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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사고

2010.09.29 12:2009.29




1.

일상을 벗어난 장소에서 느끼는 시간은 사색을 함께 불러온다. 그 사색은 충동적인 설렘을 불러일으키며 어린아이처럼 들뜨게 만들곤 한다.
진명은, 아니 맥퀸 장 진명 ‘예비’ 박사는 그 즐거움을 좀 더 느끼기 위해 전망차로에 차를 세우고 대교 난간에 기대어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았다. 바다 위를 뻗어나간 대교 끝에 선 인천공항 타운. 20세기에 지어지고 21세기 내내 다른 터치로 덧칠해진 인천공항 타운은 현대적이라기 보단 차라리 미래적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들어선 마천루들은 인천대교 이쪽에 선 진명의 눈에, 마치 거대한 바벨탑처럼 보였다. 사막이 아닌 바다 위에 우뚝 선 바벨탑.
‘그래, 꼭 저런 모습이었어.’
전공 입문 당시 그는 20세기 끝 무렵에 만들어진 어느 박물관 사이트에서 ‘직지 프로젝트’ 라는 명명 하에 수집되어진, 아동문고판 20세기 SF 소설들을 본 적이 있었다. 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번역된 소설들 속 삽화들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와 광선총과 높이 솟은 마천루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삽화들이 흥미로웠던 건, 20세기 사람들의 순진하고 낙관적인 미래상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21세기가 되면 소설과 영화 속에서처럼 미래세계가 현실이 될 거라고 믿었던 듯했다. 실제로 21세기에 모든 것이 빠르게 자라났고 몇몇 대도시들은 미래적이었다. 그 안에는 미래를 향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는 과도기일 뿐이었고 아직은 미래 도시들과 18세기 이전 마을들이 공존했다. 21세기 내내 가아와 의료, 환경 문제들이 전 지구적 골칫거리로 남아있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20세기 사람들이 그리던 세계지.’
진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이 바로 옛사람들이 삽화에서 그렸던 그 낙관적인 미래세계였다. 모든 것이 현대화(당시 사람들이 미래적이라고 생각했던)되어 안정과 최적화를 누리는 시대. 온 인류가 하나로 뭉쳐 새로운 바다, 또 다른 미래를 꿈꾸는 시절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미래만을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진명처럼.
진명은 파리를 꿈꾸었고 그에게 파리는 차라리 과거였다. 지난봄부터 논문 막바지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종종 그를 파리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달 표면 휴양과 궤도 위 스페이스 호텔에서의 휴가가 트렌드였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파리가 있었다. 시가를 문 헤밍웨이가 거리의 화가들을 구경하며 커피를 마시던 몽마르트의 노천카페. 그곳에 앉아 같은 파리의 오후 햇살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르귄의 파리의 4월을 느낄 순 없겠지만 10월의 감흥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것들을 꿈꾸며 1년 반 동안 매달렸던 박사 논문을 서둘러 제출한 것이 지난 주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파리로 떠날 채비를 했다.
논문이 통과된다면 곧 돌아와야 하겠지만, 통과되지 못한다면 내년 4월에도 파리에 머물지 모른다. 아무렴 어떤가.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학위 결정까지는 아직 넉 달의 시간이 있었고 그 동안 그는 파리지엔이 될 계획이다. 이 인천대교를 건너 인천공항 타운의 마천루들을 뚫고 들어가 공항에서 ‘호떡’을 타고 3박4일 동안 날아가면, 그는 그렇게 될 것이다.
지난 8년 간 매달렸던 전공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에게, 지금은 그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여유와 휴식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충동적으로 설레고 들뜨는 자신이 어린애 같다고 느꼈지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제멋대로 설레고 들뜨도록 자신을 풀어놓았다.


2.

“작은 사고일 뿐입니다, 고객님.”
탑승게이트 앞에서, 여승무원이 웃는 얼굴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고객님께서는 스카이엔젤 3호기에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진명을 어이가 없었다. 여승무원에겐 데이터 상의 작은 사고일지 몰라도 그에겐 결코 작은 사고가 아니었다. 파리로의 출발이 늦어지고, 인천공항에 처음 내려앉은 호떡을 타볼 기회를 놓칠 수 있는 대형 사고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사고냐고요!”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느꼈다.
“난 지난주 월요일에 분명 탑승예약을 했고 대금도 치렀어요. 아까 짐 부칠 때도, 저 출국게이트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통과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당신이 탑승을 못하게 막다니! 대체 뭐가 문제냔 말입니다!”
여승무원은 여전히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맥퀸 장 진명 고객님께서는, 스카이엔젤 3호기의 탑승이 보류되었습니다.”
“보류라니, 그게 무슨 뜻인데요?”
“말 그대로 보류지요. 고객님께서는 스카이엔젤 3호기에 탑승하실 수 없다는······.”
“이봐요, 아가씨!”
그는 기어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뒤에 늘어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놀라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자꾸만 보류니 탑승할 수 없다느니, 자꾸 앵무새처럼 같은 소리만 반복할 거요?!”
여승무원 얼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사라졌다. 기세를 잡은 그는 여세를 몰아 붙였다.
