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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주선전酒仙傳

2010.01.18 14:0401.18



  조 땅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이름은 유만석이라 하였다. 평소 술을 즐겨마시고 호방하였으며 어느 곳에 얽매임없이 마음이 넓어 모든 의견을 포용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와 기이한 이야기 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얽매이지 않음이란 벌어먹고 사는데 이롭지 않은 일이라, 항시 돈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으므로 취토록 마시지 못하고 일어서 돌아와야 했다.

   어느날 마지막 잔을 들이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갯길을 오르고 있을 때, 손에 술병을 들고 가는 노인을 만났다. 아직 한 두잔쯤은 아쉬웠으므로 대번에 혀 밑에 침이 괴고 입을 쩍쩍 다시면서 노인에게 청했다.
"이보시오, 노인장, 그 술병에서 무척이나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구료. 내 비록 식견이 높진 않으나 좋은 술을 맛볼 세 치 혀는 가지고 있으니 한 모금만 맛볼 수 없겠소?"
  노인이 꺼리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그러지요."
  하더니 술병을 기울이는데 놀랍게도 술이 가득 담겨 찰랑거리는 잔이 병 주둥이에서 흘러나왔다. 유만석은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고 막 청림원의 애송이 학사와 황당무계한 일이 성현의 가르침에 맞지 않음에 관하여 논하다 온지라 내색하지 않고 넉살좋게 잔을 받았다. 쭉 들이키니 향이 맑고 맛이 뛰어나 이제껏 마셔본 어떤 술보다 훌륭했다. 그는 감탄하여 말했다.
"신선들이나 마시는 술 같소이다. 너무 뛰어나서 얼떨떨하구만. 다시 한잔만 맛볼 수 있겠소이까? 이런 술을 맛볼 일은 흔치 않아서 그런다오."
"얼마든지 좋습니다. 받으시지요."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노인이 술을 따랐고 잠깐 사이에 거푸 들이켜 대여섯잔을 비웠다. 마시면 마실수록 흥이 솟아 거나해졌다. 노인이 말했다.
"보아하니 풍류를 아시는 분인 듯 해 내 대접할 마음이 생겼소이다. 술 맛을 아는 이와 마시는 것 역시 기쁨이지요. 보잘 것 없으나 안주를 내면 어떻겠습니까?"
"좋지요. 이런 술과 함께라면 푸성귀도 불로초 같을 거외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술병에서 썰어놓은 돼지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와 잘 익은 깎두기가 담긴 종지, 노인 몫의 술잔까지 흘러나왔다. 노인이 말했다.
  "아무래도 술이란 대작 상대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는 기뻐하면서 노인과 술잔을 주고받고 나서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술잔이 세번 더 채워지기도 전에 접시가 말끔히 비워지고 말았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젊은이를 너무 작게 본 것 같구먼.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내 안주를 더 내겠소."
노인이 술병을 기울이자 이번에는 양념한 생선과 나물, 구운 새고기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 따위가 담긴 소반상이 떡 나왔다. 두 사람은 다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고기는 잘 익었으며 양념도 적당했고 채소는 갓 딴 것들이었다. 쉴새없이 손으로 찢은 고깃점과 와삭거리는 나물조각과 두부 뭉텅이 등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가 짓씹혀서 꿀꺽 넘어가면 거기에 술을 부어 넣었다.

