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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브리타니아의 마녀

2010.09.29 12:1909.29

◆ 1 ◆

"드루수스님, 좀 말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수석백인대장이 물었다. 여기저기 쌓이는 술병의 양만큼 그의 근심도 늘어났다. 그야 그럴 것이, 아무리 행군을 마치고 숙영지를 지은 뒤라고는 하지만, 여기에서 술을 먹는 사람들은 전부 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로마인에게 포도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보급품에 포함된 포도주는 요리나 상처치료 보다는 마시는 용도다. 다만 그 술을 식사 도중에 반주로 마시느냐, 식사 후에 안주를 놓고 본격적으로 마시느냐가 문제다. 요 며칠 사이에 내 휘하의 병사들은 티베리우스 황제처럼 되어갔다. 포도주에 물을 섞지 않고 그대로 마셔버리게 되었다는 얘기다.
당연히 말려야한다. 병사들이 술에 취한 사이 적이 몰려와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내 모가지 정도는 대번에 잘려나갈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브리타니아 속주의 총독까지 있었다. 평소보다 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술을 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총독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얼마 전에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에 취임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틸리우스는 평시에는 자신이 세 개의 군단을 통솔하는 사령관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처럼 행동한다. 몇 번 있었던 픽트인의 공격에서는 앞장서서 군단을 이끌고 칼레도니아 깊숙한 곳까지 반격에 나서는 용맹함을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걸핏하면 호위병들에게 술을 먹이려 들었다. 가급적 군단기지 밖에서는 술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듣고는, 오히려 군단기지 안에서는 반드시 먹어야한다고 주장하며 술병을 내밀곤 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군인으로서는 아무래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괜찮지 않습니까? 저만큼 인기 좋은 분은 처음 보는데요."
옆에 있던 백인대장의 말이었다. 확실히 내 짧은 군 경험에서 봐도 저 정도로 인기 좋은 상관은 없었다. 군대에 뼈를 묻은 백인대장의 말이 그렇다면, 그렇게 나쁜 건 아닐 것이다.
"병사들과 숙식을 함께 하시는 거야 긍정적으로 봅니다만, 그래도 근무 중에 술을 저렇게 먹이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원론적인 말을 해보았다.
"사령관께서 하라고 하시는데, 어쩔 수 없죠."
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와 수석백인대장을 제외하고는 이내 술판에 동참해버렸다.
이런 상황이 여러 날 지속되다보니, 행군 이후의 술판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 행렬은 엄연히 제국과 동맹을 맺은 부족과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신임 총독이 자신의 임지를 순람하며, 직위를 남용하여 호위병으로 끌어온 2개 백인대원들과 먹고 마시며 놀기 위한 것과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처음에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던 자들도 군단기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일이 터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브리타니아는 안전한 속주가 아니다. 히스파니아 전체에 하나의 군단만 주둔하는데 비해, 그보다 좁은 브리타니아에는 세 개나 되는 군단이 배치되어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직접 군단을 이끌고 나섰던 픽트족과의 전투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속주 전체에서 반란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과한 것이 아닌데도 정신을 풀어놓고 있다 보니, 보름달을 가리며 나타난 해괴한 적이 코앞에 닿을 때까지 대부분의 병사들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는 상황이었다.
여덟 명이 사용하는 막사보다 더 큼직한 덩치를 자랑하는 적은, 그 커다란 날개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공터에 내려앉았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우리와 꽤 거리가 있는 곳에 서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람보다 다섯 배는 넘는 키를 자랑하는 저 괴물의 기준으로는 몇 걸음 안 걸리는 거리일 것이다. 괴물은 날개 겸 앞다리로 땅을 짚고, 이쪽을 향해 몇 걸음 내딛었다. 성큼성큼 내딛는 발은 순식간에 나를 포함한 병사들을 공격범위 안에 두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있던 병사들은 방패와 투창을 고쳐들었고, 아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자들도 부산히 움직이며 장비를 갖추었다.
"웬 놈이냐!"
기세 좋게 외친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허리춤에서 칼을 빼들며 나섰다. 방패를 든 병사들이 서둘러 나서 사령관의 몸을 가렸다. 뒤따라 전투준비를 마친 병사들이 투창을 적에게 겨누며 사령관을 보호하듯 둘러섰다. 보통 같으면 병사들의 위세에 눌려 적이 스스로 물러서거나, 적어도 사기가 꺾일만한 상황이었다. 온 세계를 둘러봐도 적수를 찾을 수 없다는 로마의 군단병들이다. 그것도 군단 내에서 가장 강하다는 제1대대의 제1백인대와 제2백인대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적은 당장이라도 창을 던져 상대방을 고슴도치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군단병들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의 높고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군단병들이 움츠러들었다.
