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pena 마왕

2003.12.26 19:2112.26

   “이씨! 그것 좀 빼!!”
  
   나는 우악스럽게 여자아이의 손으로 달려들었다. 여자아이의 오른손 셋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 그 반지가 나를 아프게 했다. 여자아이는 당황했다.
  
   “시, 싫어!!”
   “아프단 말야! 빼!!”
   “악!!!”
  
   그리고 처절하게 울려퍼진 여자아이의 비명. 그 반지는 빠지지 않는 반지였다. 그 반지는 마왕이 데려가려고 점찍어놓은 증표였다. 아무도 그 반지를 빼지 못했고, 빼려고 시도할 때마다 여자아이는 고통을 받았다.
   여자아이는 울었다.
   나는 머쓱했고, 여자아이를 달랬고, 그 애가 반지 때문에 고통받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여자아이는 아주 예뻤고, 너무 슬프게 울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의 반지는 내게도 너무 아팠기 때문에.
   그 여자아이는 우리나라의 공주였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공주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좀 덜 더러웠을 거라고.
  
   “끼잇!!!”
  
   이렇게 마물의 피와 배설물로 온몸을 더럽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오늘도 '문'을 가진 마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2개의 문만 더 뚫고 나가면 마왕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데, 갈수록 '문'을 발견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있다. 아마도 높은 급의 '문'을 가진 마물의 수가 적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알 수 없다. 마왕의 성이 하늘이나 지하가 아니라  인간의 땅에 있는 것은 확실했고, 지금 이 곳도 인간의 땅인 것 같았다. 그러나 주위는 황량했고 인간은 눈에 띄지 않았으며 보이는 것이라곤 마물의 시체뿐. 해가 뜨는 쪽이 동쪽이라는 것 외에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정보란 없었다. 드문드문 나무라도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물들이 우글대는 이 곳에서 등을 댈 수 있는 장소가 생기니 말이다. 게다가 불이 옮겨붙을 위험이 있긴 하지만,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불도 피울 수 있다. 사방이 뻥 뚫린 곳이었다면 정말로 잠을 자기가 두려웠을 터인데……. 그나마 모닥불이 타닥 불꽃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며 낮의 피로를 달랠 수가 있었다. 홀로 수십 마리의 마물들을 상대해야 했던 길고 지리한 싸움.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이, 아니 호칭 따위 집어치우고 제이린이 마왕에게 붙잡혀간 지 벌써 6개월이 넘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들 긴장의 끈을 늦춰갈  무렵이었다. 그날은 나와 제이린의 결혼식날이었으므로. 공주가 결혼을 하여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순간, 마왕은 공주에게서 손을 떼리라고 믿었으므로. 그러나 결혼서약을 하려던 그 순간, 제이린이 나의 아내가 되겠다고 대답하려는 그 순간, 마물들이 결혼식장에 난입해 들어왔다.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들이 모두 무기를 빼어 들고 앞으로 나섰고(모두 나의 친척- 즉 용사 집안 사람들이었으니까!) 마물들과 뒤엉켜 싸우는 통에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나는 제이린을 안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제이린은 내 팔 안에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팔 안에 남아있던 것은 마왕으로 추정되는 자가 남긴 종이쪽지와 반지, 그리고 사람만 한 인형이었다.
   '이제야 모시고 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 소리.
   나는 인형을 팽개쳤다. 바닥에 닿는 순간 인형은 거대한 폭음을 내며 사라졌다 - 결혼식장이었던 사원과 함께.
  
  
  
   “나를 사랑해?”
  
   제이린은 그렇게 물었다. 언제나처럼 약간 새초롬한 표정에 상기된 뺨이 대조적이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질문을 했었을까.
  
   “응? 레번, 말을 해봐. 나를 사랑해?”
   “물론이지. 난 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어.”
   “약속은 약속이고.”
  
