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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맞선남의… 손톱!

2011.06.25 00:2306.25

내 친구 하나가
선 봐서 결혼을 했거든.
글쎄, 이런 것도
선 봐서 결혼했다고 해야 되나?
하여간 사연이 좀 특이해,
들어 봐.


그러니까 맞선
본 상대가 누구냐 하면 친구네 엄마랑 친하게 지내는
동네 아주머니가 아는 사람 아들이었대.
이렇게 써 놓으면 완전 복잡한데 선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뭐, 부모님
인맥 한 바퀴 다 돌 만한 나이가 되고 나면 그 담부터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식으로 몇 다리 건너 건너 보게 되고 그런 거지.
하여간 그래서 다 동네 사람들이라 동네 커피
가게에서 동네 맞선을 봤대.
동네 맞선’이라는 말이 너무 웃겨서 그럼
반대말이 뭐냐고 했더니 내 친구 왈 호텔 맞선이라더군.
맞선이 다 똑같은 맞선이지 호텔 맞선하고 동네
맞선하고 뭐가 그렇게 다르냐고 했더니 커피값이 완연히
다르다는 거야, 똑같은
커피인데 호텔이 네 배쯤 더 비싸다나.
뭐 그 커피값 자기가 내는 거 아니니까 여자한테는
아무래도 똑같지만. 그래서
내 친구는 정성껏 꽃단장하고 맞선 보러 나간 거야.


나갔는데 맞선남이
영 아니더래. 왜냐하면
약속 시간에 이십 분을 늦었거든.
그것도 약속시간 딱 맞춰서 전화해서 지금
도착하셨냐고, 자기도
근처에 왔으니까 금방 가겠다고,
그러더니 이후 이십 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더라는
거야. 내 친구는 화장도
고치고 거울도 들여다보고 전화기도 들여다보고 다시
거울-전화기-거울-전화기
들여다보면서 어찌어찌 십 분 넘게 기다리다가 전화를
해봐야 되나 문자를 하는 게 더 낫나 걱정하다가 십오
분쯤 되니까 남자가 안 오려나보다,
근데 안 오려면 아예 오지 말지 다 왔다고 전화하는
건 뭐냐, 혹시 문앞에서
납치당했나, 이런
경우에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건가,
엄마한테 전화할까,
이런저런 고민들을 심각하게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남자가 나타났다는군.


그래서 상당히
마음이 혼란한 상태에서 그래도 커피 시켜놓고 첨 보는
사람이랑 마주 앉아서 안 되는 대화를 어색어색하게
열심히 간신히 이어나가고 있는데 남자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고 머그잔을 들어서
커피를 마시려다가 머그잔 손잡이에 손가락이 부딪쳤는데,
정확히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 하더니 뭐가 내
친구 쪽으로 날아와서 앉아 있는 내 친구 배에 맞았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는 거야.
친구가 무심결에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그게 뭔지
알아? 손톱이더래.


,
손톱. 희끄무레하고
좀 투명한 그냥 손톱. 아마
엄지 손톱인 거 같았는데 완전 깔끔하게 떨어져 나온
거 보니까 아무래도 그 왜 네일샵에서 붙여주는 가짜
손톱 같더라는 거야. 근데
가짜 손톱이 거기 왜 떨어져 있으며,
더 중요한 건 왜 맞선 보는 남자한테서 가짜 손톱
같은 게 날아오는 거냐고?


내 친구는
황당하지. 어쨌든
떨어졌으니까 주워서 남자한테 줬대.
그랬더니 남자가 또 그걸 ‘아,
감사합니다’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서
자기 오른손 엄지손가락에다가 끼우더라는 거야.


