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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달 우주화(宇宙花)

2003.09.26 16:3509.26

  [나도 ----에 데려가 줘.]

  [안 돼.]

  [부탁이야.]

  [우리는 자네를 잃을 수도 있어.]

  ----.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하고 달콤한 울림을 지닌 색채를 뱉어내자 흐느낌 같은 떨림이 찌르르 전해져 왔다. 그는 실체를 한번 떨기까지 했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갈색의 막대기를 땅에 꽂아놓은 것 같은 그의 몸이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녹색의 반점들이 아주 조금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두려워했다. ----에서 무언가를 잃는 것은 그들에게는 가장 슬픈 일이었다.

  [자네를 잃으면 자네의 실체는 우리 발치에 시들 거고 자네들은 자네의 실체를 보고 우리가 자네를 일부러 잃었다고 발할 거야. 그러면 우리는 슬퍼져서 우리의 돌아갈 몸을 시들게 할거야.]

  그의 생각이 그들의 실체 중 하나에 희미하게 닿았다. 그들 중, 유일하게 시들어버린 실체였다. 나는 눈이 없는 그들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은 너무 둔해서 자네들을 커다란 막대기라고 생각할거야. 뽑히지 않게 누가 일부러 꽂아놓은 막대기들.]

  [둔하다? 막대기?]

  나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은 가지런히 꽂혀있는 울퉁불퉁하고 화려한 색깔의 막대기 군집에 불과했다. 생물의 군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도 미지수였다. 나는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인공적인 구조물을 떠올렸으니까. 백 개의 돌탑, 고인돌, 스톤헨지 같은 것들. 내가 막대기-에 딸려 떠오른 생각들을 발하자 그는 웃었다.

  [아아, 히이, 호오, 하아.]

  [재미있나?]

  그의 몸의 녹색 반점이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떨림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그대로 시들어 잎이 다 떨어져버린 우주식물의 일종처럼 보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췄다. 무례한 생각이었다.

  ['둔하다'는 뭔가?]

  [글세, 아무 것도 발하지도 접하지도 섞이지도 않는 것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최대한 장난스러운 어조를 담아 발했다. '둔하다'라는 말을 어떤 게 변화시켜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예민하고 섬세해서 둔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나의 대답에 호기심이 어려있던 그의 색채가 천천히 누그러들었다. 색채는 한없이 느려지고 무거워졌다.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처음 겪는 반응에 나는 섬뜩 놀랐다.

  [이봐?]

  물음에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 어이! 자네들?]

  당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어휘를 동원해서 그를 불렀지만 여전했다. 나는 그들에게 개체의 개념은 있으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꽤 한참을 부르던 나는 두통을 느끼고 발하기를 멈췄다. 그렇게 오랫동안 크게 발하는 것은 무리였다. 잠시 후 그에게서 느릿느릿하고 작은 답이 돌아왔다.

  [두운하아다아는- 이잃지않았지이마안 잃은 자르을 마알하는 거로구운.]

  그의 속삭임에 더 이상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미안해졌다. 그리고 그에게 존경을 느꼈다. 나였다면 그런 형태의 새로운 개념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그렇게 빠르게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이, 그들이 이미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면 슬퍼할 이유가 없네.]  

  두려움과 슬픔. 말로는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어조는 다시 분명해졌지만 슬픔에서 느껴지는 텅 비고 꽉찬 색채는 들여다보는 나에게 약간의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자네를 잃는 건 우리에게 그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가져다 줄 거야.]

  나는 침묵했다.

  [가게. 우리는 꽃을 피울 걸세.]



  며칠 뒤, 그를 보러가자 그의 실체는 보라색으로 멋지게 변해있었다. 전보다 몇 센티 작아진 것 같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도 모조리 다른 색깔, 혹은 미묘하게 다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위치가 절대 변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몰랐다면 나는 그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들은 내 앞에서 '꽃을 피우지' 않았고 하다 못해 ----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자네는 우리와 달라. ----가 자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어.]

  그가 말했다. 그의 색채는 지난번보다 풍부해져 있었다. 발함의 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색채의 처리라던가 섬세하게 뻗어나가는 가느다란 공간 같은 것이. 꽃을 피우는 횟수가 거듭되어갈수록 그의 정신도 풍부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혼자야. 나는 우리들과도 다르고 자네들과도 다르니까.]

