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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15종 근접조우

2007.09.01 16:0209.01





blog.aladdin.co.kr/twinpixrevinchu@empal.com
 

제15종 근접조우




  - 이번엔 외계인이다!




  저 우주엔 외계인이 있을까요? 아님 이 드넓은 우주 속에 지적 생명체는 우리 밖에 없는 걸까요? UFO는 존재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들 사이엔 이미 외계인들이 활보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호나우딩요 같은 외계인으로 의심받는 축구선수 뿐만 아니라, 옆집의 이웃으로, 애인으로, 꽃으로, 전화 안내원으로 우리 주위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르죠.
  올해는 다양한 장르 서적들이 출판되었습니다. 다양한 출판사에서 새롭게 장르문학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제 매번 번역되어온 고전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소설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하는 상황이지요. 유명 작가의 작품 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도 번역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장르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작가의 소설은 어떨까요? 무협 쪽에서 최초의 단편집인 『진산 무협 단편집』이 출간되었고 황금가지에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을 2권까지 발간했습니다.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에서는 세 명의 한국 작가의 작품을 실은 『누군가를 만났어』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번역되고 있는 외국 소설들과 달리 국내 장르 소설들 특히 단편 소설의 출간은 미비합니다. 올해 첫 발을 딛은 케이스가 많지요.(아, 그리고 국내 최초 장르 문학 잡지 『판타스틱』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현재 많은 분들의 우려를 깨고 꾸준히 품절되고 있는 잡지. 각종 인터넷 서점 잡지 판매 순위에 상위권을 랭크하고 있는 『판타스틱』은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 뿐 아니라 국내 작가의 작품도 꾸준히 싣고 있습니다. 듀나, 복거일, 이영도, 전민희, 배명훈 등의 작가들 말이지요. 앞으로도 이 기세가 계속된다면 국내 장르 문학의 발전을 꾀하고 많은 신인 작가들을 발굴해낼 모체가 될 거라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환상문학웹진 거울은 두 번째 앤솔러지 단편집을 출간했습니다. 정식으로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것도 아니고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장르에 애정을 가지고 또 글 쓰고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두 번째 앤솔러지까지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들이 있다면, 또 이들이 앞으로도 글을 계속 써나간다면 이 앤솔러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국내 장르문학은 그 날개를 활짝 필 날이 올 것입니다. 멋진 작가들의 등장과 좋은 작품들의 등장은 이 앤솔러지가 또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소재별 앤솔러지인 『혈중환상농도 13%』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앤솔러지 단편집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두 번째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뱀파이어라는 피와 죽음으로 상징되는 매혹적인 존재들을 모아놓은 첫 번째 앤솔러지였다면, 이번 앤솔러지는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외계의 존재를 모아놓았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전혀 살아가면서 생각해 본적이 없는 말 그대로 외계인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책을 펼치기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펄지로 예쁘게 만들어진 표지는 서점에 진열해 놔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만져볼 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 외계인. 떠오르는 생각은 적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국내 작가들의 기발한 상상력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적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만이 강렬히 박혀 있는 ‘외계인’이라는 소재를 과연 어떤 모습으로 풀어냈을까.


  12명의 작가들이 조우한 15편의 외계인들.


  이제 여러분도 그 외계인들을 만나보시겠습니까?




  134340  karidasa




  이 『제15종 근접조우』앤솔러지의 첫 타자는 karidasa님이었습니다. 첫 번째 앤솔러지 『혈중환상농도 13%』에서 춘향전을 새롭게 재해석한 멋진 작품으로 만나 뵈었지요.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춘향전이라는 고전이 섬뜩한 작품으로 변모한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이미지들이 강렬해서 아직도 작품이 쉽게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34340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작년에 기억하십니까? 인터넷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었습니다. 1930년 발견 이후 태양계의 9번째 행성이었으나, 2006년 국제천문연맹이 행성 지위를 박탁해버렸죠. 네, 134340은 바로 명왕성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국제소행성센터로부터 왜소행성으로 분류되어 정식 명칭이 ‘134340 플루토’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단편소설은 각 행성에 사는 외계인들의 시선으로 인간의 오만한 면모를 멋지게 풍자한 소설입니다. 각 행성의 외계인들의 설정들도 재미있고 마치 한 편의 우화처럼 읽힙니다.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는 사실이긴 하지만 명왕성에도 사람이 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굳이 알아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그러려니 하며 살았다.(p11)




