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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물속 아래 잠긴 시간

2015.10.11 10:3310.11

 물속 아래 잠긴 시간

 

 

 

 

비가 오네, 엄마는 베란다 문을 닫으며 중얼거린다. 베란다를 등지고 앉아 있던 나는 창 쪽으로 얼굴을 바투 갖다 댄다. 툭툭, 안방에서 아빠가 뭐라 웅얼거린다. 툭툭, 빗물에 흐려지듯 아빠의 말은 발음이 뭉개져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선다. 창문 닫는 소리. 문 닫았어요, 하고 엄마가 나지막이 말하는 소리. 고요하게 울리는 소리 사이에서 아빠가 악청을 내지른다. 혼자 튀어버린 말은 다른 차원에서 오기라도 한 듯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아빠는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무언가 툭 꺾인 듯, 아빠는 안방에 틀어박힌 채 은둔하며 지냈다.

그해 여름, 우리는 무엇을 흘러 보냈나. 무엇을 애타게 바랐기에 그렇게 상처투성이였나.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뜨거웠기 때문이다. 여름이 참을 수 없도록 뜨거워서. 그저 여름이었기 때문에. 펄펄 끓는 더위 속에서 숨 쉬는 것마저 어려웠던 탓에.

나는 운동화를 신으며 우산을 든다. 비 오는데 어디 가려고? 엄마가 안방에서 고개만 내민 채 묻는다. 언제고 엄마는 이제야 아빠를 대하는 법을 찾은 것 같다며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웃을 때마다 아늠이 떨어질 것처럼 바스락댔다. 잠깐, 저수지에. 나는 엄마를 외면하며 밖으로 나선다.

저수지까지 한달음에 달린다. 수런수런, 소리가 흐른다. 비가 오면 세상은 재잘거린다. 눈을 게슴츠레 떠서 보면 아스라하고 푸르스름한 것이 둥둥 떠 있다. 비가 오는 날에만 보이는 풍경. 떨어지는 빗물 같기도 하고 빗물이 아닌 것 같기도 한 것들. 그것은 어깨를 건드리고 팔뚝을 스치고 허벅지를 적신다.

점점 흐르고 흘러 도달하는 곳.

그곳은 수면에 일렁이는 물비늘이 떠밀려 사라지는 세계.

 

 

 

 

나는 저수지에 뛰어든다. 첨벙 하는 큰소리가 나더니 이내 빗방울이 수면을 때리는 소리만 남았다.

출렁이는 물결 너머로 나는 깊숙이 들어섰다. 온몸에 울리는 빗소리. 하얗게 일어나는 물방울 사이로 보이는 푸른 물살. 나는 이대로 어딘가로 흘러가버릴 것만 같다. 그러면 어김없이 어릴 때 저수지에 휩쓸려 갈 뻔한 일이 떠올랐다.

어릴 때에는 비가 오는 것이 싫었다. 여름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마도 지독히 싫었다. 매일 쉴 새 없이 퍼붓는 비에 닿으면 내 몸이 땅 아래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녹아서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버릴 것만 같았다. 단단히 붙잡을 것이 필요했지만 주위에는 너르펀펀한 들판뿐이었다. 두 다리에 힘을 아무리 주어도 비가 오는 날이면 보이지 않는 물살이 쓸려와 나를 휩쓸어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실제로 저수지에 빠져 휩쓸려갈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안으로 들이차는 물이 폐를 채울 때마다 나는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내 몸은 빙글빙글 돌아 깊은 곳으로 휘몰아쳤다. 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피부를 스치는 수초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이 점점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는 것만 같아 발에 무언가 닿기를 바랐다. 그러나 닿는 것은 그저 차디찬 물살뿐. 차라리 휩쓸려가기를 빌었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다시는 돌아가는 일이 없이 아예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면 고통도 함께 사라지리라 여겼다. 내 몸은 작았고 약했으며 부러지기 쉬운 가지와도 같았다. 그대로 톡 부러져도 아무렇지 않을 연약한 몸뚱이. 그러니 그 무엇보다도 쉽게 쓸려갈 터였다. 그러나 쓸려가지 않았다. 검은 물결 너머로 어슷어슷 보이던 잔별의 무리가 하얗게 휘몰아치는 곳에서 무언가가 내 작은 몸을 받쳤다.