"가이우스, 나를 환영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대접이 너무 심한 것 아냐? 한 때 애인이었던 아녀자에게 바늘을 들이대는 게 당신의 예의인가?"
병사들은 눈에 띠게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의 형체가 아닌 생물이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점차 커지다가, 어느 병사의 외침에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마녀다!"
그리고 잠시 동안 멈춘 술렁임은 산발적인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마녀다아악!"
주로 갈리아인, 게르만인 병사들이 패닉에 빠져들었고, 다른 병사들은 아까까지의 당황스러움에 패닉에 빠진 동료들로 인한 불안감을 품은 채 방패를 고쳐 쥐었다.
북방의 마녀에 대한 것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일대에서는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주술을 부리는 마녀가 거대한 비룡을 타고 날아다닌다는 이야기로, 나도 브리타니아로 온 뒤에 인근 부족의 사람들에게서 우연히 들은 것이니, 다른 지역 출신의 병사들은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이야기 속에서의 마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방패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인대장들이 겁에 질린 병사들을 독려하는 동안,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장중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며 마녀를 규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브리타니아 속주의 총독이며, 자신을 적대시 하는 것은 자신의 상관인 로마제국의 황제는 물론이고 황제에게 지지를 보내는 원로원 의원과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말로 할 때 썩 물러가라는 내용이었다.
사령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괴물은 꼿꼿이 세우고 있던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머리는 덩달아 조아려졌다. 병사들의 방패가 더욱 굳건하게 사령관의 앞을 지켰다. 투창은 스스로 날아 멀리 떨어진 적의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사납게 흔들렸다.
하지만 뒤이은 적의 행동에 병사들은 다시 당황하였다. 비룡이 고개를 숙이자, 비룡의 등에 타고 있던 마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물감으로 온몸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 넣은 마녀는 맨몸을 드러낸 채, 요란한 소리를 내는 쇳조각들을 매단 나무막대를 사령관을 향해 내밀고 있었다.
"닥쳐라, 가이우스. 가장 사랑했던 이를 잊은 자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한 때의 정욕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다 버렸으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불행하게도 이런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녀의 말에 동조를 표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속주 총독이자 사령관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틸리우스다. 바람기로 유명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이름과 씨족명이 같은 것이다. 카이사르에게서 씨족명을 받은데다, 그의 사생아일지도 모르는 그의 조상의 영향 때문인지,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젊어서부터 카이사르의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다고 전해진다. 바람기에 한정된 이야기였지만. 황제가 집정관에 취임한 뒤 은퇴하여 느긋하게 지낼까 하고 생각하던 그를 브리타니아 속주로 보낸 것은, 그에게 아내를 빼앗겼거나 빼앗길까 두려운 원로원 의원들의 강도 높은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 아틸리우스 사령관인 만큼, 한 때 사귀었던 여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녀들 중 하나가 그에게 원한을 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없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자연히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마녀에게 호통을 치던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손가락을 꼽아보고 있었다.
"……도미티아, 풀비아, 라엘리아……는 그럴 리가 없고…….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파울라……. 타티니아, 율리아와는 아직 사이가 좋은데……."
여자관계 때문에 제국에 위해가 가해졌다는 것만큼 꼴사나운 추문은 없을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지, 그래서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이 상황을 가급적 조용히 수습해야 묘비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틸리우스 여기에 잠들다. 플루톤이여, 속히 프로세르피나를 감추어라!'는 식의 문구가 새겨지는 일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가급적이면 그런 일은 머릿속에서 조용히 했으면 좋았을 것을,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했던 그의 행동은 상황을 더더욱 악화시켜갔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입에서 여자 이름이 하나 나올 때마다 마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서른 명 정도의 이름이 나왔을 무렵,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녀가 소리쳤다.
"닥치고 선택해라. 혼자서 조용히 나와 목을 내밀지, 병사들과 함께 저승에서 군단을 꾸릴지!"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진정하시게. 말로, 말로 해결하면 되지 않겠나. 우선 전후 사정부터 차분히……."
"개수작 부리지 마! 닥치고 죽을 방법이나 골라!"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좋아, 이 아이가 당신의 거시기를 물어뜯게 만들겠어."
"아니, 제발 내 말 좀……."
"필요 없어!"
"그러니까……."
