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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세 번째의 단편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솔직한 마음으로 여는 걱정이 앞섰다. 매년 판타지 계(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추상적으로 판타지 전체의 시장과 작가군 일체를 뭉뚱그린다는 정도로 소박하게 함의하고 출발하자)의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고, 도서 시장 전반을 흐르고 있는 쇠퇴의 기미보다 더 급속히 판타지는 그 입지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울에 매달 실리는 글의 수 역시 예전보다 상당히 줄어 있었기 때문에 여의 걱정은 더했다.

수록된 작품의 수가 줄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여는 혹시 이것이 거울의 쇠퇴 기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거울에 한 번이라도 글을 실었던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지만 신진 필진들이 합류하고 있는 기미에도 불구하고 거울이 어떤 때보다 활기를 띄었던 해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월 즈음이었던가, 늦봄 무렵에 여는 매달의 거울 단편을 모두 출력해서 되새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거울에 대한 과한 기대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드는 글이 있으면 자신과 맞지 않는 글도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글 하나에 실망한 것이 거울에 대한 실망인 듯이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 완성된 단편집이 여의 손안에 들어왔다.

책을 손에 들고 다시 수록작을 살폈다. 작가의 이름을 보고, 작품의 이름을 보았다. 여가 몇 번이고 되새김해 읽었던 글들이 있는가 하면 무심히 넘겼던 글들도 있었다. 두 번째 중단편선이 두꺼운 부피와 많은 작품수로 첫인상을 남겼다면, 세 번째 중단편선은 그와 상반될 정도로 작가 수도, 작품 수도 줄었다. 작품의 수가 적은 까닭으로 순서는 작품이 수록된 순서를 따를까 한다.



1. 하얀 이빨―――곽재식

새로 합류한 작가진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작가중의 하나가 곽재식 님이다. 여성 필자가 상당히 많은 거울의 특성 탓도 있겠지만 곽재식 님이 쓰는 남성적인 색채의 글들은 거울에 상당한 자극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독자 우수 단편으로 선정된 {달과 육백만 달러}가 다소 냉소적인 어조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인 스토리와 플롯을 진행시켜 나갔다면 {하얀 이빨}은 감성적인 면을 상당히 걷어낸 문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문체가 어쩌면 작가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어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글을 써나가면서 익숙하지 않아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하얀 이빨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작가가 상당히 편하게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상으로 침범한 비일상적인 에피소드로 출발해서, 서서히 독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솜씨가 비범하다. 독자와 화자가 모두 무지의 상태에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밟아가면서, 화자는 작가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의 의외성, 그리고 시장이 저격당할 뻔하고 눈앞에서 그 범인이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한 화자이지만 그건 자신의 일상이 아닌 까닭에 능청스럽게 농담의 소재로 등장하거나 한다. 그 범인의 정체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저격사건은 화자의 생활 안으로 개입해 들어오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여전히 그 이유로 애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 글의 매력적인 점 하나는 바로 이런 일상성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실제 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계의 운명을 놓고 이야기하는 환상문학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여자친구와 별반 재미있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그 여자친구와의 감정이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이 온 몸에서 드러나는 화자, 다운되는 컴퓨터 앞에서 지루해 하면서 여자친구에게 의미 없는 농담 문자를 보내는 것이나, 자신에게 고백해온 여자에게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자신을 단념시킬까를 생각하는 것이나, 회사에서의 일을 떠맡고 싫다는 말은 못해도 속으로 불만을 늘어놓기는 하는 것이 이 서울에, 한국에 살아가고 있는 직장인 남자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글의 전개에서 별반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농담이나 선배와의 식사 이야기지만 그것이 있어서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가 현실성을 띈다. 그리고 바로 그 현실성이 기반이 되었을 때 글에서 ‘낯선 장면’이 더욱 낯설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식당에서 물컵에다 양치를 하는 선배의 모습이나 갑작스럽게 회사에서 제시하는 크루즈 여행 같은 것. 글에서 이 낯선 장면은 독자에게 선명하게 각인되어 중요한 복선으로 기능한다. 테러범이 던진 것이 실제 도시락이라거나 하는 것이 테러범이 정신병자였음을 암시했다가, 뒤에 그 테러범이 실제로는 상당한 재주를 가진 학생이었다거나 하는 증거와 맞물리면서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화자가 보는 기묘한 환각, 점점 확실해지는 범인의 정체는 일상을 서서히 침범해 들어온다. 그리고 마침내 의외의 결말로 치닫는다.

처음 이 글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선명하다.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도 입담이지만 이러한 결말을 독자가 어이없이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치밀함이 더 놀랍다. 이런 소재를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라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낙하산}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하얀 이빨}은 실제 우리의 일상까지도 섬뜩하게 만들어 놓을 정도의 현실성이 더해진다. 여는 갑자기 여와 함께 근무하는 한 선배가 유독 한 회사에만 집착하는 것이 문득 떠올랐었다. 혹시 그것도―――라고 생각하다 실소하고 끝났지만.

실제로 그 세계를 경험했거나 혹은 그 세계를 아주 잘 알거나 하지 않으면 쓰기 힘들 정도의 사실성을 바탕으로 독자가 읽기 쉽도록 서술하는 솜씨. 그래서 이 글은 소설이면서도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듯이 시각적이다. 여성 작가들이 사용하는 선명한 색채의 감각은 그다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문장은 사라지고 스토리와 장면만이 남는다. 마치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작가의 단편이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이런 감각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것은 문장에 수식을 덧붙이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와 다른 길을 걷겠다고 작가가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이야기성’에 중심을 두는 작품활동인 것이다.