세모꼴이 된 비늘이 잘게 떤다. 손가락이 베일 정도로 날카롭고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 가득 담겼다. 하얗게 부서지던 뭇별이 물방울 사이로 떠오른다. 어둠은 꿈틀대며 나를 수면 위로 끌어낸다. 그대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 비늘을 꽉 잡았던 게 기억난다. 차디찬 감각과 함께 느껴졌던 미끌미끌한 감각. 기름에 번들거리는 것과는 다른, 뽀드득거리는 유리창을 만졌을 때처럼. 그날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몸을 단단히 받쳐준 감각만은 어른이 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태어나고서 자란 곳에는 저수지가 가까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작은 강이 흐를 뿐이었다. 그곳은 늘 말라 있었다. 흐르는 강물 양옆은 쓰레기가 가득했고 내 키보다 크게 자란 갈대와 말라버린 풀 때문에 물가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봄과 여름에는 수레국화나 코스모스가 피어서 볼 만했지만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초라하기만 했다.

언제나 끝도 없는 벌판이었다. 아주 먼 곳에서 보이는 산은 낮았고 늘 매캐한 미세먼지에 뒤덮였다. 겨울엔 귀가 떨어질 것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여름엔 나무그늘이 없어 언제나 뜨거웠다. 직사광선이 바로 내리쬐는 곳에서 일을 하려면 파라솔이 반드시 필요했다. 양파를 캐는 때가 오면 밭 곳곳에서 그런 파라솔을 볼 수 있었다. 울긋불긋한 꽃처럼 피어난 파라솔. 그럴 때면 언제나 너른 들판에 드문드문 심어진 나무가 신성하게 느껴졌다.

이사 온 곳은 내가 나고 자란 곳과는 달랐다. 뾰족뾰족한 산이 바로 집 뒤에 있었고 눈에 닿는 곳마다 동그마니 산이 솟았다. 산이 감싸는 곳에는 포도나 복숭아가 있는 과수원이 있었고 이따금 배와 자두를 재배하는 곳도 보였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은 산꼭대기까지 이어지고 윗동네를 지나면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이 나왔다. 바로 앞에 있는 산은 낮았지만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스산했고 새벽이 되면 으스스한 기운이 흘러내려왔다.

아빠도 나처럼 두려웠을까. 뾰족하게 솟아난 산등성이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면 그대로 나자빠질까봐 뼛성을 부린 것일까. 아빠는 뼈에 새겨진 뼛성을 모두 뽑아내려는 기세로 엄마와 나를 못살게 굴었다.

이사 오기 전에도 드문드문 그런 성정을 보였지만 해고당한 후로는 더 심했다. 우리 때문이랬다. 당신이 해고당한 까닭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탓이 아니라 엄마와 내가 있어서랬다. 모두 다 네년들 때문이야. 네년들이 나를 망쳤어. 아빠는 단말마를 내지르듯 바락바락댔다. 술을 줄창 마시고 이웃집과 승강이를 벌이고, 엄마와 나에게 욕설을 내뱉고. 아빠는 결국 동네에서도 쫓겨났다. 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그 몸을 숨기기 위해 산과 산이 있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오자마자 아빠가 내지른 몽니는 메아리가 되었다. 이웃집과 이웃집 너머 있는 집까지 모두 그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아빠와 함께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바로 뒤에 있는 저 깊은 산속이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참을 수 없는 생각은 어둠이 입을 벌리는 산에서 생겨난다. 그럴 때면 나는 도망을 쳤다. 둔덕을 따라 저수지까지 달려왔다. 작은 산등성과 산등성을 사이에 두고 무언가를 떠받들 듯 존재하던 저수지. 산 그림자가 내려오는 저녁 무렵이면 물살이 검게 꿈틀댔다. 마치 저수지가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는 듯했다. 똬리를 튼 뱀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물 아래 깊은 곳에서 어두운 빛살이 올라왔다.

그때 어둠 너머로 당신이 튀어 올랐다. 저수지가 뱉어낸 듯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오른 몸은 물살을 헤치고는 뭍으로 올라왔다. 당신은 곧장 내가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 섰다. 물에 홀딱 젖은 머리칼이나 옷가지에서 외로움이 뚝뚝 듣는 것 같았다. 휘휘 바람과 같은 소리가 났다. 시나브로 번져가는 소리의 향연. 파문이 일 듯이 내 가슴으로 번져와 재깔댔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저수지에서 벗어났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월드컵이라고 세상이 떠들썩할 때였다.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는 반 아이들과 통성명만 겨우 했을 뿐 친해지지는 못했다. 하교하는 길에 패스트푸드점이나 분식집에 들르는 일도 없었다. 집까지 가는 막차는 아직 해가 떠 있는 이른 저녁에 있었다. 담임에게 사정을 말한 후 버스정류장까지 달려가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래야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청소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는 나를 반 아이들은 밉살스럽게 보았다. 평소에 곰살맞게 대하지 않아서 더 그러했다. 나는 세상천지 아래 단 하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가 되어갔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당신을 찾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 밤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당신도 나와 같은 처지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저수지로 이끌었다.