그걸 보고 있으니까
만정이 뚝 떨어지더래. 아니
무슨 남자가 가짜 손톱을 붙이고 다니니?
그리고 붙이려면 제대로 붙이지 하필 맞선 자리에서
이십 분이나 늦게 온 주제에 거기다가 손톱까지 핑,
날아가서 생전 처음 보는 맞선 상대녀 옷에 맞고
떨어지는 건 또 무슨 엄청난 실례냐고.
내 친구는 당장 그 자리에서 상대 남자한테,
커피잔 손잡이에 걸려서 떨어지는 거 보니까 그
네일 야매도 그런 야매 없다고,
네일샵 바꾸시라고 한 마디 해 주고 자리 박차고
나오려다가 엄마랑 엄마 친구 아주머니 얼굴이 생각나서
참았대. 이래서 자고로
맞선이라는 게 주선한 사람 체면 생각해서 참고 참다가
나중에 헤어지고 나면 남자는 커피값 생각나서 속이
쓰리고 여자는 화장품값 미용실값 옷값 생각나서 속이
쓰리고 서로 낭비한 시간 생각하면 열만 받는 채로
끝나는 천하에 쓸데없는 행사 아니겠어.
그리하여 내 친구도 사천이백원짜리 커피 한 잔
얻어먹고 예의상 한 시간쯤 억지로 낭비해 주신 뒤에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야.
그렇게 이상한 남자일 줄 알았으면 커피라도 비싼
거 마실 걸 그랬다고 나중에 막 화를 내더라구.


근데 남자는 또
내 친구가 마음에 들었던가 봐.
그 뒤로도 소심한 문자가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왔었다는데 내 친구는 다 씹었지.
원래 맞선 보면 꼭 내 맘에 든 사람은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내 맘에 안 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까 둘이 눈 딱 맞아서 이어지기란 하늘의 별따기잖아.
하여간 그래서 연락오는 거 다 씹어버리니까
조용해져서 내 친구는 그대로 그 맞선남하고는 다시
안 볼 줄 알았대. 근데
한 달쯤 있다가 다시 만난 거야.
어디서 만났게?


내 친구가 검도를
배우거든. 사실 내가
보기에는 얘가 이래서 시집을 못 간 것도 좀 있어.
선보러 나가서 남자가 맘에 안 들면 첫 마디에
자기 검도 배운다고 얘기하는데 그러면 예외없이
100% 초토화라는 거야.
그 뒤로는 절대로 연락 안 온다는군?
내 친구가 무슨 검도를 배워서 남자를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검도를 그다지도 무시무시하게
잘 하는 것도 아니라는데 (자기
입으로 지지리 못 한다고 그래,
난 잘 모르지만) 남자가
돼가지고 그 말 한 마디에 자존심 상한다고 화를 내거나
도망을 갈 건 뭐니? 진짜
웃겨. 근데 내 친구는
그렇게 하면 이상한 놈들이 달라붙질 않는다고 상당히
만족해 하더라구.


어쨌든 그래서
내 친구가 검도 배우러 다니는데,
그 도장도 좀 특이해.
관장님이 검도 5단인데
여자분이래. 사실 내
친구는 관장님이 여자라서 그 도장 다니는 거야.
검도장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도장 들어가면
사방에 잔소리가 붙어 있대.
도장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으십시오.
대한검도회.” “탈의실을
깨끗이 사용합시다.
대한검도회.” “죽도를
넘어 다니거나 죽도로 장난을 치지 맙시다.
대한검도회.” “마지막으로
나가는 사람이 불을 끄고 나갑시다.
대한검도회.” 기타등등.
근데 이 모든 잔소리가 다 똑같은 디자인에다가
‘대한검도회’ 템플릿으로 코팅까지 돼서 사방에
붙어 있다는 거야. 대한검도회는
그런 안내문을 무슨 주차 딱지처럼 일률적으로 인쇄해서
배포하나? 근데 서울
시내에 검도장이 몇 갠데 그걸 일일이 다 나눠주는
걸까?


어쨌든 그렇게
돼 있는데, 얘네 관장님은
이 대한검도회 잔소리 밑에다가 A4
용지에 출력해서 이런 식으로 다 붙여놨다는
거야. “도장에 신발
신고 들어오면 청혼합니다.”
탈의실을 더럽히면 청혼합니다.”
죽도로 장난치면 청혼합니다.”
나가면서 불 안 끄면 청혼합니다.”


사실 관장님이
여자분이니까 내 친구로서는 청혼해도 별로 부담은
없는데, 검도 5
카리스마 관장님이 청혼한다고 그러면 남자 관원들은
약간씩은 진짜로 겁먹는다고,
관장님이 그러시면서 웃더래.
하여간 그렇게 화기애매한 분위기에서 뭐 그럭저럭
명랑하게 돌아가는 도장인가봐.
근데 바로 거기에 그 때 그 맞선남이 나타난 거야.