작가의 글은 거울에 실린 것밖에 보지 못했지만, 지금의 글을 계속 써나가시기를 감히 바란다. 드라마나 영화도 비슷비슷한 스토리가 넘쳐나는 요즈음에 개성적이고 선명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날 기회는 그리 없다. 작가가 본인의 개성을 살려 조금 더 써 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발디디고 있는 일상에 근거한, 어쩌면 정말로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 정도의 그런 이야기를 더 듣고 싶기 때문이다.



2. 몽중몽―――ida

{촉각의 경험}으로 여가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된 이후로 여는 두 번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란 횟수는 여가 읽은 작가분의 글 수와 같다. 전에 그 글을 쓴 사람이 맞는가 생각할 정도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 매번의 인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종이책을 앞에 놓고 보니 그 생각이 그렇게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단편을 쓰는 작가라면 한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주제다. 설사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든 그렇지 않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숙고의 과정을 통해 자신 나름의 결론을 내려도 보았을 것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밟아가고 있다. 2004년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 수상작인 {촉각의 경험}은 인간 실존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자세를 보이더니 {우수한 유전자}에서는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통해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어느 글을 보더라도 다른 사람이 다룬 적이 없는 새로운 소재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 결론 역시도 완전히 독자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작가의 진지한 자세와 어우러져 수작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특히 {우수한 유전자}는 전에 여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여가 읽은 모든 작품(작가의 개인 단편선을 포함하여)을 통털어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생각되는 걸작이다.

그런 작가가 이제는 꿈과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특이하다고 하면 특이하겠지만 작가의 행보를 생각해 보니 마땅한 귀결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화자의 이름은 여몽. 한자의 해석에도 알다시피 그의 현실과 꿈은 경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뒤섞인다. 그는 잠을 거부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수면제를 건넨다. 그 도움의 주체는 친구이며, 형이며, 또 자신의 꿈에서 등장하는 조연이며 조력자이다. 그는 과거와 현재, 역사와 환상 사이를 떠돌며 해로 상징되는 객체와 매번 대화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그는 꿈이며, 그의 깨달음 역시 꿈이다. 그가 상상하는 해는 실체하는 해인 동시에 그가 상상한 허상이다.  

그리고 그 모든 순환의 꿈이 끝나고 주인공이 처해지는 상황은, 알에서 막 깨어난 새의 모습이다. 수없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순간에 잊어버리고 다시 그 꿈이며 현실인 삶의 순환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수미쌍관적인 구조와는 다른 의미로 글 전체를 하나로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전자가 시작했던 점으로 되돌아가는 완결성을 만든다면 이런 순환적 구조는 진정한 끝이 아닌 다른 시작으로의 반복을 의미한다. 거기에 이 글에서는 마지막 결론이자 시작인 이 부분이 작가가 반복해 온 ‘깨달음’의 실체 중 하나가 된다.

자칫 잘못하면 산만해 질 수 있는 구조로 작가가 의도한 길을 독자가 쫓아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글이다. 반복되는 구조가 서서히 깊어지고 심화되더라도 독자에겐 단순한 반복으로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 전에 독자가 책을 덮을 우려도 있다. 철학적인 주제를 실험적인 구조로 진행해 나갈 때의 위험성이다. 작가의 전작 {우수한 유전자}에서는 독자가 섣불리 글의 결론을 짐작하게 하여 글을 놓게 만드는 위험이 있었다. 글의 마지막을 본 독자는 감탄할지언정 그 전에 그만둔 독자들은 그 글에서 어떤 인상도 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의미다. 양자 모두 작가가 독자와 소통하는 의사소통의 부분에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더욱 아쉽다. 주관 있는 글쓰기에 응원을 보내며 건필을 기대한다.



3. 판타스틱 입맞춤―――정대영

작가가 유독 여성 화자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점은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작가가 남성인데도 불구하고, 남성 작가가 그리는 여성들처럼 그린 듯이 똑같은 여성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도. 여성 작가의 글을 연상시킬 정도로 집요하게 감정에 몰입하며 그 감정선을 따라서, 때로는 사건의 순서도 초월하여 글을 전개한다.

이번 작품은 총 6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아무 생각없이 읽어 넘기면 단숨에 읽고 나서, 제목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정도의 글이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렇게나 어색함 없이 여자들의 이야기를, 아니 상처받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상처받았기 때문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먼 곳을 보는 시선에서 불안해지는 감정, 그게 구태여 여자와 여자간의 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째서 이 둘을 동성으로 만들었을까. 여는 그것이 작가가 마련한 또 하나의 위험요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남자에게 상처받았던 전력은 화영의 상처요인인 동시에 두 사람의 불안요소로 기능한다. 그래서 화영의 행동은 ‘잠시 여기서 쉬겠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이 두사람의 짧은 저녁은 앞을 예측할 수 없다.  

최근 작가분의 글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개인적인 사정이 여의치 않나보다 짐작만 할 뿐이다. 짧은 글에도 반가워 곱씹고 읽고 있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를. 건필을 기원한다.



4. 걸어다니는 화석―――적어

작가분의 작품은 현실과 접점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도 독특한 매력이 있지만, 이 작품처럼 일상과 접점을 가질 때 더욱 매력을 띄는 듯하다.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섬뜩한 결론에 놀랐고,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섬세하고 부드럽게 서술하고 있는 작가의 글에 놀랐었다.

실상 우리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은 모든 기억속에서 다 사라져버린다는 설정은 섬뜩하지만 그 설정 안에서 유일하게 모든 진실을 기억하는 따이푸의 존재가 선명하다. 그리고 그 따이푸가 모든 사람에게 내어놓는 따뜻한 차와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이 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섬뜩한 설정을 따뜻하게 감싸는 감수성이다.

