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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는 전설이다

2007.09.30 14:5209.30





quarantine.ivyro.net/ttbluewind08@hotmail.com   0.
   문학 전체로 봤을 때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1950년대는 장르문학의 황금기라고 할만한 때였다. 아시모프,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나 레이 브래드버리, 커트 보네거트나 테어도어 스터전 같은 쟁쟁한 작가들이 활동했으며,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이나 [나니아 연대기The Narnia Chronicles] 같은 작품이 쓰여진 시기기도 하다.
   SF나 공포에 한정시켜 본다면, 핵무기의 사용으로 끝난 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일 테지만, 이 시기에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라고 불리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서브 장르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요즘에야 좀 뜸하기는 하지만 90년대 말까지는 꾸준하게 창작되고 있었으니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아마 몇 가지 정도는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트리피드의 날](The Day of the Triffids, 1962)이나 [북두의 권], [매드 맥스](Mad Max, 1979) 같은 영화들 말이다. 좀 근래로 오면 조지 로메오의 ‘좀비 3부작’, 아니 4부작이나 [28일 후](28 Days Later), [바이오 하자드](Biohazard, 1985) 같은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케빈 코스트너의 경이로운 실패작인 [워터 월드](Waterworld, 1985)도 있지만.)

   종말 이후를 그리기 위해 작가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세계를 멸망시켰는데, 그건 ABC 병기일 때도 있었고 괴 생물체의 침입일 때도 있었지만, 많이 반복된 설정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 질병으로 인해 생존자들이 괴물로 변하는 좀비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무슨 이야기인지 다들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그런 설정의 원조라고 할 수 있고, 50년대 미국 현대 공포 소설을 다루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가 오늘 소개할 작품이다.
   덧붙여 이하의 내용에는 상당한 미리니름이 포함되어 있으니, 편견 없이 작품을 접하고 싶으신 분은 먼저 가까운 도서관이나 서점, 혹은 지인을 이용해 주시길 바란다.


   1.
   1976년, 핵전쟁 이후 창궐한 원인 모를 질병의 탓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감염된 사람들은 흡사 전설에 나오는 흡혈귀와 같은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유일하게 질병에 감염되지 않은 로버트 네빌은 낮에는 생필품을 모으고 근처의 흡혈귀를 사냥하고, 밤에는 요새화된 집에 틀어박혀 그를 꾀어내 잡아 먹으려고 하는 흡혈귀들의 공격을 견디며 살아간다.
   개의 죽음으로 체념을 배우고 변해 버린 일상에 적응해 가던 네빌은, 어느 날 대낮에 태양 아래서 걸어 다니고 있는 루스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2.
   [나는 전설이다]에서 공포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고독이다. 반세기의 세월을 넘어서도 이 소설이 여전히 설득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 그 감성이 현대인에게도 지극히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개의 죽음과 체념으로 끝나는 전반부와, 루스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후반부로 나눠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 네빌의 갈등은 상실로 인한 고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계가 멸망하는 가운데 있었으며, 가족과 지인들을 모두 잃고 그 중 일부가 흡혈귀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혼자 살아남았다.
   네빌이 처한 이런 외적 상황은 사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절망적이다.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점은 운 좋게 다른 생존자를 만나지 않는 한은, 네빌이 지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도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드슨이 묘사하는 네빌의 행동과 심리를 주의 깊게 따라가보면, 네빌이 느끼는 고독은 단순히 물리적인 고립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 혹은 체제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의 고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변화한 세상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전반부에 네빌이 기울이는 노력은 과거로 회귀, 혹은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해본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전설에서 거론되는 흡혈귀의 약점이 왜 실제로 통용되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술에 의존해보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흡혈귀를 잊으려고도 해본다.
   이런 도피성 행동은 개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 이후에도 사실 방법이 바뀌었을 뿐 방향이 바뀌지는 않았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해지는, 흡혈귀를 질병으로 규정하고 과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여 브람 스토커가 창조한 흡혈귀 상을 벗어난 근대적인 괴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 그것이 네빌의 손을 거쳐서 이루어 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네빌은 괴물을 탐구하고 해석해서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을 감염자로 만들었으며, 전설을 전설이 아니게 만든 후에야 비로소 변화한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고 안정을 되찾는다.