근데 이 손톱
빠진 맞선남이 검도장엔 왜 왔냐 하면 내 친구를
스토킹이라도 해서 따라다닌 건 절대로 아니고,
알고 봤더니 원래 검도를 하던 사람이라는 거야.
동네 가까운 데 있던 다른 도장하고 내 친구가
다니는 도장하고 합쳤다나봐.
근데 이 맞선남은 하필 그 다른 도장에 예전부터
다니고 있었던 거지, 도장을
합치니까 이제는 이 쪽으로 운동하러 온 거고.
우연치고는 신기한 우연인 거 같지만 또 사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동네 아주머니의 아는 동네 사람
소개였으니까 처음부터 다들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동네 맞선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하여간 그래서
내 친구는 얼떨결에 한 달 전의 손톱 빠진 맞선남하고
검도장에서 마주쳐서 대련을 하게 돼 버린 거야.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는데 일단 운동을 하긴 해야
되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손목을 쳤는데,
쳐서 맞았대, 근데
갑자기 호완이 뚝 떨어지더래.


호완이 뭐냐
하면 검도할 때 쓰는 장갑인데 내 친구 거 보니까 길고
크고 딱딱한 게 꼭 주방용 오븐 장갑같이 생겼어.
하여간 손목을 쳤는데 그게 뚝 떨어져서,
대련하다 중단하고 호완 도로 끼시라고 말하려고
보니까 호완이 벗겨진 게 아니고 손목이 같이 떨어졌더라는
거야. 죽도로 쳤을
뿐인데 손목이 진짜로 뎅겅 잘려나간 거지.
근데 내 친구가 질겁을 해서 보고 있으니까 그
맞선남은 아무렇지도 않게 호완째로 손목을 집어들더니
무슨 인형 팔 끼우듯이 꾹 눌러서 도로 끼우더래.
근데 또 그게 그렇게 꾹꾹 끼우니까 금방 도로
끼워지더라는 거야. 황당하지
않냐? 그래서 내 친구가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그 손목 떨어진
맞선남도 좀 쑥스러웠는지 오른팔을 몇 번 구부렸다
폈다 하더니 “이게 평소엔 잘 안 끼워지는데 오늘은
금방 붙네요, 하하,”
이러더라는 거야.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지만 상대가 다시 대련하자고 자세 취하고 기합
넣으니까 내 친구도 중단 잡았지.
손목은 아까 뎅겅 잘린 게 신경 쓰이니까 이번에는
허리를 쳤대. 근데
그랬더니 이번에는 허리가 덜렁 잘리더라는 거야.
처음에는 몰랐는데 남자가 돌아서니까 상체가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갑상 착용한 채로 바닥에 쾅
떨어지더래, 다리 쪽은
갑이랑 다 착용한 채로 그대로 서 있고.
등 뒤로 돌아가서 어떻게 된 건지 보니까 겨드랑이부터
반대쪽 골반까지 몸통을 가로질러서 죽도 지나간
모양대로 비스듬하게 잘렸더라는 거야.


내 친구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지. 그런데
남자가 (그러니까 남자
상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좀 들어서 허리 위에다 얹어달라고 그러더래.
그 말 듣고 내 친구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멍하니 보고 있으니까 그 남자랑 같은 도장 다니다가
이 쪽으로 넘어온 다른 사람들이 와서 허리 위에다가
도복이랑 갑상 아래로 갈라진 곳 위치 잘 맞춰서 얹어
주더래, 아마 그 쪽
사람들은 그런 꼴 여러 번 봤나보지.
그랬더니 이번에도 그냥 허리가 곧바로 붙더라는
거야. 그리고 남자는
계속 대련을 할 기세였는데 관장님이 3
지났다고 호각 불어서 인사하고 한 바퀴 돌았고.
그리고 한참 운동하다가 드디어 순서가 돌고
돌아서 다시 그 허리 잘린 남자하고 대련을 하게 됐대.