“내가 탑승할 수 없는 이유를, 탑승이 보류된 이유를 대란 말예요! 왜, 저 밖에 서 있는 비행기는 제대로 예약을 하고 대금도 치른 승객들 중에서, 키나 몸무게 뭐 그런 것들을 보고 차별해서 탑승시키기라도 하다는 거요?”
“그, 그럴 리가요. 저희 초대형 항공 크루즈 여객기 스카이엔젤 3호기는······.”
당황한 여승무원은 무슨 말로 둘러대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더욱 몰아세웠다.
“아니면, 내가 테러리스트처럼 생기기라도 했단 말이요?”
“예? 테러리스트요?”
여승무원은 진명을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진명은 흥분한 와중에도 그녀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건 잊혀져가는 학자들만의 용어였으니까. 이제 사람들은 테러라는 단어를 몰라도 되는 시대니까. 그렇다고 기세를 놓칠 순 없었다.
“어쨌든!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내가 탑승할 수 없는 근거를 대지 못한다면, 나 역시 당신들의 조치를 인정할 수 없소. 나는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호떡처럼 생긴 비행기를 타겠단 말이오!”
그러나 진명은 여승무원이 들고 있는 단말기를 터치하는 걸 보고 말았다. 엔터를 친 여승무원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물론 잘 알아들었습니다, 고객님. 그러나 맥퀸 장 진명 고객님께선 스카이엔젤 3호기에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마네킹 같은 얼굴에 가식적인 웃음이 되살아나는 걸 보면서, 진명은 짜증스럽게 되뇌었다.
‘이제 곧 누군가 나타나겠군······ 젠장!’
아니나 다를까, 뒤에 늘어선 사람들 사이로 공항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3.

30분이 지나자 진명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소리치고 반항하는 그를 탑승게이트에서 끌어낸 공항 경비직원들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만 놓인 썰렁한 방에 그를 홀로 남겨두고 가버렸다. 물론 문을 잠근 채. 그는 난감하고 창피하고 울컥하는 마음에 항의를 계속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모른다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담당자를 보내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여승무원과 마찬가지로 앵무새 과들이었다.
지금쯤 승객탑승이 끝났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탑승 중인지도 모른다. 천명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크루즈 여객기였으니까. 비행기는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출발 예정이었다. 아직 두 시간 반가량이 남아있었지만, 이 상태로 라면 탐승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은 비행기가 활주로를 날아오른 뒤에야 나타날 속셈인지 모른다. 의도적으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가자 진명은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파리에서의 낭만적인 계획과 덩달아 이번 기회에 대형 호떡을 타보려는 시도는 이미 물 건너간 건지 모른다. 파리행이야 다음 비행기를(물론 그들에게 정신적 보상을 충분하게 받은 후에) 탈수도 있겠지만, 이 작은 소동으로 인해 그의 설렘과 기대는 이미 망가진 뒤였다. 이런 상태로, 이런 기분으로 파리에서의 휴가를 제대로 즐길 수나 있을까?
그때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복도를 걸어오는 두 사람의 소리였고 짧은 대화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명랑한 목소리의 남자가 혼자 만나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센서 소리.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작고 똥똥한 몸집에 동그란 얼굴, 나이 육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유럽 혈통의 늙은 남자였다.
“아이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진명은 분한 마음에 대꾸 없이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경쾌한 몸짓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느긋하니 말했다.
“인류관리국 사무관, 코번 박 승호라고 하오. 그냥 코번이라고 불러요. 사무관 호칭은 안 붙여도 되니까.”
진명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람을 한 시간씩이나 감금해 놓고!”
“공항 직원들을 탓하진 말아요. 그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난 비행기를 타야 한단 말입니다. 내가, 탈 수는 있는 겁니까?”
“그걸 알아보기 위해 이렇게 부랴부랴 달려온 것 아니겠소?”
그는 화가 난 진명은 아랑곳없이, 늙은 몸짓으로 느긋하니 품에서 작은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조작하는 폼이, 진명의 신상정보 데이터를 불러오는 듯했다.
진명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인류관리국? 그런 기관이 있었던가. 하긴, 지금 같은 시대엔 전 지구적인 관리가 필요한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름 한번 거창하네.
그는 직감적으로 긴장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 늙은 남자는 보통내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코번이 단말기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번거롭게 한 건 알지만 나도 꼭 확인을 해야 할 임무라서 말이오.”
진명은 대꾸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코번은 진명의 심리를 간파했다는 듯 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나오면 호떡을 타 볼 기회는 점점 멀어질 거요.”
진명은 다시 울컥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가 협조하면... 약속할 수 있습니까.”
“글쎄. 뭐가 문제인지 확인된다면, 그리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확인된다면, 아마 탈 수 있을 거요.”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 카드를 날렸다.
“비행기가 떠나기 전에 끝난다면 말이오.”
“좋습니다. 시작하시죠.”
코번은 씨익, 능글맞게 웃었다.
진명은 주도권을 갖기 위해 먼저 물었다.