  처음부터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명왕성에 사람이 산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입니다. 이 당황과 낯섦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작가의 힘이 글 전체를 살아있게 합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무렵 지구인들이 또 다시 사고를 쳤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한 대책 없는 인간이 망원경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중략) 지구인들은 수시로 남의 행성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어처구니없는 엉터리 말들을 이론이랍시고 지어내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지구인들의 집착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저렇게 호기심 많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은 처음 봤다고 다들 혀를 내둘렀다.(p17)




  블랙 아몬드  roland




  roland님의 작품은 이 앤솔러지를 통해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일인칭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또 능숙하게 써서 초반부터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되었습니다. 또 흡인력이 있어서 내용을 궁금해 하며 끝까지 읽게 만들었습니다.


  이 단편은 마약을 소재로 음울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얼핏 이야기의 전체 진행이 예상되는 소설이지만, 뛰어난 흡인력이 그 점을 커버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정적인 장면을 터트려주는 소설입니다. 제목에서 받는 이미지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죠.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에 대한 이야기로 꽤 분량이 긴 편이면서도 금세 읽게 됩니다.




  나는 화려한 문신을 새겨 주겠다고 구슬려 자매를 꼬시는 데 성공할 참이었다. 그녀들은 얼굴은 꽤 예쁘지만 골은 텅텅 빈,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스타일로 내게 즐거운 밤을 선사할 예정이었다.


  적어도 베키가 나를 발로 차서 침대 밖으로 굴러 떨어트리기 전 까진.


 
“이 새끼는 깨워도,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해!”(p27)




  박시은 특급  곽재식




  거울 시간의 잔상 필진인 곽재식님은 마치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입담으로 무장한 단편을 발표해왔습니다.(그 중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 맥주의 마음」은 MBC 베스트 극장에서 ≪토끼의 아리아≫라는 제목으로 드라마 된 바 있습니다.)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관심을 갖고 찾아 읽게 되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비교적 초기에 제목에 이끌려 무심코 클릭했는데, 그 이후로 창을 닫지 않고 끝까지 한 번에 읽어 내린 작품입니다. 그만큼 굉장한 몰입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재미있고요.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롭고 빨리 결말을 읽고 싶은 소설이죠.(「박시은 특급」은 어떤 독자는 곽재식님의 최고의 작품으로도 꼽기도 하죠.)


 


  나도 분명히 오늘 행사에서 일한 사람인데, 왜 박승유는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녀와만 떠드는 지 그것도 좀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왠지 지금 이 대화의 관계를 비집고 들어가려거든 뭔가 한 마디 끼어 들어야 할 거 같아서 대뜸 박승유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그런 적 있어요? 그거 옛날에…… 배우 박시은이 나오는 SBS TV단막극에서 박시은이 그러던 건데. 거기서 보면, 박시은이 술 취해 가지고, 택시 타고 버스 탄 줄 착각해서 버스 카드 막 찍으려 그러거든요. 그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말리면 박시은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놓아라. 버스는 선불이다. 아저씨~ 버스 카드가 안 찍힙니다~’ 그러거든요.”


  나는 웃긴 말이라고 생각하고 히죽 웃었다. 그러나 박승유의 모습은 엄청나게 냉랭했다.


  “그런 게 있었어요?”


  “예. 몇 년 전에, SBS TV 단막극 중에 <남과 여>라는 거 있었잖아요. 그 중에 에피소드 하나였는데.”


  “그런 거 없었던 거 같은데요.”


  “지금은 없어진 거 같은데……. 왜 MBC에는 베스트 극장 있고, KBS에는 드라마 시티 있고, SBS에는 <남과 여> 있었는데요.”


  “아니 아니. <남과 여>라는 단막극 시리즈가 있었다는 거는 기억나는데. 박시은 나오는 그런 편은 없었어요.”


  “없었다뇨. 그게 박시은이 택시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 바꿀 무렵에 찍은 거라서 나름대로 굉장히 분위기 잘 맞는 재미있는 편이었는데.”


  “박시은 열혈 팬이세요?”


