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식사진전

2015.09.16 20:0709.16

여러 종류의 사진이 탁자 위에 정렬되어 있다. 낮은 산을 찍은 사진, 축축한 측백나무의 밑동을 찍은 사진, 파란 하늘에 스며들어가듯 옅어지는 권층운을 찍은 사진, 시간대가 변해 오렌지색 필름을 쓴 듯한 노을이 지는 하늘을 찍은 사진, 빈 땅에 놓인 주먹만 한 돌을 찍은 사진, 9층 아파트를 맞은 편 건물에서 정면으로 찍은 사진, 이름 모를 항구도시의 정경을 찍은 사진, 컴퓨터를 분해해놓아 펼쳐놓은 것을 찍은 사진, 서구권 사람인 듯 얼굴선이 굵은 여자를 가까이서 찍은 흑백사진. 작가의 머릿속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듯 추상적인 사진 등등. 피사체는 다양했고, 그냥 눈으로만 봐도 한 사람이 찍었다고 하기엔 너무 다양하고 상반된 인상의 사진들이 많았다.

실제로도 그렇다. 이 사진들은 모두 공모전에 출품된 사진들이다. 나는 그 공모전의 1차 심사를 하려고 사진을 펼쳐놓은 것이다.

일단 눈으로 보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들어, 끄트머리를 물었다. 그대로 앞니로 찢어내고, 사진 조각을 혀 위에 올렸다.

심사를 하고는 있지만 내가 심사위원인 건 아니다. 사실 고등학생 때 만난 졸업한 선배가 1차 심사위원인데, 일이 생겨 자기가 심사하기로 한 사진들을 나에게 넘긴 것이다.

“너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전부 씹어 먹어줘.”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며 복사한 사진들을 나에게 넘겼다.

그야 물론 내가 믿지 못할 사람이란 건 아니다. 솔직히 나는 선배보다 심사를 더 잘할 자신이 있다. 나만의 특별한 재능이라면 최종심사위원을 맡아도 꿀릴 게 없다고 생각한다.

방금 먹은 사진에서 혀를 찌르르 울리게 하는 풍미가 느껴졌다. 잘 익어 이 세상의 색이 아닌 듯한 빛깔의 복숭아와 황금빛 레몬을 동시에 베어 물어 반쯤 얼은 두 가지 차가운 과즙이 혀끝에서 녹아 그대로 스며드는 듯한 맛이다.

“훌륭한데.”

제대로 된 요리는 아니지만, 이정도로 신선한 맛을 낼 수 있는 사진이라면 1차 심사는 충분히 통과할 만하다.

한 입 만큼의 면적이 찢어진 사진을 옆 테이블에 따로 빼두었다. 2차 심사위원들이 이 사진의 진가를 알아봐주면 좋을 텐데.

나는 다음 사진을 집어 들고 입으로 옮겼다. 에그타르트처럼 부드러운 계란의 풍미와 달콤함이, 그리고 이어서 부스러지듯 계란에 녹아드는 바삭한 바게트의 식감이……. 아니, 이건 빵이 아니다. 첫 맛에서 에그타르트가 떠올라 한순간 착각했지만, 이건 고기다. 육고기 보다는 생선 계통에 가까울 것이다. 언젠가 먹어본 연어회가 떠오르는 맛이다. 빵으로 착각한 건, 생선살 구석구석에 모세혈관처럼 뻗어있는 잔뼈가 입안에서 씹혔기 때문이다. 잔뼈가 혓바닥의 융기들을 긁어댔다. 거기서 이미 첫맛의 좋았던 기분이 싹 가셨는데,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생선살이 차가운 게 아니라 기분 나쁘게 미지근했다. 마치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사이에 넣었다가 내놓은 것 같은 온도였다. 불쾌감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나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겉보기는 괜찮은데 이런 맛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첫맛이 괜찮았으므로 킵 하기로 한다. 여러 차례 선배가 던져준 공모전을 맡아본 결과, 이정도 사진이면 나중에 ‘아, 그때 먹었던 에그타르트 연어회가 그나마 나았는데!’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단 첫맛은 좋았으니까.

그 다음 사진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다음 사진을. 옆 테이블에 따로 놔두는 소수의 사진과,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대다수의 사진으로 차근차근 분류해나갔다.

내가 심사할 사진은 정확히 500장. 이 중 가장 나은 20장을 뽑아서 위로 올리면 된다. 나를 포함한 1차 심사위원 열 명에게서 거둔 200여 장을 2차 심사위원들이 다시 한 번 거르고, 그러면 대략 20장 내외의 사진이 최종심사로 올라간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위로 올릴 20장을 다 뽑았다. 이 중 여덟 장은 좋지만, 남은 열두 장은 분량을 채워야 해서 뽑은 그저 그런 사진이다.