2005년 혹은 2004년에 여가 본 일본 영화 중에 [연애소설]이라는 것이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거나 걱정해준 사람들, 자신과 친해진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리는 운명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였다. 부모도 연인도 모두 죽어버리고 혼자 살아가고 있는 젊은 청년이 담담히 과거를 회상하며 유언장을 쓰는 영화는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거기에서 여주인공이 이 청년에게 하는 대사가 있다.

―――만날 수 없으면 죽어 버린 거야, 사람들은. 만나지 않고 잊혀져버린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자신에겐 죽은 거야.

자신과 친해지면 모두 죽어버리기 때문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남자에게 먼저 다가와 손을 뻗는 여주인공은,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겁내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라고 말한다. 운명에 지지 말라고 말한다.

여는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그 대사를 떠올렸다. 우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실제 죽었거나 살아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외에, 시간의 흐름에 마모되어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을 잊고, 그리고 그들을 기억 속에서 죽여 갔을까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자연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작가가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였는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망각’이란 존재의 상실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나무랄 것 없는 문장과 적절한 감정 배합, 무척이나 보기 드문 좋은 글이었다. 작가분의 이름을 충분히 되새길 수 있는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건필을 기원한다.  



5. 연애편지, 다이어트―――배명훈

{다이어트}로 적잖게 여를 충격에 빠뜨린 배명훈 님의 글이 이번에는 두 편이 실렸다. 한 작가의 글이 하나씩 실리는 관례가 깨진 것인데, 워낙 두 글의 개성이 첨예하게 달라 편집팀이 어느 하나를 골라내기 힘들었으리라는 추측을 했다.

{다이어트}가 비교적 편안한 문체에다 읽기 쉬운 글투로, 개성적인 발상에서 출발한 글인 반면 {연애편지}는 구성부터가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서술 역시 {다이어트}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읽었구나 짧게 요약하기가 쉽지만 {연애편지}는 그렇지 않다. {다이어트}가 서술 중심의 글이라면 {연애편지}는 구성의 독창성이 중심이 되는 글이다.

실험성이 높은 글에 대해서는 뭔가 언급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가 실험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했는지 확신할 수 없을 뿐더러 작가의 실험이 과했던 것인지 아니면 여가 이해력이 부족했던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날 수 있는 스토리는 이제 다 태어났다고 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아이디어는 한정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며―――아마추어들의 실험성에서 오랫동안 이 형식으로 완성되어 온 소설의 형식성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볼 작품을 써내려간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가치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성이 글 자체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소설의 형식 자체를 파기하고 다양한 상징성을 부여하는 작품 활동은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소설은 독자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분야인 것이다. 그리고 독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독자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부분 그 주제에 기인한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인가, 이 글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병적인 증상을 보이는 화자, 작가가 글 안으로 침범해 들어가고 화자는 거기에 대해 언급하고 하는 형식의 파격은 다른 우주로 화자를 이동시킨다는 급격한 전환에 이른다. 네 번째 우주가 독자가 살고 있는 세계로 상정되며 그 독자가 바라보는 우주가 다섯 번째 우주다. 그럼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우주는 무엇인가. 글과 현실을 초월한 무엇. 두 번째 우주인 희곡의 지문에서 세계가 폭발하면서 세 번째 우주, 연극의 세계가 무너진다. 그러나 여전히 네 번째 우주인 독자의 세계에서는 연극의 세계가 무너진 희극, 두 번째 세계는 남아 있다. 이 모순성이 독특한 아이디어와 특이한 구성에서 만들어진 세계의 독특한 부분이다.

반면 {다이어트}는 현실에 기반한 현실 비틀기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에서 사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소설에서도 친숙하게 독자를 당길 수 있는 이야기 구조다. 그러면서도 한 인간이 우주로 나가기 위해서 연료를 축적한다는 독특하고 기괴한 설정이 독자를 압도한다. 실직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현실을 비판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로 가버린 청년이 현실에서 적응하지 못한 청년이 급기야 현실에서 떠나는 죽음을 택했다는 표면적인 사건과 실상 그 청년은 지구를 침범하려고 엿보고 있는 우주인들을 다른 곳으로 따돌리는 역할을 했다는 내적인 사건이 맞물린다.

표면 사건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일상사이기 때문에 내적 사건과의 괴리는 더욱 커진다. 이런 양면성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매끈매끈한 소설들은 인터넷에서 꽤 찾기 쉬운 시대가 되었다. 쉽게 읽히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이런 이질적인 단편을 가치롭게 보고 싶은 것이다.

다양한 시도를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6. 변신, 버지니아 울프 가라사대―――콜린

작가분의 글을 읽으면서 종종 여는 이 글이 한국 작가가 쓴 것이 아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러한 작가가 콜린 님 한 명 분인 것은 아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작가가 과학소설이나 환상소설의 번역본에서 종종 보이는 특유의 색깔을 가진 문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역어체'라는 문체를 말한다. 여는 역어체라는 표현 자체가 적절한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편의상 그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한국의 여러 작가들 가운데에서 이러한 문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유독 환상문학과 과학소설 장르에 많은 것은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한국문학을 읽어온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 작가군이 좋아하고, 읽어 왔으며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독서 내력들이 번역문, 그 중에서도 영문의 번역문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영문으로 된 소설을 번역해 온 번역가 집단이 곧 그 장르의 독자군에서 출발한 것을 보면 이들 가운데에는 스스로 원문의 소설을 읽어온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추측된다.