  상이 다 비자 노인이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막 그가 떠나왔던 주막집이 흘러나오더니 주모가 걸어나와서 뜨끈한 국밥과 수육이 담긴 접시를 상에 올렸다.
"언덕에 주막만 덜렁 있고 우리끼리만 마시고 있다니 이상하군요."
  그가 말하자 노인이 바로 술병을 기울였다. 삼거리가 먼저 흘러나와서 그보다 먼저 자리잡고 있던 주막 밑에 쫙 깔리고 그 다음에는 다른 술꾼들이 흘러나와 자리를 차지하고는 저마다 상을 두들기며 "주모! 주모!"하고 시끄럽게 불러댔다. 주모가 바쁘게 이리저리 오가는 걸 보고 노인이 말했다.
"자, 이 정도면 괜찮겠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영락없이 방금전에 떠났던 주막 같소."
  그래서 두 사람은 국밥을 싹싹 비웠다. 쉴 새 없이 술잔이 비워지고 채워진 것은 물론이다. 뜨끈한 국물을 바닥까지 들이키고 잔도 깔끔하게 비우자 그가 말했다.
"그것 참 보배로운 물건이외다. 이제까지 수많은 술병들을 비워왔건만 그런 물건은 처음이오."
"이런 물건을 여간해서는 만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세상을 받칠 기둥을 깎은 대사나 은하에서 감로를 퍼다 온 세상 백성들을 취케 하는 선인이나 지닐 보배지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또 말해보시지요. 설마 그 정도로 족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노인의 말에 그는 호기롭게 대꾸했다.
"그러믄요, 아직도 한참이나 더 마실 수 있고 말고요. 좋은 술을 함께 하니 마실 수록 마음이 새롭구려, 이번에는 장안의 가장 큰 주루에서 잔을 기울이고 싶군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도 돈이 생기면 얼른 마셔 없애곤 했는지라 그런 큰 주루에 간 적은 한 두 번 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인이 술병을 기울이자 눈 깜빡할 사이에 5층이나 되는 으리으리한 주루가 처마를 한껏 추어올리고 서 있었다.

  붉고 푸른 등이 매달린 입구에서는 아리따운 기녀들이 비파를 안고 나와 소매를 끌어당기고, 수염을 늘어뜨리고 비싼 비단옷으로 불룩한 배를 가린 주인이 웃으며 직접 두 사람을 안내했다. 두 사람은 서로 부축하면서 높다란 계단을 따라 올라가 꼭대기의 가장 화려한 방에 앉았다. 이윽고 둥기당 뚱땅 줄을 뜯고 작은 북을 두드리며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기녀들이 노래하는 가운데 다리가 부러질 듯한 상이 나오고 뜨끈하게 데운 술과 얼음처럼 찬 술이 번갈아 나왔다. 상 위의 생선은 아직도 퍼득거렸고 통째로 구운 새들은 뱃속에 채워넣은 밤이며 대추를 권하는데 유자에서는 싹이 돋아나 나무가 되고 다시 잘 익은 유자를 무릎 위에 떨어뜨렸으며 용의 간에는 신령한 구름이 서리고 봉황의 눈에는 무지개가 비쳤다.
  두 사람이 권커니 잣커니 하면서 이따금 창 아래로 술병을 기울이면 저자거리며 행인이나 왁자한 시전, 으쓱대는 한량, 세도부리는 행차 따위가 방울져서 똑똑 떨어져 바닥에 깔리곤 했다. 두 사람은 즐거워하면서 귀한 안주들을 맛보고 술잔을 비웠다. 어느덧 상 위에 빈 그릇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고 기녀들도 지쳤을 때 창 밖에는 신년을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따닥따닥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보면서 그가 말했다.
"아! 마치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구료.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흡사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오."
  그러자 노인이 다가앉더니 은근하게 말했다.
"비록 비싼 주루에 귀한 안주와 훌륭한 술이라 하나 속세의 때가 묻은 것은 다르지 않지요. 어떻습니까? 진짜 신선들이 마시는 술이라면? 월궁에서 잔을 기울이지 않겠소?"
  유만석은 이미 술병에서 장안성도 흘러나오는 것을 본 마당에 무슨 일이 더 일어나랴 싶어 고개를 끄떡였다.

  노인이 병을 기울이자 삽시간에 그 안에서 캄캄한 밤이 흘러나와 모든 것이 먹 속에 잠긴 듯 새카매졌다. 그리고 빛이 한두방울씩 비치다가 졸졸 흘러나오더니 이윽고 눈부시지 않고 은은하게 빛나는 옥으로 된 달이 밤 한 가운데 둥실 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달 위에 상아, 은, 유리, 진주로 지어진 월궁 한 복판에 앉아 있었고, 그 큰 궁궐에는 두 사람 말고 아무도 없었다.
  허공에서 술방울이 똑똑 떨어져 잔을 채우자 노인이 권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질끈 눈을 감고 확 들이키니 술을 목구멍에 넘긴 것 만으로 몸 안에 따뜻하고 차가운 기운이 돌고 정신이 번듯 깨어 맑아졌다. 달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듯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고개를 돌리면 둥근 하늘이 돌고 눈을 감으면 북두 주위로 이십팔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말했다.
"그 술은 월궁 항아가 계수나무와 옥두꺼비로 오백년동안 담근 옥로주라오. 신선들도 옥황상제께서 베푸시는 주연에서나 맛볼 수 있을 만큼 귀한 술이지. 하지만 진정 귀한 술은 따로 아껴 둔 것이 있소. 이제 그 술잔을 받을 상대를 만난 것 같으니 사양치 말고 한 잔 받으시오."