  박승유는 그렇게 말하면서 비웃는 듯한 웃음을 살짝 흘렸다.(p83)




  박승유는 계속 주인공을 비웃고 무시하고 그런 드라마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인공의 꿈이었다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인공을 바보 만들죠. 독자는 감정이입이 되면서 같이 답답해  하고 억울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SF 설정 배경과 멋지게 어울리면서 이야기는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던져줍니다. 이 점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입니다. 통쾌하고 명료한 결말 때문에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려주는 글입니다.


  P.S 인터넷으로 읽을 때는 순식간에 읽어 내려서 이 단편이 이렇게 긴 분량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내용은 분명 아는 그대로인데 종이로 인쇄된 것을 보니 페이지 분량이 꽤 상당하더군요. 그만큼 몰입도가 상당했다는 것이겠지요.




  옆집의 영희 씨  정소연




  “이런 도심 오피스텔을 이렇게 싸게 구할 기회는 다시 없다우. 지하철에 버스에 교통 편하지 전망 좋지, 아래 상가도 얼마나 편해. 옆집에 그런 게 있어서 그렇지……. 그래도 그 덕에 치안은 좋으니까, 아가씨 혼자 살기에 이만한 데가 없어.”


  수정은 집주인의 말을 귓등으로 들어 넘기며 빈 오피스텔 안을 살폈다. 십사 층, 남서 향으로 난 큰 창에서 기분 좋은 오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집주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p123)




  당신의 이웃 중에 외계인 있다면? 우리 이웃 중에 외계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세계는 가능합니다. 외계인과 교류를 하는 배경 속에서 주인공은 옆집에 외계인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싼 전세를 구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기피하는 낯선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주인공은 우연찮게 조우하게 되고 서로 교감을 나누게 됩니다. 이 단편은 왠지 따스하고 아련한 느낌을 줍니다. 다른 존재와 소통을 한다는 것은 그런 느낌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주인공과 독자만이 아는 둘만의 유대가 가슴에 빛의 잔상이 되어 남는 소설입니다.




  영희 씨와 수정의 사이로 아득한 우주 저편의 불꽃과 남극에서 너울지는 오로라와 겨울에 피어오른 자줏빛 연꽃 같은 열기가 조각난 별빛 같은 빛의 가루를 남기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p134)




  Running  디안




  소리는 진공 속에서 침묵한다. 그래도 나는 숨을 죽였다. 자원 채취선 하나가 내가 숨은 소행성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p139)




  『혈중환상농도 13%』에 서사가 아닌 이미지 중심의 소설이었던 「Na-chzehrer」을 수록한 작가입니다. 이번 소설 역시 쉽게 읽히는 소설도 아니고 이야기가 중심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겠지요. 그것이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일 겁니다. 이번 소설은 다행히도 저번 『혈중환상농도 13%』에 실렸던 「Na-chzehrer」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친절해진 것보다는 내용이 지나치게 짧은 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페이지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난해하다는 느낌 보다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제목만큼이나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글입니다.




  나의 우주선은 작고 더 가벼워져 갔다. 수많은 항성계들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지만 적재량이 큰 화물선을 모는 택배원들의 수입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더 가벼워질 수가 없었고 그 즈음 슬슬 남들이 꺼리는 <주의 사항이 3가지 이상 붙은 의뢰>들을 받기 시작했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p140)




  우주화宇宙花  가는달




  「나하의 거울」로 제1회 이매진 단편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가는달님의 작품입니다. 당시 「나하의 거울」을 읽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요. 침묵을 찾는 채해의 여정을 얼마나 기묘하고 섬세하게 그렸던지 그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직도 생각이 나곤 합니다. 이 소설은 우주화라는 존재와 주인공의 교류를 그리고 있습니다. 우주화는 묘한 존재입니다.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 식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간보다 더 발달한 지성체로 보입니다. 그들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발하고 발화하며 인간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한 번에 다채롭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주보다 더 깊은 심연인 ‘----’ 갈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안내자를 잃고 나서 그곳에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우주화’라는 독특한 존재를 매력적으로 묘사하고, 한 편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사실 처음에 단편을 읽을 때는 온갖 낯선 설정들 때문에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읽는 순간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충격을 받으며 재빨리 다시 앞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두 번 읽어야 하는 소설이 있을까요? 아니요. 두 번 읽게 되는 소설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한 번 읽고 나면 반드시 다시 한 번 읽어보고프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것마저 작가가 의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읽게 되었을 때, 글은 전체적으로 새롭게 보이고 더 많은 깊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게 새롭게 읽히고 새로운 기분으로 읽게 됩니다. 우주화는 다시 한 번 발화하고 또 수천 번 꽃을 피우고 애상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내 기억을 열었다. 그것이 얼마나 왜곡되고 마모되었는지는 보장할 수 없어서 부끄러웠지만 그는 탄성을 흘리며 정신의 더듬이를 뻗었다. 그리고 보답이라는 듯 ----에 대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정보를 보여주었다.