이러한 문체는 이미 장르의 독자들이 읽어온 수많은 번역된 소설들과 비슷한 문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특정 독자들에게는 아주 읽기 쉬운 문장이 되는 동시에 또 익숙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선호되는 문체라는 것은 독자군과 새로운 작가군이 익숙해져 온 문체이며, 그들 안에서는 당연하게 공유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 소설을 다양하게 접해온 사람이 똑같이 인터넷 소설의 작가가 되었을때 그들 특유의(이모티콘과 과도한 문장부호와 압축과 감탄사, 등의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형식이 글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고, 이 글은 그 독자군들에게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해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처음 인터넷 소설이 붐을 일으키던 당시에 그 글의 공통된 특징에 대해 비판하며 소설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한 사람들이, 그 장르에 익숙하던 독자군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어느 쪽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며 두 문화군의 충돌이었다.

그러면 이 역어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10대 초반부터 일본의 게임을 접해보거나 일본의 라이트 노블을 읽으며 자란 세대들은 그 곳의 문장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영문의 번역이 아닌 일본의 번역이 가지는 공통된 무언가를 친숙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어투에 익숙하지 않은, 어쩌면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순수소설’이라고 일컬어진 한국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이 이 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하는 점이다. 환상문학이나 과학소설을 즐기는 독자들 안에서 통용되는 글쓰기로 만족할 것인가. 초등학교 고학년을 가르치는 교사인 지인이 여에게 들려준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소리를 내어 책을 읽어보라고 학생을 지목하면 학생들은 긴 문장의 경우에 다음 줄로 넘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서너 줄이 넘어가는 긴 문장의 경우 자신이 방금까지 읽어온 문장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금방 찾아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하는 말을 듣고 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물론 이것은 읽기 교육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문장에 사람들이 낯설어 하는 것은 나이에 무관한 문제가 된다. 이미 특정 장르에 길들여 져 있는, 그 장르에 한해서는 읽기 소양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독자군에 한정해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저 진부하게조차 들리는 문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것인가. “소설은 인생의 반영이다”라는.

작가분의 서술 능력은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인정한 바가 있다. {변신}은 강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나 소설 자체가 어떤 주제 안으로 갈무리되기보다 사건과 아이디어로 구성된 들려주기에 치중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점점 고조되는 변신의 정도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꼬집는 풍자로 읽을 수도 있으며 그 자체가 흥미진진하게 고조되는 사건이므로 독자로서는 읽는 재미가 있는 글이라고 하겠다. 잠시지만 여 역시 이런 세계가 온다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 가라사대}는 더욱 매력적이다. 바로 옆집에서 일어난 기괴한 사건과 사건 이후로 화자에게 침범해 들어오는 비일상의 낯선 요소요소들이 화자의 감정과 일치된 서술과 맞물러 유려한 글을 만들었다. 현실에서 벗어난 저 너머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 과감히 머리 아래를 버린 작가가 화자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날카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그러나 이 글들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충분히 좋아할 글이라는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는 조금 더 아쉬움이 남아 버리는 것이다. 과연 점점 축소되는 읽기 인구들 안에서 특정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한정한 글쓰기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감탄하며 읽을 수 있는 ‘순문학’이 있는 것처럼 순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감탄하며 읽을 수 있는 ‘장르문학’을 작가분은 쓰실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순문학 독자들의 문제도 장르의 독자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순문학 장르에서도 장르적인 특성, 아이디어와 현실의 초월을 소재로 하는 글이 속속 나타나고 있으므로.



7. 바지니에게―――jxk160

수록된 작품 가운데 가장 긴 글이다. 단편집의 경우에는 보통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번에 읽어 내려가는 편인데 이 작품만은 예외를 두었다. 분량으로는 작은 한 권의 하드커버 정도로 내었으면 딱 맞겠다 싶을 분량이고, 내용 역시도 적지 않다.

jxk160 님은 불친절한 작가다. 거울의 필진들 가운데 추선비님과 쌍벽을 이루리라 생각한다. 한눈에 읽어 내릴 수 없는 문장으로 한번으로 이해하기는 힘든 글을 쓰면서 또 상당수의 독자들이 이 글을 이해해 보겠다고 덤비게 만드는 글을 써낸다.

그래도 전작들에 비하면 이번 글은 상당히 친절한 편에 속한다. 여는 작가의 이름을 본 순간에 이 글을 또 몇번이나 읽을 것인지 염려부터 했지만, 최소한 이번의 글은 한 번 읽고 났을 때 인물들이 서로 섞여 혼란스러웠다거나 사건의 시종을 알 수 없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인물들의 세계는 독특한 세계다. 유럽과 미국이 아닐까 싶어지는 나라들이 있는데 또는 쿠바와 미국 같기도 하고, 중국과 또 무엇 같기도 하다. 작가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독자들이 모두 이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지 아는 듯이 그저 이렇거든, 하고 너스레를 떨며 어조 한번 높이지 않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밤 너머에}를 포함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발디딘 서울, 한국과 다르면서도 또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처럼 완전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다. 자신들의 정의와 사회의 정의가 충돌하거나,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하면 타개할 수 있을까 피를 끓이거나.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초월한 듯이 아름답고 고고하며 무덤덤한 듯이, 어른인 듯이 서 있는 인물이 중심에 있다. ‘아델마이어’, 그를 동경하며 사랑하는 소년 ‘리페’, 그에게서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 가슴아파하는 ‘길레트’. 그들을 중심으로 고아 출신으로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불타는 ‘인리히’나 의사이면서도 스스로의 의술과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길레트의 아버지, 사업으로 유복하게 재산을 모아 사회의 변화가 자신의 부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리페의 부모들이 주변에 있다.