  엉겁결에 유만석이 손을 내밀자 노인이 술병을 기울였다. 밤이 사라졌다. 달도 사라졌다. 월궁도 간 데 없었다. 무엇이 흘러나와 채운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술병의 주둥이에서 빛이 비치고, 마침내 한방울이 똑, 유만석의 내민 손 위로 떨어져내렸다... 서서히 떨어지면서 그 방울은 잔이 되었다. 손에 쥐인 잔 안에 달이 비춰 보였다. 밤도 있었다. 장안성도 있었고 주루도 있었고 주막도 삼거리도 소반상도 언덕도 다 있었다. 심지어 그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자신이 노인에게 수작하는 모습도 보였다... 술이 잔째로 흘러나오는 술병도 보였다. 술병 속에 세상이 들어 있는데, 그 세상 속에 술병이 있었고, 또 그 술병 속에 세상이 있고, 세상 속에 술병이 있었고, 이것이 끝없이- 유만석은 술잔이 끝도 없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노인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아끼는 술이라오- 이 세상이라고 하지요."
  그 말을 들으면서 유만석은 술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빙글 빙글 도는 술잔에서 세상이 쏟아져 나와 그야말로 홍수처럼 걷잡을 수 없이 제 자리로 돌아 흘러갔다. 달이 휘익 스쳐지나가고, 밤이 아득히 퍼져나가는데, 장안성은 쿵 떨어져 내리고(따닥거리는 불꽃놀이는 아직도 피어올랐다), 주루 처마 끝의 종은 조금 흔들리고, 삼거리에 시장판에 주막과 언덕과 산과 숲이 우르르- 노인이 말하는 소리는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들려왔다.
"천하 사람들이 그대는 능히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더니 아직 이 세상을 받을 경지는 아닌 것 같군요. 그러나 이것도 인연이니 작은 선물을 주겠소. 언젠가 또 만날 때가 오거든 그 때 다시 한 잔의 술을 기약하기로 하지요."

  그는 제 집의 낡은 방바닥 위로 몸을 큰 대자로 쭉 폈다. 늦은 날빛이 눈꺼풀 위로 떨어질 때까지 아주 잘 잤다. 깨어나서는 한바탕 꿈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일어나 보니 곁에 잔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희고 둥그런 것이 노인의 술병에서 흘러나온 그 잔이었다. 그는 이 잔을 몹시 아껴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웃고는 했다.
  이후 어느 모리배들이 성정이 말라빠진 대꼬챙이 같은 늙은 선비를 부추겨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웠을 때, 금부도사들이 도착해 보니 그는 빈 잔에 괸 술을 마시고 잔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술잔은 어느 아첨꾼이 주워다 신선의 술잔이라며 권세 높은 집에 바쳤는데, 그 대가가 몰락할 때 깨져 달아났다고도 하고 간 곳 없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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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벗들과 좋은 자리에서 좋은 술로 수작할 제, 대취한 친우가 술을 권하려 하거늘 술병은 들되 잔은 찾지 못하고 무릎에 붓는지라 바지가 차가운 술에 척척해지고 다들 황망히 일어서 닦으려 할 때 문득 술병에서 찰랑대는 술이 담긴 술잔이 흘러나와 손에 착 쥐일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얄팍한 지갑을 생각하면 한 상 안주가 술병에서 흘러나와 떡 차려지는 것도 퍽 유쾌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 안에 술병이 있고, 그 술병 안에 또 세상이 있고, 그 세상 안에 또 술병이 있고, 이것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술이 아닌가 합니다.

댓글 2
  • No Profile
    Dominique 10.01.18 14:52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전소설을 읽는 것 같군요. 심사평이 어떻게 나올지 조금 궁금해 집니다.
  • No Profile
    C 10.01.19 02:21 댓글 수정 삭제
    와 술술 읽히는 옛날 이야기에 재미있는 환상동화 읽은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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