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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슐라

2010.01.30 23:2301.30

  카슐라

  그 저택은 부자들의 집이 많기로 이름난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집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주인이 밖으로 나오는 광경을 목격한 이도 적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식품 배달 차량이 언덕을 올라가기 때문에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하는 모양이라고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짐작하고 있다.

  아래쪽 도로에서 저택 대문까지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밤색 지붕과 희게 회칠한 벽 일부만 보인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내비치지만 선뜻 다가가는 걸 꺼려하고 있다. 그 저택과 관련된 소문들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허황된 도시 전설이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몇몇 사람들은 저택 가까이 가봤다가 진짜로 유령이나 입가에 피를 묻힌 여자를 목격했다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모두 그 저택을 무서워한다. 혹자는 ‘공포의 저택’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저택과 주인을 잘 알고 있는 한 여자는 예외였다.

  저택을 올라가는 경사진 길로 자전거 한 대가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낑낑대며 페달을 밟아대고 있었다. 만일 이런 언덕길을 매일 자전거로 올라가면 허벅지가 근육으로 울퉁불퉁해졌을 거라고 불평을 하다가 결국 내려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올 수 있는 길 쪽으로 난 큰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자가 저택 안에 있었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고, 긴 머리를 하나로 땋고 묶어서 늘어뜨린 여자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안수희, 저택의 주인이다.

  안수희는 여자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서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문을 밀고 나가면서 정원에 발을 디디는 때에 맞춰서 자전거가 대문 앞에 도착했다.

  여자는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안수희가 나오는 걸 보고 올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안수희는 문을 열어주면서 어서 오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여자도 오랜만이라며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안수희는 그녀를 김서애라고 불렀다.

  “미안. 그동안 논문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었어.”

  그녀는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안수희는 학사 과정만 통과했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안수희는 김서애를 거실에 앉게 한 다음에 부엌으로 가서 차를 대접할 준비를 했다. 주전자에 물을 담아서 끓이고, 찬장 깊숙이 넣어둔 홍차 잎과 손님 대접용으로만 쓰는 웨지우드 티세트를 꺼냈다.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자 티포트에 찻잎을 넣고 끓는 물을 따랐다. 과자를 접시에 담아서 쟁반에 받쳐 들고 거실로 내가니까 김서애는 탁자에 비치해둔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안이 눈처럼 하얀 찻잔에 따라지는 붉은 찻물을 보고 그녀는 무척 좋아했다. 은은한 딸기 향이 풍겨오는 걸 눈을 감고 즐긴다.

  “딸기 홍차구나. 과자에는 딸기를 갈아 넣은 모양이지? 블루베리도 들어갔네.”

  김서애는 과자 하나를 집어서 입안에 넣었다.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라서 한 입에 쏙 들어갔다. 부드러우면서 은은한 달콤함이 입안에 번지자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네가 구운 과자는 맛있어. 그런데 비법은 언제 가르쳐 줄 거야?”

  안수희는 웃으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말했잖아. 반죽은 정성들여서 하고, 먹는 사람을 생각해서 정성과 애정을 조미료로 넣으라고.”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넸다.

  “요즘 비법을 자주 알려달라고 그러는데…… 손수 만든 쿠키를 전해 주고 싶은 좋아하는 남자라도 생긴 거야?”

  김서애는 그런 게 아니라고 웃으면서 안수희 어깨를 가볍게 후려친다. 두 사람은 웃으면서 좋아하는 남자가 없었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서애는 두 명을 거론했지만, 안수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김서애가 남자에게 흥미가 없는 거냐고 걱정스런 어투로 물었고, 안수희는 차와 과자를 먹으며 웃기만 했다.

  안수희는 찻잔을 입에 대면서 친구의 목덜미를 곁눈질로 노려보았다. 김서애의 목은 희고 길어서 예쁘다. 혀를 내밀어서 핥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본성을 따라서 깨물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문득 안수희는 친구의 옷 칼라와 가까운 목 아래쪽에 희미한 자국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급히 찻잔을 내려놓고 목 아래쪽을 보자며 달려들었다. 김서애는 목을 보이기 싫어서 몸을 비틀었지만 안수희의 힘이 세서 떨쳐 낼 수 없었다.

  희미하지만 밧줄 같은 걸로 조여진 자국이 확실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지만 친구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안수희는 또 목을 졸랐냐고 따지고 물었다. 김서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그래? 왜 그렇게 죽고 싶은 거야?”