   삐죽이 내민 제이린의 입술은 분홍빛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화난 듯한 눈은 서늘한 녹색. 하얀 어깨로 드리운 머리타래는 밤처럼 짙고 포근한 검정. 눈색깔과 짝을 이루는 초록 드레스. 그리고 제이린을 제외한 모든 것이 희고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응.”
   “제이린 공주님을 사랑해.”
  
   제이린의 분홍빛 입술이 위로 올라가고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제이린의 미소는 아주 예쁘다. 눈물을 흘릴 때에도 제이린은 예쁘다. 나의 제이린. 그래서 마왕은 너를 탐냈던 걸까.  태어나기도 전부터 너를 데려가려고 맘먹었던 것일까.
   그러나 나는 어째서 너를 만나게 되었던 것일까.
  
  
   한기가 느껴져 잠에서 깨었다. 그래도 꽤 많이 잠을 잔 듯, 벌써 동이 터오고 있는 파아란 새벽이었다. 눈을 뜨고 나니 무언가 난잡한 것들이 눈앞에 많이 펼쳐져 있었다.
   나로부터 반경 5미터의 반원을 그린 듯 풀이 뽑혀져 있고, 그 이후로는 마물의 시체들이 펼쳐져 있었다. 펼쳐져 있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수는 많았다. 게다가 내가  피웠던 모닥불이 다 꺼진 후에 얹은 것이 분명한 새 불쏘시개들. 누군가가 왔다간 것이다, 내가 옛날 꿈이나 꾸고 자빠진 동안에. 누가 와서 이렇게 대학살극을 벌이고 갔는데도 잠을 실컷 잘만큼 다 잔 다음에 고작 추워서 깬 꼴이라니. 그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주었기에망정이지, 적이었더라면 난 다시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멀었구나, 레번. 멀었어.”
  
   스스로 혀를 차면서도 등골이 오싹했다.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나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빼고 나는 그 '누군가'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 그가 지나가던 길에 멍청한 놈 하나를 구원해 준 건지, 아니면 계속해서 나를 쫓아온 건지, 쫓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나를 돕자는 건지 아니면 이대로 보내기 싱거우니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장난처럼 쓸어 준 건지! 심지어 그인지 그녀인지조차도!
   나는 분통이 터져서 모닥불 위에 신경질적으로 흙을 덮고 그 위에서 뛰었다. 그러나 곧 숨을 가다듬었다. 하루는 짧다. 몸이 해야 할 일은 많다. 섣불리 몸도 마음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다시 또 시작이다.
  
  
  
   “헉, 헉…….”
  
   이상한 날이었다.
   이곳은 마왕의 땅, 마물들이 사는 곳. 나는 그들을 찾아가서 베고 문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은 마왕이 잔머리를 쓴 결과였다. 모든 마물은 태어날 때부터 그 몸 자체가 문이 된다. 가장 비천한 마물을 잡아서 죽이고 그 몸을 반으로 가르면 그 피가 끊어지지 않고 넓게 퍼지며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통로를 여는 것이다. 그렇게 통로를 지나면 다른 층이랄지 다른 차원으로 나오고, 다시 그보다 높은 층으로 가게 해 줄 문을 지닌 마물을 죽여야만 한다. 결국 한 문을 통과하고 나면 밀려드는 대부분의 마물이 쓸모가 없어진다. 지금 내가 통과한 문보다 더 높은 문을 가진 마물만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쓸모가 없다고 나에게 덤비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를 죽이려 한다면 죽여 줄 수밖에. 귀찮고도 지리하다.
   그러나 대개 높은 문을 지닌 마물을 죽인 자에게 비천한 마물은 접근해 오지 않는다. 피냄새에서 무언가가 나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피한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그것이라고 해도 좋다. 아무리 작은 마물이라도 떼로 덤빌 때에는 견딜 수 없을 텐데 그렇게까지는 안 하니까. 강한 자 앞에서는 철저히 꼬리를 만다는 마물의 위계가 고마울 노릇이었다.
  
   “젠장, 하나도 없는 거냐!”
  
