보았다. 주연이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고는 배슬배슬 웃었다.
“쿡, 그럼 벌충으로 육지에 닿는 대로 식사라도 대접하죠.”
“좋아요. 하지만 개구리 시체는 사절이에요.”
주연의 장난스러운 말에 기주는 기분 좋게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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