  말이 단순한 형태이지 그것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라는 곳 자체의 거대함도 거대함이지만 그 안에 가득 찬 수많은 것들.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물질에 가까웠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투명하고 어두운 ----안을 돌아다니다가 빈 공간을 발견해 몸을 담았을 때 이루어지는 찰나의 폭발이었다.(p152)




  이번엔 외계인이냐?  가연




  가연님은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로 제1회 이매진 단편 공모전 판타지 부문을 수상하고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에서 올해 초 출판된 작가의 발견 선집 2권 『누군가를 만났어』에 다섯 편의 단편을 실은 작가입니다. 그리고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열정적인 운영자시죠.


  이 단편은 중편입니다. 앞에 있었던 「박시은 특급」 보다도 긴 분량을 자랑합니다. 그럼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외계인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취향을 짐작이나 할 수 있어야 말이지! 그 뿐이야? 경호원 줄줄 끌고 다녀야지, 너무 높은 소리로 웃지 마라, 몸을 만지려 들지 마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 마라, 통역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 등등 수십 개는 될 법한 규칙도 암기해야 하지. 외계인 가이드 한다고 월급 더 줄 것도 아니면서.(p167)




  이야기의 시작은 여행사 가이드로 일하는 주인공이 외계인의 서울 가이드를 맡게 되면서 진행됩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중편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외계인을 집중 조명한 소설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습니다. 유쾌하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제목 ‘이번엔 외계인이냐?’를 무시한 결과였죠. 주인공의 연애 경력은 화려합니다. 인어, 뱀파이어 등과 사귀었던 것이지요. 주인공이 외계인 가이드를 맡게 된 계기도 예전에 인어를 가이드해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주인공의 인어의 전 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인어와 만나게 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인어에게 한 눈에 반하고 막무가내형 인어와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재미있으면서도 단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교류로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어떤 유형의 사람들로 대입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다양한 연애 이론 중 하나로 말이죠. 그리고 뱀파이어와 사귀었을 때의 이야기나 현재 외계인과의 이야기들이 진행됩니다. 분량이 긴 만큼 집중된 형태가 아니라 약간은 산만하게도 보였지만 그래도 어느 부분도 지루하지 않고 다 톡톡 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인어든, 뱀파이어든, 외계인이든 아무튼 간에 남의 연애 이야기는 참 재미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냐, 쟤 전에 사귀었던 사람 남자였어.”


  유민이가 냉큼 말했다.


  “엑? 지인이가 남자도 사귀었었어?”


  “응, 뱀파이어였지만.”


  그게 뭐 그리 재밌는 일이라고 웃음보가 터졌다.


  “야, 뱀파이어에, 인어에, 이번엔 외계인이랑 사귀게 되는 거 아냐?”


  “아니거든!”


  슬슬 짜증이 났다.


  “뱀파이어랑 인어 빼고는 다 보통 사람이었거든?”


  “야, 그럼 너 진짜 뱀파이어랑도 사귀었었어?"


  “몰랐어?”


  유민이가 정민이에게 어깨를 붙이고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난 잔을 비우고 한 잔 더 시켰다.(p191)




  잘 가시오, 외계인이여  쿠키




  이 앤솔러지의 응모글 중에 하나로 초기에 올라왔던 작품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읽었는데 재미있게 읽었죠.(모니터로 글을 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읽는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글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발명가입니다. 이 사람은 유능한 사람인 것 같지만 실상 발명품들은 실용성이 전무한 것들이 많습니다.