상위 20장에서도 이렇게 갈리니, 나머지 480장은 얼마나 별로였는지는 네다섯 살 어린애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맛이 없다. 수준이하라는 게 미각으로 느껴진다. 쓰레기를 너무 먹어서 혀가 얼얼할 지경이다. 일반적인 미각으로 사진을 씹어도 이것보단 맛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사진도 대다수였다,

공모전 심사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몇 번 해봤지만, 늘 똑같은 감상을 갖게 된다. 예술성 있는 사진이란 게 뭔지는 모르지만, 대충 비슷하게 찍으면 혹시나 당선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사진을 찍는 응모자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응모자의 심정까지 맛으로 느껴지진 않지만, 그래도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사진을 먹을 때면 그런 내심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찍는 것으로, 조금 특이한 피사체를 마주한 것으로, 뭔가 느낌이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인상만으로 찍은 사진이 정말로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작가 스스로도 어떤 사진인지 모른다는 게 왜 ‘어쩌면 대단한 사진일지도 몰라’가 되는 걸까. 그야말로 원숭이가 햄릿을 쓰길 바라는 얘기다. 정말로 바란다면 먼저 무한대의 사진을 찍길 바란다.

사진이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쉬운 예술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미각이 거부하면 뭐 속고 싶어도 속을 수가 없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쓰레기통에는 사진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얼핏 나쵸 무더기처럼 보인다. 맛은 없지만.

원본사진은 따로 있기 때문에, 맛있었던 심사작은 다 먹었다. 나에게만 불행히 안 좋은 사진이 많은 것이고, 5000장 가량의 사진 중에 보다 훌륭한 사진이 많길 기도한다.

그 이후로 중간고사다 곧 수능이다 하며 까맣게 잊고 있던 공모전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은 슬슬 선선해지는 9월의 어느 날 학교 정문에 걸린 현수막을 보게 되었을 때였다.

‘K고등학교 1학년 유성열 학생 제15회 한국사진작가협회신인상 대상 수상’

강조하려는지 글자색이 붉다. R255 G0 U0. 높은 채도에 중간 정도의 명도. 대강 그 정도일까. 천재작가의 탄생. 지금 저 현수막을 뜯어먹는다면 그런 생각이 느껴질 것 같다. 사진 이외에는 먹어도 아무것도 못 느끼지만.

학교 안에서 1학년 교실을 지나치는데, 유성열의 주위에 1학년 애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어? 진우 형도 왔어요?”

아니다, 1학년 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성열 무리에서 벗어나 2학년 후배가 나에게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진우 형도 현수막 봤어요?”

유술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상 공모전은 전국최고 경쟁률이지 않아요? 장려상을 타도 대단한 건데 대상에다가 최연소 수상자라니. 이야, 제가 사진 동아리에 있을 때 진짜 천재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

유성열을 쳐다보았다. 주위에서 너도나도 내뱉는 얘기들이 뒤섞여 정작 걔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뭐, 상금은 얼마인지, 뭐에 쓸 건지, 나에게 조금 기부할 생각이 없는지 그런 얘기들이겠지. 여기서 진지하게 ‘너에게 사진이란?’같은 질문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질문 자체는 중, 고등학생이 쓸법한 재미없는 질문이긴 하다만.

3학년이 1학년 교실에 계속 있는 것도 내키는 일은 아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교실을 나왔다.

내 옆에 붙어오던 유술이 갑자기 은근히 표정을 바꾸었다.

“천재보존의 법칙이란 게 있는 거 아니에요? 형이 사진 동아리를 나가니까 저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거 보면.”

혀를 찼다.

“남 탓 하긴. 너도 노력해서 천재가 되면 되잖아.”

“넵. 재능이란 게 있다고 누가 예전에 말하긴 했지만요.”

문맥상 그 누군가가 나인 건 분명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솔직히 사진동아리에서 1년가량 봐온 바로는, 유술이 천재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따지자면,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유성열도 그다지 천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지만.

예전에 먹어본 유성열의 사진은, 그냥저냥 적당히 먹을 만한 수준이었었다. 어떤 요리에 비유할 수 있는 맛이었는지, 그렇게 상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김밥으로 치자면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이다. 그것도 차가운 상태 그대로의 삼각김밥.

나름 좋아한다. 나는 사진에 대해서 미각이 예민할 뿐이지, 실제 음식은 대체로 좋아한다. 아마 너무 맛없지만 않으면 구분을 두지 않는 게 아닐까. 허기가 조미료라고, 뭘 먹든 먹고 싶을 때 먹으면 좋은 것이라는 주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저 귀찮아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싶지 않은 것뿐이겠지.

수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나는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도착하고도 수업시작까지 5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한국사진작가협회신인상 올해 수상작. 링크가 걸린 게시글로 들어갔다. 그러자 유성열의 사진과 다른 입상작 사진들이 떴다.

몇몇 사진은 본 기억이 있는 듯 하다. 다만 그것은 어렴풋한 인상일 뿐이고, 확실하냐고 누가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으리라. 몇몇 사진이 내가 심사한 500장의 사진 중에 있었던 걸지도 모르고, 단지 예전에 봤었던 사진과 비슷한 사진일 수도 있다.