까무룩 모든 것이 잠이 들면 당신은 조심스레 수면으로 올라와 헤엄을 친다. 오직 별빛만이 숨을 쉬는 어둠의 공간. 당신은 첨벙거리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물살을 헤친다. 까만 머리가 수면에 올라오면 그제야 느리게 숨을 뱉고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이 그렇게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풀벌레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먼 곳으로 사라졌다. 물비늘이 사라지는 곳에 그 모든 소리가 모여 있었다. 오직 당신만이 동그마니 수면 밖으로 튀어나와 당신의 소리를 낸다. 가만히 물살이 출렁이는 소리. 퐁퐁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내가 내뱉는 숨마저 당신에게로 스며들었다.

 

 

 

 

나는 저녁마다 복숭아를 품에 가득 안고는 저수지로 올라갔다. 칡잎을 따서 느티나무 아래에 깔아두고는 복숭아를 두었다. 복숭아가 없으면 포도를 놓기도 했다. 하루 벌어 사는 가난한 살림이라 복숭아 한 쪽도 귀했을 텐데 나는 왜 그것을 느티나무 아래 소중히 두었는지 모른다. 다만 엄마가 매일 과수원에서 따는 것이 복숭아가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수원에서 일을 마치고 오는 엄마에게서 풍기는 과일 향이 다른 세상에서 묻혀온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니 그것을 당신이 있는 곳에 두어도 된다고 여겼다.

이사한 후로 생활비를 버는 것은 엄마의 몫이 되었다. 엄마가 손톱에 흙이 끼인 채 꾸깃거리는 돈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 아빠에게 건네면 아빠는 언제나 엄마를 무시했다. 배운 것이 없으니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가스러진 말을 했다. 해고당한 후로 아빠는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한 채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만 보았다. 붉은악마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응원하는 화면이 자주 비쳤다. 그들의 명랑한 웃음소리, 커다란 함성. 아빠는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험상궂은 얼굴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텔레비전을 껐다.

아빠가 텔레비전을 끄면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빠가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엄마가 고개를 숙이고서 아빠의 말을 조용히 들어줄 것이란 것을 알았다. 입을 꾹 다문 엄마의 입매가 실그러진 것은 울지 못했기 때문이다. 온갖 감정이 쌓였던 탓에 울음마저 집어삼킨 것이다.

아빠의 마음은 언제나 넝쿨져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자란 넝쿨이 뒤엉킨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뽑아도 자라나는 덩굴. 아빠는 그것을 뽑으려고 바동대지만 결국 집어삼켜질 뿐이다. 그 덩굴은 엄마와 나를 삼키면 잠잠해질까. 그래야 아빠가 편안해지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저수지에 뛰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수영을 배우지 못한 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몸을 던진 것은 아빠의 피가 나에게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울부짖으면 흘러갈지도 몰랐다. 내 안에 깃든 아빠의 뼛성과 엄마의 침묵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나약함이. 어쩌면 가뭇없는 외로움도.

물에 빠지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당신이 찾아주길 바랐던 것이다. 푸른 물결 너머로 손을 뻗으면 당신이 잡아줄지도 모른단 기대감에 그렇게 매일 복숭아를 저수지에 두었던 것이다. 내 허리를 감싼 당신이 뭍으로 나를 끌어올려 가만히 나를 보았을 때, 당신의 하얀 피부가 오색으로 반짝여서 내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찡그릴 때, 바람이 불어와 당신과 나의 젖은 몸을 적실 때, 박새가 나지막이 울던 그 여름날,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이름이 뭐예요?

처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애꿎은 망초를 뜯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물방울이 풀잎에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대답은 없다. 나는 초조해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불쑥 당신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 내 손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꽉 쥔 손을 조심스레 편다. 망초가 흐무러져 볼썽사납게 변해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꽃잎이 덕지덕지 붙었다.

당신은 내 손안에 있는 것과 바닥에 떨어진 망초를 소중히 그러모았다. 꽃송이가 그 손에 닿는 순간 갓 피어난 것처럼 생기를 띠며 파르르 떤다. 그대로 줄기가 뻗어나가 땅 아래로 뿌리를 박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하나하나 핀 꽃을 날렸다. 안타까운 듯 당신의 눈동자가 떨렸다. 나는 엉겁결에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다신 이러지 마.

당신에게서 수초 내음이 났다.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하고는 살짝 웃었다.

그래서요? 이름은?

.

당신이 나에게 대답한 순간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결코 닿을 수 없던 두 세계가 부딪친 것처럼.

