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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원의 빛 (2)

2006.05.20 00:5805.20

2. 도서관 소녀

도서관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미래 세계의 상세한 역사, 천사들의 자서전들, 도서관의 믿을만한 서지목록, 수백만 개의 가짜 서지목록, 그 가짜 서지목록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진짜 서지 목록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바실리데스의 그노시스적 복음, 이 복음의 주해서, 그 주해서의 주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해명서, 각각의 책에 대한 모든 번역본들, 모든 책들의 증보판들. -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나 보고 책을 읽어오라고 처음 만난 사람 주제에 숙제를 내놓고서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한 대로 이틀 후에 빌렸던 보르헤스의 책을 들고 반납하러 도서관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만날 시간과 장소조차 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보르헤스 책들은 사서에게 반납하고, 처음 만났던 서가의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처음 만난 서가에서 서성거리며 책 구경을 간간이 하며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한 서가에서 다른 서가로 부유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서가 앞에 서 있기 십상이었다. 그 서가는 어떤 책인지 모를 정도로 잡다한 책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오랫동안 사람 손길을 타지 않았는지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는 책들이 책장마다 가득했다. 장정조차 바래서 이제는 사라진 금박을 입힌 제목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Everyman's Library 마냥 천으로 싼 두꺼운 하드커버의 책들은 오랫동안 쌓인 먼지를 이불 삼아 잠들어 있는, 아니 어쩌면 책의 장정은 그들의 비바람에 닮은 묘비 마냥 고요함 속에 부활을 꿈꾸며 죽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평소에는 이 서가에는 들어와본 기억이 없었다. 평소 나는 외국 소설 파트에 주로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도서관을 아무 생각 없이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부유하다가 이곳까지 흘러온 것 같았다. 그것만이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깊이와 층을 알 수 없는 달팽이의 껍질과도 같은 곳을 지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역시 또 길을 잃은 직후였다.
나도 모르게 휴게실을 찾아서 낡고 헤진 책을 들고 돌아다닐 때 저쪽 서가 사이에 무언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오후 햇빛에 장정이 헤어진 낡은 책의 이제는 희미해진 금박 글씨들이 아련하게 빛나고 서가는 이제는 운명을 다한 오래된 책들의 묘지인 것 마냥 고요에 잠겨 있었다.
이제 그 아른거리는 것을 좀더 형체가 뚜렷해져서 누군가의 옷자락임이 분명했다. 치마 끝인 듯 보이는 옷자락이 마음을 스칠 때 무언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렁이며 깨어나려는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이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개구리처럼, 세포 하나하나에 전이되는 깨어나는 느낌이 들면서 몸속에 묘한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냥 나른하게 긴장이 풀려 있던 몸에 활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몸이 저절로 그 아른거리는 옷자락을 좇기 시작했다. 희미해지는 소녀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옷자락은 한참 구식인 원피스 형태였다.
마치 아서 라캄의 일러스트에서 볼 법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등 뒤로 큰 리본이 달린 색이 바랜 옷이었다. 한참을 앞에서 흔들리다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녀는 까만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하얀 도자기 피부의 붉은 입술을 한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아직 앳된 얼굴에는 볼살이 통통하게 남아 있고 커다란 동공, 그리고 붉은 입술로 무언가 속삭이듯이 말을 걸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공기가 다 빠져나간 공간에서 떠드는 것처럼 입모양만 보일 뿐, 일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주위의 공기 자체도 변한 듯했다. 햇빛이 비치는 오래된 도서관의 낡은 서가에 그녀와 나 단둘이 단절되고 유리된 공간에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한 마디 속삭인 뒤에 다시 고개를 돌려 서가로 갔다. 갑자기 온몸의 지축을 흔드는 듯한 공포와 충격으로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았으나 소녀는 사라진 뒤였다.
나는 소녀의 흔적이 있었던 마지막 서가에 등을 기대고 한참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에 조임쇄를 건 듯한 이 압박에 괴로울 뿐이었다. 무언가 튀어나올 것처럼, 뱃속의 에어리언이 튀어나와 “엄마?”라고 할 것처럼 나의 내부를 괴롭히는 이것의 정체는 무엇인 걸까?
그러다 등에 무언가 배기는 느낌에 몸을 서가의 책에서 떼어보니, 무언가 튀어나온 책이 하나 있었다. 작은 양가죽 장정의 초라한 책이었다. 금박은 떨어져나갔고, 책은 먼지로 뒤덮혀서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책은 인디언 핑크빛의 부드러운 마치, <분홍신>처럼 생긴 예쁜 가죽장정의 책이었을 것이다.