  나는 발명가이다. 허나 다른 사람들은 나를 발명가라고 부르기보다는 괴짜라고 자주 부른다.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의 발명품들은 하나같이 신기하기만 할 뿐, 전혀 실용성이 없다고 한다.(중략) 물 없이도 거품이 나는 비누를 개발했을 때는 이것이 돈이 되리라 생각했으나, 정작 비누 회사에 가져갔을 때는 재료비로 제조 비용이 3배나 든다며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3배 비싼 비누를 쓰느니 그냥 3배 저렴한 비누에 물을 묻혀서 머리를 감겠다.(p227~228)




  이런 주인공이 마침내 대단한 발명품을 하나 만들어 냅니다. 물론 역시 문제점이 존재하긴 하죠. 물체의 시공간을 넘어 전송하는 기계. 그러나 우주 어디서든 뭐든 전송받을 수 있으나 무엇을 받을 수 있을 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 요상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썩힐 수도 없어서 계속 연구를 하던 주인공은 특정한 옵션을 주면 비교적 생명체 비슷한 것이 전송될 확률이 비교적 올라감을 발견합니다. 이를 이용해 마침내 외계 생명체를 불러내는 데 성공하는 것입니다. 담담해보이면서도 곳곳에 유머가 번득이는 글입니다. 재치 있는 문장들이 보이고 위트가 살아있습니다. 나타난 외계인들도 조그맣기 때문에 아무리 폼을 잡아도 귀여워 보이기만 하고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독특한 웃음을 줍니다.




  가릉이가 가릉가릉  무한슬픔




  짧은 글이지만 주인공의 능숙한 달변이 인상적인 글입니다. 제3회 황금드래곤문학상에서 「K-1004」로 단편상을 수상한 작가 분으로 「최민주가 왜 그랬을까?」「April Fool's Day」등 인터넷 리플 놀이를 이용한 독특한 형식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능청스런 입담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재치 있는 소설을 발표해 왔습니다. 이 소설 역시 주인공의 엄청난 입담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외계인 가설을 소개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동그란 눈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어. 가릉이가 가릉가릉이라고 말이야.”


  “그랬어? 이상하네. 왜 갑자기 그런 말이 나왔을까?”


  “훗.”


  나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홍차의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감돌자 기분이 좋아지면서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너 들켰어.”


  “응?‘


  “들킨 거라고. 아까 오는 길에 아는 동창을 만났는데, 왜 너도 알잖아, 방송국 기자를 하는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이 요즘 중요한 내용을 취재 중이래. 다른 이한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내용이 뭐냐면 녀석이 외계인과 정부의 유착 관계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는 거야. 외계인이라니 그거 웃기지 않아. 그런데 녀석은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어. 외계인은 이미 지구에 정착한지 오래라는 거야.(하략)”(p240)




  고양이 별  은림




  은림님은 제1회 황금드래곤문학상에서 「할머니 나무」로 단편상을 제2회 황금드래곤문학상에서 「할티노」로 중편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국내에 출간된 몇 안 되는 판타지 단편소설집인 『윈드 드리머』와 『환상서고』에 각각 「샨 데 크리엔」, 「Sistory」를 실었죠. 그만큼 장르문학에서 특히 단편 쪽에서 멋진 글들을 많이 발표한 작가분입니다. 멋진 글들도 많았고요. 『혈중환상농도 13%』에서는 연예인처럼 추앙받는 공무원 흡혈귀를 등장시킨 「루벨 나이트」라는 독특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그만큼 기대치가 높은 작가분이었는데, 여기에 실린 「고양이 별」은 기대치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아침 놀이터엔 그 애와 나 둘 뿐이었다. 바람에선 아직 새벽 풋내가 남아 청명하게 너울거렸고 햇살은 잘 닦여진 유리창처럼 밝고 날카로웠다. 벌써부터 선명한 땡볕을 피해 앉은 나무 그늘 위쪽에서 튀어나온 옹이 같은 매미가 줄기차게 울었다.


  우리 집에는……


  빨간 플라스틱 삽으로 낡은 양동이에 모래와 새 발처럼 갈라진 나뭇가지, 최근에 떨어진 제법 온전한 나뭇잎, 누군가 떨어트린 수퍼 그랑죠 카드 딱지로 얇게 바닥을 가렸을 때 마치 이름 없는 비 한 방울처럼 그 애가 말했다.