“그럼 정식으로 묻죠. 그 앵무새 같이 떠들던 여승무원은 내가 탑승이 보류됐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뭡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요. 전 세계를 유람하는 크루즈 여객기는 예약자들을 대상으로 신원조회를 실시하고 엄별해서 탑승을 허한다오. 물론 그건 다른 탑승객들의 안전을 위해서고.”
“난 범죄를 저지르거나 불법행위를 한 적이 없어요.”
“물론 그렇겠죠.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니까. 어쩌면 본인은 모르는 어떤 범죄나 정치상황에 연루됐을 수도 있소. 또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 아니면 당신과 안면이 있는 그 누군가가 그런 경우일 수 있고. 그런 경우 대개 탑승이 제한되거나 반려되고 그 정보들은 경찰에 넘겨진다오. 하지만 ‘보류’ 라면······.”
늙은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판단하기 애매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 늙은이가 이렇게 직접 나온 거라오.”
코번은 여유 있게 끄덕이고는 진명과 단말기에 뜬 사진을 비교하며 보았다. 그리고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봅시다. 이름이······ 맥퀸 장 진명 씨. 일단 사진보단 실물이 나아 보이는구려. 분위기도 지적이고.”
예의상 하는 소리려니 생각한 진명은 대꾸하지 않았다.
“주거지는 서울 시티 종로 지구, 나이는 서른두 살······ 아, 연방세대로군.”
그는 호감 어린 눈빛을 보이며 덧붙였다.
“난 연방세대들을 보면 마냥 부럽단 생각을 하곤 한다오. 나 같은 구시대 놈들과는 확실히 다르니까.”
진명은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전 세계가 연방으로 통합되기 이전 세대들이 지구연방 이후 태어난 젊은이들을 행복한 세대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만 다를 뿐 사람이란 언제나 매한가지다.
“직업은 아직 학교에서 공부 중이시고, 전공이······ 아, 심리역사학이로군!”
그는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명을 다시 보았다.
진명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코번이 상기되면서 말했다.
“나는 그저 공무원일 뿐이라 잘 모르지만, 그거 요즘 한창 뜨는 학문 아니오?”
“글쎄요, ‘뜬다’ 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 같군요.”
그 말에는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심리역사학은 그 자체로서 이목과 관심을 받아선 안 되는 학문이었다. 그럴수록 심리역사학의 통찰은 무너질 테니깐.
그러나 진명은 코번의 반응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니오. 정말 반갑소이다, 젊은이. 그런 게 현실 속에서 실제로 연구된다는 게, 나 같은 늙은이에게 얼마나 신기하게 보이는지 아시오?”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전공이 소설 속 상상의 학문일 뿐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심리역사학은 본궤도에 오른 지 이미 오래였다.
사람들의 그런 선입견을 알고 있기에 진명은 태연하게 말했다.
“저도 연구실에 있을 때마다 같은 신기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말이오.”
코번의 얼굴에 문득 장난기가 나타났다.
“심리학자들은 수학자인 거요, 아니면 역사학자인 거요?”
짓궂은 질문이었다. 심리역사학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은 그런 식으로 질문하길 좋아했다.
그러나 진명은 이런 상황에서 말장난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심리역사학자지요.”
“아, 이런. 미안하오. 농담이었다오.”
코번이 곧바로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웃으면서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심리역사학의 시초는 아이작 아시모프인거요, 해리 셀던인거요?”
그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는 우연하게 만난 심리역사학도를 이용해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겠다는 짓궂은 의도가 서려 있었다.
진명은 일순 짜증이 일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비행기를 타야 했으니까. 어쩌면 그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지도 모른다.
“아시모프 박사가 심리역사학의 출발이라면, 셀던은 그것의 지향점이지요.”
사실 그 문제는 심리역사학자들의 공론화 된 화두이기도 했다.
코번이 감탄하는 눈으로 공감했다.
“아, 그렇군. 아시모프가 소설 속에서 심리역사학을 창조했고 그 소설의 주인공인 셀던이 그것을 완성했으니까! 현실의 심리역사학자들은 아시모프의 상상력을 근간으로, 해리 셀던처럼 미래에 대한 예견을 목표로 삼는단 말이지. 그런 거죠?”
문득, 진명은 이 늙은 남자가 만만한 상대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연신 진명을 살피는 그의 표정이, 스크루지처럼 교활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단말기를 살피며 말했다.
“그럼 계속 볼까요? 현재 박사학위를 준비 중이시고, 논문 제목이 ‘중세 유럽 농민봉기의 확산과 21세기 한국 촛불운동의 확산에서 나타나는 변수들에 대한 심리역사학적 고찰’ 이군요?”
진명은 그가 어떻게 자신의 논문 제목까지 아는 건지 궁금해졌다. 논문을 제출한 건 고작 지난 주 월요일이었는데. 인류관리국은 생각보다 큰 기관인가 보지?
자신의 논문이 화제로 오르자 진명은 괜히 어색해졌다.
“그건 그저 심리역사학이라는 거대한 고목에서 뻗어 나온 작은 가지 하나를 확인한 겁니다. 역사적 변수들에 대한 심리역사학적 증명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내용인가요?”
진명은 껄끄러운 눈으로 코번을 보았다.