   베고, 베고, 때로 뭉툭해지면 때리고, 다시 날을 세울 틈도 없이 후려치고.
   끝없는 마물의 물결이었다. 이미 쓸모없는 마물들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것도 절대로 내가 지쳐서 나가 떨어질 만큼 한꺼번에 많은 수가 오지는 않으면서 끊임없이. 마물들의 표정에는 비장감이 가득했다. 대개는 알아보기 전에 내가 베어 넘겼지만.
  
   “... 나와!! 누구냐, 나와!”
  
   강한 자에게 덤비지 않는 마물들이 덤빌 때에는 하나밖에 없다. 명령. 누군가? 목적이 무엇인가? 이제는 내가 위협이 된다는 건가? 나를 지치게 만들 셈인가? 이건 시작인가, 아니면 동시에 끝인가?
   내가 줄곧 누구냐고, 나오라고 외치며 마물을 베어 넘기는 동안 이 이상한 공간을 희뿌옇게 밝히던 해가 저물어 갔다. 어둠이 내리면 끝장이다. 그때까지도 이렇게 밀려온다면. 마물은 어둠을 먹고 자라고, 나는 어둠을 꿰뚫어보지 못하니, 그 간극만큼 두 배로 내가 불리해진다. 그러나 곧 나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시간이 지나는 것, 어두워지는 것, 마물들이 강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젠 죽는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도 못 움직이겠다. 망할.
   해가 졌다.
   이제까지 이 시간이 되도록 싸워 본 적은 단 두 번. 해가 지는 순간 마물은 변태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커지고 등에서 뿔이 솟으며 이빨과 발톱이 길어진다. 그 전까지는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비늘 달린 동물들처럼 보인다면 해가 지고 나면 확연히 괴물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해가 지고 나면 조금씩이나마 상처가 계속 회복되는 것 같았다. 낮에 손쉽게 잡아죽이다가 마지막 남은 한 마리를, 그때까지의 싸움 전부를 합한 것만큼 힘들게 싸워 겨우 퇴치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나를 향해 밀려들던 마물들의 무기가 검에서 발톱으로 바뀌는 것을, 뭉실뭉실했던 살기가 찌를 듯이 압박하듯이 바뀌는 것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물들이 하나씩 팔을 내렸다. 그리고 먼 곳에서부터 하나씩 땅 밑으로 사라졌다. 풀이 자신이 났던 땅속으로 들어가듯이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술렁거림도 없고 어떤 신호도 없이 미리 약속해 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아니, 아니다. 구령을 내리는 자가 있었다. 목소리로는 아니지만 그 존재로 구령을 내리는 자가 있었다. 마물들의 물결 저 너머에서부터 여유롭고 당당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자,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 마물들을 내쫓는 자가.
  
   “반갑습니다.”
  
   마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드디어 내 앞에 선 자가 말했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검을 쥔 채 어찌할 바를 몰라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댁은 뉘신지? 인간형으로 생기셨는데 속도 인간이신지? 아니면 최소한 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지는 않은 생물이신지? 참, 나를 도와준 건 맞으신지? 사람 잘 못 본 건 아니고? 지나가던 길인지?
  
   “하나씩 물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그자가 웃으며 한 말에 정신이 들었다. 기분 나쁜 작자다. 내 눈으로 스쳐 지나간 물음을 보았다는 얘기인가? 그럼 지금도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건가? 나는 읽을 테면 읽어 보라는  듯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읽고 있다면 조용히 아닌 척하는 것이 예의라는 것쯤은 알 테지?
   그자는 손을 들더니 한 손은 뒷짐지고 한 손은 앉으라는 듯이 바닥을 가리켰다. 나는 아파서 당장이라도 내리고 싶지만 안심할 수 없어서 엉거주춤 반쯤 든 칼을 보고 그를 다시 보았다. 그자가 웃었다.
  
   “계산이 잘못되었나 보군요. 아직도 힘이 남아 있다니.”
   “계산?”
   “아무리 최하급이라고 해도 1대대로는 모자랐던 겁니까?”
  