  우리 집에 방이 있는데, 그건 고양이 방이래.(p247)




  글은 어린이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과 주인공이 좋아했던 여자애. 가난해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아이. 자기 방도 없었지만 고양이 방이 집에 있다고 했던 아이. 가난과 자기 방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아이의 어리고 섬세한 심정이 잘 그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읽으면서 묘하게 집중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모든 대화가 따옴표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계속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적막 속에서 아무도 없는 해질녘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두 아이. 거기에 고양이 방에 대한 미스터리는 부각됩니다. 과연 고양이 방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유년기 속 기억은 많이 퇴색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죠. 과거 회상을 끝낸 현실의 고등학생이 된 소년은 누락된 기억을 찾기 위해서 옛 여자애의 집을 찾아갑니다. 거기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기억 속의 창틀 밑 벽지를 주욱 훑었다. 설마, 아직도 편지가 있지는 않겠지. 꿈인지 생신지도 가물가물한걸. 그런데, 정말로 거기 편지가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벽지를 북 찢어서 안에 든 걸 꺼냈다. 네모나게 접힌 부분을 두 번 펼치자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처럼 노랗게 바랜 갱지에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 옆엔 적당하게 삐뚤어진 그 애의 것이 분명한 글씨가 있었다.(p273~274)




  어린아이들의 시점으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그림자 같은 이미지로 남는 소설입니다. 왠지 기이하고 어둡고 간혹 숨 막히는 느낌도 드는 소설. 그럼에도 가슴 저릿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꿈, 그 너머  赤魚




  2000년 시공사에서 『그의 이름은 나호라 한다』를 출간하고 2004년 제2회 황금드래곤문학상에서 『열 번째 세계』로 가작을 수상한 김주영님의 작품입니다.




  내 이름은 에일라, 내년이면 이제 열아홉이 되는 열여덟 살의 소녀, 드리머Dreamer와 지구인 사이의 혼혈 삼대, 현역 함선 승무원이다. 이런 내 소개 중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약관 열여덟 살의 현역 함선 승무원이라는 사실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나는 열여덟 살의 소녀인 주제에 함선 기사 1급 자격증과 조종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남들이 이십 년 걸린다는 함선 승무원 코스를 열네 살 때 조기 졸업했다는 거다.(p283)



  주인공은 우주선 함장을 꿈꾸는 함선 승무원입니다. 필자가 우주 이야기 특히 우주선이 나오는 함선 이야기를 좋아하는 터라 즐겁게 읽었습니다. 소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 소설에는 ‘드리머’라는 존재가 나옵니다. 미래를 꿈의 형태로 볼 수 있는 특별한 존재들이죠. 그들은 사라졌지만 ‘드리머’와 ‘인간’의 혼혈인 주인공은 꿈의 형태로 타인의 미래와 자신의 미래까지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게 진짜 꿈과 혼동되기도 하고, 온전한 형태로 나오지 않기도 하지만요.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불행하기만 할까요? 그런 점들을 뛰어넘어 사람은 꿈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꿈 그 너머까지 도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게 아닐까요.




  그것은 수수게끼 같은 미소로서 내 방 구석에 놓여 있는 증조 할머니, 순수 드리머의 얼굴에 언제나 드리워진 미소이다. 어딘가 슬퍼 보이면서 어딘가 희망에 찬 그 미소는 오직 드리머들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지구인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하는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신비로움에 젖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증조 할머니의 미소에 들어 있는 슬픔은 소멸될 자신의 종족의 미래라는 <슬픈 미래>에 대한 것이고, 기쁨은 <기쁜 미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증조 할머니가 보았던 <기쁜 미래>에 내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p290)




  K씨의 개인사정으로 이번 호의 연재는 쉽니다  가는달




  앞에 실린 우주화를 쓴 가는달님의 작품입니다. 우주화의 긴 호흡의 글과 달리 짧은 글입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목의 센스만큼이나 재미있습니다.




  M매거진에 기고 중인 K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기인이었다. 편집자인 A가 연쇄 살인에 대한 글을 받기 위해 K를 찾아갔을 때 그는 츄리닝 바지에 헝클어진 머리로 쭈그리고 앉아 더듬이가 하나밖에 없는 바퀴벌레 시체 13개를 들여다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스토킹에 대한 글을 집필 중일 때는 한 달 간 A의 3미터 뒤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p303)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異衆燐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 ET처럼 우정을 나누게 될까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되겠다.”


  “뭐가?”


  “썰어서 조금씩 옮기면 되겠다고…….”


  동연은 이마에 손을 짚고 말했다.


  “저걸 썰어? 토막 낸다는 거야?”


  “뭐 어때. 팔 것도 아닌데.”


  “피라도 묻으면?‘


  “뭐?”


  “피가 산성이면 어떻게 해?”