아무래도 평화롭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내뱉는 말은 하나같이 마녀의 속을 뒤집어놓는 듯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면 피해자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사령관과 대작을 하며 좋다꾸나 하고 있던 병사들은, 이제 어째서 자신들이 저따위 인간말종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이어지는 말싸움을 보며 병사들이 하나둘씩 창을 늘어뜨렸을 때, 마녀가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부채질에 폭발해버렸다.
"됐어,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다시는 남자구실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주겠어."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뭔가 중얼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생소한 발음이 들리는 것을 보면 라틴어는 아닌 것 같았다. 내밀고 있던 나무막대 끝에 희뿌연 빛이 서렸다.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나는 칼을 뽑아들고 땅을 박찼다. 마녀가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볼 수 있도록, 그리고 마녀의 주술을 맞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룡이 가장 먼저 내 움직임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내가 달려가며 던졌던 투창이 비룡에게 거의 닿아 있었다. 비룡은 서둘러 날개를 들어 투창을 쳐냈다. 땅을 짚고 있던 날개를 들어 올리면서 비룡의 몸이 흔들렸고, 자연히 마녀의 자세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마녀가 주문을 외우는데 방해를 받았는지 나무막대 끝의 빛이 깜빡거렸다.
마녀가 당황하며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비룡의 날개를 딛고 뛰어오르며 칼을 들어올렸다. 마녀가 몸을 뒤로 젖혔지만 칼날이 베는 범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당황한 마녀는 나를 항해 나무막대를 뻗었다. 칼을 휘둘렀을 때, 나무막대의 끝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무언가가 내 가슴을 후려갈기는 느낌을 받았다. 충격에 몸이 날아가며 마녀에게서 멀어졌다. 칼을 끝까지 휘둘렀지만 뭔가를 제대로 베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갑작스런 빛에 흐려졌던 시야가 회복되고, 잠깐 동안 날아갔던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 마녀는 팔을 움켜쥐고 비룡을 조종하고 있었다. 비룡은 목에서 피를 흘리며 날개를 퍼덕여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나를 부축했다. 군의관이 달려왔지만 그가 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충격 때문에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숨 쉬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외상도 없었다.
곤경에서 벗어난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다시 위엄 있는 사령관의 모습으로 돌아와 나에게 공치사를 하고는, 자신이 아껴뒀던 비장의 포도주를 증정한다며 짐을 뒤지러 달려가려했다. 사령관의 가랑이 사이로 떨어지는 액체에서 눈을 돌리며, 나는 이동준비를 명령했다. 마녀가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찰과상 수준일 것이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일단 물러났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숙영지가 마침 에부라쿰 기지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아틸리우스 사령관과 그 수행원 몇몇을 이끌고 말을 달려 군단으로 복귀했다. 마녀의 목표가 아틸리우스 사령관이었기에, 일반 병사들을 떼어놓고 이동하는 편이 나았다.
군단기지에 도착하자마자 군단장인 아버지께 달려갔다. 마녀의 습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즉시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30분도 되지 않아 보초병이 두 배로 늘었고, 여기저기 밝혀둔 횃불의 수도 마찬가지로 늘어났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오늘 같은 날에는 마셔야된다며, 아버지를 뵙고 나온 나를 자기 숙소로 끌고 갔다. 거기에는 이미 자다가 불려나온 대대장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다시 한 번 공치사를 하고는, 오랜 세월동안 숙성시켰다는 포도주나 벌꿀주 같은 것들을 꺼내들었다.


◆ 2 ◆

바깥의 소란스러움에 눈이 떠졌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에 의해 티베리우스식 음주법으로 밤늦도록 마셔댔으니 멀쩡할 수가 없었다. 그가 풀어놓은 술은 분명 여태껏 맛본 적이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었지만, 다음날의 숙취까지 해결해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머리만 아픈 게 아니었다. 일어나 앉으려니 전신의 근육이 파업을 선언한 듯이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누워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평소보다 몸을 많이 움직인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호위할 때, 그가 매일 병사들을 자신의 술상대로 삼는 바람에 평소보다 훈련의 양은 적었다. 마녀와 대적했던 것은 전날의 가장 활발한 활동이었지만, 겨우 그 정도로 이렇게까지 몸이 녹초가 되지는 않는다.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며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는 투니카만 걸쳐져 있었다. 내가 나가떨어지자 동료들이 숙소로 나를 옮겨주고 갑옷을 벗겨놓은 것 같았다.
너무 늦게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 바로 나가지 않으면 수석대대장씩이나 되면서 지각을 해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사슬갑옷과 새 투니카를 꺼낸 뒤, 포도주로 얼룩진 투니카를 벗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다.