이 글은 중편이면서도 장편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이들이 살아가는 사건은 중편 안으로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장편 한 권을 읽은 뒤처럼 독자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현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부조리처럼 이 곳에서도 부조리가 있고, 우리 사회의 10대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사회에 분노하고 스스로의 미숙함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현실 속에 부딪히거나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소설이 성장소설로 분류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를 상상하기 힘든 10대들의 숨가쁘고 지치는 일상이 지나면 그들도 성인이 되고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고향을 찾거나 하게 되리라. 시간 속에 침몰해 사라진 10대들은 단지 기억으로 남고, 살아남은 10대의 기억 속에서 존재한다.

작가가 이 글의 제목을 {바지니에게}로 지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기존 소설에 등장한 인물을 제목으로라도 인용한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그 인물과 이 소설이 관련을 가진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작가가 만들어 낸 암울하고 사실적인 세계에서 10대를 지나 성인이 된 극중의 ‘리페’는 이제 부잣집의 공주님이 아니고, 그가 그렇게 써온 과거의 소설은 그에게 지워야 할 과거가 되어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로, 그가 부모와 함께 떠나온 그 나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그 곳에 자신의 소중한 기억이, 미숙한 시절의 다시 없을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여는 생각한다. 작가는 어쩌면 아무런 감정 개입이 없이 이들의 아픈 10대의 시절을 쓰면서도 그들이 그렇게나 힘들어한 10대가 되돌릴 수 없이 소중한 시절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8. 적백화면―――자하

글을 처음 읽고 나서는 상당한 분량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렇게 길지 않은 글이었다. {바지니에게}를 거르고, {변신} 이후에 글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신}과 분량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고작 책 페이지로는 한 페이지가 더 있을 뿐이다) 이 글을 그렇게 길게 느낀 것이 스스로도 의아스러웠다.

이야기는 지하철 역에서 발견한 한 포스터에서 출발한다. 한 때 꽤 유명했던 포스터였기 때문에 이 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선명한 붉은 색과 흰색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던 광고판에 화자는 마음을 빼앗기고, 어째서인지 그 적백의 대비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홍차, 라는 이름의 음료에서 더욱 붉은 색을 내려고 하기 시작해서 먹지도 않을 홍차를 계속 만들어 내고, 그리고 급기야 붉은 색에 성공하고 나서는 흰색과의 대비를 만들기 위해 집착한다. 그것은 물감에 생각이 넘어가기까지 하는데―――이런 일련의 집착의 과정들이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묘사된다. 편집진의 코멘트로 하루키를 연상시킬 수도 있겠다.

이러한 집착을 다르게 해석해 보자. 여는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일상생활에서 사소한 것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이 어느 순간 삶의 한 단편에서 인생을 도피할 만한 소재를 찾는다는 병적인 심리 상태를 그린 것이다. 라든가. 어쩌면 더 나아가 ‘홍차’로 만들어낸 붉은 색이 집착에서 기인한 가짜 깨달음과 가짜 희망이고 황금빛으로 나타나는 실제의 홍차가 삶의 진실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든가. 그런데 어쩐지 이런 해석들이 그런 거라고 느껴지는 게 아니라 여가 만들어낸 작위적 해석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분위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화자의 병적 상태를 이야기하려면 어투가 더 강렬해야 했던 것이 아닐지.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 담담한 어투를 사용했다면 사건이나 심정의 흐름이 독자들에게 보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전개를 따라야 하지 않았을까.

작가의 전작들을 기억하는 여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글이었다. 작가분의 건필을 기원한다.



9. 최민주가 왜 그랬을까―――무한슬픔

무한슬픔이라는 작가를 놓고 보면 항상 여는 고민에 빠진다. 이 작가를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사람의 혼을 빼놓듯이 강렬한 글을 쏟아내는가 하면, 전의 그 작가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맥없이 단조로운 글을 떡하니 내놓기도 한다. 독특한 개성이 있구나 싶으면 너무나 맨질맨질한, 평범한 글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그것이 무한슬픔이라는 작가를 여가 주목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민주가 왜 그랬을까}는 형식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글이다. 일본 2채널의 리플들이 모여 이야기를 완성하고 마침내 일본 사회를 뒤흔든 베스트셀러가 된 [전차남]의 예도 있지만 현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터넷의 인터렉티브한 환경은 예전에 불가능했던 형태의 집단창작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떤 상호합의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창작소설과는 구별된다. 특정 인물들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그 결과를 의도하지 않고 스스로의 입장에 근거하여 남기는 코멘트(리플)들과 원문의 게시자와의 상호작용으로 시작되어 급기야 코멘트를 남긴 이들(리플러) 사이의 상호작용을 낳고 또 전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예측하지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전차남]은 처음 게시자가 완성한 글이 아니다. 사건의 진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첫 원문의 게시자인 전차남이지만, 그 남자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 본인인 동시에 또한 수많은 리플러들이다.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그에게 추천한 가게를 찾아가보거나 하기도 하고 또 전차남의 행동에 격려를 하거나 혹은 꾸짖거나, 심지어 비웃거나 하는 리플들이 자유롭게 이어지는 전체가 곧 '전차남'이라는 집단 창작물이다.

그런 것이 이제 역으로 소설 안으로 차용되어 온 것이다. 이 예측 불가능한 작가 '무한슬픔'의 손에 의해서. 인터넷을 해오면서 수많은 리플의 상황을 보아 온 사람들이라면 이 글이 단지 형식을 어설프게 차용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약어들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면서 수많은 아이디들이 자신의 개성을 가지고 리플을 잇는다. 그리고 심지어 동일한 인물의 리플들은 동일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글을 인정할 수는 없다. 단지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이 글이 소설이 된 것은 이 안에 무한슬픔이라는 작가가 만들어낸 비현실적 현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반부에 우리의 일상에서 출발한 이 리플들은 중반에서 등장한 ‘엑파 게시판 찌질이’들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의외의 결과로 이어진다. 단지 보통의 소설로 쓰여졌으면 진부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독특한 형식과 맞물려 선명한 인상을 준다.