먹어보고 싶다. 먹어보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보기에는 꽤 맛있어 보이는데. 나는 스마트폰 액정에다가 혀를 갖다대려다가, 핥아본들 배터리의 발열 때문에 기분 나쁘게 뜨뜻해진 플라스틱 맛과 자꾸 만지느라 남아있는 손끝에서 분비되는 피지 맛, 그리고 조금의 전기적 신호 맛으로 드레싱한 잡탕 액정 맛밖에 나지 않을 거란 걸 떠올렸다. 예전에도 한 번 해본 적 있다. 혀를 갖다 대 본 사진이 원래 액정 맛인가 싶어 다른 사진도 맛을 보았지만, 같은 맛이었다. 내 혀는 아날로그 한정이라는 걸 깨달았었다.

액정 맛을 생각하고 있자니, 뭔가 어렴풋이 한 사진의 맛이 입안에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혀끝이 저릿하면서 입안에 침이 고였다. 맛있을 것 같아서 고이는 침은 아니었다. 혀끝에서 자꾸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정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출력해서 먹어봐야지. 그러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대상 수상작이 어떤 맛이지 궁금하기도 하고.

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니 만큼 일단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3교시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됐다. 잠깐 매점에 들리려 발걸음을 옮기는 중, 사진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됐다. 유성열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같은 장소를 맴돌 거나 이곳저곳 돌아다니거나 하고 있다. 딱 봐도, 뭘 찍을지 쥐어짜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10분은 짧다. 이미 5분이나 지난 걸 확인한 후, 나는 서둘러 매점으로 향했다.

빨대를 꽂아 초코우유를 마시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유성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교실이 있는 본관 건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별관 뒤쪽에서 돌아 나오고 있는 카메라맨이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유성열이다. 누가 보면, 쉬는 시간에도 사진을 찍는 저런 열정이야말로 수상의 단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탈퇴하긴 했지만, 전 사진 동아리 선배로서 쉴 때는 쉬라고 말해주고 싶다.

생각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은, 한때 나도 저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 사진 찍는 게 휴식이었으니까.

그래도 보는 사람 입장이 되니 괜히 신경 쓰인다.

돌려서라도 말할 생각으로 유성열에게 다가갔다.

“슬슬 쉬는 시간 끝나.”

내가 소리 높여 말하자 유성열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대로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진우 형.”

눈초리가 조금 처져 있는 게 눈이 띄는 유일한 점인,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의 얼굴에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평범하게 생긴 애가 신인상에서 대상이나 받다니, 이런 걸 보면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응, 신인상 축하한다. 진짜 1학기 때만 해도 네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과장하여 칭찬했지만, 이상하게 유성열의 안색은 내 말과 함께 어두워졌다.

“저도 몰랐어요. 혹시나 대상이 아닐까 로또 기다리는 심정으로 내긴 했는데요. 진짜 덜컥 수상해버리니까 제가 자격이 되나 의심되네요.”

“약간 자기혐오?”

“네, 저는 사진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니까요. 뭔가 자신감을 가질 건지가 없는 거죠. 형도 제 사진 보시고 평범하다고 했었잖아요? 제가 느끼기엔 그때 찍은 사진이나 이번에 수상한 사진이나 딱히 성장한 것 같지가 않아서요.”

“그래?”

유성열의 말을 듣고 보니 괜히 수상에 대해 나까지 의문이 느껴진다. 유성열의 말에, 자기는 수상할 자격이 안 된다는 걸 이해해 달라고 설득하는 느낌이 다소 있었던 게 그 이유다.

갑작스럽게 스타가 돼서 괴리감에 우울증이라도 생긴 걸까. 뭐든 스스로 이겨내야 하지만, 솔직히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사진을 먹어보고 판단하고 싶다.

나는 위로의 말은 사진을 먹어 본 이후로 미루고, 쉬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달려야 시간에 맞을 정도는 아니라, 우리는 교실이 있는 본관 건물을 향해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국사 선생님께 들은 얘기인데요, 아마 이번 학교 축제 때 제 사진 전시회를 하겠대요.”

“그래? 좀 강압적인 말투 아니야?”

“뭐, 그렇긴 한데 저도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요. 덜컥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해버렸어요.”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유성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닌 듯 낯빛이 어둡다.

“저도 좋은 경험이라고는 생각하는데요, 마음에 드는 사진이 부족해서 더 찍어야 해요. 근데 영 잘 안 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쳐주었다.

“전시회엔 어떤 사진을 올리면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단순히 좋은 사진만 냅다 전시해놓는 게 전시회는 아닐 거잖아요? 같은 테마로만 할까요? 우리 동네의 방방곡곡 이라는 느낌으로요. 뭐 일단 이런 고민도 찍어놓은 사진이 있고 난 후의 일이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유성열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 앞까지 왔다. 3학년 교실은 1층에, 1학년 교실은 3층에 있다. 이런 것도 노약자 우대일까. 나는 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는 유성열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내 교실로 향했다.

수능 준비로 여념이 없이 수업을 마치고 하교시간이 되었다. 유성열도 신경 쓰이고 해서 오랜만에 사진 동아리에 들를까 고민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뭐, 동아리실에 가면 익숙한 얼굴들이 있을 뿐이겠지. 동아리 멤버들은 다 열성적인 애들뿐이라, 학교를 마치고도 동아리실에 모두 모여 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진 나도 그 멤버 중 하나였었다. 이렇게 나오고 보니까 대체 뭘 한다고 귀가를 마다하며 동아리실에 죽치고 있었던 걸까 의문이 든다. 그다지 심심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할 것도 없었을 텐데 잘도 즐겁게 놀았다 싶다.