  그가 발했다.

  [왜 ----로 가고 싶은 건가.]

  [요즘 발목이 아파. 더 튼튼한 발목이 있었으면 좋겠어.]

  [하아, 이이, 하아. 실체의 고통 때문에 그런 위험을?]

  그가 웃기지 말라는 듯이 발했다. 발목이 아픈 건 사실이었다. 모래바람이 불 때만 되면 지끈지끈한 게 잠을 잘 때도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발함의 표면에 드리워진 장난기를 읽어냈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감춰두고 있었던 진심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나도 꽃을 피우고 싶어. …얼마 전에 안내자를 잃었거든.]

  변하고 싶다.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추운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아내의 텅 빈 몸을 생각했다. 그것은 사고였다. 잘 웃고 잘 울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해 주었다. 그들처럼. 그녀는 안내자였다. 그들이 처음으로 ----에 나가서 만나는 상대를 그렇게 부르듯이. 서로 끌어당겨 방대한 ----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지표가 되어주는 상대를 그렇게 부르듯이. 그녀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가 되지 않도록 끌어주었다. 내 속에 틀어박히지 않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지도 못한 시체가 되어 우주에 누워있고 나는 사람들을 떠나 아무도 찾지 않는 행성 외곽에서 인간이 아닌 자들을 찾는다.

  [자네가 자신을 잃고 싶어한다면 더욱 ----로 데려갈 순 없어.]

  나는 뜨거워진 뺨을 닦았다. 그가 나의 눈물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옳다. 변하고 싶다는 것은 잘 포장된 죽음에의 욕구에 지나지 않았다.

  [미안해.]

  […우리도 ----에 뭐가 있는지 아직 잘 몰라. 우리는 자네들이 우주를 탐험하듯 ----를 탐험하네. 그러니까….]

  그는 무언가를 발하려다 멈췄다. 시냇물이 흐르고 벌레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끼어 들었다. 색채들이 그물이 되어 그를 감쌌다. 간질이고 휘돌다가 멈췄다. 약간 달랐지만 색채들은 모두 그의 색채와 비슷해서 구분하기 힘들었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실들이 순식간에 뻗어나와 얽혔다. 나는 어지러워져서 보기를 멈췄다. 멀미가 났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라본 그들의 실체는 발하고 있는 색채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잠시 대화를 했네.]

  그가 내게 발했다. 멀미가 가라앉을 무렵 똑똑, 문을 두드리듯이 시신경과 연결된 뇌의 어딘가를 직접 두드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냥 대화에도 그 정도인데 ----로 가겠다니 자네도 참.]

  그는 분명히 나를 놀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주에 나갈 때도 무모했어. 그래도 우리는 성공해서 내가 자네와 이야기하고 있잖나.]

  [이야기!]

  그가 웃었다. 그에게 있어 나는 그리 훌륭한 대화상대가 못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의 정신은 지나치게 단조로웠고 구분할 수 있는 색채와 공간도 한계가 있었다. 나와 이야기하는 중에는 내가 멀미라도 할까봐 다른 이들과 대화할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얼마만큼의 정보가 오가는지 측정 불가인 그들의 대화가 아니라 어눌하고 느리적한 인간식의 대화를 함으로 해서 그가 낭비하는 시간이 상당할 것도 분명했다.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엄청난 시간-그는 꽃을 아흔 여섯 번 이상 피울 수 있는 시간이라고 발했다-을 버려가면서 상대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의 인사말 하나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나를 성심성의껏 상대하기는커녕 인간식으로 치면 졸면서 나를 상대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지만.  

  [너무 그러지 말라고.]

  그는 나의 단순한 정신을 좋아했다. 내가 그의 놀림에 쓴웃음을 짓자 나의 생각에 닿아있던 그가 발했다.

  [자네는 단순하지 않아. 자네가 모를 뿐이지 자네는 아주 복잡하다구. 단순한 건 우리야. 자네의 셀 수 없는 머리칼과 피부의 굴곡과 물렁물렁한 실체에 비해 우리의 실체를 보라구.]