  김서애는 찻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린다. 거실이 조용한 게,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안수희는 차라리 그럴 거면 네 피나 나에게 주고 죽으라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버리고 어깨에 손을 얹으며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그래서는 안 돼. 생명은 소중한 거야. 넌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어. 봐! 넌 계속 살아 있잖아?”

  김서애는 ‘상습 자살 시도자’ 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살 시도가 잦은 편이었다. 한때는 이틀이 멀다 하고 자살 시도가 잦았지만 그녀 가족의 열성적인 치료 시도 끝에 이제는 한 달에 서너 번으로 줄어들었다. 특징이 있다면 오직 밧줄이나 끈 같이 목을 조일 수 있는 종류만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칼 같은 날붙이나 투신 같은 방법은 생각에 없는 듯 했다.

   김서애는 찻물을 한 번 쭉 들이 킨 다음에 찻잔을 내려놓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컬렉션을 보고 싶다고 안수희에게 청했다.

  안수희는 친구를 가련하다는 눈길로 쳐다보며 따라오라고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에서 열쇠 뭉치를 집어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와서 왼쪽으로 돌아서 복도 맨 끝 방을 열쇠로 열고 들어갔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데, 오래되어 녹이 슨 경첩이 묵직한 비명을 질렀다.

  벽을 더듬어서 스위치를 찾아서 불을 켰다. 커튼을 걷으니까 방 안이 환해졌다.
안에는 세계 각지의 전통 인형들이 2단 진열대에 놓여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태국, 몽골, 필리핀, 캄보디아, 타이완, 루마니아 등에서 구할 수 있는 고유의 옷을 입은 예쁜 인형들이었다. 안수희는 모두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닐 일이 잦았던 부모가 사온 것이라고 말한다.

  김서애는 인형들을 모두 좋아하지만, 특히 문 맞은편 진열대 정 중앙에 놓인 루마니아 아가씨 인형을 특히 귀여워한다. 그 인형은 땋은 금발 머리 위에 챙 넓은 밀짚모자를 썼고, 상의는 레이스가 달린 바다를 연상케 하는 청록색 조끼와 청록색 끝을 단 눈처럼 하얀 치마를 입었고, 둥그스름한 앞치마 같은 것에는 노랗고 빨간 꽃 장식이 되어 있다. 얼굴은 달같이 복스러웠다.

  다른 인형들은 대충 둘러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루마니아 인형만 손 위에 놓고 보드라운 머리칼만 쓰다듬는다. 안수희는 김서애의 뒤에서 인형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김서애의 시야 밖에 있는 인형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이 씨익~ 씨익~ 하고 거친 숨소리를 내쉬면서 머리를 앞뒤로 흔들고, 팔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다리를 떠는 인형도 있었다.

  안수희는 눈을 부릅뜨며 가만히 있으라고 목소리를 낮춰서 윽박질렀다. 그러자 인형들은 얌전해졌다.

  안수희가 루마니아 아가씨 인형이 정말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넌 그 인형을 정말 특별하게 좋아하는 것 같아. 괜찮다면 선물로 줄게.”

  김서애는 그냥 마음에 드는 것일 뿐이고, 방에 둘 데도 없으니 받는 건 사양하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안수희는 인형까지 쥐어주면서 몇 번 더 가지기를 권했지만 김서애는 한사코 뿌리쳤다. 몇 번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김서애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벨소리가 났다.

  실랑이가 멈추고, 김서애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받았다. 김서애는 전화를 받자마자 깜짝 놀라며 어서 가겠다고 했다.

  “미안. 나 엄마 심부름하고 돌아가던 중이었거든. 나중에 또 올게.”

  급하게 달려 나간 그녀는 결국 인형을 가져가지 않았다. 안수희는 손에 인형을 쥔 채 현관에 서서 바삐 자전거에 오르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녀가 뒷모습이 사라지자 픽하고 웃으면서 도로 방으로 돌아와서 루마니아 인형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루마니아 인형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른 인형들이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입을 벌릴 줄 아는 인형도 있었다.
  옷에 달린 작은 핀을 떼어 내서 손에 들 수 있게 된 인형도 있었다.
  엉덩이를 힘껏 움직여서 앞으로 조금씩 움직일 줄 아는 인형도 있었다. 인형들은 안수희에게 증오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만일 달려들 수만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놓았으리라. 움직이지 않는 인형은 루마니아 인형뿐이었다.

  “모두 시끄러! 저 아이를 본받는 게 어때? 하긴… 쟤만 영혼을 넣어두지 않았지….”