집에 돌아와서는 먼저 컴퓨터를 켰다. 유성열의 사진이 궁금했다. 어떻게 생긴 사진인지야 알지만, 그 맛을 아직 모르니까.

사진이 올려져 있는 사이트는 다행히 오른쪽 클릭을 막아놓지 않았다. 복사해서 프린트기로 출력했다.

프린트기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대체 무슨 작업공정이 이뤄지기에 ‘우웅, 철컥, 위이이우웅’ 뭐 이런 소리가 나는 건지 속을 들여다보고 싶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짓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행동이다.

어쨌든 그런 소리를 동반하고 움직이던 평면음식 제조기가 요리를 시작한지 채 1분도 안 되어 임무를 완료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나는 사진을 꺼냈다.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커터칼과 자를 챙겼다. 필요 없는 여백은 잘랐다. 아무 맛도 나지 않기는커녕 그냥 A4용지 맛이다. 먹을 이유가 없다. 마치 식빵 테두리를 자르는 느낌이다. 식빵테두리는 좋아하지만. 그러므로 다른 예시를 들자면 이건 과자 포장지를 뜯는 것과 같은 행위다.

조금 복잡하게 들어가자면, 사진이 찍힌 종이 용지에 따라서도 맛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맛이 달라질 뿐이다. 흔히 쓰는 A4는 우유 셔벗 같은 사르르 녹는 뒷맛을 남기기 때문에 웬만한 사진에는 다 어울린다. 나도 싫어하지 않고. 어쨌든 입가심에는 좋다.

마침내 작업을 마치고 유성열의 사진은 손에 들었다.

펼쳐진 우산을 찍은, 입체감이 느껴지는 흑백사진이었다.

피사체가 중심선에서 70%정도 오른쪽 편으로 치우쳐있는데, 조금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라보니 피사체 반대편으로 공간이 깊게 파여 있어 기묘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흑백이지만 그 명암 차이 때문에 빛이 반짝이는 게 보인다.

한 눈에 봤을 때는 ‘어떻게 이런 걸 찍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분명 내가 심사를 했던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맛이 좋았던 사진은 아니었다. 맛이 좋았던 기억은 없다.

어떤 맛이었지,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사진을 입에 넣었다. 도리어 기억나지 않아서 기대가 되는 사진이었다. 맛있을지 맛없을지가 아니라 순전히 어떤 맛인지가 궁금했다.

살짝 베어 물고 왼쪽 어금니로 꼼꼼히 씹었다. 이 맛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맛을 뭐라 비유해야 할까. 달걀? 달걀이라면 반숙인가 완숙인가. 혹은 계란말이냐 프라이냐.

어느 쪽도 아니다. 이런 말랑말랑 식감이면서 달걀 맛이 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하나밖에 없다. 에그타르트다.

순간 머리 속에 불꽃이 튀었다. 뭔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뭐였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맛은 계속 이어졌다. 에그타르트에 이어 바삭바삭한―.

나는 서둘러 사진을 목뒤로 넘겼다. 소름이 끼쳤다. 더 씹기 전에 눈치 채서 다행이다. 미처 삼키지 못한 물고기 특유의 비린 맛이 우유 셔벗의 식감과 함께 혀끝에 남았다.

기억이 났다. 이 사진은 연어타르트였다.

이 사진이 대상이라고? 운이 좋네. 사진이 속이기 쉬운 장르라곤 하지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이야.

혹은 요즘은 이런 퓨전음식이 트렌드인가.

한 번 더 사진을 들여다봤다. 뒤집어서 보기도 하고, 가까이서, 멀리 떨어뜨려서 살피기도 했다. 겉보기엔 멀쩡하다. 끄트머리가 뜯겨나간 상태긴 하지만.

최근에는 교내 이곳저곳에서 유성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항상 사진기를 든 채, 떠오르는 영감이 있으면 놓치지 않게 항상 셔터에 신경을 쏟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해야만 찍을 수 있는 사진도 있겠지만, 그다지 보기 편한 모습은 아니다. 사진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찍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긴장한 채 찍은 사진에는, 그 긴장이 고스란히 밴 맛이 나니까. 그 긴장은 긴장이 아니라 간장이다. 과한 긴장에서는 짠맛이 난다. 카메라를 쥔 손에서, 땀이 마르고 남은 소금기가 필름으로 옮겨가는 것일까.

점심시간. 멀찍이서 지켜보다 결심했다. 그래도 선배니까, 라는 생각이 용기를 심어주었다.

“사진 찍어?”

굳이 묻지 않아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건지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좀 더 말을 고르고 나서 말을 걸어볼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네. 진우 형은 이젠 사진 안 찍으시나요?”

“그냥저냥 간식 먹는 기분으로 가끔 찍지.”

“와, 진짜요? 부러워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할 말을 짧게 끝내고 그대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성열의 어조에서는 나와 더 얘기하고 싶다는 뉘앙스가 짙게 배어있었다.

못 느낀 척 하고 그냥 갈까 싶다가도, 그래도 사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버려두기엔 마음이 걸린다.