  [그건 실체잖아.]

  [어째서 실체와 정신을 구분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그의 매끈하고 기름한 실체를 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실체를 만졌다. 차갑고 딱딱했다. 신진대사를 하는 것 같은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몽당빗자루 귀신같은 것일까. 실체는 무생물이고 거기에 정신만이 깃들어….

  [실례야.]

  나는 그의 실체에서 손을 뗐다.

  [실체가 무생물이라는 건 우리의 정신도 없다고 하는 거야.]

  [미안.]

  지난번 그가 실체를 떠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분명 어깨를 으쓱하며 눈썹을 치켜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신 망설임의 색채를 뿜어냈다.

  […자네들에 대한 기억을 열어주겠어? 가능하다면 자네의 안내자에 대한 것도.]

  [왜?]

  [가끔, 우리는 ----를 다니다가 잃은 자를 발견하기도 해. 아무 것도 발하지 않고 텅 빈 상태지만.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지만 특히 깊게 나눴던 자라면 멀리서 보고 오기도 하지. ----에는 우리말고 더 복잡한 자들도 있으니까.]

  마주치는 건 천 서른 아홉 번 꽃을 피울 때 한번쯤으로 아주 가끔이지만.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마도 위로하려는 것이리라. 나는 새삼스럽게 미안해졌다. 그가 자신의 정신을 모두 열어 보이지 않는 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지만 내가 정신을 열어 보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내 두려움 때문이니까.

  [싫다면 안 해도 돼.]

  [아냐.]

  나는 내 기억을 열었다. 그것이 얼마나 왜곡되고 마모되었는지는 보장할 수 없어서 부끄러웠지만 그는 탄성을 흘리며 정신의 더듬이를 뻗었다. 그리고 보답이라는 듯 ----에 대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정보를 보여주었다.
  말이 단순한 형태이지 그것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라는 곳 자체의 거대함도 거대함이지만 그 안에 가득 찬 수 많은 것들.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물질에 가까웠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투명하고 어두운 ----안을 돌아다니다가 빈 공간을 발견해 몸을 담았을 때 이루어지는 찰나의 폭발이었다. ----안은 미세하고 수많은 구멍들이 헤엄쳐 다닌다. 갖가지 형태의 구멍들은 몇 억 광년의 거리를 두고, 혹은 몇 마이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산재해 있고 블랙홀처럼 근처를 지나가는 것의 발을 잡아당긴다. 그러면 그들은 가장 자신과 비슷하게 생기고 마음에 드는 구멍이 생길 때까지 구멍 틈을 헤엄쳐 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꼭 닮은 구멍을 찾아내면 옷을 입듯이 몸으로 구멍을 채운다. 말 그대로 꽃이 피어난다. 온갖 색채의 환희, 새로운 공간, 변형. 전류가 흐르고 그들은 ----의 가장 먼 끝에서도 보일 정도로 밝게 타오른다. 벌어진다. 폭발한다. 사그라든다. 꽃이 지면 그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헤엄을 친다. 더욱 풍성해지거나 섬세해지거나 부드러워지거나 강해져서. 구멍도 헤엄치기 시작한다. 열매는 그들 자신이다. 아니다. 말로는 안 된다. '보지 않으면' 모른다. 사실 나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슬퍼서 나는 울어버렸다.



  [둔하지 않아서 괴로움을 당하다니 자네들은 이상하군.]

  땅바닥에 엎어져 울고 있던 내게 ----의 환상을 거둔 그가 발했다. 그가 발하고 있는 색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나는 눈물로 머릿속이 멍해져서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것이 고작이었다.

  [난 비정상이야.]

  쥐어짜듯 한 문장을 발했다.

  [그러면 자네들과 자네를 이어주던 안내자도 비정상이야.]

  나는 나와는 달리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었다. 나처럼 보거나 발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비정상인 것을 내게 숨겼다고 해도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비정상인 인간이니까.

  [아니, 내 안내자는….]

  차마 그 이상 발할 수 없었다.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두렵고 슬픈 것이다. 그것을 발하는 순간 얼마만큼의 휑뎅그렁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우주로 날아간 시신이라도 찾아 묻어줄 수 있다면. 끝없는 우주에 누워있는 것은 차라리 나여야 했다.