   두 번째 말에는 알아들었다. 이런 이상한 자식이 다 있나.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냥 올 것이지 사람을 하루 종일 굴린 다음에 폼 잡고 나타나? 게다가 1대대를 보낼 정도의 힘이 있으면 그냥 와도 나 하나쯤 제압하기는 간단한 게 아닌가?
   하지만 기운없어서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뭐, 여러 가지 고려해서 선택한 방법입니다.”
  
   그자는 살며시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인간적인 몸짓을 해 봤자 속을까 보냐.
  
   “아니, 정말입니다. 여러 가지 고려해서 선택한 겁니다. 첫째, 나는 기운이 남아돌아서 이것저것 쓸데없이 틱틱거리는 꼴은 못 봐 주는 성미입니다. 둘째, 만약 정도를 넘어서서 당신이 나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든다면 나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별로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당신과 정면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셋째, 다음 차원에서 만난다면 손쉽게 당신을 제압할 수도 있고 어쩌면 내 존재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움츠러들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는 당신과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그러더니 다시 살며시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나는 그자가 만족할 만큼 웃고 나면 말을 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자는 결국 말하지 않았다.
  
   “넷째는 뭐요?”
   “글쎄요. 숫자를 매겨 가면서 말하다 보니 말할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합시다.”
  
   다시 웃음. 기분이 이상했다. 그자의 웃음이 맘에 든다거나 두근거린다거나 궁금하다거나 해서 드는 기분이 아니었다. 상판에 주먹을 박아 주고 싶을 만큼 뱃속이 불편한데 기운은 없고, 없던 기운까지 짜내 가면서 팔을 내지르기에는 조금 부족할 정도로만 얄미웠다. 해소되지 못한다. 얄미움이, 짜증이. 그리고 화가 난다. 오갈 데 없는 화가 몸속을 맴돈다.
  
   “밤이 오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문득 아주 일상적인 말투로 그자가 물었다. 꽤나 망설이면서 대답하지 않는 동안 그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고도 조용하게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대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무서워.”
  
   그렇게나 일상적으로 질문을 한 주제에 그자는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약간 발끈 화가 나기도 하고 기운도 없고 해서 나는 털썩 주저앉아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연하잖아?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러 온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네 족속은 밤에 더 강해지고, 게다가 나도 인간이니까 쉬어야 한다고. 지금 같은 일이 두 번만, 아니 한 번만 더 일어나도 나는 그 자리에서 죽겠지. 그래서 무서워.”
  
   말투도 반말이 되었다. 어차피 나를 죽이고 싶지 않은 거라면 이 정도로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생각해 보니 쓸데없이 틱틱거리는 꼴을 못 참는다고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자는 다시 물었을 뿐이었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겁니까?”
   “죽는다는 게 의미하는 것이 두려워.”
   “죽는다는 게 의미하는 것이라. 예를 들면 지금 이 일을 마치지 못하고 마왕에게 공주를 빼앗긴 채로 있는다든가?”
  
   그자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 그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끝마치지 못하는 것. 내가 죽는다면 제이린은 아무도 못 구하겠지. 구하려고 정말로 마음먹는 사람도 없을 거야. 그러면 제이린은 평생 마왕에게 잡혀 있겠지? 그 아픈 반지도 못 빼고…….”
  
   내가 왜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 마왕한테 잡혀 가서 제이린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겠고, 사실은 나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거기 가서 더 행복하게 지내는 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어. 힘들 때면 더 그래. 그런데 그 반지를 생각할 때마다 곧 다시 아닐 거라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제이린은 언제나 그것 때문에 아파했으니까, 그렇게 아프게 만드는 놈이 납치했다고 해서 행복하게 해 줄 리는 없을 거야. 그렇게 믿고 있어.”
   “공주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
  
   '나를 사랑해?'
  
   삐죽이 내민 제이린의 분홍빛 입술, 나를 바라보는 화난 듯한 녹색 눈, 눈색깔과 짝을 이루는 초록 드레스. 하얀 어깨로 드리운 밤처럼 짙고 포근한 머리타래. 잡힐 듯, 눈 앞에 서 있듯 선명한.
  