숙소에서 나서자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전날에 있었던 아틸리우스 사령관 습격에 대한 일로 회의를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지 중앙의 사령부로 향했다. 병사들이 나를 돌아보며 인사를 할 때마다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간단하게 인사를 받아주며 사령부에 들어섰다. 평소 같으면 아버지가 상석에 앉아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상석에 앉아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제의 영웅이 오셨구먼! 이보시게, 드루수스 군단장. 자네 아들이 마녀를 쓰러뜨렸으니 그에게 말레피카누스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게 어떻겠는가?"
아버지가 대꾸했다.
"과찬이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런 칭호를 부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겸손하구먼. 한니발을 무찌른 스피키오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부여했겠나? 뭐, 그건 그렇고……."
그가 나의 차림새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왜 그리 차려입은 건가? 너무 중무장인데 그래."
나는 평소와 달리 사슬갑옷이 아니라 철판갑옷을 입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여러 장의 철판을 연결시켜 만든 갑옷으로, 사슬갑옷보다 몸을 더 잘 방어해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보다 몸을 잘 가려주기도 했다. 입을 열기가 꺼려져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아버지가 말했다.
"여긴 최전선이지 않습니까. 어제 공격을 당하고 하니 경각심이 든 것이겠죠."
"그것도 그렇구먼."
다행스럽게도 적당히 넘어가게 되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아틸리우스 사령관과 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회의라고는 했지만 둘의 대화만 이어지고, 나머지는 조용히 앉아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여자를 모른다니까. 사귄 적이 있으면 잊을 리가 없지. 내가 만난 여자들은 하나같이 기억에 남을만한 여자들이었는데, 분명히 어제의 그 여자는 내 기억에 없어."
"하지만 그녀가 아틸리우스님의 애인이었다고 자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환장하겠다는 거야. 기억에 없는……. 잠깐, 여자냄새가 나는데."
그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자라뇨? 마녀 말입니까?"
아버지의 말에 몇몇이 일어나 칼자루에 손을 댔지만,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아랑곳 않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이건 자네 아들 냄새구먼. 하지만 어제까진 이렇지 않았는데……."
"아직 술이 덜 깨신 것 아닙니까? 지금도 입을 여실 때마다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요."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아버지의 빈정거림을 무시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에서 무언가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내 뒤에 서서 내 어깨를 잡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일세. 분명히 내 기억으로 리비아누스는 남자일세. 그런데 지금 내 감각이 이 녀석을 여자라고 말하고 있단 말이야. 게다가 전투 중에도 사슬갑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느닷없이 철판갑옷을 입는다? 뭐, 몸매를 가리기에는 좋겠군."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진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나르키소스 같은 생김새구먼. 여자라고 해도 못 믿지는 않겠어. 어제보다 턱선도 좀 갸름해졌고……."
"그만 좀 하십시오. 지금은 회의 중입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의 제지에도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내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갑옷을 벗어보게. 안에 투니카는 입었을 테지. 갑옷을 벗고 몸과 목을 보여주면 내 의심이 풀릴 거야. 그게 안 되겠으면 목소리라도 내보든지."
아버지가 이쪽으로 와서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완고하게 버텼다.
"자넨 가만히 있게. 지금 이 군단의 수석대대장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야. 자네가 없을 때 군단을 맡을 사람 말일세. 자, 리비아누스.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가만히 있도록 하게. 내가 확인해보도록 하지. 참고로 나는 남색에 흥미가 없다네. 이건 그냥 '남자'인 부하의 몸 상태를 살펴보는 것 이상이 아닐세."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얼굴은 달아올랐고, 그의 호흡은 거칠어져있었다. 빌어먹을. 쓸데없이 이런 데는 눈치가 빨라서. 그의 손이 슬금슬금 갑옷 속으로 들어오려 할 때, 결국 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만 두시죠."
내 목에서는 평소보다 새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벌레 보듯이 하던 이들이 모두 놀라 내게 시선을 모았다.
"리비아누스야,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무엇보다 아버지가 가장 놀랐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덤덤하게 말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된 것이겠는가? 자네의 아들이 여자가 된 것이지."
사령부는 당장에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탁자만 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힐끔거리며 나를 쳐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깜짝 놀라며 시선을 탁자로 향했다. 아틸리우스 사령관만이 히죽거리며 나를 노골적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비……. 아니, 코르넬리아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버지는 이미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결심한 듯했다. 아버지부터 남자이름이 아니라 여자이름으로 나를 부르자,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좋다구나 하며 거기에 따랐다.
"그러게 말이네, 코르넬리아양. 속 시원히 털어놓도록 하게."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이렇게 된 상황이라……."
