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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영 판타스틱 증후군

2004.08.28 00:2708.28

판타스틱 시리즈 1 - 판타스틱 증후군

판타스틱댕! (qeen9@korea.com)



   치마를 입어도 더우리만치 날씨가 좋은데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벌써 몇일째, 사무실 동료들이 창을 내다보며 이런 날에 놀러나가지 않는다는건 죄를 짓는거라고 한숨을 내쉴만큼 내리 좋은 날씨가 이어지는데도, 마음은 장마를 만난 방구석처럼 축축하고 퀴퀴하고 끈적하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뜨끈한 자판기 커피를 습관처럼 손에 쥐고 모여서서 맞장구 치고 있노라면, 슬몃 끈적한 마음이 두눈을 치켜뜬다.

   '말로만 투덜거리지 말고, 정말 가고 싶으면 월차를 써.
    벌써 몇 일째 똑 같은 푸념을 늘어놓는거야?'

  폭언을 내뱉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위해 뜨끈한 커피를 입에 한모금 물고 버텨본다. 우울한 피곤이 어깨를 누른다. 마음이 끈적한 시기는 피곤하다. 대학생 시절에 호기심으로 들었던 무슨 강의에서는 사람에겐 무의식이라는 모를 인격이 있어 이성이 미치지 않도록 돕는다고 배웠건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것만 같다. 배운대로라면, 연약한 이성의 불평불만을 어른스럽게 다독이며 받아들여줘야할 무의식이 되려 미쳐 날뛴다. 자기 하나 챙기는 것도 벅찬 이성이 오히려 무의식까지 챙겨야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집안 생활비에 자기 등록금까지 스스로 벌어사는 어린 가장처럼, 지독하게 고단하고 지독히도 피곤하다.

   "먼저 들어갈게요."

  더 이상 무의식의 충동질은 받아줄 자신이 없어 일부러 냉큼 잔을 비우고, 사무실로 돌아와 앉는다. 몇 달전부터, 조금 더 편한 것으로 바꾸자는 이야기만 무성한 싸구려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이번 주에 맡은 일은 어제 끝내놓아서 할 일이 없다. 결제도 받았기 때문에 서버팀으로 보내는 일만 남았지만, 좀 더 손을 보고 싶다고 하루 더 시간을 늘려 받았다. 사실 손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손을 본다고 해봐야, 아이콘 테두리를 좀 더 가늘게 하거나, 혹은 더 굵게 하느냐는 사소한 선택이 전부다. 어제는 굵은 테두리로 결제를 받았으니, 오늘은 가늘게 고쳐서 넘겨주면 그만이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십분이면 충분한 일에 스물네 시간을 받아낸 이유는 단지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죄책감 같은건 느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이번주 내내 해야할 일이었고, 하루를 좀 여유있게 보내고 싶어서 서둘러 끝낸 것뿐이다. 월요일부터 쭉, 오늘은 이렇게 덧없는 시간을 보내리라고 생각했다. 무의식도 미쳐버린 김에 말이다.

   "두영씨, 윈도우 씨디 있어요?"

  좀 더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옆자리 동료에게 씨디를 빌린다. 아침 일찍 테두리를 가늘게 바꿔놓은 아이콘 파일을 서버팀 메일 계정으로 보내버리고, 요즘 유행하는 바이러스에 걸린 척, 컴퓨터를 포멧해버린다. 여자는 컴맹이라는 성차별 의식이 이럴때만큼은 고맙기 그지없다. 고작해야 또 바이러스에 걸렸냐는 핀잔정도가 전부이리라. 포멧을 하고, 윈도우를 다시 설치하고, 거기다 필요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설치하다보면 퇴근까지 남은 서너시간은 훌쩍 지나가버리겠지. 그리고 그 서너시간동안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마음이 바뀌어서 굵은 테두리가 더 낫겠다 싶어도, 한숨을 몰아쉬고 포기해야한다.

   "바이러스 걸렸어요? 다 다시 깔아야겠네."