아까 손목 쳤더니
손목 떨어지고 허리 쳤더니 허리 잘리고 그랬잖아?
내 친구는 완전히 어쩔 줄을 모르게 된 거지.
그래서 머뭇머뭇하면서 그냥 서 있다가 계속
두드려 맞았대. 게다가
남자가 진짜 잘 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계속 맞다 보니까 열받아서 자기도 때렸는데
그게 머리에 맞았대. 이번에는
머리가 뎅강 굴러떨어지는 건가 싶어서 순간 얼었는데,
언뜻 보니까 호면 (투구
같이 생긴 거 있어, 사무라이
시대에는 진짜 투구였는지도 모르지)
안에서 남자 얼굴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가 다시
붙더라는 거야.


나 같으면 그거
본 순간 기절했을 텐데 내 친구는 그 때 딱 드는 생각이,
아 호면이 있으니까 머리는 쳐도 안 떨어지는구나,
그래서 그 다음부터 계속 머리만 쳤다는 거야.
근데 남자가 키가 꽤 커서 때려도 잘 맞지는
않더래. 그래서 머리
때리려고 하면 남자가 받아서 내 친구 허리를 때리고,
다시 머리 때리려고 하면 남자가 받아 허리 때리고,
계속 머리-허리,
머리-허리,
이러고 무슨 얼간이들끼리 슬랩스틱하는 것처럼
똑같은 동작만 되풀이하다가 간신히 어떻게 한 대 쳐서
머리 한 번 맞추고 끝났대.


그리고 운동 다
끝나고 나서 서로 모여서 자기 소개를 하게 돼서 그
때 물어봤대, 아까
그거 왜 그런 거냐고. 그랬더니
그 맞선남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원래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남자라나.
그러니까 몸이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원래
그렇게 쩍쩍 갈라지고 뚝뚝 떨어지고 그런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원래는 그거 붙이려면 맞춰놓고 한참 기다려야
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잘 붙더라구,
실실 웃으면서 그러더래.


근데 남자가
툭하면 깨지는 주제에 검도는 또 1단이더래.
몸이 그래가지고 운동은 어떻게 하시냐고 물어봤더니
남자가 하는 말이 자기가 이러니까 상대방이 신경쓰여서
잘 때리질 못한다고, 그래서
손목 한 번만 떨어뜨리고 나면 그 담부터는 오히려
자기가 유리하다는 거야.


그 말을 들으니까
내 친구는 낚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울화통이 확 터지더래.
근데 뭐 어쩌겠어,
이미 대련 다 끝났는데.
새로 사람들 왔다고 관원들끼리 술 마시러 가자고
그러는데 내 친구는 열받아서 그냥 집에 와 버렸대.


집에 오면서
생각해 보니까 맞선 때 손톱 떨어진 게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가더래. 그러니까
자기는 남자가 무슨 네일샵엘 다니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가짜 손톱이 아니고 진짜
그 남자 손톱이었던 거지.
머그잔 손잡이에 부딪치는 정도로도 손톱이 날아가
버리는 거야. 근데
손톱 빠지면 엄청 아프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불쌍하긴 하더래,
남자 하는 행동을 보니까 전혀 아픈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그 뒤로 내 친구는 검도하러 가서 그 남자 손목
주워서 붙여주고 허리 주워서 얹어주다가 시간 다
보내게 돼 버렸어. 왜냐하면
그 남자가 하는 말이 원래 자기가 한 번 그렇게 떨어지면
붙는 데 진짜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내 친구하고
있으면 그냥 얹어주고 끼워주는 대로 순식간에 붙는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랑 대련하다가도 몸 어디가 떨어지면 주워가지고
멀쩡하게 운동하는 내 친구한테 와서 그걸 붙여달라고
한다는 거지. 한창
공격하는데 괜히 옆에 와서 얼쩡거리다가 얼떨결에
죽도에 맞아서 괜한 다른 부위까지 뎅겅 떨어진 적도
몇 번이나 있었대. 그러면
내 친구는 운동하다 말고 깜짝 놀라서 다 그만두고
주섬주섬 붙여주는 거지.
좀 지나면 익숙해져서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남자가 어디 떨어진 걸 들고 있으면 그게 너무 신경이
쓰여서 안 붙여줄 수가 없더라나.