"그 전에 마녀의 주술에 맞지 않았는가. 그것 때문이 아닐까?"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주술을 맞은 뒤에 한동안 아무 이상도 없었지 않습니까?"
"주술이 바로 효과를 보이리라는 법이 있겠는가? 오히려 몸을 뒤바꾸는 주술이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 지금 중요한 건, 코르넬리아에게 일어난 특이한 일은 주술에 맞은 것뿐이라는 얘기야."
"그러면 마녀가 원래 아틸리우스님을 여자로 만들려고 했었는데 코르넬리아가 그걸 대신 맞아버린 것이겠군요."
대충 그렇게 마녀의 주술에 의해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수석대대장 자리는 어떻게 하지?"
"글쎄요……."
"잠깐만요.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자리에서 물러나야합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여자가 수석대대장이라니, 말이 되는 소린가? 수석대대장의 자리는 로마 시민권이 있으면서도 원로원 의원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자리니까."
"하지만 저는 남자입니다. 비록 마녀의 주술 때문에 지금 이런 상황이기는 하지만, 알맹이는 남자라고요."
"어쨌든 지금은 여자지. 다른 건 몰라도 성별이 다르니 병사들과 어울릴 수가 없어서 안 돼. 병사들이 거부하면 어떻게 대처할테냐?"
아버지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
"우선 일시적으로 코르넬리아에게서 수석대대장 지위를 박탈하도록 하겠다. 수석대대장의 직위는 제2 대대장이 임시로 맡도록 한다. 코르넬리아는 신분을 증명해줄 병사 몇 명과 함께 로마로 복귀하도록. 아틸리우스님, 론디니아까지 동행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호위로 제1 대대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알았네. 내가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하도록 하겠네."
"하지만 아버지, 로마에 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 않습니까? 저는 여기에 남아서 마녀를 잡겠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마녀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게다가 여자의 몸으로 마녀와 싸우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로마로 돌아가 최고 제사장님을 뵈어라."
"황제폐하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뒤에는 폐하의 지시에 따르도록."
최고 제사장이 로마의 종교에서 최고위직이기는 하지만 뭔가 특별한 자리인 것은 아니다. 그저 국가에서 주도하는 제사를 주관하는 명예직일 뿐이다. 사람들이 흔히 신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기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해결되도록 기도를 해봐야 해결이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평소의 아버지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아무런 쓸모없는 짓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이상한 사태를 눈앞에 두고 평소의 신념을 바꾸신 것이라고 해도, 여자가 된 남자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을 주관하는 신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 사실상 완전한 해임이었다. 굳이 황제를 만나라고 한 이유는 이 일이 극히 기이한 일이라 최종결정을 유보하신 것에 불과할 것이다.


◆ 3 ◆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께서 로마에 저수지를 지으면서 한 번 모의해전을 한 뒤로, 저수지를 모의해전장이라고 부르게 된 거죠. 듣고 계십니까?"
다섯 벌 째의 옷을 찢어 모닥불에 던져 넣으며 아틸리우스 사령관에게 물었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그만 좀 하라고 이야기를 해도 들어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옷을 보내왔다. 호위병을 통해 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가져오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찢어버리거나, 불구덩이에 쑤셔 넣어버렸다. 이번에는 어째서 저수지를 모의해전장이라고 부르느냐고 물으면서 은근슬쩍 옷을 건넸다. 나도 거기에 대한 답을 하면서 은근슬쩍 옷을 찢어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여러 차례 항의를 했지만 아버지는 나의 말을 묵살하고 론디니움으로 돌아가는 아틸리우스 사령관과 동행시켜버렸다. 나는 스스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계속 군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쓰던 장비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고, 그래서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은 투니카와 사슬갑옷이었다. 외형이 조금 바뀐 것만 제외하면 예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거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기껏 여자가 됐는데 왜 여자 옷을 안 입는 거야!"
울상을 지으며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고함을 질렀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행동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코르넬리아가 지금은 코르넬리아이긴 하지만 한 때는 리비아누스였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지금은 '어찌됐든 지금은 코르넬리아가 아닌가!'하고 마음의 자물쇠를 풀어버리고 집적거리는 듯했다.
자신의 막사에서 식사를 같이 하자는 아틸리우스 사령관에게 퇴짜를 놓고 돌려보냈을 때,
"그래도 병사들과 함께 계시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현지 시찰에 동행했던 백인대장이 말했다.
"저는 원래 이렇게 했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수석대대장님이 예전과 같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예전에 남자였다고는 하시지만, 지금은 여자의 몸이십니다."