거울의 작가진들이라면 알 만한 “가릉이가 갸릉갸릉”이라는 대사를 다시 만나서 조금 웃기도 하고, 작가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보일 것 같은 즐거운 글이었다. 아이디어가 그렇게 새롭지 못하다거나 자칫 일회성 장난으로 끝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글이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으로 이런 기우를 말끔히 씻어 주기를 바란다.



10. 환상진화가―――은림

작가는 환상소설을 쓰는 작가들 가운데서는 상당히 눈에 띄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장편 위주로 이루어지는 이 한국 판타지계에서, 환상문학의 공모전에서 두 번이나 단편과 중편이라는 소수장르로 입상한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작품, {할머니 나무}와 {할티노}는 작가를 이야기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할머니 나무}에서 순문학과 환상문학의 양면을 모두 포함하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숙고를 보여 주었던 작가는 그 뒤로 그에 비견할 만한 압도적인 작품을 그다지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의 작품들이 모두 나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수상 경력이나 처음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긴 작품만큼 강렬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문장의 구성력이나 밀도는 매 작품마다 달랐다. 여는 작가의 글들을 매번 매우 즐겁게 읽었으면서도 그 글을 써낸 사람이 은림이라는 작가라는 사실에 조금 아쉬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등장했다. {환상진화가}(개인적으로 여는 한자 병기에 대해서 다른 표기법을 선호하므로 여기에서는 한자 병기를 하지 않았다). 육체를 바꾸어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세계, 몇 번이나 재생해내서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미래 세계는 전반적으로 암울한 과학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은림의 과학소설이라니.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글을 쓴 사람이 은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글에서 다루어지는 설정(혹은 세계관)에 새로운 것은 그다지 없다. 먹이 피라미드에서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식하는 개체가 돌연 나타났다거나, 몇 번이고 재생이 가능한 세계라거나 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플랜’역시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인간형상을 하고 있다는 설정이나 그들끼리 지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집단의 군체이거나 하는 것, 과학소설이나 만화에서 종종 인용되고 있는 설정이 아닌가.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상당히 재미있는 글이며, 또 사람을 빨아들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성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묻어나 있는 글이 과학소설적인 건조한 문체와 서로 맞물려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출산’과 ‘종족번식’의 문제다. 이들은 죽지 않는 세계에 있으면서도 번식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가족관계조차 붕괴되어 버린지 오래이고 성별의 특성조차 사라진 후에도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단지 종족 번식을 위해서 관계를 갖는다.

이렇게 비틀린 세계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인 플랜이 진화하는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째서 처음에는 이 세계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풍만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다음의 진화체는 어째서 티없이 맑아 보이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인가.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 아니라 오래 전에 그들의 역사 속에 폐기해버린, 떠나버린 과거의 모습이다. 그런 존재인 플랜에 유혹당한 인간들은 재생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그들이 스스로 택해온 현실과 미래에는 플랜이 만들어내는 그런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먹히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미래를 더 이상 살아나갈 수 없다.

플랜에게 매료된 주인공 ‘강’의 결말은 그래서 마땅히 도달해야 할 결론 같은 것이다. 몇 번이고 재생하면서 자신의 후손을 남기고는 번식의 의무를 다했다고 더 이상 번식하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 여자. 가족제도까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면서도 자신이 만들어 낸 후손에 대해 마치 어머니같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강은 과거에 한 발을 디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플랜이 상징하는 실체를 깨달은 순간에 그는 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살아있고 재생하는 것만으로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손에 넣을 수 없다. 그의 시간은 이미 현재에 속해 있으므로. 그러니 그는 과거에 먹힐 수밖에 없으며, 그리고 과거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소설의 분위기를 의식한 탓인지 글투는 전체적으로 건조해졌지만, 은림이라는 작가의 다른 글을 생각해보면 작가가 문장을 만드는 것보다 이 이야기를 완성해 내는 데 더 신경을 썼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감히 비약일지 모르는 상상을 해본다. 사람과 사람이 살을 맞대고 가족을 이루고 하는 것이 모두 사라진 미래가, 합리적이고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 재생체가 결코 첫 생애 이상의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것처럼 이 불완전하고 삐그덕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무엇보다 가치롭다는 그런 말을 작가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여는 조그만 바람 하나를 작가분에게 덧붙인다. 환상소설을 쓰는 사람들에게 작가분의 위치는 무척 상징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편으로 아무리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더라도 현실적으로 출판으로 이어지기는 힘든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한탄이 아니다. 작가분의 작품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계속 수준이 높은 작품을 써 내가는 것이 그 뒷발자국을 보고 단편을 쓰고 있는 수많은 환상문학 작가들에게 희망이 되리라는 것이다.



11. 명예롭지 못한 소녀―――추선비

뱀파이어 ‘엘루네드’라는 이름을 여의 머리 속에 각인시켜버리고 만 추선비 님의 글이다. 뱀파이어의 속성을 성적 이미지와 결부시키는 관점에서 본다면 작가분의 글은 가장 뱀파이어물다운 글이다. 여가 전에도 언급한 바가 있듯이.