   “젠장.”
  
   그저 눈을 비비고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자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대답을 얻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는 듣고 싶어 하고 당신은 말하고 싶어 하니 그걸로 된 거 아니겠습니까.”
   “난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당신도 내게 들을 이야기는 별로 없을 텐데.”
   “무슨 소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궁금한 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그 반지는 무슨 말입니까? 아프게 하다뇨?”
  
   나는 그저 그자의 목소리에 따라 멍하니 생각했다. 눈 앞에 있는 제이린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날 때부터 셋째 손가락에 꼭 맞았고 몸이 자라면서 함께 자란 반지. 처음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었지만 제이린이 자라날수록 빨간 보석이 마치 마왕의 눈이 떠지듯, 땅에서 붉은 싹이 돋아나듯 자랐던 그 반지. 진저리를 치며 제이린이 언제나 돌려놓아도 조금만 한눈을 팔면 어김없이 정면으로 돌아앉아 그렇게도 괴롭히던 반지.
   제이린이 울었다. 계속해서 반지를 안 보이게 돌려놓으면서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붉은 눈은 제이린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울지 마, 제이린. 내가 지켜 줄게. 마왕이 널 데려가지 못하게 해 줄게. 사랑해, 제이린, 제이린, 제이린, 제발.
  
   어느새 울고 있었다. 그자는 예의를 차리듯 내게서 뒤돌아 있었지만 꺽꺽 대는 흉한 울음소리는 사방으로 울려 퍼졌을 게다. 알 수 없다. 이제까지 잘 견뎠는데. 어째서 지금, 어째서 이자 앞에서…….
   그자는 뒤돈 채로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나지막이, 그러나 끊이지 않고 말을 쏟아 놓았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약간 이상한 이야기로군……. 반지를 어렸을 때부터 끼워 놓고 점찍을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면서…… 어째서? 어째서 나이가 찰 때까지 놔둔 거지. 쓸데없는 자신감은 아니었을 테고……. 게다가 마왕은 이전에 저주를 받아서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은데 말이지. 고귀한 태생인 자가 그런 식의 증표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마왕의 신부가 증표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 같고. 흥미롭군, 정말. 하지만…….”
  
   그리고 갸웃거리는 몸짓과 말 한마디.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끼고 있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자도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문득 나를 흘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 내가 혹여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이제야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문득 어제 내가 잘 때 도와준 것이 이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하러?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나를 지치게 만들고 싶어서 하급 마물 1대대를 동원한 놈이 밤이라고 해서 나를 지킬 이유는 없지 않은가.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레번 다이로스. 다음에 볼 때에는 이 모습은 아닐 테지
만요.”
   “무슨 소리요?”
   “당신은 지금 땅에 발을 붙이고 팔다리를 쓰지요.”
  
   처음으로 그자가 정말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당신이 검을 내뻗어서 땅을 가르고 마물을 조각 낼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세계와 차원이 그것을 받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세계와 차원을 변형시켜서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을 바꿔도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당신의 힘이 세계와 차원을 변형시키는 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계는 파괴되겠지요. 그리고 세계가 없는 곳에서 당신 또한 살아날 수 없을 거고. 공멸의 길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각이 있는 자라면 자신이 세계를 파괴할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그 힘을 함부로 쓰지 않겠지요.”
   “그렇겠지.”
   “그런데 우리 마족은 몸 자체가 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런 조절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지요.”
   “조절을 하지 못한다지만 당신은 지금 나를 해하지 않고 내 앞에 서 있고, 원할 때에만 나를 패대기칠 수도 있지 않나?”
   “그것은 당신의 관점에서만 하는 말입니다. 세계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관점에서는 내가 힘을 집중해서 당신에게 쏘는 것과 내 주위로 계속 발산하는 것 사이에 엄
청난 차이가 있겠지요. 당신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한 차이가요. 하지만 이쪽으로 쓰든 저쪽으로 쓰든 세계는 계속 그 변형을 감당해야 하는 겁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세계의 관점에서 생각하라니 말도 안 되는 요구다. 나는 인간이지 세계가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가 택하는 방법은 세계와 차원에 따라서 아예 힘의 크기를 줄여 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취하고 있는 이 모습은 이 세계가 견딜 수 있는 한계에 가까운 정도로 힘을 발산하는 모습입니다. 이보다 약한 인간의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약한 모습을 취해야만 하겠지요. 공멸은 피하고 싶으니까.”
  