  [자네의 안내자는 둔하지 않아. 그녀는 자네가 발하는 걸 봤고 그 색을 아꼈어.]

  그가 자신의 확신만큼 강렬하고 밝은 색채를 풀었다.

  [진짜?]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발하는 거니까 믿으라구.]

  그는 더 이상 발할 것이 없다는 듯 색을 거둬들였다. 진심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그녀만큼이나 상냥해. 자네가 우리였다면 그녀 대신 자네와 결혼했을지도 모르겠어.]

  그가 커다란 색채의 폭죽을 터뜨렸다.

  [호오! 하아! 헤에!]

  눈이 부셨다.

  [참으로 기쁜 말이지만 우리는 이십삼만 오천 일곱 번 꽃을 피운 늙은 자라구.]

  [이십삼만 오천 여덟 번째 꽃은 나를 위해 피워 줘.]

  그는 붉은 꽃의 환상을 발해 대답했다.



  그 날 밤, 나는 꿈속에서 인간화된 그를 만났다. 늙은 자라고 한 것 답지 않게 그는-혹은 그녀는 싱싱하고 아름다웠고 서글서글한 눈매가 아내와 닮아 있었다.

  "역시 복잡해."

  그는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불평이라기 보다는 감탄에 가까운 어조였다. 인간화되어 발하는 것 대신 익숙하지 않은 성대를 사용했지만 이제껏 들어본 사람의 목소리중 가장 아름다운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하느적거리며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의 뒤로 점점이 빛나는 별들이 어지러웠다.

  "자네들은 꿈을 쉽게 잊는다지. 지금부터 하는 말, 기억할 수 있겠어?"

  노력할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움직이는 것이 너무 느려서 그가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에서 우리 중 하나가 새로운 걸 발견했어. 우리는 자네가 그걸 봤으면 싶고 말이야. 하지만 자네들의 몸이 너무 복잡해서 그대로는 무리야. 우리는 결정했어. ----에 가고 싶으면 털들을 없애서 실체를 단순화시킨 다음 오라고."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머리카락과 눈썹이 사라졌다. 민둥민둥한 머리와 얼굴은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다.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웃음이 몽글몽글한 연녹색 거품이 되어 우주의 끝까지 흩어졌다.

  "웃으라고. 히에, 호오, 헤에. 우리도 웃어줄 테니."

  그러나 그의 눈은 슬퍼졌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는 위험해. 우리는 자네를 잃을지도 몰라. 그럼 우리는 아주 슬퍼질 거야. 그때처럼. 약속해. ----에서는 우리의 뒤만 따라다니겠다고. 거긴 너무 넓어서 방향도 알 수 없어. ----에서 자네가 우리를 잃으면 우리는 자네를 잃을 거야.
  약속을 했는지 안 했는지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장소를 넘어서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 방식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가위와 면도칼을 찾았다. 이곳은 나밖에 없었고, 설사 꿈이 그냥 꿈이었다고 해도 그는 나도 실체를 변형할 수 있다는 데에 감탄할 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온 몸의 털을 깎았다. 온종일 몇 군데 상처를 입어가며 해낸 작업의 결과는 참담했다. 인체 구조상 필연적으로 손이 안 닿는 곳이 있게 마련이고 인간 기술의 정수인 강력 접착 테이프로 털을 잡아뜯는 것은 눈물이 찔끔 나게 아팠으니까. 벌겋게 부은 피부를 어루만지며 나는 키들거렸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나는 대충 옷을 걸치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휘황한 색채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내가 왔음을 알아차리고 인사했지만 다른 이들과 대화를 끊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가 보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색채를 아주 조심스럽고 가늘게 조정했다. 그는 오른 편에 있는 녹색과 파랑의 다른 이의 실체로 검정색을 발하는 한편 뒤쪽으로 한참 떨어진 자들에게 엷은 분홍색을 발했다. 왼편에서 뿜어져 나온 청록색에 휘감겨 투명한 공간을 열어 색을 섞었다. 내게는 반짝거리는 노랑으로 말을 걸었다.