어떠한 종족, 인간에서 출발했든 아니면 인간과 완전히 구별되는 이종족이든지 간에 인간이 아닌 존재를 등장시키는 것은 작가로서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흔히 하는 말로 귀 긴 쭉쭉빵빵 미인이라고 묘사한다고 해서 엘프인 것이 아니므로. 이종족을 등장시켜 인간성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종족이 단지 글에서 의미없이 등장해서는 안 된다. 카키노우치 나루미의 만화 [흡혈희 미유]에 등장하는 흡혈귀, 이마 이치코의 [해변의 노래]에 등장하는 도깨비,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엘프와 드워프 등 종족의 개성을 확실하게 독자에게 각인시킨 경우는 기억에 남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작가가 어째서 이 종족을 등장시켰는가에 대해 실소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뱀파이어 시리즈물은 단연 사람을 압도하는 면이 있다. 작가 특유의 시적이고 난해한 상징적인 문장과 어우러지면서 이 글에서 등장하는 밤의 흡혈귀는 생생하게 생명을 얻는다. 직접적인 묘사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도 글은 전체적으로 감각적이고 육감적이며, 퇴폐적인 분위기까지 가진다. 그들이 활보하는 밤은 기괴하고 섬뜩하며 인간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인간과 확연히 구별된다. 뱀파이어들의 감정은 함께 등장하는 인간들의 감정과 전혀 구별되며 같은 뱀파이어 안에서 개체적인 개성까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명예롭지 못한 소녀는 전작에서 등장하는 ‘엘루네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중심 인물은 그가 아니다.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간이었던 소녀의 에피소드를 그 소녀가 사는 영지의 영주인 아름다운 캐롤라인이 시선의 중심에 서서 이야기한다. 흡혈귀의 흡혈이라는 것이 캐롤라인에게는 일상이며 소소한 행위이지만 그것이 인간에게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흡혈귀인 캐롤라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은 남자의 꾀임에 넘어가 함부로 몸을 내어주는 여자아이 ‘엘루네드’에게 충동적으로 이름을 내린다.

인간 한 둘, 혹은 자신의 시녀들이 죽어가더라도 그다지 타격을 입지 않을 것 같던,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캐롤라인이 아이의 죽음을 듣고 돌변하는 것이 이 글의 절정부분이다. 자신 때문에 명예를 잃었다고 할 수 있는 소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내리는 것, 그래서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만들어 주려고 하는 행동이 어쩌면 캐롤라인으로서는 소녀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뱀파이어인 까닭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녀의 죽음 앞에 흥분했던 그가 소녀가 죽어가는 원인이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 준 이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아무런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름을 거두어 달라는 소녀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담담히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여는 이 몽롱하고 퇴폐적인 글 안에서 유일하게 생생하게 살아 있던 소녀 엘루네드의 죽음이 인간과 다른 뱀파이어를 등장시켜야 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그들이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남자가 엘루네드를 대신 범했을 이유도 없었을지 모른다. 권력으로 상징되는 존재를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절망을 고스란히 앙갚음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이 무관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는데 뱀파이어가 영주로 있는 이 세계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기능하는가.

엘루네드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뱀파이어 캐롤라인는 여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이 개성적인 뱀파이어들을 또 다른 글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물론 작가 특유의 몽롱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와 함께 말이다.



12. 플라스틱 프린세스―――유서하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된 이 글은 아쉽게도 거울에서는 놓쳤던 글이었다. 단편집에 실린 글로서 이 글을 처음 만났다.

낯선 이름을 만나면 여는 항상 설렌다. 새로운 작가가 새로운 글을 늘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필력이 높고 언제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읽게 해주는 작가의 이름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기대감을 주기 때문이다. 여태 보지 못했던, 여가 만나지 못했던 것을 읽게 되리라는 기대감이다.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전체적으로 10대의 감수성을 가진 글이다. 주인공이 10대로 보인다는 것 때문은 아니다. 주인공의 1인칭으로서 무척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10대 여자아이 특유의 민감한 감수성과 감정적인 급박함이 글 전체에 흐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보다도 플라스틱의 육체를 얻기를 바라는, 인류의 종말을 향해 치닫는 시점에 오직 자신과 상대만을 생각하는 그 감수성도 그렇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 감정이 너무나 버겁다. 독자를 이해시키기 전에 압박한다. 자신의 사랑이 절대적이고 이 비극적인 사랑이 절대적이라고 소리높인다. 일인칭이어서라고는 하지만 작가와 화자가 일치된 듯이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파국이 10대가 아닌 여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것이 화자의 나이를 의식해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그 솜씨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혹여 작가가 화자와 동화되어 화자의 목소리가 곧 작가의 목소리가 된 것이라면, 그건 위험할 수 있다. 주인공의 감정이 격한 까닭에 글이 격해졌다는 것은 1인칭에 한해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가 작가의 다른 글을 읽지 못했으므로 무엇이라 판단할 수는 없으나, 만약에 작가의 목소리가 다른 글에서도 이러하다면-, 작가는 주인공과 작가를 분리하는 작업에 좀 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녀 보면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사람마다 하나는 있다고 하는데, 그림이나 음악보다 글이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필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한은, 소설 속의 인물과 작가는 같지 않으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등장인물의 개성을 지나 객체화된 결과물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문장력이 뛰어난 글은 많다. 문장의 기본은 안 되어 있는데 편하게 쉽게 사람들이 어디선가 봤을 법한 상투적인 이야기에 적당히 개그를 섞어 쉽게 쓰는 판타지들도 많다. 독자들은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할 수도 있고 이야기의 입담에 감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 어느 쪽의 작가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 문장이 잘 다듬어져있어도 소설로서의 형식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소설이 아니며, 이야기가 즐겁고 재미있더라도 문장의 기본이 안 되어 있자면 소설가로서의 기본 소양 부족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부족한 것을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숙고하며 고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과정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만족하는 작가는 그 현재에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작가의 다른 글을 읽고 싶다. 여의 이 불안이 기우임을 믿고 싶다. 작가가 선명한 감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재주를 가졌으며 이번 글에서의 위태로움은 주인공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13. 황금알 먹는 인어―――아이

단편집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 작품은 작가의 평소 개성에서 그렇게 벗어나 있지 않다. 현실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하나로 만나는데, 결말이 내려진 순간에도 그 결말이 그렇게 깔끔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진다.