그러니까 내
친구는 검도하러 가도 운동을 제대로 못 하지.
매번 남자가 어디 떨어진 걸 들고 와서 옆에 무슨
밥 달라는 강아지처럼 쳐다보고 서 있으니까.
도장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몇 번
그러고 나니까 내 친구도 화가 나기 시작하더래.
집에 오면서 생각해 보면 왜 내가 내 돈 내고 운동
배우러 가서 남의 시중을,
그것도 저렇게 이상한 남자의 이상한 수발을 들고
앉았나 생각하면 열통이 터지더라는 거야,
안 그렇겠어? 도장을
바꿔서 딴 데를 나갈 생각도 했는데 지금 관장님 여자분인
것도 좋고 잘 가르쳐주시는 것도 좋고,
딴 데 가면 또 그 도장 분위기랑 거기 관원들이랑
처음부터 다 다시 적응해야 될텐데 그런 건 싫고,
이것저것 다 골치 아픈데 아예 검도를 그만둘까
그런 궁리도 심각하게 하더라구.
한동안은 만나기만 하면 도장 그만두겠다는 소리만
하더라니까.


근데 그만두질
않고 찔끔찔끔 계속 나가길래 화끈하게 그만두지 왜
질질 끄냐고 했더니 호구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다는
거야. 걔가 산 게
국산이라서 호구치고 그렇게까지 비싸진 않지만 그래도
육십만원 넘게 주고 샀대거든.
육십만원이 아주 막 엄청나게 큰 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집 애 이름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내 친구가 검도 자체가 싫어져서 그만두려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래서
도장에 모셔놓은 육십만원 호구가 아까워서 그만두려다가
또 가고 또 가고 꾸역꾸역 그렇게 돼 버렸다는 거야.
물론 매번 갈 때마다 남자 손목이니 허리통이니
주워다가 붙여줘야 했고.


그러다가 결국은
검도장에 붙은 그 안내문에 나온 대로 남자가 내 친구한테
청혼을 해 버린 거지. 청혼한
이유가 상당히 괴상했지만 어찌 보면 뻔했는데,
남자가 하는 말이 자기 몸이 쉽게 떨어져나가고
붙이는 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데 내 친구하고
같이 있을 때만 그 자리에서 제꺽 붙는다는 거야.
그러니까 자기는 내 친구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제발 결혼해 달라고
그러더래.


내 친구는 물론
농담인 줄 알았지.
말을 듣고 제일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내가
도장에서 신발 제대로 벗었나?
탈의실 정리했나? 죽도
가지고 장난 안 쳤는데?
아하 도장 불을 안 끄고 나왔구나,
하고 운동하던 데로 도로 들어가서 불을 끄고
나와서 집으로 가려고 했다는 거야.
남자가 붙잡길래 도장 불도 껐으니까 청혼하실
필요 없다고 그랬대, 얘도
참 내 친구지만 순진한 건지 한심한 건지.
근데 남자가 한사코 붙잡으면서 주머니에서 뭘
꺼내는데 보니까 반지더라는 거야.
남자가 안 맞으면 바꿔올 테니까 한 번 껴 보라고
주는데 그걸 보고서야 내 친구는 제 정신이 든 거지.


그래서 물어봤대.
그 쪽이 뭘 바라고 나랑 결혼하려는 건지는
분명하지만, 내가
댁이랑 결혼하면 도대체 얻는 게 뭐가 있냐고.
그랬더니 남자가 대답을 못 하더래.
그래서 내 친구는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자기는 이딴 식으로 사람 가지고 노는 거 불쾌하다고
쏘아붙이고 집으로 와 버렸다나.
그리고 한동안 신경쓰여서 검도장을 좀 안 나가다가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이 남자 때문에 운동도 못하고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는 거 같아서 내가 널 쫓아내지
니가 날 쫓아내냐, 하고
검도하러 가 봤더니 남자가 안 왔더래,
그래서 한 일이 주 정도는 별일 없이 평온하게
검도장을 다닌 거지. 근데
물론 거기서 끝난 건 아니고 남자가 검도장을 다시
왔어.


운동하러 온 게
아니고 끝날 때까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 친구가
나오니까 붙잡더래. 그래서
내 친구가 이러지 말라고,
나는 더 이상 할 말 없다고 그랬더니 남자가 그러지
말고 자기 얘기 좀 들어 달라고,
그 때 했던 말에 대해서 대답을 준비해 왔다는
거야.