  [그런 식으로 말을 건 것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기억했군.]

  [진짜였네.]

  나는 그동안 붉은 색으로 변한 그의 실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전보다 아주 약간 가늘어보였다.

  [자네를 기억해서 붉은 색으로 변했지. 예쁜 꽃이었는데 못 보여준 게 아쉽네.]

  나는 그가 보여주었던 붉은 꽃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는 붉은 잎사귀에 금빛 후광을 덧 그리고 한꺼번에 솟아올라 흩어지는 빛을 발했다.

  [예쁘군.]

  [예쁘지. …준비는 됐나?]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따라와. 그리고 무엇을 보더라도 함부로 행동하지마. 우리는 자네가 자네
로 있기를 바라네.]

  그가 발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맨 마지막 발함은 그들에게서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자네가 자네로 있기를 바라네. 그것은 무척이나 어색했고,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개체의 이름이 없는 그들에게도 매우 생소한 발함이었다. 내가 멋대로 그들에게 생소하리라고 지레짐작하는지도 모르지만.

  [자네와의 이야기는 열 번 꽃을 피우는 것보다 유익하고 새롭네. 자네는 재미있어. 스스로를 단순하다고 착각하는 자네들의 복잡함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네.]

  나에게서 배운 발함이라는 것인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영광이야.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지?]

  [자네를 위해 특별히 ----의 입구를 짜고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꽃을 볼 수 있을 걸세.]

  그는 입구를 일부러 성기게 짜고 있어서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발했다. 내가 얼마만큼 민감하게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부를 다 본다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도 ----를 전부 다 보려는 짓은 하지 않아. 글쎄, 숫자로 셀 수 없을 만큼 꽃을 피우고 난 뒤라면 시도해 볼만하겠지만.]

  그가 발했다.

  [그런데 뭘 발견한 거야?]

  [보면 알아.]

  그는 입구를 짜는데 동참해야한다며 대화를 끊었다.



  [우리가 자네의 안내자 역할을 할거야.]

  그가 개체의 의미가 담긴 빛을 발했다. 입구가 완성되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완성된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건 기하학적 무늬가 수놓아진 한 장의 천이었다. 천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런거림이 보였다. 흔들림이 보였다. 다른 공간이 보였다. 넋을 놓고 있는 내게 그가 발했다.

  [준비가 되면 발해.]

  [준비 됐어.]

  얼떨떨한 가운데 대답을 하자 그들은 내 몸에서 나를 끌어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유체이탈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천이 움직였다. 그들은 발함을 움직여 천으로 나와 자신들을 감쌌다. 천이 닿자 나는 날실과 씨실 틈으로 스며들었다. 시선이 가닥가닥 쪼개져 어질어질한 가운데 온갖 색채가 주변을 빠르게 지나갔다. 밝은 빨강이 눈을 감쌌다. 그였다.

  [따라와.]

  그가 나를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색이 가라앉았다.

  [----야.]

  [여긴….]

  [자네에게는 어떻게 보이나?]

  뭉쳐있던 천이 촤르륵 풀려나가며 생생한 공간이 펼쳐졌다. 실들이 뻗어나갔다. 그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그들이 발하고 있는 색 때문이 아니었다. 눈 닿는 곳 어디든 색이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보이냐고? 나는 억지로 시야를 넓혔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주였다. 별이 빛나지도 않았고 춥지도 않았지만 이건 우주였다.

  [우주…로군.]

  ----보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발해야 할까. 그때 여기저기서 인력이 느껴졌다. 구멍이었다. 따라 들어온 그들 중 하나가 휘리릭 돌다가 구멍에 잡혀 겹겹이 피어오르는 빛을 뿜으며 폭발했다. 장엄하다. 광활하다. 웅장하다. 빛에 압도당한 나는 그제야 몇 가지 어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꽃이었다. 그가 보여준 붉은 꽃의 환상보다 몇 천 배 아름다운 꽃. 그것을 기점으로 그들은 ----안을 날아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온갖 색의 꽃이 피어났다. 그와 나의 앞에도 그를 꼭 닮은 구멍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잡고 가볍게 뛰어 구멍을 피해 날았다. 이번엔 꽃을 피우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니까. 그는 가볍게 발하며 움직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잡혀서 어정쩡한 색깔의 꽃을 피우는 건 싫어. 자네도 조심해. 자네가 잡히면 이상한 꽃을 피우게 될 거야.]