 

 

 

 

당신의 이름이 강, 이라고 했을 때 나는 급류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아빠가 엄마에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엄마의 뺨에 닿았던 소리가 내 피부에 닿아 강한 물살을 일으키듯 밀어내서 강, 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어떤 소리도 내기 힘겨웠다. 집에서는 까치발로 걸어 다녀야 했고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 것도 신중해야만 했다.

아빠는 작은 소리만 들려도 리모컨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 차라리 술을 마시는 것이 나았다. 술을 마시지도 않고 가만히 거실에 앉아 전원이 꺼진 텔레비전을 보는 아빠는 미치지를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아빠는 울긋불긋하게 응원을 하던 젊은 얼굴이 보이기라도 하듯 불뚱거렸다. 해린이만한 애들이 장갑차에 깔려 죽었는데 월드컵은 무슨 월드컵이야! 아빠는 경기도 양주시에서 숨진 내 또래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라도 한 듯 손등으로 눈매를 훔쳤다. 더위가 기승을 부려 땀이 눅진하게 달라붙었다.

아빠는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듯 발버둥을 쳤다. 엄마가 힘겹게 벌어온 돈을 집어던지며 갈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화냥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윽박질렀다. 당신 혼자 빠지지 않겠단 각오로 엄마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나는 무력하게 엄마를 보았다. 아빠가 나에게도 손찌검을 할까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는 몸을 움츠렸다.

엄마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조심스레 모았다. 하나하나 정성스레 펴고는 돈 봉투에 넣었다. 아빠가 상을 엎었다. 식기가 나뒹굴고 컵이 깨졌다. 나는 울지도 못한 채 숨을 끅끅 쉬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흐를 때마다 당신을 떠올렸다. 푸른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 있을 당신을. 허우적대지도 않고 휩쓸려가지도 않는 당신을. 그러면 당신은 그 순간 생전 보지 못한 거대한 몸뚱이를 가진 존재가 되어 나를 받친다. 나는 더 이상 쓸려가지 않고 그대로 물에 녹아내리듯 잔잔해진다. 오직 푸름만이 남았다. 내가 꿈꾸는 곳이 바로 그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얽매이는 것 하나 없이 자유롭게 나부끼는 세상. 그곳에서라면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될지도 몰랐다.

 

 

 

 

수영 가르쳐줄 수 있어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불쑥 나왔다. 말하고 나니 민망해서 황급히 덧붙였다.

, 저번에 저수지에 빠진 적이 있거든요. 수영을 배워두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데도 당신은 저수지에서 헤엄을 쳤다. 저수지가 당신의 유일한 세계라는 듯 당신은 언제나 저수지에 머물렀다. 뭍에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하루 종일 저수지에서만 있을 때도 있었다. 푸른 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검은 머리칼은 깊은 물속에 잠긴 수초처럼 흔들렸다. 당신은 말없이 도로 물속으로 들어섰다. 당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물비늘이 둥글게 퍼져갔다. 출렁이는 물살이 잠잠해지자 나는 당신이 내 말을 거절한 줄만 알았다.

월드컵이 끝난 후로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기상청에서는 장마가 시작되리라고 보도했지만 비는 오는 둥 마는 둥 했다. 하늘은 흐렸지만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땀이 흘렀다. 미지근하게 데워진 공기에 피어난 꽃들이 축 늘어졌다. 바람이 불어도 진득한 감각은 떨어지지 않았다. 햇살이 찌르르 울렸다.

너무 더웠다. 숨조차 뜨겁게 느껴지는 더위는 그대로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이 더위를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어느새 물가로 다가온 당신이 내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바람을 기억한다. 당신과 나를 감싸는 공기가 한데 어우러져 새뜻해졌던 그 순간을.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내 손을 잡은 당신의 손은 차가우면서도 새맑았다. 손바닥을 통해 당신의 존재가 혈관 곳곳에 퍼졌다. 나는 한껏 그 손을 잡고는 당신을 따랐다.

 

 

 

 

당신의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워서 꽃에 생채기가 나지 않았다. 망초 사이를 걷는 당신의 걸음에서는 꽃을 스친다는 감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신을 감싼 모든 것이 당신과 어우러졌다. 느티나무 아래 당신이 서면 고기비늘처럼 나뭇잎이 출렁이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오가던 작은 새들이 당신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팔랑거리며 나부끼던 나비가 당신의 어깨에 내려앉을 때 들려오던 개구리의 울음소리. 오직 당신을 위해 부르는 찬가가 되어 산과 산 너머로 사라졌다.