휴대폰을 잠깐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수업시작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아있었다.

“부러워? 왜?”

“저는 되게 이것저것 난삽하게 찍는 편이거든요. 형처럼 여유를 가지고 찍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 형이 동아리 활동할 때 찍은 사진들 봤었는데, 정말 좋은 사진들뿐이었어요. 보면서 계속 감탄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부끄러워지긴 하지만, 내 사진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인정한다. 자기도취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맛이 괜찮은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공모전에 당선돼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천천히 찍으려고 했어요. 좀 더 사진 하나하나에 공과 여유를 두고 싶었는데, 축제 때 전시회를 열어야 하다 보니 또 급하게 찍게 됐어요. 천성은 버릴 수 없는 것 같아요.”

“여유롭게 찍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적당히 예전 사진들 걸러내면 되잖아? 어차피 대단히 안목 높은 사람이 네 사진을 비평할 것도 아닐 텐데.”

유성열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찍은 사진들은 다 마음에 안 들어요. 거기다 지금 찍으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좀처럼 좋은 영감이 안 생겨서 문제지.”

이렇게 말한다면 내가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는 듯 하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최연소 신인상 수상작가의 수상 이후 첫 전시회인 만큼 외부 사람들이 모여들지도 모르겠다.

더 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때 유성열이 뒤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진우 형!”

뒤를 돌아보니, 유성열이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띤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마주 바라보자, 유성열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말하는 듯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저한테 사진 찍는 법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저 형이 찍은 사진들 좋아하거든요.”

“내가? 내가 신인상 수상작인 너를 가르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유성열은 한층 더 입가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에이, 형이 출품했으면 형이 대상을 탔을 걸요? 저는 방안에 불과했죠. 방안도 저에게 과분하지만요.”

나는 손을 저었다.

“나한테도 대상이 과분해. 내가 상을 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야 그럴게, 내가 심사까지 했었으니 출품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정식이 아니긴 했지만.

“아니요, 형은 꼭 됐을 거예요. 적어도 제 사진보다는 형의 사진이 더 좋아요. 형은 왜 공모전 같은 곳에 도전 안 하시는 거예요? 다른 형들한테 물어봐도 형이 공모전에 나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요.”

갑자기 쏘아붙여져서, 나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일단 화를 좀 가라앉혀줘야 할 것 같다.

“아니, 왜 갑자기 자책하고 그래? 명예로운 상까지 수상했는데. 네 사진도 좋은 사진이야.”

첫 맛은 좋은 사진이었지.

“좋은 사진이요? 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게 제 눈에 보여요.”

“뭐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았다. 부정을 한들 유성열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가르친다고 할까. 의지가 꺾이는 게 느껴졌다. 애초에 반드시 부정하자는 의지도 나에겐 없었다. 유성열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미각에 따른 좋은 사진 찍는 방법을 전수해주기만 해도 될 일이다. 이 방법은 나의 필살기라고 할만한 것이지만, 기초적인 것을 조금만 보여주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뭐가 됐건 저는 형 보다 못 찍어요. 그 격차를 줄일 수 있게만 형이 가르쳐주셨으면 해요.”

입가가 굳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에서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얘도 이렇게 대놓고 부탁하는 걸 힘들어하는 것이다. 나는 2학년이나 선배기도 하고.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남에게 이정도로 재차 부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도와주는 것을 수능 공부에 대한 기분전환 삼으면 되는 것이다.

“좋아. 내가 적어도 사진 보는 안목만큼은 월드 클래스니까.”

비상식적으로 특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굳이 레슨을 못 하더라도, 나는 비장의 수를 하나 가지고 있다. 유성열이 만약 신인상 수상자에 걸맞게 압도적으로 사진을 잘 찍게 되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마법처럼 못 찍은 사진이 잘 찍은 사진처럼 맛있어지는 조미료는 아니다. 나는 포토샵 보정 쪽은 젬병이다.

다음날 방과 후, 우리는 카페에서 만났다. 손님이 없는 카페였다. 커피 맛이건 다른 디저트건 인기가 없다는 걸 알고 찾은 카페다. 필요한 건 조용한 장소와 적당한 기온이었으니까.

유성열에게는 전날, 지금까지 찍어온 사진들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유성열은 사진을 유에스비에 담아서 가져왔다. 이걸로는 당장 사진을 볼 수 없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어젯밤에 고민해둔 몇 가지 말들 중에 하나를 꺼냈다.

“일단 우리의 목표를 확실히 정해야 해.”

“목표요?”

유성열이 금방 반문해왔다.

“그래. 일단 내 생각에는 목표는 두 가지야.”

나는 손가락을 하나 들고 말을 시작했다.

“네가 스스로 만족할만한 사진을 찍는 것. 그건 슬럼프 극복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진에 대한 기준치를 낮추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많은 형태를 띠지.”

질문할 시간을 주지 않고 두 번째 손가락을 들었다.

“두 번째는 이게 법보다 빠른 주먹인데, 전시회를 무사히 마치는 거야. 그야 그럴게, 이번 전시회만 제대로 치르고 나면 느긋하게 좋은 사진을 찍어도 되니까.”