“제 논문 이야기를 하기에, 여긴 적절한 장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녜요. 아니라오.”
그는 손을 들어 저으며 자신의 호기심을 강조했다.
“학문을 말하는데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을까. 또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디 가서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들어보겠소. 늙은이를 위해 조금만 설명해 주겠소?”
진명은 난감해지며 코번을 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늙은 남자의 얼굴에는 순수한 호기심과 그것이 채워지리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진명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코번 씨께서 심리역사학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지 모르지만, 심리역사학은 인간집단의 행위를 수학적으로 모형화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입니다.”
“공기입자 하나의 움직임은 예측할 순 없지만, 공기 전체의 흐름은 예측할 수 있다!”
코번이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곤 부끄럽다는 듯 덧붙였다.
“나도 그 소설을 읽었다오. 아주 오래전에, 어렸을 때지만.”
진명은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주름 가득한 그의 표정이 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렇습니다. 개인이 아닌 수많은 인간들의 집합에 대해서만 적용된다는 것이 심리역사학의 기본 전제죠(사람들이 심리역사학의 작동원리와 그 결과에 대해 몰라야 한다는, 또 다른 전제에 대해선 생략하죠). 현재 심리역사학의 위상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반응하고 선택해 온 사건들에서 수학적 공식들을 도출해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언젠가 그것들이 미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보여주리라 믿고 있지요. 그리고 책을 읽으셨다니 아시겠지만, 그것은 아주 지난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꽤 많은 역사 속 사건들의 변수들이 심리역사학적 공식화가 이루어졌지만, 우리들 앞에는 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펼쳐져 있는 상태랍니다.”
“인간의 역사가, 짧지만은 않으니까.”
“맞습니다. 제가 심리역사학이라는 고목의 가지들을 말씀드린 건 그런 이유예요. 그 거목의 수많은 가지와 잎들이 수학적으로 공식화되어야 할 요인과 변수들인 겁니다. 제 논문은, 그 중 위쪽의 작은 가지(사실 고목의 어느 부위에서 뻗어나간 가지로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만) 하나를 들여다 본 겁니다. 두 역사적 사건에서 변수들의 공통점을 증명하고 거기에서 수학적 공식을 이끌어내고 있지요.”
“중세 유럽의 농민운동과 21세기 한국의 촛불운동에서 말이오?”
진명이 끄덕이며 동의하자 코번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이해가 안 되는구려. 중세의 유럽과 21세기의 한국은 시대가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다른데······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거요?”
“그건 전적으로 역사학적인 질문입니다, 코번 씨. 역사학적으로 보면 두 운동의 태동과 진행, 결과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죠. 말씀하신 것처럼 중세와 21세기의 두 지역은 시대가 다르고 지역적으로도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으며 물론 사람들도 다르니까요.”
진명은 코번이 이해했다는 걸 확인하곤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심리역사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18세기 유럽 농민운동과 21세기 한국의 촛불운동의 ‘태동과 확산 과정’에는 분명한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 같은 운동들이 벌어질만한 요인들이 깔려있었고 그것들이 확장될 수밖에 없었던 변수들 역시 존재하고 있었죠. 그 요인과 변수들은 심리역사학의 수학적 공식으로 이미 증명된 것들이고요.”
코번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진명을 보았다.
“나는 학자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중세 농민운동은······.”
“역사에서 커다란 이슈가 아니었죠. 그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진명은 코번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는 자신이 이 사적인 토론에 빠져들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맞아요.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 내내, 몇 백 년 동안 농민들의 계급은 농노 수준이었고 그들의 역할은 영주와 지주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였죠. 당시 유럽의 역사는 신흥세력인 상업주의자들과 그 후에 나타난 자본주의자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역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죠. 하지만 역사란 항상 강자들에 의해 써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런 강자들의 역사 속에서도 농민들은 언제나 그 밑바닥에 존재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 나갔죠. 그리고 결국 그들은 (제가 탐구했던 요인들과 변수들에 따라서)자신들이 원하는 걸 성취했고 이후에는 자신들의 포지션을 제대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촛불운동은 단기간 동안만 일어났잖소.”
코번이 진지한 학생처럼 물었기에 진명은 교수라도 된 듯 우쭐해졌다.
“그래요. 농민운동에 비하면 21세기 한국에서 태동한 촛불운동은 단기간에, 과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전복적이었죠. 하지만 21세기 초에 처음 일어났던 촛불운동이 그 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 기간은 중세의 농민운동과 비교한다면 매우 짧은 기간이지만, 근대 이후 급진적으로 발전한 기계화와 급변하는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본다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두 운동의 공통점은 뭐요?”
“봉건적 잔재에 반발하는 대중들의 욕구.”
“봉건적 잔재?”
코번의 얼굴에 장난기가 되살아나면서, 그는 어이없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농민운동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촛불운동은 21세기였잖소, 맥퀸 씨. 21세기가 봉건적이라는 건, 지나친 억측 아니오?”
“저는 봉건적이라는 표현을 정의할 위치가 못됩니다. 단지 심리역사학도일 뿐이니까요.”