  포멧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동료 하나가 동정하듯 한 마디 던진다. 으레히 할 수 있는 말이고, 들을 수 있는 말인데도 온몸이 곤두선다. 기어코 입밖으로 뛰쳐나가고 말겠다는듯이 욕지기처럼 솟아오르는 무의식을 있는 힘껏 뜯어말리면서, 대답도 하지 않은체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지금 나는 위험하니까 저리 가라고, 그런 기분을 등짝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온 이야기를 거절할 방법을 찾고 있으려니, 다행스럽게도 등 뒤에 멈춰서있던 발소리가 이내 아무런 말없이 멀어져 간다. 안도의 한숨을 짧게 뱉어내고는 인체 공학을 무시한 싸구려 의자 등받이에 기대 앉는다. 문득 스스로에게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도대체 어째서 마음이 이렇게 끈적해지는지 알 수가 없다. 혼자 서도 잘 지내던 무의식이 갑자기 미쳐 날뛰는 이유도 모른다. 그렇다고 생리마냥 주기가 있어서, 나름대로 마음 굳게먹고 준비할 수 있는 병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런 주제에 증세도 지독하다. 피부 아랫쪽이 지나치게 민감해진다. 하루하루 별탈없이 지내는 것 같아도, 생달걀마냥 속과 겉이 따로 돈다. 따뜻한 햇살아래, 친한 사람과 앉거나 서서 같은 대화, 같은 이야기를 나눌 뿐인데도, 속으로는 한없이 빈정대고, 비꼬고, 욕하고, 헐뜯는다. 그런 내 속알맹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성이 괴롭다. 참느라 괴롭고, 부정하고만 싶은 내 무의식에 한겹 더 괴롭다.

   "어? 바이러스에요?"

  옆에서 윈도우 씨디를 빌려준 장본인이, 이제야 알았다는듯이 말을 건네온다. 아무렴 내가 아무일도 없는데 빌렸을까봐.

   "일은 다 끝냈으니 다행이죠, 뭐."
   "그나마 다행이네, 대충 깔다 퇴근하면 되겠네요."

  그러고는 하하 웃으며 담배를 들고 걸어가 버린다. 말이 짧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누구와도 서너마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까.

   - 초보자도 쉽게 배우는 요가, 200일 완성.

  모니터 파란 화면에 눈이 질려 슬쩍 책상 위에 놓인, 먼지 쌓인 책더미를 훑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얻은 책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흥미도 없는 책이라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하고, 표지조차 넘겨본 적 없는 책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유혹하는 것만 같은 제목이 아닌가. 자, 나를 읽어요. 읽고서 따라해봐요. 그럼 그 알 수 없는 병이 씻은듯이 나을거에요 하고 사람 좋게 웃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이런 마음을 움켜쥐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짓은 이미 몇 번이나 겪었고, 미쳐 날뛰는 무의식을 진정시키려고 별의 별짓을 다해봤지만, 관심도 없는 책을 읽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잘 듣는 해결책을 두 가지 알아 냈다. 마음이 만족에 못이겨 바싹하게 구워질떄까지 무언가를 닥치는대로 사들이거나, 아니면 일부러 저질러놓고도 겁나고 막연할만큼 큰 사고를 치는거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언제 어느때라도 확실한 해결책이지만, 또 그만큼 멍청한 해결책이다. 그래도 이성마저 미쳐버리기 전에 해결해야만 한다. 더 이상 내키는대로 살아도 마음 편한 학생도 아니고, 잔뜩 굳은 불쾌한 얼굴을 언제까지고 복통이나 두통으로 둘러대며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먼 옛날, 미개인이 하늘에 산재물을 바치고 안녕과 평화를 얻었듯이, 이 끈덕한 마음에 무언가를 바치고 끝내야한다. 버리고나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쓰라릴 무언가를 바쳐야한다. 돈을 바쳐서 무언가를 끝도 없이 사들이는 짓은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본래 취직하더라도 3년 정도는 비싼 것에 굶주렸던 학생 시절의 한을 푸느라 저축마저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제 그럴 미친 짓을 저지를 금전의 여유는 없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무언가 일을 저지르는 것 뿐이다. 가능하면 스스로에게는 큰 충격이면서도, 그다지 손해 볼 것은 없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있는 일을 저질러야한다. 아직 학생이었다면, 어느 정도 큰 일을 저질러야하는지 가늠하지 못하던 그 시절이었다면, 망설임없이 가장 위험한 짓을 찾고 골라서 당장 저질렀을게 틀림없지만, 나는 이제 사회인이고, 앞뒤를 제어 적당히 끈덕진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범위를 예상해야만 한다.