행세가 이상하여 살펴보니,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다른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같이 고개를 돌리며 동조를 표했다.
"맞습니다. 여자가 남자들처럼 무릎까지 오는 투니카만 입고 땅바닥에 앉거나 하는 건 좀……."
바뀐 것은 성별만이 아니었다. 남녀의 특징적인 차이뿐만이 아니라, 근육이 줄어들고 골격도 바뀌는 등, 내 몸은 마치 처음부터 완전한 여자인 것처럼 되어있었다. 보통 여자들과 다른 점은 머리카락의 길이 뿐이었다.
이건 병사들을 탓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백인대장에게 말했다.
"칼 좀 빌려주십시오."
"칼이라뇨?"
"사령관님을 뵈려고요."
갑옷과 방패는 가져올 수 있었지만, 투창과 칼은 압수당해버렸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찾아가는 건 '나 잡아 잡수쇼.'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허리에 칼이라도 차고 있어야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백인대장이 따라 일어났다.
"그냥 칼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아, 그게……. 드루수스님께 무기를 드리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일시적이지만 내가 군인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심리적인 압박 때문에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해진 거겠지.
백인대장과 함께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막사로 향했다. 론디니움에서 온 소식을 듣고 있던 그는 제 발로 찾아온 나를 보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사랑스런 코르넬리아여,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일단 자리에 앉게나."
그가 자신의 옆에 의자를 끌어놓으며 손짓했다. 나는 그와 맞은편에 앉았고, 백인대장은 내 뒤에 섰다. 그가 대놓고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기다리시게. 거의 다 끝나가거든."
그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몇몇 문서에 도장을 찍고는 전령에게 건넸다. 굳이 전령을 막사 밖까지 배웅한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돌아오며 내 옆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인가?"
"마녀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만……."
"아, 그 마녀 말인가? 그 얘기는 저번에 했지 않는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전혀, 말입니까?"
"물론이지. 그런 여자와 사귄 적이 있다면 절대 잊어버릴 리가 없다고."
온갖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벌거벗은 상체를 떠올리는 듯, 그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유피테르 신에게 맹세코, 정말로 모르십니까?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도움을 주신다면 입맞춤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가 울상을 지었다.
"이거 안타깝구먼. 자네의 첫 번째 입맞춤은 다른 방법으로 가져가야 될 듯싶네. 나는 정말로 모르니까."
"그렇습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 마녀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네. 내가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마녀를 고용하면서 그걸 일러줬다면,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내 옛 애인을 자처할 수도 있겠지."
"브리타니아에는 아직도 반로마적인 부족이 여럿 있지 않습니까? 그들 중 하나가 마녀를 고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을 텐데,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범위를 꽤 많이 좁힐 수 있어. 방금 론디니움에서 온 소식을 들어보니, 커다랗고 괴상한 생물이 밤중에 하늘을 나는 걸 목격한 사람이 여럿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론디니움에 마녀를 고용한 사람이 있을 테지."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라니. 유력한 증거 아니겠나? 그러니……."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어느새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놀라서 물러나려했지만 그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인대장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걸로 어떻게 안 되겠나?"
"네, 안되겠네요. 전 이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나섰다. 그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론디니움에서 괴생명체에 대한 목격담이 있었다는 소식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망망대해에서 헤매다가 갈매기를 만난 것과도 같았다. 어쩌면 다른 마녀일 수도 있고, 엉뚱한 것의 목격담일 수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론디니움에 가볼 필요는 있었다.
당장에라도 론디니움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굉장히 느긋하게 이동을 했다. 현지시찰을 할 때도 그리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번에는 유난히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식량을 챙겨 말을 타고 먼저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무기라곤 단검 정도밖에 가져갈 수 없다는 게 걸리긴 했지만, 가는 도중에 마을에 들러 창이든 칼이든 하나 구하면 될 테니 문제는 없었다.


◆ 4 ◆

마침내 저녁식사가 끝나고 보초병을 제외하곤 잠이 들 시간이 되었다. 식량 같은 짐은 낮에 미리 숙영지 바깥에 숨겨놓았으니 몸만 빠져나가면 된다. 어떻게 빠져나갈지는 생각해봐야 될 문제겠지만, 기병은 거의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타고 나가기만 하면 모두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아직도 불 옆에서 빈둥거리며 포도주를 마시는 몇몇 병사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사이,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구름이라도 낀 건가 싶어 하늘을 올려보니, 며칠 전에 봤던 비룡이 달을 가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비룡은 이전과는 달리 주변에 착륙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 바퀴 크게 회전하며 비행한 비룡은, 숙영지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보초는 뭐하는 거야! 모두 당장 일어나! 적습이다!"