진명은 자신의 부정확함을 시인한 후에, 논문에 썼던 표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건, 심리역사학적으로, 한국 사회에는 고착화 된 어떤 ‘변수’가 존재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되고 뿌리도 깊어서 21세기 중반까지도 한국이라는 사회를 억누르면서 사람들 인식의 성장을 더디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랜 기간 유럽 농민들을 짓눌렀던 중세 암흑기처럼 말이죠.”
“그것들이, 같은 변수란 말이오?”
진명은 끄덕이곤 말을 계속했다.
“중세와 21세기에 그 ‘같은 변수’ 가 존재했다는 전제가 증명가능해지면,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들의 공식 역시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억눌려 있던 대중(어떤 이름으로 규정해도 좋아요. 중세의 농민이든 민주주의 시절의 시민이든)은 먼저 외부환경에서 자극을 받지요. 중세시대의 농민들은 영주들에게서 독립해 나가는 도시들과 상업주의자들에게서 자극을 받았고 (같은 변수로 수식화 할 수 있는)21세기 한국의 시민들은 군사독재 시절 이후에 등장한 진보주의자들과 인터넷이라는 환경에 자극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미하고 수동적이던 대중은 영주, 지주들과 기득권자들에게서 같은 식의 억압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부조리한 처지들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 부조리한 환경을 바꾸기 위해 싸우기 시작합니다. 소심하고 지루하게 말이죠. 그러나 그러한 흐름은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대중들의 욕구는 저지당할수록 응집하고 때가 되면 폭발하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똑같은 성과를 이루지요. 중세 농민들은 농노의 지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고, 21세기 시민들 역시 부조리하고 반쪽뿐인 시민이 아니라 온전하게 성숙한 시민사회를 이룩하게 되지요.”
코번이 어느새 미동도 없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진명은 자신감 있게 부연할 수 있었다.
“좀 더 설명할까요? 초기의 촛불운동(당시에는 촛불집회라고 불렀다지요)은 아시다시피 미미했죠. 처음 몇 가지 정치적 사건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이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어요. 당시의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장악한 언론을 무기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폄하하고 매도했죠. 그럼으로 인해 촛불운동은 사그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꺼질 듯하던 촛불은 21세기 중반을 지나 후반까지 지속됐죠. 초기 촛불집회라 불리던 것이 본격적으로 촉발되어 촛불운동으로 명명된 것이 21세기 중반이후버터잖아요? 그런 양상을 볼 때 ‘촛불’이라는 말을 처음에 누가 어떻게 해서 붙인 건진 모르겠지만(전 그 연유를 알지 못해요. 저는 집합적이고 유기적인 흐름을 탐구하는 심리역사학도니까요) 상당히 타당해 보입니다. 그 운동의 태동과 과정 그리고 마지막 타오름까지, 그 속성이 촛불과 똑같으니까요.”
진명은 말을 마치고 코번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듣다가, 진명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으쓱하면서 본래의 여유 있는 얼굴로 돌아왔다.
“맥퀸 씨 말을 들으니 확실히 공통점이 있는 것 같군 그려. 하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 아니오?”
“그럴지도 모릅니다. 제 논문은 다른 시대의 두 운동을 심리역사학적 공식으로 증명해 보인 거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심리역사학적 공식으로 (결과가 알려지지 않은)다른 역사적 사건에 대입한다 하더라도 역사책에 기록된 것과 똑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심리역사학이 공식화해온 변수들이 맞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 변수들을 미래에 대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멋지군요. 맥퀸 씨.”
코번은 비로소 끄덕이며 여유 있게 웃었다. 그러다 생각난 듯 물었다.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말이오. 심리역사학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전할 것 같소이까?
진명은 이해 못하고 그를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심리역사학이 대세라는 건 나도 알겠단 말이오. 그런데 그것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그러니까, 인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냔 말이오.”
“그건, 심리역사학의 태동 근거를 보면 됩니다.”
이번에는 코번이 이해 못하고 진명을 보았다.
“해리 셀던이든 아이작 아시모프든 누가 심리역사학을 누가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는 이번 세기 들어서 지구연방으로 통합되었고, 코번 씨 말대로 저와 같은 연방세대들이 점차 주류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형식적인 통합만을 이룬 지구연방은, 앞으로 한두 세대가 지나면 실질적이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지구연방이 될 겁니다.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인류(그건 심리역사학이 필요로 하는, 아주 좋은 집단표본이 되겠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포화상태에 이른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어요. 새로운 대양을 향해 막 나아가려는 시점이죠. 인류는 우주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것이고 그곳에서 계속 역사를 만들어 갈 거예요. 그러나 그 모험은 지구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험이 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위험을 최소화할만한 근거가 필요한 겁니다. 그것이······.”
“그것이 심리역사학이로군요. 사전에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고,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죠. 해리 셀던이 했던 것처럼.”
진명은 끄덕이면서 웃었다.
“사람들은 뭔가, 끈을 잡고 싶어 하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의 심리역사학도 맥퀸 장 진명 씨가 낙관적으로 예견하기론, 심리역사학은 앞으로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다! 이거군요.”
“그러길 바랍니다.”
코번은 화답하듯 웃으면서 끄덕였다.