   "먼저 퇴근할게요."

  끈덕진 마음을 털어내고픈 마음에 필요한 프로그램 설치를 몇 개 미뤄놓고선, 등 아픈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물을 무얼로 할지, 언제 바칠 것인지는 이미 오늘 아침에 정해두었다. 나흘 만에 만나는 한 사람을 끈덕진 마음에 바치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나는 이별한다.


   좋아하는 술집이 높다란 곳에 있다는건 나름 즐거운 일이다. 거기다 한 층을 전부 쓰고 있어서, 바깥면을 전부 창으로 둘러버린 가게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어둑한 밤하늘 가까운 곳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늘상 찾는 이 칵테일 바에는 가까운 곳에 높은 빌딩조차 없어서 창가 자리에 앉으면 하늘 위에 앉아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칵테일 바의 맛을 책임지던 훌륭한 바텐더가 사라진 다음에도 꾸준히 들렸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하는 날에는 저녁 식사 대신 이 곳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면서 밤하늘 위에 앉아서, 그저 노래를 듣고 술에 취했다.

   "일찍 왔네."

  맛은 변했어도, 좋아하는 칵테일을 시켜놓고 바깥을 한참 내다보고 있으려니, 그 사람이 맡은 편에 앉는다.

   "또 딸기 마가리타야?"
   "응."

  붉은 빛이 도는 내 잔을 보고, 언제나처럼 같은 미소를 짓더니 담배부터 한 대 피워분다. 사귀자고, 서로 약속한지도 한참 지난 사람이다. 들어오면서 카운터 바구니에 쌓인 성냥갑을 집어오는 버릇도, 주문보다 담배를 먼저 피워무는 모습도 이젠 당연하게 느껴지고, 스트로베리 마가리카를 굳이 딸기 마가리타로 바꿔부르는 고집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둘 만큼 익숙하다.

   "무슨 일 있어?"

  점원에게 블랙 러시안을 주문한 다음, 담배 연기를 위로 뿜어내면서 대뜸 물어온다.

   "왜?"
   "아니, 보통 우리 평일에는 잘 만나질 않으니까."
   "그냥."

  꿰뚫어보는듯한 질문을 적당히 얼버무리고는, 탁자 위에 놓인 그 사람의 담배갑을 들어 한 대 빼앗아문다. 아무 말없이 건네는 라이터 불에 담배 머리를 들이밀고 숨을 들여마시자, 한달전 회식 자리 이후로, 참 오랜만에 담배 연기가 담뿍 입속에 차오른다.

   "술 한 잔 하고 싶었어."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마도 반쯤은 눈치채고 반쯤은 오해하리라는 것이 뻔히 보인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기분 풀려고 하는구나,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오늘은 그냥 조용히 같이 마셔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 넘겨짚는 배려가 마음에 들어 사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오늘은 더 이상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나처럼 창밖이나 내다보며, 가끔 내가 던지는 말에 있는 힘껏 정성스레 그리고 짧게 대답하는게 전부겠지. 끈덕해진 마음에 바치는 제물로 손색이 없는 남자다.

   "담배 바꿨어?"
   "아니, 오늘은 그냥 멘솔 피우고 싶어서 산거야."