그래서 내 친구가
말해 보라고 그랬더니 남자가 우물쭈물 하다가 도로
도장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냐고 그러더래.
도장 문이 번호 키로 돼 있는데 좀 오래 다닌
관원들은 다 번호를 알아.
그래서 관장님이 없어도 운동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거든. 운동
끝나고 다들 집에 가서 아무도 없을 테니까 거기서
자기가 내 친구한테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내 친구는
좀 망설이다가 도장으로 도로 갔대.
대체 뭘 믿고 그 남자랑 단 둘이서 거길 들어갔냐고
내가 펄쩍 뛰었더니 내 친구 하는 말이 “이상한 짓
하려고 들면 목이나 다리 같은 데 때려서 뎅강 잘라버리고
나는 도망치면 되잖아” 이러더라구.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도장으로 도로 들어갔어.
남자가 불을 켜더래.
그러더니 바닥에 웅크리고 앉더라는군.
남자가 앉으려고 몸을 숙이니까 내 친구는 순간적으로
이 남자가 무릎이라도 꿇으려는 건가 싶어서 깜짝
놀랐는데 그건 아니고 그냥 몸을 한껏 웅크리더래.


그러더니 남자가
강아지로 변하더라는 거야.


하얗고 복실복실하고
통통한데 진짜 귀엽더래.
너무 예뻐서 방금 전에 남자가 변신한 강아지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내 친구는 그대로 안아서 쓰다듬어주려고
했대.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 소리를 꽥 질렀대.
그랬더니 남자가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는 거야.


그리고선 남자가
내 친구한테 뭐라고 했냐면,
여태까지 살면서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데,
이건 자기 부모님도 모르시는 일인데,
자기는 변신을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내 친구한테,
자기랑 결혼해주면 둘이 같이 있을 때는 뭐든지
내 친구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겠다고 그랬대.
강아지가 좋으면 강아지가 되고 고양이가 좋으면
고양이가 되고, 꼴보기
싫다고 그러면 바퀴벌레가 돼서 숨어 있든지 아니면
소가 돼서 밭을 갈라고 해도 자기는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강아지나 고양이는
귀엽지만 결혼하고 봤더니 남편이 바퀴벌레나 밭 가는
소가 돼 있으면 그건 좀 너무 곤란하잖아?
그래서 내 친구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물어봤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댁이 조건이 좀 특이해서 장가를 못 가시는 건
나도 알겠지만 여자는 나 말고도 많으니까 나보다 더
어린 여자 이쁜 여자 착한 여자 깔렸을텐데 그 중에
찾아보시면 댁의 신체조건 상관없이 결혼해주겠다는
사람도 있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남자가 그러더래.


몸이 떨어져나갈
때 엄청나게 아프대. 당연하지,
말 그대로 몸이 떨어져나가는 거니까,
얼마나 아프겠어. 근데
내 친구랑 같이 있으면 안 아프다는 거야.
떨어져나가도 아프고 떨어진 게 붙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무지무지 아픈데,
내 친구랑 있으면 순식간에 붙어서 그 기다리는
동안 아픈 걸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자기가 그런 식으로 아픈 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만,
최소한 내 친구랑 같이 있으면 좀 덜 아프게,
좀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거 같다고,
그 남자가 그러더래.


내 친구가 맞선
보러 나가면 상대방 남자 떠 보려고 검도 얘기 하듯이,
이 남자도 알고 보니까 선 보러 나가면 한 번씩
그렇게 손톱을 튕겨 본대.
근데 그 자리에서 뭐라고 쏘아붙이고 자리 박차고
나가지 않은 여자는 내 친구가 처음이었다는 거야.
떨어진 게 손톱인 걸 보면 다들 쓰레기인 줄 알고
발로 밟거나 차 버리거나 무시하는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주워서 정중하게 돌려준 사람도 내 친구가 처음이라나.
그리고 이십 분 늦었는데 다 기다려주고 독촉
전화 안 한 것도 이 남자한테는 은근 감동이었나봐.
, 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그 이십 분 늦은 건 떠 보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거야. 도착했다고
전화하면서 걸어가다가 커피숍 바로 앞에서 어디 걸려서
신발 속에서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어느 정도
다시 붙어서 대충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까 시간이 그렇게 걸렸다는군.