불가사의한 광경이었다. 당신 주위로 참새와 박새뿐 아니라 이름 모를 새들이 모두 내려와 그 주위를 감쌌다. 새들이 뭐라 재재거리면 당신은 과일을 그들 앞으로 놓았다. 산에서 내려온 청설모와 다람쥐가 폴짝대며 당신의 무릎 위로 올라섰다. 나는 가까운 곳에서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나도 모르게 밟은 잔가지가 부러지자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푸드덕거리면서 창공으로 날아올라 사라진 자리에는 햇귀가 희붐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았다. 아니, 나를 보았던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당신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막 날아간 새의 언저리를 향한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곳. 언제나 한결 같은 빛깔로 품어주던 존재에게로. 푸르고 푸르러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를 향해.

세상은 시나브로 시나브로 쪽빛으로 번져간다.

 

 

 

 

푸른 물결이 드리워진 세상에서 나는 당신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과 세상이 이어지는 것이 타인의 손을 잡는 것처럼 간단하다면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도 이어지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어디에서 놓친 것일까. 분명 손을 잡고 있었을 텐데. 아빠도 엄마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흩어져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된 것일까.

하얀 포말이 사방으로 밀려가며 퍼졌다. 파란 물 사이로 번져가는 물거품은 엄마의 눈물을 닮았다. 엄마는 모든 것이 잠든 밤이 되어야만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아빠에게 맞은 부위를 손으로 꾹 누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르르 또르르 흐르는 것이 눈물이 아니라 조각조각난 심장이었다. 매일밤 엄마는 그것을 토해냈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당신이 잡은 손을 놓았다. 당신은 가볍게 떨어져가며 저수지를 휘감는다. 기다란 발이 물을 찰 때마다 하얗게 피어나는 별. 하얗고 푸른 별이 총총히 나풀대면 그 사이사이로 은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별을 머금었다. 그 순간 물고기는 창공을 나는 새가 되었다. 지느러미는 날개가 되고 비늘 하나하나는 깃털이 되어 내 주위를 누볐다.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이 구름처럼 뭉쳐져 수면으로 올라갔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요.

나는 헤엄을 치는 당신을 눈으로 좇았다. 수영을 하지 못하기에 두 다리를 바닥에 대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당신을 쫓지 못해 안달이 나 두 다리에 힘을 뺐다. 금방이라도 두둥실 떠오를 것만 같았다. 이대로 물살에 휩쓸리면 어쩌나 싶어 도로 힘을 주지만 순식간에 내 옆으로 다가온 당신이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하늘을 날고 있어요.

부옇게 번져가는 물속은 이미 내가 살고 있던 곳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손에 의지한 채 발을 살짝 뗐다. 물살이 일어나면서 내 팔을 휘감고 내 허리를 감싸고 내 허벅지와 종아리를 휘감았다. 팔과 손목으로 작은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가와 입을 댔다. 간질이는 감각에 몸을 비트니 무수히 많은 별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처럼 물고기는 멀어졌다.

당신은 언제나 물속을 헤엄치죠.

이 기분을 하늘이 나는 것이라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안에 깃든 무게가 모두 빠져나간 듯 몸이 사뿐하다. 금방이라도 물에 녹아내릴 것 같다. 어쩌면 하얗게 돋아난 별로 흩어질지도 모른다.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 알겠어요.

하늘과 수면이 맞닿은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하늘 위의 것들이 물속 아래로 스며들었다. 어둠의 농도가 점점 깊어질수록 빛은 점점 또렷해졌다. 어디선가 거인의 숨소리처럼 파문이 일었다. 별이 잘게 떨 듯 은빛 비늘은 흐무지게 빛났다. 물고기는 항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수많은 별들이 되어 나를 에워쌌다.

물고기들 너머로 당신의 아름다운 몸이 보였다. 당신이 손짓하자 물고기는 별똥별이 되어 당신에게로 날아갔다.

 

 

 

 

나는 까치발을 든 채 거실로 들어섰다. 사위가 어두워져서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이가 딱딱거리고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손가락이 퉁퉁 불어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더 오래 있고 싶었다. 물속 세상에 펼쳐지는 풍경을 박제하듯 눈에 담고 싶었다. 당신이 물속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손짓을 하는지, 발을 힘차게 움직일 때 당신 발치에 있던 물고기가 얼마나 세차게 당신을 쫓는지. 눈을 감았다 뜨면 바로 그 순간의 풍경이 떠오르도록. 너울대는 수초가 까마득한 밑바닥에서 일렁인다.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번지는 초록빛의 빛깔이었다. 뭍에서 보았을 때 저수지는 짙은 녹의 빛깔이었는데 물에 들어서니 파르라니 파르라니 떨었다.

베란다 문 너머에서 여치와 같은 풀벌레가 울었다. 간간이 청개구리 소리도 섞였다. 저수지에 있을 적에는 소리가 아득하기만 했는데 집으로 오니 한꺼번에 소리가 밀려오듯 귀 가까이에서 크게 울렸다.