  마주보는 얼굴에 바로 내뿜을까봐, 들이마신 연기를 잠깐 고개를 돌려 뱉은 다음에야 대답하는 고갯짓이 눈에 밟힌다. 어쩐지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언제 이야기할 지 망설이던 한 마디를 다시 눌러 담는다. 그냥, 따라하듯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연기를 뱉으려니, 어쩐지 속이 쓰리다. 이제 잊어야 한다고, 죄다 내버렸던 고양이 사진이 눈속으로 떠오른다. 작년에 끈덕한 마음에 바쳤던 고양이 사진이다. 제물로 바치면서, 사진첩을 손에 들고 하염없이 추억했었다. 언제 어떻게 집으로 들여놓았던가. 뭐가 재미있었고, 슬펐고, 화가 났고, 기뻤었는지. 반나절을 사진만 바라보다 수의같이 새하얀 쓰레기 봉투에 무참히 구겨 넣었었다. 덕분에 끈덕진 마음은 사라졌지만, 어느날 쓸데없는 미련이 목에 걸린 날에는 혹시 남은 사진이 없을까하고 온방안을 미친듯이 헤집는 버릇이 생겼다. 이 남자를 바치면 또 무슨 버릇이 생길까. 아마도 주고 받은 선물 중에 마음에 들고 비싼건 버리지 못하겠지. 특히 조그맣고 귀여운 유명 브렌드의 미니 컴포넌트는 늘상 쓰는거니 버리기는커녕 책상 위에서 치우지도 못할게 뻔하다. 그러면 또 미련이 목에서 명치까지 걸리는 날, 청승맞은 노래를 틀어놓고 추억하다가 미친년마냥 웃고 울겠지. 사실 죽을만큼 사랑했던 것도 아니면서, 마치 특별하고도 운명 같은 사랑을 했었다는 듯이 울다가, 불현듯이 혼자서 삼류 연애 소설 흉내낸다고 스스로를 비웃다가, 마침내 길고 긴 추억 첫자리로 돌아가서 확인하는거다. 사랑해서 사귄 사람이 아니라고, 그저 나에게 딱 맞기에 사귀었을 뿐이라고, 그런 마음을 새삼스레 확인하려 들겠지. 단점이 좀 있지만, 귀찮게 간섭하지도 않고, 사랑을 빌미로 비겁한 요구를 하지도 않고, 적당히 귀여운 선에서 이리저리 질투할 줄도 알고, 억지쓰는 일도 없어서 참 오랫동안 사귀었을 뿐이라는 다짐을 하다가, 침대위에 엎어져 우는거다. 가족에게 들키기 싫어서 있는 힘껏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이를 악물거나 이불보를 꽉 물고서, 숨도 쉬기 힘든데 억지로 울기까지 하면서, 아까워서 우는거라고, 슬퍼서 우는거라고 우왕좌앙 앞뒤가 맞지도 않는 핑계를 대가며, 지쳐 잠이 들때까지 삼류 인생 극장을 혼자서 찍겠지. 한숨이 나온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 견딜만 할지도 모른다. 울다 잠든 다음날 아침은 부은 눈만 빼면, 출근하기에 어울리는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 테니까, 무조건 손해만 보는건 아니다.

   "우리 그만 만나자."

  끝없이 생각을 곱씹으려다 그만두고, 반쯤은 망설이고 반쯤은 참고있던 말을 툭 뱉어낸다. 이왕이면 냉정하고 냉담하게, 깔끔하게 저지르고 싶었건만, 울컥하고 마음이 동요한다. 구석에 우울하게 뭉쳐있던, 끈덕한 마음이 미친짓에 놀라 한달음에 달려나온다. 심장이 피를 뿜어내는 소리가 귓전을 떄린다. 마음이, 마음이 한껏 동요한다.

   "뭐?"

  조용히, 내 고갯짓에 맞춰가며 서로 마주보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던 그 사람이 담배 연기를 뿜다말고,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술기운이 얼굴을 타고 돈다. 장마비 아래 죽은 고양이 시체가 썩어가듯이 끈덕하게 눌러붙었던 마음이 동요한다. 어쩐지 모르게 엄청난 두려움이 희미한 희열과 함께 마음을 뒤흔든다. 그래, 두렵다. 이 남자와 헤어지는게 잘하는 짓인지 두렵고, 이런 식으로 헤어지려는게 제정신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인지도 두렵다. 이 남자가 없는 앞날도 텅 비어버릴 것 같아 두렵다. 끈덕한 마음이 두려움에 놀라 춤을 춘다.