“부디 그렇게 돼서, 지구연방이 은하제국으로까지 번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소이다. 아, 물론 셀던이 계획했던 제국 말이오.”
“아시모프가 계획했던 제국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죠.”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같이 웃었다. 그러다 코번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단말기를 확인했다.
“이런, 이런. 맥퀸 씨 강의를 듣다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버렸네?”
“자, 잠깐만 요!”
진명은 웃음을 거두며 소리쳤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고, 기어이 교활한 영감에게 말리고 말았다는 후회가 일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말아요, 코번 씨! 아직 20분이 남았어요. 준비한 질문을 하세요! 이런 식으로 시간을 때우면서 내가 비행기에 타지 못하게 할 생각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원한다면 맥퀸 씨는 지금이라도 탑승할 수 있소이다.”
진명이 눈이 커지며 보자, 코번은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 몇 가지 질문이 더 남았소이다. 그래서 난 맥퀸 씨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파리 행은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라고 권하고 싶소이다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둘러대지 말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이 늙은이의 바램이고, 젊은이는 원하지 않겠지요?”
코번은 여전히 장난기 어린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진명은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만약 맥퀸 씨가 지금 탑승을 원한다면, 침실이 있는 1등석으로 자리를 옮겨 드리리다. 당신에 대한 시스템 오류는 전적으로 공항 측 책임이니, 그에 걸맞는 서비스로 보상하도록 하지요”
1등석이라니, 그런 횡재가!
진명이 말문이 막힌 채 어리둥절하니 코번을 보는데, 그가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래봬도 이 늙은이가 그 정도 능력은 된다오.”
진명은 정신을 차리고 확인받기 위해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그게?”
코번은 대꾸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아니이, 저에 대해 확인하신 게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이제까지의 우린 대화를 나눴잖소.”
“예?”
“그게 내가 맥퀸 씨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소. 내 질문과 당신의 열정 어린 답변 안에 모든 게 들어 있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진명을 향해, 코번은 마치 조언하듯 말했다.
“부디, 맥퀸 씨의 논문이 통과되어 명망 있는 심리역사학자가 되길 바라겠소이다. 그래야 이 늙은이도 보람이 있을 테니.”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심리역사학의 두 번째 전제가, 사람들이 심리역사학의 작동원리와 그 결과에 대해 몰라야 한다는 거라지? 지금이 그런 경우라오.”


4.

코번이라는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진명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의 들뜸과 설렘은 아니었지만 유쾌한 대화였고, 다른 충만함을 주었다(아마 뜻하지 않게 자신의 논문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부터 칭찬 아닌 칭찬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1등석에서 여유롭게 2박3일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었다.
사람들이 호떡이라고 부르는, 납작한 비행접시처럼 생긴 스카이엔젤은 지구연방시대에 만들어진 대형 크루즈여객기였다. 수천 명이 넘는 승객을 태우고 전 세계 위를 유람했고 경유지마다 일반 승객들을 태웠다. 옛날 선박으로 여행했던 시절처럼, 스카이엔젤 안에는 모든 유락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세상 ‘위’를 군림하면서 전 세계를 유람했다. 운항이 비정기적이었고 경유하는 도시도 매번 달랐기에 자신의 도시에 내려앉은 스카이엔젤을 탈 수 있는 일반 탑승객은 행운아였다. 진명은 그런 일반승객들 중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1등석을 거머쥔 케이스였다.
완두콩 형태의 캡슐 침대 위에 커다란 관망창이 달린 1등석은 마음에 꼭 들었다. 1인용 객실이었기에 비록 비좁긴 했지만 여행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고 필요하면 언제든 다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이륙하기 직전에야 올라탄 진명은 거대한 여객기를 한 바퀴 둘러보는 데에 하루를 모두 투자했다. 그중에서 ‘다이빙 인 더 스카이Diving in the Sky' 에서의 경험이 최고였다. 여객기 중앙부에 위치한 대형 수영장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고 세상 위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이었다. 밑바닥이 투명했던 것이다. 3m 물 속 아래로 다이빙해 내려가면 물 밑으로 아래 세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물속을 떠다니면서 구름과 그 아래 육지를 ’내려다보는‘ 경험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구름 위에서 관망창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경험은 또 어떤가. 말 그대로 하늘의 천사가 되어 구름 위를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공항에서의 ‘보류’ 사고는 전화위복이었지만, 정작 진짜 사고는 스카이엔젤에서 일어났다.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였다. 시간이 꼬박 하루를 되돌리고 있을 때 진명은 서울 시간대를 따라 완두콩 캡슐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어떤 거대한 흔들림(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지만,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때문에 눈을 떴고, 어느새 캡슐이 봉인된 채 요동을 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는 와중에 직감적으로 느낀 것은 스카이엔젤이 추락하고 있다는 거였다. 거대한 크루즈 여객기가 기울어지면서 그는 캡슐 안에 갇힌 채 유리벽에 부딪치고 쏠리는 중이었다. 캡슐을 열고 선실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밀봉된 완두콩 캡슐은 끔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 승객보호장치가 작동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비행기 자체가 추락해 버린다면 이따위 보호장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진명은 겁에 질려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이런 것이 진짜 사고였다!