고함을 지르며 막사마다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깨웠다. 보초들도 즉시 경보를 울렸다. 병사들은 굉장히 빨리 전투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비룡은 훨씬 더 빨랐다. 병사들이 집결했을 때는 이미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있던 막사 위에 비룡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막사가 비룡의 몸무게를 버틸 리가 없었다. 막사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기다시피 하며 막사에서 튀어나왔다. 비룡은 막사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막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칼을! 누가 칼을 다오!"
투구를 쓰며 주변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석백인대장과 병사 몇몇이 내 팔을 붙잡았다.
"뒤로 피하십시오.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내가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지만 병사들은 나를 놓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가뿐히 뿌리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당장 놓으라고 고함을 치는 사이, 비룡이 선회를 하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비룡은 독수리가 토끼를 사냥하듯 뒷다리로 병사들을 낚아채려했다. 병사들은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투창을 던져댔다. 비룡이 워낙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통에 거의 다 빗나갔지만 몇 자루가 비룡의 몸을 맞추기는 했다. 하지만 비룡은 약이라도 먹었는지 투창을 몸에 꽂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을 계속했다.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투창을 전부 던진 자들은 방패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칼을 뽑아들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칼을 빼들었다.
병사들이 나를 붙잡는데 소홀한 틈을 타, 나는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향해 달렸다. 아틸리우스 사령관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며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뽑아들려다 놓친 것인지, 사령관의 칼이 바닥에 나동그라져있었다. 그걸 집어 들면 충분히 싸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향해 달리자, 비룡은 다시 한 번 선회하더니 곧바로 나를 향해 날아왔다. 아직 칼이 멀리 떨어져있었다. 얼핏 봐도 비룡이 나를 낚아챌 때까지 내가 칼을 집어 들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허리에 매달고 있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비룡이 나를 낚아챘다.
비룡의 발톱이 나를 옥죄어왔다.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발톱이 살을 파고들거나 하진 않았지만, 압박감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나를 움켜쥔 채 그대로 날아오르는 비룡의 다리에 들고 있던 단검을 꽂았다. 심하게 흔들리는데다 비룡의 비늘이 단단해서 여러 차례 시도해야했지만, 비늘이 뜯어져나간 자리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룡은 투창에 맞았을 때처럼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직 투창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비룡이 나를 붙잡고 있다 보니 던지지 못했다. 비룡을 나를 잡은 채로 남쪽으로 날아갔다. 부상을 입지 않은 병사들이 쫓아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룡은 그리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비룡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뱉었다. 이제야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비룡은 투창에 꿰뚫린 날개를 힘겹게 퍼덕이며 아래로 내러앉았다. 다리에도 힘이 풀린 듯, 나를 잡고 있던 발톱이 풀려 떨어질 뻔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다가 수풀 위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면서 잔가지에 긁히긴 했지만 별다른 부상은 입지 않았다. 비룡의 피가 묻은 단검을 망토로 대충 닦은 뒤, 단단히 움켜쥐고 비룡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비룡은 땅에 너부러져 힘겹게 퍼덕거리고 있었다. 비룡의 옆에는 비룡에 타고 있던 마녀가 쓰러져있었다. 나는 마녀를 비룡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간 뒤, 팔을 뒤로 꺾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팔이 꺾이는 고통에 마녀가 깨어났다. 마녀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보고는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는 어디서 나타난 년이야!"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마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벌거벗은 사람의 멱살은 잡을 수가 없다. 대신에 꺾은 팔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여자로 만든 건 가이우스……. 아닌가? 아냐, 난 가이우스를 쐈다고. 네가 가이우스인가? 가이우스는 아까 있었는데……."
마녀가 횡설수설하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살펴보니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마녀를 풀어주고 망토로 그녀의 머리를 동여맸다. 남은 부분으로는 팔을 결박하고 병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 5 ◆

"아내라고요?"
"그, 그렇다네."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마녀는, 아니,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아내는 사령관의 옆에 앉아 마찬가지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틸리우스가 내게 입히려고 벼르고 있던 옷을 입고 있었다.
마녀를 포박하고 병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필두로 한, 말을 탄 장교들이었다. 달려와 말에서 뛰어내린 그는 대번에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내 팔다리를 매만지며 상처를 살피고 상태가 어떠냐고 묻는 그를 뿌리칠 기운이 없어 그냥 놔두었더니, '어서 옷을 벗고 상처를 치료해야한다!'면서 폭주하기에 사람들이 그를 제지했다. 뒤로 끌려나자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자신을 습격한 마녀의 정체가 뭔지 낱낱이 밝혀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마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으면서 얼굴에 그려진 문양이 지워진 마녀를 보고는, 기겁하며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대체 어떻게 자기 아내도 못 알아볼 수 있습니까?"