  그래도 시끄럽게 떠들자, 안수희는 화를 내면서 켜지지 않은 천정 등과 벽 등을 모두 켰다. 강렬한 빛이 일시에 쏟아져 내리자, 인형들은 괴롭게 몸을 비틀면서 머리를 진열대 바닥에 처박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더 벌을 길게 주겠어. 내 소중한 친구에게 들켰으면 어쩔 뻔 했어?”

  안수희는 커튼까지 활짝 젖혀서 햇살이 들어오게 한 다음에 방을 나갔다.

  복도로 나온 안수희는 아래층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을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거실에서 빙빙 돌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찾다가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이번에는 안방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안방 문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거실로 돌아와서 팔짱을 끼고 쥐새끼가 벽 속에서 놀고 있는지 생각하고 해층 전문 회사를 부를 것을 고려하던 중에 온 몸의 털이 쭈뼛하고 곤두서는 느낌을 체험했다. 안수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보다 두려운 이여.”

  집 천장이 마치 파문이 이는 수면처럼 일렁거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점액 같은 것이 천천히 낙하를 시도하는데, 순간 안수희가 고개를 뒤로 젖혀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본 천장은 평소처럼 바람과 비, 더위와 추위 등에서 자기를 보호해주며 아늑함을 주고 있었다. 인형들 때문에 기분 탓 일거라며 좋게 생각해서 넘어가고 싶었다.

  문득 안수희는 갈증을 느끼고 부엌으로 가서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한 컵을 다 마셨지만 이상하게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아서 주전자 째로 마셨다. 그래도 갈증은 계속되었다. 아예 정수기 꼭지에 입을 대고 마셨다. 정수기 물탱크가 바닥이 나서야 부엌 옆에 붙은 달력을 보고 날짜를 헤아려 본 다음 정기적 공급 시기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자기 방으로 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현관문을 밀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은 숟가락으로 눌린 젤리처럼 말랑하게 변하면서 안수희의 손을 되밀어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자페슈탄…….”

  “이제 더 이상 당신의 힘이 필요하지 않네요. 당신을 찾는 다른 이들이 있지 않나요?”

  거실 벽에 붉고 큰 글씨로 대답이 휘갈겨졌다. ‘No.' 이라는 문자를 보고 안수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내게 원하는 게 있나요?”

  맞은 편 벽에 ‘Yes’ 이라고 휘갈겨 써졌다.

  “무엇이지요? 말해 봐요.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더 줘야 돌아갈 건가요?”
안수희는 수 십 가지의 질문과 단어를 허공에 대고 늘어놓았지만 벽에는 전부 'No' 이라고 쓰였다.

  “자꾸 이렇게 하면 뱀파이어인 저도 무서워져요.”

  그녀는 비로소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송곳니가 길쭉해지고, 얼굴이 얼음처럼 창백해졌다. 목구멍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위협을 가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조롱하는 듯이 거실 안이 온통 갖가지 환각으로 가득 찼다.

  안수희는 참다못해서 방으로 도망쳤는데, 그곳도 이미 환각으로 가득했다.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보려고 했지만 글자가 창문에 그물 모양으로 빽빽하게 쳐지며 안수희의 앞을 가로 막아서 나갈 수 없었다. 그를 떠나보내려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하는데, 예, 아니오. 으로만 대답을 하니까 무엇을 원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순간 안수희는 뒷머리에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안수희는 이것은 환상이라고 외쳤다. 어째서 옛날의 일이 떠오르고 있단 말인가.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지만 떠올리면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그녀는 파란 잠옷을 입고 있었다.

  피구덩이 속에 서서 손에 피를 묻힌 채로 혀를 내밀어 연신 핥아먹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발목을 붙들었다. 파란 잠옷을 입은 안수희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중년 여자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슐라…….” 하고 있는 힘을 쥐어짜서 말하고 있었다. 카슐라는 안수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안수희는 여자를 알고 있었다.

  카슐라는 발을 들어서 여자의 목을 짓밟았다. 그대로 발목을 비트니까 우두둑 소리를 내면서 여자의 목이 부러지면서 몸을 바르르 떨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의붓어머니이지만 죽어도 싸지…….’

  그 자리에서 절명한 여자는 바로 카슐라의 의붓어머니였다. 주위에 의붓아버지와 의붓동생들의 시신이 피구덩이 속에서 눈이나 팔을 내민 채로 죽어있었다. 피가 내를 이루어 흘러가는 데, 많은 시신들이 피 속에 잠겨 있었다. 자신은 그 속에서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피 속에 얼굴을 박고 맛있게 마시고 있었다.