   "갑자기 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뱉다 만 담배 연기를 길게 내쉬며 묻는다. 그 음성이, 그 시선이 내 마음을 채찍질한다. 춤춰라, 춤춰라. 그렇게 끈적함을 다 털어버리라고 채찍질한다.

   "그냥."

  보기 흉하게 끝맺더라도, 마음을 더 거세게 흔들고픈 욕망에 일부러 무성의하게 대답해 버린다. 누가 듣더라도 고함을 내지를만큼, 무례한 대꾸가 아닌가. 바보 같은 대답에 고함 소리를 듣길 바라는 멍청한 기대가 든다. 좀 더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 그 끈덕함을 다 털어버리고, 살아서 두근거릴 수 있도록.

   "난 헤어지기 싫은데."

  놀란 표정이 기대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폭발하듯 터져나오리라 생각했던 고함 소리도 그저 차분하게 가라앉아, 그만 만나자는 내 요구를 거절하고 잦아들어버린다. 이제 막 광란으로 뛰어들려던, 춤추는 마음도 멀뚱하니 멈춰선다.

   "왜?"

  이 생뚱함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엉겁결에 받았던 질문을 똑같이 던지고 말았다. 왜, 왜 화를 내지 않는건지. 어째서 고함을 지르지 않는건지.

   "우리 잘 맞잖아. 무슨 일 떄문에 갑자기 그런 말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깝지 않아?"

  언제나처럼, 조용조용한 말투로 차분하게 대답하고는 아직 덜 피운 담배를 입에 문다. 딱히 부정할 대꾸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바로 그렇다고 대답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말이 끊기고, 담뱃불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조그맣게 그 자리를 체운다.

   "서로 불만 생기면, 바로바로 이야기해서 맞추자고 약속했잖아.
    내가 요즘 뭐 잘못한거 있으면, 이야기해줘. 바로 고칠 테니까."

  잦아든 목소리에 어쩐지 양어깨가 시큰하니 저릿하다. 좋아하는 음색과 억양이다. 까다로운 내 귀가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그런 목소리다. 아깝지, 그래, 제물로 던져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깝지. 그런 생각이 손이 담배로 옮겨간다.

   "집에 갈래."

  성실하다 싶을만큼, 바로 건네오는 라이터 불에 담뱃불을 붙이고, 생각이며 마음을 다 감춘 결정을 내렸다. 가끔 피우는 탓이겠지만, 마시고 뱉는 연기가 유난히 묵직하다. 일단은 집에 가고 싶다. 가서 혼자 있고 싶다.

   "뭐라도 먹고 들어가지?"

  사람좋은 권유를 고개저어 거절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이 훤하게 내다보이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거울처럼 이쪽을 비추는 창위로 우리가 보인다. 표정도 색도 찍다만 사진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는 탓에 오래도록 노려보아도, 창 위의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앉아 있다.

   "잔이라도 비우고 가자."

  창위로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평범한 마무리를 짓는다.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얼마남지 않은 술잔을 기울이며 참는다. 김빠진 마음은 아직 어째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가운데 쪼그려 앉아있다. 그 위로 술을 붓는다. 사는게 다 그런거야하고 이야기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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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이리스 04.08.29 23:27 댓글 수정 삭제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댕! 04.08.30 14:53 댓글 수정 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꾸벅)
  • No Profile
    하닷사 04.09.04 16:50 댓글 수정 삭제
    이런 남자 하나만 내려주소서.(중얼)
  • No Profile
    딸기 04.11.01 14:25 댓글 수정 삭제
    뭔가 엄청 공감 .. ; 그만 만나자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에도, 얼마나 수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던지, 그 사람도 저렇게 상큼하게 끈적거리는 기분을 날려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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