진명은 갑자기 모든 것이, 자신에게 일어났단 상황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자신을 저지하던 여승무원. 그녀의 앵무새 같은 소리를 들었어야만 했다. 코번의 권유. 그의 ‘내일 비행기를 타길 바란다’던 권유를 받아들였어야만 했다. 이렇게 거대한 비행체가 추락한다면 승객이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항공사고 역사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판단이 서자 진명은 계속 두려움에 떨면서 소리를 질러야 할지 아니면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고통없이 죽기만을 바라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체의 흔들림은 더욱 격렬해졌고 가속도가 붙으며 떨어지고 있다는 걸 몸으로, 캡슐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캡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캡슐 밑을 받치고 있던 다리가 움직여 완두콩을 돌리면서 곧추세웠다. 그 바람에 진명은 아래로 쏠리면서 좁은 캡슐 밑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어서 침실 바닥이 동그랗게 열리면서 캡슐을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갑작스런 하강의 반작용으로 진명의 몸은 다시 세워졌고, 그와 동시에 캡슐 밑쪽에서 비누거품 같은 액체들이 쏟아져 나와 캡슐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거품은 진명 주위로, 캡슐 안을 모두 채우면서 곧바로 고체화되었다. 역시나 사고를 대비한 안전대책인 것 같았지만, 이런 조치가 진명의 공포를 몰아낼 순 없었다. 여긴 상공 1만2천 미터 위 성층권이다. 이런 조치들은 모두 홍보용 안전대책일 뿐이다. 행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몸은 산산조각 난 채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럴 바엔 차라리, 차라리······.
그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채 선택할 수 없었고, 선실 밑쪽 어딘가로 연결된 튜브 안에서 점점 빨라지는 캡슐의 속도는 그의 생각 자체를 방해했다. 굳어져가는 거품 속에서 그는 발버둥 쳤고 손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숨을 쉬려 애쓰면서 본능적으로 머리를 흔들어 유리에 얼굴을 붙였다.
펑! 소리와 함께 튜브 끝이 열리며 완두콩 캡슐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엄청난 가속도 속에서 진명은 봉인된 유리를 통해 상황을 보려고,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한낮이었고 주위로 다양하게 하얀 구름층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거대하게 불붙은 호떡과 거기에서 팝콘처럼 튀겨져 날아오르는 십여 개의 완두콩들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밑쪽에서 우아하게 불타며 추락하는 중인 스카이엔젤을 다 확인하기도 전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비누거품이 다 채워진 것이다.


5.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에서 느끼는 시간은 사색을 함께 불러온다. 병원 침대는 일상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기나긴 침묵과 감당할 수 있는 고통과 또 다른 사색을 가져다주었다.
짧지 않은 재활치료 과정을 거치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질 즈음에, 진명은 자신에게 모종의 변화가 찾아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죽음의 경험은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했기에, 그는 다시 살아난 것에 감사했고 박사학위가 통과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설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자신이 한정된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임을 확인했고, 자신이 연구하고픈 과제들은 방대하게 펼쳐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학문을 좋아했고 계획했던 연구들에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가 선고한 시간은 아직 두 달이나 더 남아있었고 그 동안은 꼼짝없이 낯선 도시의 병실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침묵 속에서 빠져들었던 사색에 충동적 설렘이란 없었다. 처음 인천대교를 건널 때처럼 들뜨게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아이처럼, 한밤중에 열린 방문을 통해 부모의 섹스장면을 훔쳐보게 된 때처럼 당황과 혼란으로 심장이 뛰었다.
진명은 하나의 의문에 매달렸다. 그건 그가 재활수술에서 깨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대형 참사사고를 일으킨 크루즈기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규탄하는 급진론자들에 대한 뉴스를 본 뒤부터였다. 처음에는 고통과 경황없음에 깨닫지 못했지만,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의문은 그 사색의 기간 동안 내내 진명을 잡고 늘어졌다. 그는 공항에서 만난 코번 뭐라는 남자의 마지막 말에 대해 숙고했고 이해해보려 애썼고 나름 몇 가지 가설도 세워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가 실마리를 찾은 건 김 토모모리 명우 교수와의 대화에서였다.
그의 지도교수이자 심리역사학의 선두 그룹 수장인 김교수는 런던의 심포지엄에 참석하러 가던 중에 일부러 시간을 쪼개 그를 찾아와 주었다. 사고에서 살아난 그를 위로해주었고 그의 논문이 통과된 것에도 기뻐해 주었다. 함께 병원 옥상에 마련된 미로정원을 산책하면서 진명은 자신의 의문을 이야기했다. 혼자서 세웠던 가설들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김교수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함께 고민해주었다. 김교수가 말없이 생각에 잠기는 걸 보면서, 그는 김교수 역시나 가설을 세우는 중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김교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진명에게 정답을 말해줘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자네도 심리역사학자가 되었으니 말해줘도 되겠지.”
이해 못하는 진명을 보며 김교수가 말했다.
“자네가 고민하는 그 사고에 대한 의문은 심리역사학자의 관점에선 답을 찾을 수 없네. 그건 단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시스템의 문제라네. 인구관리 시스템의 문제지.”