  카슐라가 이쪽을 보았다. 환상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칠 리는 없지만 카슐라는 씩 웃고 있었다. 안수희는 눈을 크게 뜨면서, “그들은 그럴 만한 짓을 했어.” 하고 중얼거렸다.

  새 가족들이라며 나타난 그들은 안수희를 학대했다. 어떤 경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친부모와 친오빠, 동생들을 모두 함정에 빠뜨려서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폐인으로 만들어 지하에 가두고, 오직 어린 자신만 살려서 옆에 두었다.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의붓아버지는 그녀를 자주 어두운 곳에 가두어 놓고 가죽혁대로 매질을 했고, 의자매들은 꼬집고, 때리고, 할퀴었으며, 의동생들은 발로 걷어차거나 심지어 겁간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피가 맛있다면서 보름 간격으로 일정량의 혈액을 채취했다.

  어린 그녀는 아직 본성이 덜 여물어서 어둠 속에 홀로 있는 걸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었다. 의붓어머니는 그마나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녀는 피를 뽑힌 카슐라에게 고기 따위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슐라는 다른 가족처럼 그녀도 미워했다.

  12살에 그녀는 뱀파이어의 본성을 각성했고, 1년 뒤에 어둠에 녹아드는 법까지 깨달은 카슐라는 새 가족을 모두 살해하고, 그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셨다. 시체는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다음에 지하에 붙들려 있는 친부모들과 혈육들을 해방시켜 주려고 굳게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갔지만 이미 모두 뼈와 가죽만 남은 폐인이 되어 있었다. 카슐라는 난생 처음 눈물을 흘리며 제발 죽여 달라는 친 가족들의 청을 받아들여서 그들의 피를 빨았다.

  경찰은 한 명만 남기고 일가족이 사라진 사건에 대해서 실종 처리를 했고, 카슐라에게 혐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연히 친 가족과 의 가족이 남긴 막대한 재산과 저택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이후로 본명인 카슐라 보다는 안수희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본성을 각성한 후에 안 것인데, 안수희는 자신이 인간이나 짐승의 피를 빨기보다는 동족의 피를 빠는 걸 더 원한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 본능에 충실해서 저택 주변을 뒤져서 자신과 같은 동족 몇 명을 찾아낸 다음에 친하게 굴었다. 그들과 교류하면서 가끔 인간을 대상으로 흡혈을 같이 하면서 의심을 줄이고 난 다음에 어느 날 갑자기 뒤에서 공격해서 피를 빨았다. 그때의 쾌감과 만족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사냥한 동족의 숫자는 세 자리 수를 넘어가서 네 자리를 넘보려고 하고 있다.

  “이제 아시아에 뱀파이어 숫자는 다섯? 셋? 아니면 너 하나?”

  뒤를 돌아보니, 12살의 카슐라가 서 있었다.

  “약한 이는 사냥하고, 강한 이는 함정에 빠트리고…… 동족이 씨가 말랐지.”

  안수희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너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이었을까? 약한 녀석들이야 네 힘으로 처리할 수 있을 테지만…… 정보가 퍼져나가고 그들이 뭉쳐서 조직적으로 대항해 왔으면……?”

  그렇게 되었다면 당한 쪽은 안수희 자신이었으리라.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나는 널 돕지 않았으니까. 답은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안수희가 다시 깨어난 장소는 자신의 방이었다. 실제로 체험한 듯이 카슐라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서자마자 방 밖으로 나가보았다. 환각과 붉은 글씨로 어지러웠던 거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해져 있었다.

  곰곰이 옛 기억을 되짚어서 가보았는데, 자신을 옆에서 도와주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냐고 중얼거리자마자 거실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벽에 붉은 글씨가 휘갈겨지기 시작했다. 안수희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녀가 피신처로 선택한 방은 인형들이 많이 있는 방이었다.

  들어가서 문을 닫자마자 밖에서 발로 걷어차듯이 쿵쿵!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인형들이 조용히 있다가 들어온 사람이 안수희이라는 걸 알자마자 적대심을 내비치면서도 빛을 피해서 머리를 싸매고 엎드렸다.

  “전부 바보로군. 너희랑 내가 한때나마 동족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인형이 달려들 염려가 없으니 안수희는 앉을 만한 곳을 찾아서 인형들을 죄다 팔로 걷어낸 다음에 진열대에 턱하고 걸터앉았다. 이 방에는 환각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숨을 돌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건네 왔다.