“그야 그렇겠네요.”

“또 전시회 하자고 하면 그땐 단호히 거부해.”

“네, 알겠어요, 형.”

나는 입을 다물고 유에스비를 만지작거렸다. 사진을 못 보니, 생각해둔 몇 가지 작전 중 어떤 작전을 밀고나가야 할지가 안 보였다. 자기 패는 알아야 뭘 하던가 할 것 아닌가.

잠시 생각하다가, 나도 공부를 해야 하니 괜히 시간 끌지 않기로 했다.

“pc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진을 봐야겠다.”

내가 말을 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성열은 급하게 아메리카노를 비우고는 나를 따라 계산대로 향했다. 맛이 없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가장 가까운 pc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자리는 많이 비어 있었다. 나는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유성열은 내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둘이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pc의 전원을 올렸다. 미리 유에스비를 꽂아놓고 기다렸다.

“총 몇 점을 전시해야 돼?”

“그건 저보고 정하래요. 그런데 체육관을 통째로 써서 전시회를 하니 50점은 있어야 공간이 안 비어 보이지 않을까요.”

체육관 안을 떠올려봤다. 벽에 걸어서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세워서 전시할 거면 확실히 그 정도는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0점 정도면 꽤나 많은 분량이다. 사진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만들어볼까? 일단 한 번 들어가면 50점의 사진을 다 지나기 보기 전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식으로. 나름 재밌을 것 같다.

생각을 하는 사이 컴퓨터 부팅이 끝났다. 회원 아이디로 로그인 하고 유에스비에 들어가 사진을 띄웠다.

처음 사진은 눈사람 사진이었다. 단순한 눈사람은 아니고, 무슨 캐릭터를 본 따서 만든 것 같은데 내가 아는 게 아니라 잘 모르겠다. 피사체가 어떻건, 올해 눈 왔을 때 찍은 것이라 해도 꽤 예전이 찍은 사진이었다.

“아, 이거 작년 12월 말에 찍었어요.”

“그래? 전시회 할 때는 추워질 때니 이런 사진도 괜찮겠는걸.”

“아, 그러면 겨울 사진으로만 뽑으실 건가요? 그러면 신작은 못 싣는데, 어쩌죠?”

“테마를 안 정해놨으니 사진전 주제를 사계절로 하던가.”

“그게 좋을까요?”

“뭐 흔하지. 어쨌든 최종 판단은 네가 하렴.”

나는 마우스 휠을 한 칸 당겼다. 다음 사진이 화면에 올랐다. 첫 사진과 같이 겨울풍경을 담은 사진이었다. 눈 덮인 붉은색 벽돌 건물과 성에가 낀 창문, 눈으로 덮여 이파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나무. 클로즈업을 했는데도 꽤나 넓은 화면이 담긴 것 같은 절묘한 사진이었다. 입에 살짝 군침이 돌았다. 눈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빙수 맛이 입안에 떠올랐다. 저 붉은 벽돌건물을 보면 딸기잼을 얹은 빙수가 아닐까.

실제로 먹었을 때의 맛이 영 꽝일 수도 있지만, 겉모양은 좋은 사진이라 따로 폴더를 만들어 파일을 옮겨놓았다. 아직 사진은 많이 남았다. 왠지 느낌이 좋다. 실속이 없어도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니 못 쓸 건 아니다. 사진을 못 먹는 사람들뿐이니까. 안목이 뛰어난 사람은 내가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진에서도 결점을 찾아내겠지만, 그런 거야 무시하거나, 속뜻이 있다고 우기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다.

어쨌든 누군가의 비평은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니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

이번 축제 때 여는 전시회는 사진작가 유성열 한 명의 개인전인 셈이지만, 이런 큰 행사를 치르는 것도 하자면 어떻게든 되는 모양이다.

사진들을 둘러보다가, 드물게 인물사진을 보게 되었다. 렌즈를 당겨 여자아이를 찍은 사진이었다. 나보다 어려보이는 걸 보면 1학년이거나 2학년일 것이다.

“아, 형. 이건.”

유성열의 얼굴에 잠시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런 기색이라면 뭐, 이 사진의 정체는 뻔하다.

“뭐야, 도촬이야?”

“아, 아니에요!”

말까지 더듬으며 부정하는 걸 보면 역시 이 사진 속 인물이 누군지는 뻔히 짐작이 간다.

“그렇구나. 좋은 사진이네. 근데 사진전에 전시하려면 허락을 받아야겠지? 괜찮아?”

“좀 그렇죠. 일단 사진전에 와달라고 말은 해놨는데요. 오늘내일 중에 제가 허락을 받아 볼게요.”

인터넷 드라이브에 유성열의 사진을 저장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기에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고 한다. 일단 보기 좋은 음식들만으로 가득 찬 폴더를 내 컴퓨터로 옮겼다.

내 방문 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먹어라.”

나는 프린터의 용지를 확인했다. 양은 충분해 보였다. 인쇄를 시작해놓고 거실로 나섰다.

식탁 위엔 어느새 반찬이 다 차려져 있었다.