어둠이 넘실대는 공간에서 베란다 창문에 비친 나를 보았다. 내 모습이 흐릿했다. 어둠이 거대한 입을 벌려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나에게 향했다.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이해린인 걸까.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이해린이 아닌 것 같았다. 이해린이란 소녀는 사라지고 어둠이 자리를 차지한 것 같았다.

달도 뜨지 않는 밤이었다. 미끄러지듯 욕실로 들어가 샤워부스를 잡았다. 그때 아빠가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어둡던 사위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지금까지 어디 싸돌아다닌 거야?

아빠는 말을 짓씹듯 뱉고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위 들고 와.

여보, 말로 해요.

엄마는 발을 동동 굴렸다. 나와 아버지를 말리려고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엄마도 물속에서는 나처럼 서툴다. 엄마는 두 팔을 펼치면서 위로 솟구치려고 하지만 이내 물속에 가라앉고 만다. 헐떡이는 숨을 어쩌질 못해 괴로워하고 숨을 토해내면 하얀 물거품이 용솟는다. 조금씩 생을 뱉으면서 엄마는 몸부림쳤다.

나는 아빠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바동거렸다. 아빠는 수초처럼 나에게 들러붙어 나를 더 깊은 물속에 처박았다.

아빠는 나를 질질 끌고 가더니 연필꽂이에 꽂아둔 가위를 기어이 손에 잡았다. 나는 머리가 뽑힐 것 같은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서늘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더니 나는 바닥에 엎어졌다. 내 시선 위로 검은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뒤이어 쾅 하고 안방 문이 닫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는 소리를 바락 질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냔 말이야!

엄마가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고는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엄마를 밀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갔다. 엄마가 노크를 하면서 나를 불렀다. 해린아. 내 이름을 부르면서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쳤다.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까. 괴롭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아빠? 아니면 그저 당하기만 하는 엄마? 누구든 상관없었다. 한쪽 귀퉁이가 훤히 잘려간 내 머리를 어루만지면 엄마든 아빠든 모두 멀리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내가 먼저 사라지기를 바랐다.

 

 

 

 

자요, 선물.

속이 빈 종이컵을 당신에게 건넸다. 바닥 한가운데는 바늘로 뚫어 실로 연결했다. 부엌에서 찾아내 만든 종이컵 전화기다. 종이컵 하나와 다른 하나를 연결하는 실은 무척 길게 뽑아냈다. 저수지에 있는 느티나무에서 집까지 직접 걸어오면서 쟀으니 길이는 충분할 것이다. 낚싯줄처럼 투명하면서도 튼튼한 실이면 좋겠다 싶지만 우리 집에서 구할 수 있는 건은 하얀 실뿐이었다. 그것이라도 좋았다. 당신과 함께 없을 때면 그런 어설픈 것에라도 기대어 당신에게 닿고 싶었다.

나는 당신에게 종이컵을 귀에 대보라고 했다. 당신이 어정쩡하게 종이컵을 귀에 대자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가서 종이컵에 대고 말을 했다. 처음에는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다가 목소리를 키우면서 쩌렁쩌렁하게. 산과 산이 울림통이 되어 소리를 주고받으며 하늘 너머로 보냈다. 비명과도 같은 절규.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고통.

새들이 놀라 창공으로 흩어졌다.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해가 나와 당신을 비추었다.

새벽드리 학교를 가겠다고 집을 나섰지만 나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사내아이와 다를 바 없는 더벅머리로 학교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머리는 나의 치부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반 아이들에게 보인다면 내가 설 자리는 영영 사라질지도 몰랐다.

엄마는 내 머리를 손보겠다며 서툴게 가위를 잡았다. 서걱서걱, 가위질 하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렸다. 엄마는 그 새벽 머리칼과 함께 또 다른 것을 잘랐다. 분노와 원망, 무력감, 절망의 덩어리.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왔던 것을 모두 잘랐다.

더워서 잘랐어요.

짧아진 머리가 부끄러워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당신의 낯꽃에 파문이 일지만 별다른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는 일도 없다.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당신에게 건넨 종이컵을 빼앗았다. 내가 든 것과 마주보게 한 채 맞대고 있다가 머리 위로 내려앉은 나뭇가지에 걸었다.

어디 놀러 갈래요?

당신에게로 빙그르 몸을 돌며 경쾌하게 소리쳤다.

오늘 학교 안 가니까요.