"아니, 그게……. 얼굴에 뭔가 덕지덕지 칠하기도 했고, 말투도 평소랑 완전히 달랐고 말이야……."
하긴, 보통은 원로원 의원이자 속주 총독의 아내가 벌거벗고 온몸에 문양을 그린 채 비룡을 타고 날아다닐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카밀라님. 대체 습격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수석백인대장에게 이름을 불린 사령관의 아내가 움찔하며 대답했다.
"다들 제 남편의 바람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아시잖아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아틸리우스 사령관만이 격렬하게 사실을 부정했다.
"브리타니아로 온 뒤에는 그래도 안심했어요. 애인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까요. 론디니움에서 살게 된 뒤로 한동안은 잠잠했고요. 그런데 작년에 에부라쿰 기지에 다녀오신 뒤로 선물로 쓸 물건도 왕창 구입하고, 그쪽으로 가시는 일도, 머무르는 기간도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그래서 습격했어요. 여자로 만들어서 다른 여자에게 껄떡대지 못하게 하려고요."
"부인, 그건 오해입니다. 아틸리우스님은 근처의 부족들과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해 드나드신 것일 뿐입니다. 구입하셨다는 선물도 각 부족의 부족장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을 테고요. 그리고 이곳에 빈번히 드나드신 이유도 이곳이 가장 불안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칼레도니아 지방은 아직 문명화가 되지 않은 곳입니다. 픽트족 같은 적대적인 부족이 난립하는 곳이라, 조금이라도 우호관계를 맺은 부족이 많아야 하기 때문이죠. 아무리 아틸리우스님이 여자관계가 복잡하신 것으로 유명하지만, 설마 최전선에서까지 그러시겠습니까?"
수석백인대장이 아틸리우스 사령관을 변호했다. 사령관의 표정이 꽤 밝아진 듯했다. 사람들은 아틸리우스 사령관의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이번 일은 아내의 오해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카밀라의 나이는 이제 20대 중반이었다. 아직 어린 여자의 착각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는 분위기였다. 카밀라는 얼굴을 붉히며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슬슬 내 몸이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저기, 제가 아틸리우스님의 현지시찰에 자주 동행했었는데, 몇 번 부족장의 딸들과 단 둘이서 손을 잡고 숲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막사 안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카밀라를 중심으로 차가운 기운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한 몇몇 백인대장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막사 안은 삽시간에 겨울에 접어들었다. 카밀라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하나도 아니고 돌아다닌 부족마다 애인을 만들다니! 용서 못해!"
아틸리우스 사령관이 놀라며 의자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단검을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내가 카밀라를 막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그녀를 막으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아틸리우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내가 이 꼬라지가 된 게 오로지 네놈의 바람기 때문이라는 거냐!"
막사는 남자가 아닌 사람과 남자였던 사람의 분노로 무너져 내렸다.

"다행이구나.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상관을 폭행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았느냐? 군법회의에 부쳐질 일이다."
"저는 그 때 수석대대장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긴 하지."
아버지가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도 아쉽구나. 딸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말이야. 그냥 다시 가서 여자로 바꿔달라고 하면 안 되겠느냐?"
"제가 집정관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들의 장래를 가로막으실 생각이십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거 참. 너는 황제폐하가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구나. 그분이라면 아마 네가 여자가 됐다고 하더라도 껄껄 웃으면서 복직시켜주실 것이다."
"그래도 여자가 되는 건 싫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뒤에서 어렴풋이
'불효자식 같으니…….'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댓글 1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발표 5월 2일까지 지연됩니다.1 2011.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1.03.26
가작 식물의 집 2011.03.2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11.02.26
우수작 종의 기원 2011.02.26
가작 두세 계1 2011.02.26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1.01.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0.12.31
우수작 성문 너머 코끼리4 2010.12.31
가작 우리는 모두 죽을 겁니다. 2010.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0.11.26
우수작 마지막 겨울 下 2010.11.26
우수작 마지막 겨울 上 2010.11.26
가작 오지맨디어스 2010.11.26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3 2010.10.29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4 2010.09.29
가작 사고1 2010.09.29
가작 브리타니아의 마녀1 2010.09.29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발표 28일까지 지연됩니다. 2010.09.25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4 201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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