밥공기를 한 손에 들고 밥솥을 열자, 뽀얀 김이 확 올라왔다. 밥을 적당히 옮겨 담고 식탁에 앉았다.

깻잎조림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깻잎 같은 풀쪼가리도 이렇게 맛있게 만드는데 사진은 왜 그렇게 맛이 없는 게 많을까. 예술과 필수는 다르다는 문제일까?

“사진은 많이 찍고 있니?”

“조금 시들해졌어요. 그냥 간식으로 먹을 만큼? 아니, 간간히 찍는 정도에요.”

문득 실소가 새어나왔다. 왜 나왔을까. 어쨌든 그걸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한 마디 더 했다.

“일단 수능이나 열심히 하려고요. 잘 먹었습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진짜 음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니,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인쇄가 끝나있었다.

바닥을 치우고 나서 사진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이 모자라면 침대와 책상 위도 썼다. 간신히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만을 마련해두고 바닥을 가득 채웠다.

정말 많이도 찍었구나.

사진은 내가 더 잘 찍을 수 있지만, 이 정도라면 그 열정이 부러워진다. 정말 많구나.

이 중에서도 50점을 걸러내야 하니 반 이상은 없애야 한다.

이 사진들은 단순히 간격을 맞춰서 정리해놓은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기준에 따라 배열해 놓았다. 50여점을 전시한다고 해도 내 수준에서는 50점을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으로, 즉 사진전이라는 것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종합할 능력이 안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있다.

나는 사진을 하나하나 맛보았다. 생각한 대로 유성열의 습관이 드러나는 사진들이었다. 전체적으로 이상한 맛. 평범한 맛. 물에다가 식용유를 떨어뜨린 걸 마시는 것 같은 맛. 또는 맛은 아니지만 혀가 매운 적도 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성열이 물어본 적이 있다.

글쎄, 내가 생각하기엔 일단 일관성이 있어야겠지. 일관성만 있어도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반듯한 요리가 나오니까.

그런 것이다. 정말 다시 얘기해주고 싶다.

몇 시간 못 자고 등교했다.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

교실에서 친구가 놀란 얼굴로 물어왔다.

“어제 밤새도록 먹었어.”

“뭘 그렇게 먹은 거야? 너 술 마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친척들이랑 일이 있어서.”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곧장 유성열을 찾았다.

어젯밤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며 중독된 듯이 먹어댄 터라 속이 더부룩했다. 아마 이건 맛의 문제도 있겠지만, 종이를 너무 많이 먹은 탓도 있으리라. 맛이 느껴진다는 거지 종이가 배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종이가 음식으로 변하는 기적까지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교실을 빠져나오는 유성열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좀 늦게 끝났거든요.”

같이 풍경이 될 만한 사진이 있을 장소로 향했다.

“어쨌든 오늘 점심 먹고 체육관에 가보자.”

일단 교사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늘이 오랫동안 져서 검푸른 이끼가 보이는 담과 하수로, 경사진 언덕이 보이는 장소에서 카메라를 들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옆에 서서 지켜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멀리 돌아다녀봤어요.”

“한식요리사가 양식 재료로 만들어본다고 더 잘 되겠냐.”

도전은 해보고 싶은 일이긴 하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고.

“사진은 사진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으니까요.”

소름이 끼쳤다. 요리를 예시로 들었던 게 잘못이다. 괜히 속마음을 드러낸 것 같이 돼서 싫은 말을 들었다.

오전 내내 쉬는 시간마다 교사 뒤편으로 향했다. 사진 찍는 모습을 멍하니 보는 편이 막연하게 교실에서 쉬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한데다, 머리회전에도 좋아서 기름을 칠해준 듯 이런저런 생각이 막힘없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1학년이 먼저 먹는 날이라서, 일찍 식사를 했을 유성열이 체육관 한 구석에서 건물 내부를 조망하고 있었다. 풍경과 시선 사이에는 렌즈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걸어가자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유성열의 카메라가 내 쪽을 향하면서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곧바로 검은 외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체육관 안을 쭉 둘러보고, 여기에다가 사진을 놔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내가 들어온 문을 사진전의 유일한 입구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걸음을 세면서 체육관 안을 돌아다녔다. 이걸 이렇게 하고, 이 사진을 여기다 걸고.

발걸음의 울림과 함께 덩그러니 걸려있는 네트를 피해 다니며 걷고 있자니, 어쩐지 나는 사진을 찍는 것보다 사진 찍는 사람을 도와주는 쪽이 어울리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뭐든 처음은 재밌는 것처럼 프로듀싱이 지금만 즐거울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분이 상쾌했다. 나중에는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퍼펙트 플랜이 완성 되었다.”

나는 체육관 한 가운데에서 저 끝의 유성열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유성열이 처음으로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찍은 사진들은 필요 없을까요?”

“내가 하려는 사진전은 검증된 재료로 미리 생각해둔 요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재료는 충분해.”

공부도 사진전 준비도 잘 집중해서 확실히 해갔다. 워낙 일이 술술 풀려서 마냥 여유 넘칠 것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축제 전야.