나는 낱장이라도 떨어질까 조심스레 책을 빼내어서 한 페이지 넘겼다. 얇고 바랜 책장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후각 가득 밀려왔다. 나는 이 순간이 정말 미치도록 좋았다. 세상의 어떤 향수나, 꽃보다도 이 곰팡내 나는 책의 향기가 제일 좋았다.
숨을 한 번 깊게 몰아쉰 다음에 책을 넘기자 책장이 바닥에 똑 떨어졌다. 나는 책을 잠깐 서가에 다시 올려놓고 그 떨어진 페이지만을 주웠다. 제목과 저자가 붙어 있는 페이지가 떨어진 것이었다.
『도서관 소녀의 일생』 라고 예쁜 이탤릭체로 간결하게 써 있는 그것 외에 출판사나 저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 내가 책을 올려두었던 서가에서 책을 꺼내 그 페이지를 다시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 주변 책장을 하나하나 샅샅이 뒤지면서 꽂혀 있는 책을 모두 다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책은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책은 사라져 있었다.
그 작은 인디언 핑크빛의 빛바랜 책은 사라졌다.
한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사서에게 이 낱장이라도 돌려주고 사실대로 고백하기로 했다.
나는 떨어진 페이지를 들고 대출대로 나아갔다. 어인 일인지 도서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사서를 둘러싸고 뭔가 얘기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뚫고 비장하게 나아갔다. 책을 파손시켰는데, 그 책이 사라졌으니 이것 참 낭패인 일이었다. 게다가 책은 매우 오래된 희귀본처럼 보였다.
내가 나아갔을 때 사람들이 사서를 둘러싸고 모여 있다 조금씩 자리를 넓혔다. 마치 모세가 사해를 가르듯이 나는 인파를 가르고 사서에게 척척 나아갔다.
나는 사서 앞에 살며시 그 떨어진 페이지를 놓았다.
“미안해요. 어느 책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책을 파손시킨 것 같아요.”
“네?”
그는 가느다란 손으로 내려온 가는 은테안경을 올린 뒤에 떨어진 페이지를 들었다.
“책을 찾아오려고 했는데, 책이 사라졌지 뭐예요.”
나는 부산스레 일부러 사서의 흥미를 끌어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겠노라는 뻔뻔스런 생각으로 손짓발짓으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페이지를 잡은 사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낯빛은 더욱 창백해졌고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충격으로 눈이 튀어나올 뻔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엄청난 대역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어떤 여자애가 보이길래 그냥 쫓아가봤는데 어디론가 사라졌더라구요. 그러다가 바로 앞에 있는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지 뭐예요. 그래서 한 페이지 펼쳐보는데 이 페이지가 저절로 떨어지더라구요. 그래서 책을 서가에 올려놓고 떨어진 페이지를 바닥에서 주워서 서가를 보니까 책이 사라졌더라니까요. 귀신 곡할 노릇이지 않겠어요?”
나는 너스레를 떨면서 어떻게든 이 대역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내가 ‘소녀’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녀가 나타났어.’ ‘그녀의 자기 변론서가 나타나다니…….’ 등등의 얘기를 하면서 나를 흘긋흘긋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는 묵묵히 자기 손에 들린 페이지만 꼼꼼하게 살펴볼 뿐이었다.
“그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긴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인데 뒷모습만 보고 얼굴은 딱 한 번 뒤돌아설 때만 봐서 잘 모르겠어요.”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게 잘 안 들려서 잘 모르겠어요. 입 모양만 좀 봤을 뿐,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입 모양은요?”
“에 그거 주의 깊게 안 봐서 모르겠는데요.”
그는 한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번 쉰 다음에 나를 쳐다보았다.
“소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뇨. 처음 본 여자애를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요.”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사서와 처음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책상에서 뭔가 열심히 쓰거나 스탬프를 찍어주는 일 등을 했지 실제로 눈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잿빛 눈에, 역시 잿빛을 띤 갈색머리를 한 햇빛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창백한 남자였다. 무표정해 보일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띠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앙상한 느낌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그녀가 누군데요?”
“그녀는 도서관 소녀입니다.”
“네 무슨 소녀요?”
바로 그 책에 써 있는 소녀였다.
“도서관 소녀가 뭐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그는 나를 심각하게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당신은 입문자이거나 혹은 이미 입문했습니까?”
“뭐에 입문을 해요? 아, 설마 제가 어느 섹트인가 물어보는 거라면 저는 무소속인데요.”
그는 한참을, 정말 한참을 나를 쳐다보았다.
“알았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뻘줌해진 나는 그만 자리를 비키는 게 좋을 것 같아, 홍해의 기적을 일으킨 모세마냥 인파 사이를 뚫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inkdri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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