나는 당신의 손을 잡아끌며 달음박질을 했다. 힘껏 발을 내딛자 플레어스커트가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당신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바짝 주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시큰해질 만큼 날씨가 좋았다. 먼 산에 걸친 하얀 구름이 안개처럼 가라앉았다. 점점 뿌옇게 번지는 구름은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저수지에서 내려오자 나는 당신을 잡은 손을 놓았다. 목을 두른 넥타이를 풀어 아무 곳에 던졌다. 목깃까지 꽉꽉 채운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치마를 더 위로 바투 올려 힘껏 달렸다.

바람은 어디서든 불어왔다. 이 바람은 누가 부르나. 누가 부르기에 이다지도 뜨거운가. 몸 안의 무게가 모두 녹기라도 한 듯 허공으로 몸이 불쑥 올라섰다. 좀 더, 좀 더, 좀 더 높게. 어깻죽지에 바람칼이 솟아나기라도 한 듯 허공으로 박차 올랐다.

너르펀펀한 들판 한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잎새가 간드랑간드랑, 제각각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푸드덕거렸다. 누가 나뭇잎을 흔드는 것일까. 애가 탄 손짓은 나뭇잎을 곳곳에서 어루만졌다. , 그렇구나. 나무가 바람을 불렀구나. 먼 곳으로 흩어져 있던 모든 바람을 하나로 모아 자신에게로 오게 했구나. 헤어진 연인들이 부둥켜안듯 나뭇잎이 잘게 떤다. 그것은 바람과 나무의 은밀한 속삼임. 그들만의 몸짓.

나는 누구를 애타게 불렀기에 이 바람처럼 달리고 있나. 얼마나 달려야만 내 안에 바스락거리는 것이 사라지나.

 

 

 

 

그때 그 시간은 그랬다. 교복을 입은 어느 중학생 소녀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한 남자. 그 둘은 나란히 길을 나섰다.

그들은 하천을 따라 내려간다. 보랏빛 향기로 가득한 포도밭. 하늘을 나부끼는 잠자리.

나는 강아지풀을 뜯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내 허리에까지 자란 수풀로 들어가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손바닥을 스치는 간질이는 감각에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강아지풀과 갈대 사이로 노란 코스모스가 피었다. 잠자리가 꽃 위로 올라가 나른하게 날개를 늘어뜨렸다. 내가 걸어가자 잠자리는 나풀나풀 날아가더니 빙그르 돌며 도로 앉았던 곳으로 내려왔다.

동네 하나를 지나자 아스팔트가 깔린 이차선 도로가 나왔다. 왼쪽으로 고개를 트니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나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신은 묵묵히 나를 따랐다.

이쪽 길은 처음이에요.

고향에서는 어디를 가든 낯선 감각이 없었는데 이사를 하고 나니 사방이 모르는 곳이 되어버렸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주위 시선에 예민해지던 시간이 늘었다. 아빠도 그랬을까.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낯선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과수원으로 매일 일을 가던 엄마만이 괜찮아 보였다. 동네 어른과도 살갑게 인사를 하고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은 엄마였기에 아무렇지 않으리라 여겼다. 엄마가 가진 괴로움이 그 안에 나뒹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계속 걸었더니 덥네요. 우리 아이스크림 먹어요.

슈퍼마켓 간판이 보이자 나는 아름드리 자란 감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낡은 평상이 있었다. 당신을 그곳에 앉힌 후 슈퍼에 들어가 재빨리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왔다. 봉지를 까서 당신에게 건넸으나 당신은 그것을 받지 않은 채 가만히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먹어요. 시원할 거예요.

내가 혀를 내밀어 할짝거리자 당신은 그제야 그것을 받아들었다. 처음 보기라도 하듯 당신은 아이스크림 곳곳을 바라보았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검은 바지에 떨어지자 당황해서 일어나는 그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내가 배를 부여잡고 웃자 당신은 멋쩍은 듯 콧등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내가 당신에게서 처음으로 본 미소였다. 코허리를 살짝 찡그리면서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올리던 모습. 부드럽게 웃으면 더 좋을 텐데, 나는 아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끝도 없는 길이 펼쳐졌다. 뜨겁게 달구어져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도로 너머에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을 터였다. 나와 당신이 그 세상으로 함께 향한다고 생각하니 점점 참을 수 없어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어디로 가볼까요?

기지개를 한껏 펴고는 손차양을 만들어 아지랑이 너머를 보았다. 손바닥이 끈끈했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당신에게 돌아선 순간, 당신은 고개를 든 채 결코 닿을 수 없는 세상을 보았다. 햇빛이 당신의 머리칼에 닿았고 일순 당신이 투명해진 것처럼 흐려졌다. 당신 바로 뒤에서 푸르게 반짝이는 나뭇잎이 선명하게 보였다. 당신 발밑에서 물꽃이 올라와 퐁퐁거리며 하늘로 올라선다. 당신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싶어 나는 당신의 옷깃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텅 빈 허공만이 내 손아귀에 닿았다.