  [나도 꽃을?]

  [그리고 몇 십만 번의 꽃을 피우기까지는 답답해서 계속 불평을 하게 될걸. 자네는 우리랑 달라서 자네가 아니게 되는걸 견디지 못할 테니.]

  그가 구멍을 피하는 솜씨는 매우 노련했다. 나는 그가 이십만 육천 여번의 꽃을 피웠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처음에는 그도 서툴렀을 것이다. 그의 움직임이 보기 좋아서 한번 꽃을 피워볼까, 발하자 그가 진짜로 비정상이 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우리는 비정상이 되어도 별 상관없지만. 그가 발했다.

  [시간이 없어. 입구가 너무 성겨서 오래 견디지 못할 거야.]

  그는 노래라고 가늠되는 선을 그으며 질주했다. ----의 끝까지, 성긴 실을 타고 단숨에 날았다. 전에 헤엄이라고 표현한 건 실수였다. 그는 그야말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에게 이끌려 그가 나를 놓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파박, 불꽃과 현란함이 뒤로 뒤로 멀어져 별빛으로만 남았다. 주변은 점점 공허해지고 비어갔다. 헤엄치는 구멍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안해졌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나는 그를 꼭 쥐었다.

  [약속해. 지금처럼 꽉 잡고 놓지 마.]

  그는 실의 가장 끝자락까지 날아간 것 같다. ----안은 이제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검은 색이 아니라 그냥 텅 빈 어둠. ----의 밀도가 낮아졌다.

  [자네들의 ----야.]

  그리고 그것이 나타났다. 움직이지 않는 무채색의 구멍.

  […우리가 잃은 자라고 부르는 것이야.]

  맙소사. 구멍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나의 안내자. 나의 아내.



  나는 그를 놓았다. 다시 잡으라고 그가 발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안의 공간을 더욱 복잡하게 쪼개놓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 뾰족한 속눈썹, 가느다란 손가락 뿐. 아름다웠다. 방금 전까지 내 눈앞을 수놓았던 어떤 꽃보다 더.

  [이미 잃은 자에게 가까이 가지마, 그냥 보기만 해.]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되는데?]

  [안 돼.]

  그가 대답을 피했다.

  [보여줘.]

  그가 물러났다. 그에게서 슬픔이 퍼져 나왔다. 미안. 미안. 미안. 하지만 자넨, 하지만, 하지만.

  [자네는 다 기억할 수 없어. 자네는 다 알 수 없어. 자네들이 그렇듯이. 위험하고 어지러울거야. 참아낼수….]

  [자네답지 않아.]

  나는 발했다. 그녀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을, 어떤 꽃보다, 더욱, 아름답게, 어떻게, 그녀가, 보이는지, 알게, 알고, 그녀를, 다시 한번.
  그는 슬퍼했다. 내 텅 빈 슬픔을 위해 마침내 그는 기억을 열어주었다. 잃은 자에게 손댄 그들 중 하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웃었다.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그녀의 껍데기를 향해. 그녀의 실체를 향해 헤엄쳤다. 그가 흔들리며 강렬한 색채를 뿜었다.

  [약속했잖아!]

  아니, 꿈속에서조차 나는 그에게 약속하지 않았다. 그가 발했다. 어떻게 되도 몰라. '나는' 자네가 자네로 있기를 바란다구. 내가 발했다. 괜찮아.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아. 그녀에게서는 인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너무 멀었다.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조금만 더. 한참을 몸부림친 뒤에야 나는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아무 것도 피어나지 않아.]

  좋아.

  [----를 떠도는 건 자네가 될 거야.]

  좋아.

  그는 침묵했다. 나는 나의 민둥민둥한 몸 대신 그의 실체 앞에 누울 그녀의 차가운 몸을 생각하며 웃었다. 손가락이 닿았다. 입술이 닿았다. 그녀가 사라졌다. 꽃은 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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