  “……현실로 돌아오라니까.”


  삽을 집어든 제희는 큰 걸음으로 괴생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번하고는 삽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p317)




  어쩌면 잔인하고 섬뜩한 이야기. 그렇지만 오히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진짜 한국에서 괜히 옥타방에 괴생물체, 혹은 외계인. 이 우주의 낯선 이웃이 처박히는 일이 벌어졌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 글이었습니다. 왠지 거만해 보이는 외계인을 삽으로 인정사정없이 패는 주인공의 모습은 통쾌한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섬뜩하기까지 한 이야기.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글. 아무튼 간에 상황설정이나 생동감 있는 인물들의 움직임 등이 마음에 들었던 글이었습니다.




  지구의 중력은 안녕하시니?  赤魚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어릴 적 보았던 영화 를 떠올렸다. 이런 날이면 식빵 같이 생긴 얼굴의 ET를 태운 자전거가 보름달을 스치면서 날아가는 광경을 본다고 해도 별로 새삼스럽지 않을 것만 같다. 생각해 보면, 일정한 반경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순간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전거를 탄 외계인이 보름달을 스쳐 지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여겨 버리는 경험적인 믿음 이상이 아니다. 그런 일은 없어, 라고 딱 잘라 말하는 건 몹시 재미가 없다.(p331~332)




  지구에서 떠나고 싶은 사람들. 혹은 지구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를 외계인이라 생각합니다. 지구와 밤낮이 반대인 행성에서 살다온 외계인과 살이 쪄야 정상인 외계인이 있고 자전거로 달로 날아가는 외계인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지구인인지 외계인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진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이들이 곧 평범한 사람들이면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스스로를 외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 이 소설은 그 즉시 현실성을 얻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 이런 외계인 모임이 있고 각자 서로의 불만을 토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왠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가슴에 와 닿는 고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감이 가고 즐겁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은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이 사람은 워낙 상담을 잘하기 때문에 이 모임 역시 쉽게 적응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너무 지구인 같다고요.”


  “응?”


  지윤 씨가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니까.”


  에라, 모르겠다. 모두들 해결사 강지윤을 보고 싶어 했으니까.


  “외계인들 모임에 한 번 안 오실래요?”


  “응?”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웬 미친 소리냐고 묻든가, 외계인이 어디 있냐고 웃어 버리든가 했다면 농담이라고 얼버무리고 말 심산이었는데, 지윤 씨가 터무니없이 진지해 보여서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거 특이한 사람들의 모임?”


  아아, 모르겠다.


  “원래는 외계인들만 모이는데, 지윤 씨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이 모두 보고 싶다니까 특별히 초대할게요. 어, 그러니까 좀 이상하게 생각되시면 거절하셔도 되고요. 좀, 그러니까 평범한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을 대하는 일을 힘들어 하니까, 그러니까, 음음.”(p337)




  외계인이든, 지구인이든 무슨 상관이랴. 다른 행성 사람들이야 그들에게 우리가 외계인일 텐데. 사실 모두 그냥 이 우주의 이웃사촌들 아니겠는가. 우리는 ‘평범’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사실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라곤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결국 타인을 이해할 수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외계인으로 남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이 지구에서 각자 적응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정겹고 반가우며 왠지 안심이 됐다. 읽는 이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멋진 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이었다.


 


  석가창비록  배명훈




  ≪제2회 과학기술 창작문예≫에서 「Smart D」로 단편부문을 수상한 배명훈님의 작품입니다. 배명훈님은 『누군가를 만났어』에 표제작 「누군가를 만났어」 외 4편의 단편을 싣기도 했고,  국내 최초 장르문학잡지 『판타스틱』 7월호에 「우주로 날아간 마도로스」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났어』를 재미있게 읽었고 그 외에도 배명훈님의 단편은 항상 재미있게 읽은 터라 이 단편도 책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까요?




  선왕은 성군이셨다. 나를 다스림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으셨다. 선왕께서 맨 처음 즉위하셨을 때, 젊은 왕께서는 한결같이 굳건하셨어도, 세상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나라는 왕과 세상의 가운데쯤에서 허물어지고 바로 세워지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왕께서 나라를 굳건하게 다스리시자 세상은 그분의 다스림에 길들여져 갔다. 나라의 힘이 닿지 앉는 변방에서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나라는 그 혼란에 흔들리지 않았다. 선왕께서는 옥좌에 똑바로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하나도 남기지 말라.”