   문득 무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번득이는 무언가. 혹시……?
  
   “다음 차원에서 만나면 단번에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게 그 소리인가?”
   “알아들으셨군요.”
  
   그자가 웃었다. 그러나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한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깨달음은 이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한 질문은 이미 확신하는 것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당연한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로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당신의 목적은 이룬 건가?”
   “물론입니다. 두서없는 것처럼 들리셨을지 몰라도 저는 해야 할 말만 했고 듣고 싶은 답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실제의 모습은 그것이 아닐 인간형의 마족이 웃었다. 세계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힘을 발산하는 모습, 공멸을 피하기 위해 취한 형태. 인간의 세계는 이 마족의 차원보다 약하니까 거기에 맞춰서 더 약한 모습을 취할 것이다…….
   진짜 인간의 모습 같은 것?
  
  
   그자가 사라지고 나서 남은 시간을, 남은 밤을 뜬눈으로 지샜다. 그자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검을 제대로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는데 잠들 수가 없다. 정신을 놓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자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린다. 무엇이었을까. 그자의 말을 듣고서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그 생각. 생각하고 떠올리고 기억을 더듬다가 동이 터올 때쯤에 간신히 잠들었다.


   제이린이 말했다.

   “내일이면 다 끝나는 거겠지?”

   결혼식 전날이었다.
   그래, 그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식만 끝나면 반지도 제이린의 눈물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되기는 했다, 아예 제이린이 사라졌으니.
   꿈은 꿈이되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찬찬히 보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전에는 내가 제이린을 보는 식이었는데, 지금 나는 ‘제이린과 제이린을 보는 나’를 보고 있다. 장면에서 뚝 떨어져서 구경꾼처럼. 그곳에서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표정, 들리지 않던 말도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지긋지긋한 나날에 이별을 고하고 기뻐해야 할 때에 무언가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듯 반쯤 젖은 제이린의 눈, 고개 숙여 제이린의 발을 만지던 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 입 모양으로만 달싹거리는 제이린의 입술.

   ‘미안해.’

   무엇이, 제이린?
   이상한 경험이었다. 보지 않았던, 보지 못했던, 보려고 하지 않고 그냥 슥 지나쳤던 장면을 우연찮은 기회에 다시 꼼꼼하게 보는 기분이었다. 언뜻 보고 받았던 예전의 느낌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또한.
   제이린은 왜 나를 불쌍하다는 듯, 미안하다는 듯, 다시 못 볼 것처럼 보았던 것일까? 제이린. 그때…… 무얼 보고 있었어?

  
   다시 지루하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마물을 찾아 헤맨다. 문이 있는 마물을. 덤벼 드는 마물을 죽이고 문의 등급을 확인한다. 내게 필요한 문은 두 개. 그 문을 지닌 마물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이제까지 찾은 열두 개의 문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려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각오했다.
   하지만 문과 문 사이, 의미 없는 살육만을 계속할 때에는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는 것 같다. 밤이 되면 아무 생각 없이 쓰러져 자고, 피곤한 몸을 일으켜서 희뿌연 마계에서 또 하루치만큼 살육을 하고 몸과 마음을 혹사시킨다. 그걸로 끝이면 좋겠는데……. 가끔 생각난다. 나를 만나러 왔던 그 마족이 중얼거리던 말이. 꿈에서 본 제이린의 미안하단 말이. 그리고 다른 생각할 거리가 없는 밤에 모닥불을 볼 때에 다시 보듯이 눈앞에 떠오른다. 아무리 극도로 혼란스러웠다고는 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품에 안고 있던 제이린을 빼앗길 수가 있었을까, 거기에다가 덤으로 인형에 쪽지까지 선물로 받고 말이다. 강제로 앗아간 거라면 조금이라도 내가 알아챌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