  “수희? 수희니? 여기는 대체 어디야?”

  서애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방을 살폈는데, 어디에도 서애는 없었다. 말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는데, 왼쪽 다리 밑에서 나고 있었다. 내려다보니까 루마니아 인형이 말을 하고 있었다.

  “수희야. 내가 왜 너를 올려다보고 있니? 어떻게 된 거야?”

  서애와의 사귐은 흡혈욕구와 소중한 친구를 사이에 두고 계속되는 싸움이었다.
첫 만남은 갑작스런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안수희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서 쫄딱 맞으며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마침 큰 우산을 쓰고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가던 김서애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서로의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안 김서애는 안수희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고, 그 이후로 가끔 만나게 되었는데 의외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하면서 친구로서 지내게 되었다.

  뱀파이어는 친한 사람이나 가깝게 지내는 사람의 피를 빨고 싶은 충동에 지배되기 쉬운 데, 안수희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서애는 선량하고, 깊은 이해심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우정이 멀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국 충동을 꾹 눌러 참는 수밖에 없었다.

  정이 섞인 교류가 전무한 안수희는 김서애를 통해서 사람에 대해서 배우고, 친구라는 게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김서애는 곧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안수희와 김서애는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하고, 유명한 러브 코미디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내용은 두 친구가 한 남자를 두고 갈등을 겪다가 일시로 결별했다가 다시 시간이 흘러서 만나면서 잊어버린 우정을 확인하는 줄거리이었다. 엔딩 스텝 롤이 올라가는 중에 안수희는 김서애에게 말했다.

  “우리…… 잠깐이라도 저 여주인공들처럼 되지 말자. 평생 우정을 지켜나가자.”

  김서애는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말을 이해하고 싱긋 웃으면서 안수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날 좀 구해줘. 수희야.”

  허리를 굽혀서 루마니아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은 파르르 떨면서 도와줄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안수희는 지금껏 사냥한 동족들의 영혼을 끄집어내어 인형에 봉인해 두고 잘 드나들지 않는 방에 진열해 두었다. 죽어간 부모와 형제들을 추모하는 의미도 있었다.

  루마니아 인형은 방에 진열된 인형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신이 들어있지 않은 인형이었다. 인형이 말을 하는 걸로 보아서는 서애의 영혼이 들어있는 모양인데, 왜 인형 속에 들어있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고, 궁금했다.

  “어째서 거기에 있는 거니?” 하고 묻자, 서애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갑작스런 충격에 눈을 뜨니까 여기에 와 있고, 네가 올려다보였다고 설명조로 말했다.

  친구를 창문틀에 올려놓고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데, 문이 쿵쿵! 하고 두들겼다. 이번에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으려는 양,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안수희는 인형들을 죄다 바닥으로 던지고 진열대를 모두 문 앞으로 밀어놓았다.

  아주 묵직한 무언가로 문을 때리는 것 같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흔들렸다. 서애는 비명을 질렀다. 문을 두드리는 세기는 강해지고, 간격은 짧아지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소란을 피운단 말인가. 안수희는 문을 열고 나가고 싶었다. 문 앞에 둔 진열대를 치우려는 데, 뒤에서 서애가 소리를 친다.

  “수희야! 가지마! 문을 열지 마! 무서운 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안수희는 도로 진열대를 문 앞에 밀어놓았다. 동시에 집이 온통 흔들리면서 문 왼쪽 일부가 부서졌다. 작은 나뭇조각들이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안수희는 있는 힘껏 진열대에 자기 몸을 더해서 밀어붙였다.

  그리고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쿵쿵거리는 소리가 딱 멎었다.

  안수희는 문으로 다가가서 부서진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밖에 설치된 난간과 복도 바닥 일부만 보일 뿐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루마니아 인형으로 다가가서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아보려는데, 바닥에 붉은 글씨로, ‘No'이라는 글씨가 써졌다. 마치 휴지 조각이 물을 흡수하듯이 'No'.이라는 글자가 온 방안으로 퍼져나갔다.

  안수희는 괴성을 지르면서 손톱으로 벽을 할퀴었다. 벽이 묵처럼 으깨지면서 네 줄의 흔적이 생겼는데, 빨간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인 그녀는 코로 냄새를 맡아보고 그 액체가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금방 알아차렸다. 혀를 내밀어서 맛을 보기보다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두 손을 마구 휘둘렀다.