복잡한 수식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해답은 언제나 명쾌한 법이다. 인구관리 시스템!
진명은 한 순간에 모든 걸 깨달았다. 그 인류관리국 직원이 왜 자신을 인터뷰했는지, 자신이 왜 원래 좌석이 아닌 1등석 캡슐에 태워졌는지, 그리고 그 거대한 호떡이 왜 추락했는지.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의 탑승이 갑작스럽게 보류되고 그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는 늙은 남자에게 뜬금없는 강의를 펼칠 수 있었던 건, 그의 논문이, 제법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김교수는 진정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어 주었다.
“자네의 논문을 감수하면서, 나는 자네가 발견한 낙관적인 변수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했었지. 기억하나?”
그가 끄덕이자 김교수는 말을 이었다.
“자네의 논문은 시대가 다른 두 지역이 같은 변수들에 의해 흘러간다는 주장이었지. 그 이론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그것이 학위 심사과정에서도 통한 거라네(물론 자네가 사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변수는 현재까지 심리역사학자들이 밝혀낸 역사상에서 나타난 2만 8천여 개의 변수들 중 하나지······ 그런데 난 요즘, 다른 변수에 대한 가설을 하나 준비 중이라네.”
진명이 보기에, 김교수의 가설은 이제 본격적인 심리역사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자신과 같은 새내기에겐 넘지 못할 장벽처럼 느껴졌다.
“다른 시대(그것이 봉건주의 시대이건 민주주의 시절이건 말일세)와 다른 지역(역시나 한국이건 유럽이건 말일세)의 역사가 동일한 심리역사학적 변수에 의해 작동되고 같은 흐름으로 흘러온다는 것은 분명하네. 우리 심리역사학자들은 그러한 전제를 염두에 두고서 역사의 변수들을 공식화하고 있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류의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또 다른 전제가 있다네. 내 가설에 의하면,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그 변수는 이제까지 역사의 밑바닥에 깔려 내내 흘러왔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우주시대에도 계속해서, 같은 변수로서 흘러갈 거라는 것일세.“
김교수가 런던으로 떠난 뒤 진명은 다시 사색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코번의 마지막 말에 매달렸고 아시모프(혹은 해리 셀던이)가 세운 심리역사학의 두 번째 전제를 곱씹어 보았다. 그 전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심리역사학이 결국에는, 대다수 사람들의 유기적 흐름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한계였다. 만일 사람들이 ‘심리역사학의 작동원리와 그 결과에 대해 몰라야 한다’ 하더라도, 인류라는 거대한 흐름이 나아가고 거기에서 반복적으로 생성되는 역사의 결과는 언제나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구연방으로 하나가 되어 우주로의 항해를 시작한 인류가 새로운 대륙에서 다른 종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역사는 분명하다고 예견할 수 있다. 대양을 건너와 신대륙을 발견한 전제국가의 함대가 그곳 원주민들에게 행했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다.
학문에 대한 생각은 개인적인 처신으로 옮겨갔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건 그냥 사고였다. 그는 스카이엔젤을 예약했고 제 시간에 날짜변경선을 지나 추락할 예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들의 계획된 시스템 안에서.
만일 자신이 논문을 조금 늦게 제출했다면 어땠을까. 또는 논문의 가치가 지금보다 떨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의 탑승은 ‘보류’ 되지 않았을 것이다. 코번과의 사적인 인터뷰(이제는 더 이상 유쾌하지 않은) 역시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등석으로 옮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완두콩 캡슐 안에서, 굳어가는 거품 속에서 보았던 마지막 광경이 떠올랐다. 화염에 불타오르며 우아하게 추락하는 거대한 호떡을. 의식을 잃어가면서 그는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되새겨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다른 혼란. 자신의 탑승이 보류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가? 이 연방세계의 선택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많은 이들처럼 한쪽 눈을 감은 채 살아가면 된다. 다른 곳만을, 자신이 보고 싶은 곳만을 보면 된다. 그러나 그는 이제 박사가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식인 무리에 든 것이다(그가 탑승이 보류된 사건은, 그의 계급의 변화를 무엇보다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고뇌를 시작할 때임을 알았다. 한쪽 눈을 감아버릴 것인지, 두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할 것인지. 소위 지식인의 고뇌를.
아직은 혼란스러웠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진명은 자신의 고뇌가 심각하게, 오랫동안 계속될 거라는 것만은 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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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발표 5월 2일까지 지연됩니다.1 2011.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1.03.26
가작 식물의 집 2011.03.2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02.26
우수작 종의 기원 2011.02.26
가작 두세 계1 2011.02.26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1.01.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0.12.31
우수작 성문 너머 코끼리4 2010.12.31
가작 우리는 모두 죽을 겁니다. 2010.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0.11.26
우수작 마지막 겨울 下 2010.11.26
우수작 마지막 겨울 上 2010.11.26
가작 오지맨디어스 2010.11.26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3 2010.10.29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4 2010.09.29
가작 사고1 2010.09.29
가작 브리타니아의 마녀1 2010.09.29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발표 28일까지 지연됩니다. 2010.09.25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4 201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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