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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과연 판타지의 종주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다. SF의 종주국이라면 단연 미국을 뽑겠지만, 양과 독자의 수가 더 많다고 해도 판타지라면 역시 미국이 아니라 영국을 첫 손가락에 꼽아야 마땅하다. 근대 판타지의 빅3라 할 수 있는 조지 맥도널드, 윌리엄 모리스, 던세이니 경이 모두 영국인 혹은 영국 출신(던세이니 경은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이라는 점도 그렇고, 현대 판타지의 양대 거두 톨킨과 루이스도 영국인이며 현대 판타지의 최고 인기작인 디스크월드와 해리 포터 시리즈 역시 영국에서 태어났으니.

그러나 톨킨, 루이스, 롤링만으로 영국 판타지의 인기를 셈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위대함과 거대함을 가늠하는 것은 무리다. 여기에 영국 출신 판타지의 명작 시리즈를 또 하나 소개하니 땅끝 연대기(The Edge Chronicles)라고 불리는 이야기다.

땅끝 연대기는 뱃머리처럼 대륙의 끝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땅끝나라(Edgelands)를 무대로 한 이야기로 현재 11권과 일종의 설정집(가이드북)이 한 권 나왔다. 이들은 반드시 시간의 흐름대로 출간되지 않아서 팬들은 임의대로 연대기라는 제목에 맞게 작품들을 중심인물(주인공)에 따라 퀸트 편, 트위그 편, 루크 편으로 부르며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은 트위그 편 네 작품 중 앞의 셋이다.

[깊은 숲 너머(Beyond the Deepwoods)]
땅끝 연대기에서 가장 먼저 출간된 작품이며 시리즈 전체의 세계를 소개하는 느낌이 드는 입문작. 난쟁이나무꾼족(族)의 마을에서 자라난 인간 소년 트위그가 깊은 숲에서 겪는 모험을 그렸다.

[폭풍의 추적자(Stormchaser)]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출간된 작품. 몇 년이 흘러 하늘해적단의 일원이 된 트위그가 아버지와 함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여행을 떠난다.

[생타프랙스의 밤(Midnight Over Sanctaphrax)]
네 번째로 출간된 작품(전작과 이 작품 사이에 연대기 전체에서 가장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Cloud Wolf]가 나왔음). 여엿한 하늘해적선의 선장이 된 트위그가 땅끝나라 전체를 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트위그 편으로는 이 외에도 [The Stone Pilot]이 들어가지만 이 작품은 암석조종사인 모긴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실질적으로 모긴이 주인공인 이야기라고 하니 트위그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작품은 번역출간된 이 셋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세 편의 공통점은 주인공 트위그의 성장과 모험에 촛점을 맞추어 그를 맞이하는 운명과 임무가 점점 무게를 더하며, 이야기의 무대마저 그에 맞게 넓고 다양해져 점점 스케일이 커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트위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깨닫고 강한 인물로 자라나 아버지와 재회하여, 하늘해적이 되어 위기를 겪으며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 생타프랙스의 위험을 구해내며, 마침내는 땅끝나라 전체의 존망을 건 모험을 겪으며 영웅이라 불릴 만한 활약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이자 매력으로 손꼽을 만한 부분은 다양하고 독창적인 종족과 동식물을 통해 정말로 ‘환상적인’ 세계를 그렸다는 점이다. 장르 소설이라는 낱말에 익숙한 소재(장치)를 사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긴 하지만, 그만 안일하게 이미 있는 소재를 갖다 쓰거나 표절인지 클리셰인지 의심스러운 내용을 고민없이 남발해도 좋다고 악용되는 점이 많았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종족이나, 마나와 클래스로 구분되는 마법 같은 부분은 판타지 장르의 규범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을 읽으면 다른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수많은 종족의 모습과 생활을 접하게 된다.

두 번째로 뽑을 부분은 작품의 소도구, 흔히 설정이라 부르는 부분이 세세하면서 설득력이 있어 자연스레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하늘배를 타고 날아다니는 하늘해적이 등장하는 본작은 적어도 필자가 읽어본 모든 작품 중에서 하늘에서의 비행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늘을 날고 배를 조종하는 게 일반적인 항해와 다를 바 없이 간단하게 그려지던 기존의 시시한 작품들과 비교하면 더욱 뛰어나게 느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크리스 리들의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독특한 동식물과 희한한 광경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 글만으로는 이미지를 잡기 힘든 본작에서 삽화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귀엽거나 멋있어 보이려는 ‘거품’을 걷어낸 세밀하고 촘촘한 일러스트가 글의 깊이와 맛을 더해주고 있어 예쁜 그림으로 허술한 글을 가리려는 일부 라이트 노블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전형적인 설정과 클리셰로 만든 가건물 같이 불품없고 허약한 세계관에 의지하는 판타지가 범람하는 가운데 보기 드물게 탄탄하고 깊이있는 세계를 선보인 본작의 인기가 높지 않음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문학수첩리틀북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출간한 탓인지, 대여하기에 적합치 않은 판타지 소설이라 생각되어 대여점에서 따돌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이 해리 포터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아쉽다(물론 두 작품은 판타지라는 거대 카테고리에 포함되긴 해도 다른 점이 많아서 직접 비교하긴 어렵다).

번역본의 뒤쪽 띠지에는 땅끝 연대기 시리즈가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해 앞으로도 출간할 거라는 의지를 비치긴 했지만 1년 가까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 좀 불안하다. 더구나 이 세 작품으로 트위그의 모험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으니(다른 시리즈에 등장은 하지만 주인공은 아니라고 함) 출판사로서는 섣불리 손대기가 망설여지기도 할 것이다. 현재 원작은 트위그 편 네 작 외에 트위그의 아버지 퀸티니우스가 주인공인 작품이 넷, 트위그의 손자인 루크가 주인공인 작품이 세 편 나왔으며 현재까지도 완결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비록 2007년에는 신작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 연대기는 영국 판타지의 장구한 전통과 축적된 유산을 바탕으로 태어난 시리즈이다. 독특하고 신비로운 세계와 다양한 등장인물들, 치밀한 복선과 잘 짜여진 구조로 맞물려진 탄탄한 구성, 흥미진진한 소년의 모험담, 여기에 좋은 삽화까지 좋은 판타지가 갖춰야 할 요소를 고루 가지고 있어 기존의 익숙한 설정만 가득한 판타지를 읽으며 '환상적인' 느낌을 잃어버린 독자에게 권하며 아울러 이 시리즈의 번역출간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덧. 원작의 출간상황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사전을 참조했다.
http://en.wikipedia.org/wiki/The_Edge_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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