  떨어지고, 튀는 빨간 액체를 머리에 맞은 인형들은 좋아하면서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저런 모양이 되어도 본성이란 숨길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창문 위에 놓아둔 루마니아 인형은 벌벌 떨면서 엎드려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빨간 액체는 안수희의 손톱에 패인 자리를 메우면서 글자를 다시 생성시켰다. 글자 자체는 어떤 해악도 미치지 않지만, 뜻이 나타내는 부정성과 계속 밀려들어오는 성질이 공포심을 불러왔다.

  “그만, 야자폐슈탼! 원하는 게 무엇이지!”

  글자의 증식은 멈추지 않았다. 인형들이 공중으로 둥둥 떠오르더니, 무언가 모이는 힘에 의해서 일시에 안수희를 향해 덮쳐눌렀다.

  그들은 모두 손에 뾰족한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글자들이 안수희의 사지를 결박했고, 인형들이 이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안수희는 고통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모습을 보여! 야쟈폐슈탼!”

  죽어가는 그녀의 눈에 한 문장이 보였다. 맨 앞줄만 읽고 피가 가려져서 더 읽을 수 없었다. 순간 가슴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한 바가지가 넘은 피를 울컥 토하고 그대로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창틀 위에 있는 루마니아 인형은 너무나도 두려운 장면에 벌벌 떨고 있었다. 김서애는 글자가 모여서 만든 하나의 문장 같은 글귀가 나타났다. 영어로 쓰인 글귀를 읽고 나자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아침, 김서애가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꽃무늬 천장이 들어왔다. 일어나서 둘러보니까 자기 방의 침대 위였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 대충 옷을 꿰어 입고 안수희의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잠긴 대문은 담을 타고 넘어갔다. 현관은 열려 있었다.

  인형을 전시하는 방에는 전신에 찔리고 긁힌 상처가 가득한 안수희의 참혹한 시체가 누워있었다. 김서애는 시체 옆에서 섧게 울다가 한참 뒤에 눈물을 닦고 전화로 경찰을 불렀다.

  안수희의 사인은 긁거나 찔린 상처보다는 심장에 가해진 충격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부검의가 말했다. 엄청난 충격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겼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늑골이 멀쩡하다는 겁니다. 외상도 없고요.”

  부검의는 외상도 없으며, 늑골이 부러지지 않게 심장을 찢는 건 불가능하다며 의아해했다. 김서애는 확실한 원인은 모르지만 아마 붉은 글씨를 써 댄 자가 했을 거라고 예측했다. 김서애는 조심스럽게 부검의에게 자신이 본 이야기를 돌려서 말했다. 예상대로 부검의는 김서애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 차트를 넘기면서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사람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안수희의 저택은 살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서 곧 구청에서 봉인할 예정이었다. 김서애는 자신이 추억이 있는 저택을 구입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자금이 없어서 훗날을 기약했다. 그녀는 대문 밖에서 저택을 바라보면서 꼭 충분한 돈을 모아서 사고야 말겠노라고 다짐했다. 봉인 하루 전날에 김서애는 저택에 들렀다. 그녀는 인형의 방으로 가서 원하는 인형을 찾았다.

  루마니아 인형은 창가에 놓여있었다. 다른 점은 이전에는 옆으로 누워있었는데, 이제는 일어나 앉아있었다. 그동안 저택에 들른 자는 없었을 테여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루마니아 인형의 옷과 머리카락에 앉은 먼지를 털고 주머니에 넣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인형은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두어졌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입술이 전보다 약간 붉어진 게 인형이 당장에라도 자기 이름을 부르며 입술을 달싹일 것만 같았다.

  김서애는 침대에 누워서 왜 먼저 가버렸느냐고 안수희를 원망하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조금씩 흐느꼈다. 인형이 머리맡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조금이지만 양 눈자위가 젖어가고 있었다.

  김서애는 베개 밑에 손을 넣더니 둘둘 말아둔 밧줄을 꺼냈다. 그것을 둥글게 매듭을 짓더니 누운 자세에서 목에 걸고 매듭을 힘껏 잡아당겼다. 당기는 순간에 목과 밧줄 사이에 무언가가 끼는 느낌이 들어서 머리를 들어보았다. 루마니아 인형이 줄 사이에 끼어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둔 인형이 왜 줄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일까. 도로 올려놓고 다시 줄을 당기려는 순간에 인형은 다시 목 위에 떨어져 있었다.

  김서애는 천천히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너니? 수희?”

  인형은 말을 하지 않았다. ―1부 카슐라 끝―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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