   3.
   어렵게 얻어낸 네빌의 안정은 루스와 변종 흡혈귀들―――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뱀피리스라고 불릴 만한―――이 나타나면서 깨어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출현은 흡혈귀 VS 네빌의 구도를 그대로 뒤집어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들의 등장으로 네빌은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아니라 괴물이 된다.
   괴물은 아웃사이더다. 폭력과 야만성이라는 인간의 거울상으로 다뤄지던, 돌연변이 거대 괴물이던지 간에, 괴물은 기존의 체제에 포함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래서 기존의 질서에 의해 배제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변종 흡혈귀들의 입장에서는 네빌이 바로 그 자신들의 체제에 포함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네빌의 말처럼, 정상은 다수를 위한 개념이지 단 하나를 위한 개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네빌은 자신이 그가 죽여왔던―――실제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전설의 흡혈귀들과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매드슨의 결말은 상당히 우울하다. 네빌은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지키려던 소시민이었고,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으며, 자신이 지키려고 하던 일상은 이미 무너졌고 전설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죽고 만다. 나는 전설이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4.
   사실 리뷰를 맡고 나서 꽤나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래 전 소설이기도 하고, 유명한데다가, 이미 2년 전에 출판되었고 거울에도 sabbath님의 리뷰가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이전에 올라온 리뷰와 다른 방향으로 적어보려고 했는데 짧고 전하고자 하는 바에 충실한 소설이다 보니 또 그게 쉽지 않다. 다른 방향으로 읽힐 여지가 없다고 할까. 결국 이전에 가해진 평가들을 되풀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벌써부터 드니 큰일이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영상화 소식과, 리처드 매드슨의 다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덧붙일까 한다. [나는 전설이다]는 이미 [지상 최후의 남자](The Last Man On Earth, 1964), [오메가 맨](The Omega Man, 1971)으로 두 차례 영화화가 된 적이 있다. 대체로 원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쪽이 중론이다. 조금 있으면 윌 스미스를 앞세운 세 번째, [I am legend]가 개봉할 예정이다. 보지도 않은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반칙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도 원작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윌 스미스를 주연으로 고른 것은 신선한 시도지만, 필자는 예고편에서 개를 ‘데리고’ 걷고 있는 네빌의 모습을 보고 아예 다른 영화라고 생각하고 감상할 예정이다. (예고편의 유튜브 링크는 http://www.youtube.com/watch?v=hX773fMkS90이다.)

   국내에 번역된 [나는 전설이다]의 후반에 실려 있는 단편들에 대해서는 크게 할 말이 없다. [나는 전설이다]의 인상이 너무 강렬한 탓인지, 후반에 모아져 있는 단편들은 그에 비해 힘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좀 구식이라는 느낌도 있다). 그 중에 루피 댄스가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리즈에서 [Dance of the Dead]로 각색된 바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각색한 사람이 매드슨의 아들인 크리스천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사실.
   리처드 매드슨의 다른 대표작, [The shrinking man]의 영화화 버전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든 사나이](Incredible Shrinking man, 1957)도 2008년 7월 개봉 예정으로 리메이크 중이다. 향상된 특수 효과 덕을 볼 수야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 역시 고전 수작의 명성을 망쳐 놓을 것 같다. 메가폰을 잡은 사람이 [무서운 영화], [화이트 칙스], 최근에는 [리틀 맨]으로 제27회 골든 라즈베리에서 7부문에 (형제의 이름이지만) 이름을 올린 키넌 아이보리 웨이언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흥행에 성공해서 책이 나와주기를 기원해 보자.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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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7.09.30 18:36 댓글 수정 삭제
    the shrinking man 책이 나오겠군요. 좋아하는 책이라 반갑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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