어쨌든 그러면서
남자가 하는 말이, 자기는
남들처럼 사는 건 애저녁에 포기했었다는 거야.
근데 내 친구가 손톱을 주워줘서 그걸 붙였는데
그게 순식간에 아프지도 않고 그대로 착 붙는 걸 보고
깨달았대. 이 여자를
잡아야 된다고.
여자랑 같이 있으면 나도 살 수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내 친구는 암말도
안 하고 그걸 끝까지 다 들어줬대.
그런데 다 듣고 나서 뭐라고 했냐 하면 생각 좀
해 봐야겠다고 그러고 그냥 집에 와 버렸어.
그리고 집에 와서 나한테 전화해서 이 얘기를 다
털어놨는데 내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니까
한참 있다가 친구가 그러더라고.
결혼할까?”


그래서 결혼하게
된 거야.


웃기지?


결혼한지 좀
됐어. 작년에 결혼해서
지금 내 친구 벌써 임신 육개월이거든.
얼마 전에 산부인과에 초음파 하러 갔더니 의사가
내 친구만 따로 불러서 굉장히 불안한 얼굴로 이러더래.
심장박동은 하나인데 자궁 안에서 움직이는 거
보니까 애기가 둘인 거 같다고,
쌍둥이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무리 봐도 정확히
모르겠으니까 검사 좀 더 해 보자고 그래서 내 친구가
됐다고 그랬대. 시어머니랑
병원에 같이 갔었는데 검사받고 나와서 시어머니한테
아무래도 애기가 지 아빠 닮아서 뱃속에서 갈라졌다
붙었다 하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말도 말라고,
친구네 남편은 그나마 뚝 잘라서 깔끔하게 뎅겅 떨어지지만
남자네 아버지, 그러니까
내 친구 시아버지는 가루처럼 조각조각 부스러지는데
시어머니가 그거 쫓아다니면서 부스러기 다 주워서
일일이 붙여주기를 벌써 삼십 년이 넘게 하고 계신다는
거야, 그러면서 내
친구보고 너는 편한 줄 알라고 그러시더래.
그래서 내 친구가 열받아서 집에 와서 저녁에
남편한테, 당신이랑
똑같은 애기 낳으면 나는 애기 따라다니면서 떨어질
때마다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거다,
그러니까 애 낳고 나면 앞으로 당신 몸 떨어지는
건 당신이 알아서 챙기라고 그랬대.
그랬더니 남편이 갑자기 강아지로 변하더니 못
들은 척 딴청을 하더라나.
얄미워서 발로 콱 차 줬더니 굉장히 불쌍하게
깨갱, 하고 죽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서 그제서야 알았다고
그러더래.


어쨌든 내 친구는
그러고 살고 있어. 남편이
일이 바쁘긴 해도 돈은 꽤 잘 벌어서 친구는 지금
임신하고 몸 무거워지면서 회사 그만뒀고,
애기 낳으면 최소 한 일이 년 정도는 그냥 집에서
애만 키울 생각인가 봐.


남자가 무슨 일
하냐고? 의료용 보조기구
만드는 회사 영업사원이래.
보조기구를 착용하면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다른 사원들은 기껏해야 프리젠테이션 하거나 모형
보여주면서 설명하는데 내 친구 남편은 자기 몸 떼어서
직접 보여주니까 이게 의외로 호응이 좋다는 거야.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걔 남편 그래서
자기 분야에서는 꽤 잘 나가나 봐.


내 친구는
결혼하니까 행복하다고,
나보고도 좋은 사람 찾아서 결혼하라고 그러더라구.


내 입장에서는
사실 여자가 너무 아깝지,
나는 아무래도 친구니까.
그 남자가 조건이 그렇게 괴상한데 내 친구처럼
멀쩡하고 괜찮은 여자를 어디 가서 만나겠어.
그래도 친구가 행복하다고 하니까 나도 뭐 그렇구나,
좋겠다, 하는
거지.


그러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돼 있나 봐.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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