   문을 하나 더 찾았다. 이제 남은 건 한 개다.
   몹시 힘든 싸움 끝에 그놈의 몸을 가르고 피의 문을 지나 마지막 차원에 이르렀다. 이제 내가 갈라야 할 몸은 마왕만 남았다. 제이린과 함께 마왕의 몸을 가르고 원래의 세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문을 열 일만이 남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마왕의 성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계속 느려지고 있다. 이 층에 오는 마지막 문까지 모두 뚫고 나온 나에게 덤벼 드는 마물도 없고 마왕의 성은 어디에서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장대한데도 나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자가 했던 말을 알아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자의 의심을, 의심을 빙자해서 나에게 알려 주려던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이린은 마왕에게 잡혀 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이린이 마왕이다.
   나를 만나러 왔던 인간형의 마족은 마왕이 제이린을 데려간 일에 대해서는 몰랐다. 마왕은 자주 자리에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지금 분명히 마왕은 존재한다. 마왕이 제이린을 데려간 시점에서부터 이전까지 얌전히 지내던 마물들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 말썽을 일으켰고, 마계와 우리 세계 사이의 문이 생겼다. 마왕이 제이린을 데려간 바로 그때 - 제이린이 마왕의 자리를 이은 바로 그때에.
   그렇다, 반지를 끼고 태어나는 것은 신부감의 증표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제이린을 결혼식에서 데려갈 때 나타났던 마물들도 너무나 하급이었고 강력한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린은 스스로 잡혀 갔다. 결혼식 날이 마지막이 될 줄 제이린은 미리 알고 있었다. 나를 가엾이 여긴 것은, 나의 사랑을 자꾸 확인하려고 한 것은 그래서였다. 마왕이면서 제이린의 몸을 하고 있었던 것은 저주에 걸려서일 수도 있고, 우리 세계에서 마왕이란 그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 제이린을 죽이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 걸음이 느려졌다. 성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한 걸음 한 걸음 떼놓을수록 마왕의 성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로 가까이 오는 것 같다. 설마 제이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나를 부르는 걸까?
   마족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보 짓일지도 모르지만, 바보 짓이 확실하지만, 진실을 누가 아는가? 그자가 말한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데 그 누가 진실이 아니라고 보증을 해 줄 것인가? 그 누가, 내가 이렇게 여러 층을 거쳐 마물을 살육한 검을 꽂아야 하는 것이 제이린이 아니라고, 제이린은 마왕의 뒤에서 안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나는 발을 내디딘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왕 성이 가까워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걸음이 좁아진다.

   어쩌면…….
   나를 만나러 왔던 그자가 마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crazyjam 낮과 밤만 있는 세계 2004.02.27
가는달 13월, 혹은 32일1 2004.02.27
아이 진화하는 장난감 2004.01.30
pena 용의 비늘4 2004.01.30
아밀 악마 - 본문 삭제 -1 2004.01.30
bluewind 글잔디 2004.01.30
赤魚 꿈, 그 너머 - 본문 삭제 -2 2003.12.26
가는달 나하의 거울 2003.12.26
crazyjam Midway2 2003.12.26
양원영 그녀, 사랑스런 아줌마 - 본문 삭제 -2 2003.12.26
은림 거울 성 이야기2 2003.12.26
아밀 H 이야기 - 본문 삭제 -8 2003.12.26
pena 마왕 2003.12.26
김수륜 오래된 사람 2003.11.28
赤魚 분실의 도시 - 본문 삭제 -1 2003.11.28
양원영 만병통치 병원 - 본문 삭제 -1 2003.11.28
쓰레기나라의 왕4 2003.11.28
가는달 지구로 돌아오다 2003.11.28
세이지 달의 고치(月の繭) 2003.11.01
bluewind 축제1 2003.11.01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