처음에는 사건 그대로를 이해하려 들었다가 사건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면 이 글이 상징하고 있는 바를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글은 이해를 초월하는 범위에 있는 것 같다. 대학생인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순간도 기괴하고, 그 둘이 사귀어가는 과정이나 그들의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 그리고 그 둘이 맞게 되는 파국까지도 어느 하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는 있지 않다. 묘사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묘사는 과할 만큼 많다. 모옥과 모구의 섹스에 관한 묘사와 모구의 폭력에 관한 묘사, 그리고 모옥을 둘러싼 남자들의 폭력 모두가 직접적으로 강렬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전투적이다.

황금알을 먹는 인어를 죽이라는 쪽과 인어를 지키라는 쪽 양쪽의 싸움으로 끝나는 글을 읽고 나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의 대사는 연극처럼 작위적이고 사건 역시 그러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독자가 전혀 쫓아갈 수 없기를 바라는 듯이 작가는 한길로 내닫는다. 어떤 설명도 없다.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는 반전도 없다.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사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길러진 조직원이었다거나 하는 것도 반전이 되지 못한다. 그 둘의 관계가 처음부터 너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 어떤 것이 있어도 독자가 의아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분명 작가의 서술 활동이므로 독자를 이해시켜야 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작가들은 더이상 진행할 여지가 없게 된다. 무엇을 이상으로 할 것인가. 반드시 메이저리티를 고려한 작품 창작활동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로부터 괴리된 글쓰기가 진정으로 작가에게 의미가 있는 것일지.

작가의 필력은 강렬하다. 여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전투 장면을 이처럼 핏빛으로 강렬하게 묘사하는 작가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사 장면도 마찬가지다. 선정적이거나 환상적이라거나 하는 그 어떤 감정과도 괴리되어 있는 단지 폭력적이고 본능만 남아 있는 묘사력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래서 여는 혹시 작가분이 스스로 독자로부터 괴리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개성적인 글쓰기에 감탄하며, 조금은 독자를 고려해 주십사 하는 바람도 덧붙여 본다. 작가분의 꾸준한 창작 활동을 기대한다.  



00. 맺으며

매년 한 해에 한 번씩 묶여져 나오는 환상문학 단편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환상문학 독자인 여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과학소설이 단편을 게재하는 출판매체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서 환상소설은 아직 이거다 할 출판매체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일 년에 한권이라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나마 나오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13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개성을 가지고 있고, 또 모두다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 단편선은 읽으면서 참으로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다만 작년의 작품에 비해 양이 줄어든 것이나, 2006년 단편선에 들어가리라 여겨졌던 몇몇 작품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단 13편으로 한정지은 것은 단편집의 부피를 줄이려는 필진들의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므로, 편집진들이 숙고한 결정이라 여기기로 했다.

작품 수가 적다 보니 실망도 적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작품집인데 어째서 이런 글이 포함되어있는가 의문일 글이 줄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독자들마다 보는 눈이 다를 수 있으므로 이번 단편선에서 여가 의아한 글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절대적일 리는 없다. 편집진들이 분명 그 글의 장점을 높이 사 게재하기로 결정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2004년과 2005년 모두와 마찬가지로 장점이 없는 글이란 이 안에 없다. 다만 개인적인 취향이나 혹은 작가의 경험 부족, 숙고 부족이 드러나는 글들이 눈에 띌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분명 거울의 올해 단편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집임에 분명하다. 어쩌면 환상소설의 주된 독자층들이 환상문학 단편집에는 포함시킬 글이 아니라고 장르적인 이견을 낼 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거울의 평소 집필 방향, 즉 환상문학의 범주를 넓게 잡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일이 아니다. 기존 작가들의 성장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또 기쁘고 감사하며 새로운 작가들의 신선한 글은 새로운 활력을 주는 것 같아서 거울의 독자로서 반가운 부분이다.

다만 한 가지, 이번 단편선에 포함된 작가나 그렇지 않은 거울의 작가진이나 모두다, 부디 지금의 글 쓰는 자세에서 좁은 우물에 갇혀 있지는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해 두고 싶다. 드림워커 등 판타지 사이트들은 다들 개성적인 글을 창작해 내고 있다. 눈을 돌리면 곧바로 다른 사이트에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환상문학들이 존재하며, 오래된 출판의 불황으로 다양한 나라의 소설들을 번역해 들여오는 움직임은 우리 나라 환상문학 독자들에게 새로운 읽을거리를 공급하고 있다.

자신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글을 쓰는 것, 절필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객관적인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글을 냉정하게 비판할 필요도 있다. 자신이 읽어온 어떤 특정한 범주만 고집하지 않고, 인터넷에 혹은 오프라인 시장에 유래 없이 속속 들어오고 있는 새로운 글들을 읽어보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객관적으로 읽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자신의 글을 읽어보았으면 한다. 다양한 자극을 통해 독창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한편, 가볍게 읽어 내려가는 장르문학 이상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긴 이야기도 나타났으면 한다.

이것은 분명 여의 욕심이다. 만들어진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서 필진들을 추가로 들이면서 계속적으로 환상문학의 단편과 중편을 읽을 수 있는 공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준 거울에 대해,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필진들의 절필 소식을 2007년에는 듣지 않기를 소망하며, 내년에도 올해보다 나은 단편집이 여의 손에 쥐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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