비가 올 거야.

당신이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차갑다. 세모꼴로 된 비늘이 피부에 박혀있기라도 한 듯 당신이 닿은 자리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많은 비가 올 거야.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바람에 나부끼는 감잎이 있었다. 그 바로 아래 어린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들고는 입으로 후후 불고 있었다. 무엇이 즐거운지 까르르 웃으며 내 주위를 뛰어다닌다. 비눗방울이 내 뺨 바로 옆에서 터졌다.

당신은 그보다 떨어진 곳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 당신의 이름은 어째서 강인가요?

글쎄.

강도 흘러가고 싶은 곳이 있는 거예요?

어디로?

지금보다 나은 곳이요.

지금보다 나은 곳이 있니?

강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

전요, 있으면 좋겠어요. 가끔 막막해져요. 교실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꼭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거든요. 드디어 날 알아주는 건가 싶어서 말이 걸리기를 기다리는데 어느 순간 외면하더라고요. 마주쳤던 순간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처럼. 그런 순간이 오면 차라리 어디론가 흘러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혼자 있기 괴로우니까요.

어째서 혼자 있으면 안 되는 거지?

모르겠어요. 강은 혼자라서 외로웠던 적 없어요?

없어.

정말 외롭지 않았어요?

외롭지 않았어.

슬프지는 않았어요?

슬프지도 않았어. 넌 외로웠니?

외로웠어요.

슬프진 않았니?

슬펐어요. 너무 슬펐어요. 슬퍼서 미칠 것만 같아요.

그래서 힘든 거니?

힘들어요. 제가 참을 수 없는 순간은요, 사실은 누가 저를 외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아빠가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굴어주길 바라는 그때예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아주 조금은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 그 따스한 말이 너무나도 듣고 싶은데 아빠는 그걸 몰라줘요. 그래서 너무 슬퍼요. 슬퍼 미치겠어요. 너무너무 슬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강은 아나요?

…….

…….

……모르겠어.

저는 마치 물속 아래 잠겨 있는 것만 같아요. 처음에는 푸릇한 물속이었는데 점점 깊이 빠지더니 어두컴컴한 수렁에 갇혀 버린 거예요. 빠져나가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 혼자 잠겨 있는 거죠. 당신은 모르죠? 모를 거예요. 당신처럼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저 같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수영을 잘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그런 마음을.

…….

.

.

…….

…….

, , …….

……그래.

제 이름은 이해린이에요. 바다 해() 자에 비늘 린() 자를 써요.

…….

나를 잊으면 안 돼요.

…….

나를 잊지 말아줘요.

 

 

 

 

천 년, 당신은 천 년의 시간이랬다. 물속 아래 잠긴 천 개의 시간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랬다.

아득하다 싶을 만큼 깊은 시간은 비바람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바람이 달리고 물살이 소용돌이친다.

그해 여름에는 많은 것이 비와 바람에 쓸려갔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다. 바람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사라진 것만 그득했다.

차라리 잃어서 다행이었다. 당신이 사라지고서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을 많이 보았다. 반 아이들 중에서도 그해 태풍으로 집을 잃은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위로를 건넸다. 잃은 것이 있는 사람끼리는 외로움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때의 나는 외로움 그 자체였다. 어쩌질 못하는 외로움 때문에 허우적댔다. 하지만 나는 여기 이곳에 남아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외로움이 아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일까. 차라리 그랬길 바랐다. 당신이 외로움 그 자체라면 나는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없으니까. 외로움이 아니었던 탓에 나는 여기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두 손을 휘저으며 몸을 휘돌았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저수지에 드나들었다. 푸른빛이 부옇게 번지는 이곳에서 나는 마음껏 휩쓸리고 마음껏 허우적댔다. 만약 내가 저수지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았더라면 그 깊은 곳까지 가라앉지 않았다면 당신과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휩쓸리다보면 떠밀리다보면 언젠가 단단한 무언가가 나를 받치게 된다는 것을. 그것이 있는 한 물속에 가라앉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힘껏 발짓을 하고는 수면으로 튀어 올랐다. 희끄무레하게 휘몰아치는 산허리에서 하얀 것이 아른거렸다. 꼬리 같은 것이 파문을 일으키며 툭툭 쳐댔다. 나는 뭍으로 올라섰다. 발치에 뭉개진 종이가 뒹굴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 입에 갖다 댔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본다. , 하고 부르자 세상이 푸르게 일렁인다. 당신의 모든 것이 여기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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