사진 동아리 멤버들이 이주일 전부터 홍보를 하고, 인쇄소를 찾아다니고, 수십 장의 사진을 현상하는 등, 유성열의 사진전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나는 선생님들 눈치가 보여서 대놓고 도와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능을 치른 후 준비 마지막 날 만큼은 같이 학교에 남게 되었다.

축제 전야였다. 아침부터 이어졌던 사진전 준비는, 동아리 멤버들끼리만 이어가느라 상당히 진척이 늦었다. 결국 하교도 하지 않고, 국사 선생님이 남아서 감독한다는 걸 전제로 학교에 남아서 계속 준비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밤이 되었을 때는 분식집을 하시는 유성열의 어머니가 일이 끝난 후 따로 먹을 것들을 만들어서 찾아오시기도 했다.

“이거 이렇게 밤늦게 작업하는 것도 나름 괜찮네요.”

뜨거운 떡볶이를 후후 불어 먹으며 유술이 감탄을 내뱉었다. 호들갑스럽다고 느껴질 법도 하지만, 운치마저 있다고 느끼는 것은 정말이다.

“적당히 멋있는 것 같이 찍는 건 먹히지 않아. 그 수준 낮음이 혀로 느껴져. 맛없어. 얼치기로 쏟아낸 감정 때문에 혀가 얼얼하다고. 이 사진전이 끝났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니까, 앞으로도 계속 사진을…….

피곤해서 어질어질한 상태로 유성열에게 푸념을 쏟아냈다.

쪽잠을 자고 나온 축제 당일.

과연 최연소 신인상 수상자의 첫 사진전이라는 대단한 명성 탓인지, 일개 고등학생이 여는 사진전답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체육관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기자들이 보였고, 점점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정장을 입은, 익숙한 얼굴의 군의원분들이 오시기도 했다. 나중에는 일이 끝난 후인지 일반인들의 비중도 많아졌다. 잠시 밖에 나가보면 멀리서 기웃거리며 저기 들어가 볼까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럴 거면 돈이라도 받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거라면 그문드 종이에다가 사진을 출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번도 못 먹어봐서 무척 맛이 궁금하다. 잉크도 좋은 걸 쓰면 맛이 디테일해져서 혀가 녹아내릴 것 같을 텐데. 어떤 맛일까?

체육관 한편에서 이런저런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자니 한 여자애가 눈에 띄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확 들어온 게, 예쁘기도 했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맛있는 얼굴이었다. 유성열의 사진 속에서 본 얼굴이다. 지희 라는 이름의 1학년 고등학생이다. 가까운 다른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중학교 때에는 나름 자기와 친했다는 사실을 유성열 본인의 입으로 들었다.

남의 연애사정이야 어떻건, 지희를 찍은 사진은 내가 유성열의 사진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일단 맛은 물론 보장하거니와, 그야말로 어떤 감정에 대한 일관성이 느껴지는 사진이었으니까.

나는 지희에게 다가갔다.

“안녕, 유성열 친구지?”

지희가 사진에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네, 안녕하세요. 성열이 도와주신 오빠죠? 사진전 디자인 감독이었다고 들었어요.”

“뭐 컨셉이나 이것저것도 내가 했지.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날 알아봤냐는 질문이었다. 그에 대해 지희는, 잠시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띄다가 의외의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눈이 예뻐요. 그래서인지 사진을 보는 눈이 대단하대요.”

나는 오른쪽 눈초리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예쁜가? 거울은 그다지 들여다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사진전에 대해 알아보면 조명이나 사진이 걸린 높이, 사진들과의 간격 같은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여기서만큼 그걸 확실히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만찬이네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지희도 간담이 서늘해지게 안목이 예리하다.

“뭐 코스요리 같은 거지. 개개의 요리를 각각 따로따로 보면 조금 부족해도, 그것들을 어떤 순서로 먹느냐에 따라 이게 또 맛이 달라지거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뭔가를 먹으면 그 맛이 혀에 남아 있잖아? 그 남아있는 맛이 뒤에 먹는 요리에도 영향을 끼치니까. 그 밸런스를 잡는 게 내 비장의 무기라고 할 수 있지.”

말하고 나서 반응을 살피니, 지희는 애매하게 웃고만 있었다. 하기야 관점이 다르다보니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사진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가게 마련해놓은 길을 나가기로 했다. 이곳을 지나야 유성열이 있는 곳 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성열은 여전히 촬영중독이다. 걸신들린 듯이 이 사진전이 치러지는 모습을 보며 이곳저곳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그런 유성열의 모습을 발견하자, 내 뒤를 따라오던 지희가 날 지나쳐서 유성열에게 다가갔다. 반쯤 뛰듯이 걸어가, 렌즈에서 눈을 뗀 유성열에게 즐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멀고 주위가 소란스러워 무슨 얘기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지희가 거리낌 없는 것에 반해 유성열은 몇 센티쯤 상체를 뒤로 물린 채 지희를 대했다.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끔씩 사진기를 눌러대는데, 제대로 접안도 하지 않은 채인데다 셔터 수는 이미 필름 장수를 넘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컥하고 뜨거운 게 목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더니, 오랜만에 사진을 찍고 싶어졌다. 지금 셔터를 누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뜻하고 달콤한 딸기파이처럼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사진을 몇 장이고 찍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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