  말씀이 떨어지고, 관리들이 영令을 떠받드느라 머리를 조아릴 때, 석기창石器倉에서는 돌판을 쪼기 시작했다. 돌판에는 왕의 영이 그 말씀보다 더 굳건하게 새겨졌다. 왕의 영은 결코 닳아 없어지지 않을 단단한 돌에 새겨져 소리보다 멀리 변방으로 전해졌다.(p361~362)




  이 단편은 독특하게도 이 시대를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미래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과거를 그리고 있습니다. 외계인을 이야기하면서 과거 시대와 조합하다니. 그런 설정부터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과거를 다룬다면 상당한 조사가 따랐을 텐데 이 소설은 이상하다고 느낄 부분이 없을 만큼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잘 쓰여 있습니다. 게다가 글이 딱딱한 형식으로 쓰여 있고 낯선 어휘들이 많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로운 눈초리로 글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자합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도성 석굴에서 본 기록 중에 괴물체가 민가에 해를 가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시절이 이미 2천 년도 더 된 일이었으나, 그 난리를 당하여 정벌을 명 받은 옛 나라의 장수는 “저들이 마음을 먹으면 나라 안에 있는 무력으로써는 도무지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하고 새겨 두었다.(p377)




  고양이를 부탁해




  외계인이라는 존재는 미확인 물체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각자가 확인한 외계인은 달랐지만, 이렇게 한 자리로 모았기 때문에 우주 이웃들과의 반상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침대에 편하게 누워서 우리 일상의 기묘한 순간들부터 드넓은 우주 속 외계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이 한 권의 책이 가져다주었다. 외계인들을 만나고 싶다면 이 한 권의 책을 권하고 싶다. 알지 못했던, 우리 주위에 숨어 있던 외계인 같은 12명의 작가들의 15편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쏟아져 나오는 외국 장르 소설들 틈에서 이런 국내 작가들의 작품집이 꾸준히 발간된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정식 출간은 아니지만 정식 출간된 도서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작가진과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아직은 아쉬운 부분들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우주 너머까지 시선이 닿는 기대되는 이야기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작가들이 펼치는 멋진 외계인 이야기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기에 더 가치 있는 또 재미있는 앤솔러지가 아닐까 싶다. 앤솔러지의 재미는 이렇게 다양한 작가들이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놀았는지 구경할 수 있는 재미가 아닐까? 문득, 주위를 다시 둘러보게 된다. 어디선가 뭔가 묘한 걸 본 것 같은데? 잠깐, 저거 그, 그 외계인이 아닐까? 갑자기 어디선가 검은 선글라스를 낀 검은 정장의 남자 두 명이 나타난다. 그리고 은색 봉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자, 여기 좀 보세요.


  ……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자.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양이별로 떠나간 그 아이가 돌아온 것일까? 가릉이가 가릉가릉 울고 있는 것일까? K씨가 고양이 기사를 쓰기로 한 것일까? 다음엔 고양이다. 이 작품집을 통해 발견한 작가들의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또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를 마음껏 펼쳐 보이기를. 벌써부터 주위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너희들은 무슨 이야기를 품고 있니? 얘기해 볼래? 야옹.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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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9.04 22:22 댓글 수정 삭제
    리뷰... 이렇게 쓰는 건 진짜 재주라니까요. 고맙습니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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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7.09.05 13:38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만은 플라버 텍스트가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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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9.05 21:08 댓글 수정 삭제
    플라버 텍스트가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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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7.09.06 12:27 댓글 수정 삭제
    배명훈/ 앗, 감사합니다!(__)/~~~
    세뇰/ 아직 안 산 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욱 읽게 만들 수 있을까, 하다가 아무래도 작품을 좀더 보여주어야겠다는 욕심이 과도했던 것 같아요. 'ㅁ';; 더 줄였어야 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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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07.09.06 19:46 댓글 수정 삭제
    명훈님/맛뵈기글... 이랄까, 본문의 핵심적인 부분 한 두줄 정도를 발췌해서는 제시해 보여주는 걸 말하는 거에요, 굳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글 전체의 분위기나 주제를 짤막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주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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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7.09.06 20:11 댓글 수정 삭제
    아. flavor인가보네요. 근데 flavor text라는 말도 처음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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