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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영원 그 후

2011.08.26 23:3708.26


 죽지 않는 소년이 소녀를 사랑했다.
 세상의 모든 새가 죽고 세상의 모든 꽃이 시든 마지막 겨울, 홀로 남은 소녀는 모든 것이 사라진 정원에 흰 눈이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소녀는 한 켤레 남은 가죽신을 적시며 눈 위를 걸었다. 소년의 녹나무 잎사귀색 그림자가 조용히 소녀의 발치를 따랐다.


 “사랑하는 이여.”


 소녀는 돌아 보았다. 소년은 소녀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물었다.


 “사랑하는 이여, 내 무엇을 가져다 바치면 그대 기꺼이 웃어주실까. 그대 위해 달도 별도 거두어 드리리니.”


 소녀는 푸른 새를 한 마리 달라 말해 보았다.
 노래하는 낙타와 춤추는 벌새무리를. 고즈넉이 잎을 떨굴 오동과 수면을 스치며 훌쩍 날아오를 해오라기도 이야기했다. 소년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모든 것을, 과연 조금의 어김도 없이 소녀가 머릿속에 그렸던 그대로 마련해 가져다 주었다.
 소녀는 장미꽃이 갓 피어날 때처럼 향기롭게 웃었다.


 “사랑하는 이여, 내 무엇을 또 가져다 바칠까. 그대 다시 웃어주신다면 달도 별도 거두어 드리리니.”


 소녀는 봄을 달라고 해 보았다.
 애가 타도록 긴 기다림 끝에 새침하니 왔다가 남은 세 계절 내내 그립도록 여운을 길게 남겨, 종래엔 겨우내 견디게 하는 그 찬란한 봄을. 수 많은 인간의 목소리만큼이나 무성한 비구름, 말하는 김에 별이 얼어 방울 소리를 내는 북쪽 끝의 밤하늘과 황금 수를 놓은 비단마냥 바람에 흔들거릴 가을 벌판도 달라 하였다. 백은 잔과 벽옥을 빚어 만든 나비, 온갖 문양을 수놓은 가죽 신과 한 꿰미의 유리 구슬. 우유가 흐르는 실개천과 거품을 개어 만든 과자들.
 죽지 않는 소년이 소녀를 사랑했다.
 죽지 않는 소년이 죽어버릴 소녀를 그토록 사랑했다.
 사랑하는 이여, 무엇을 드리면 당신은 다시 웃어주실까. 소년이 묻고 소녀는 답했다. 무수한 보석들, 이름을 채 붙이지 못할 만큼 다양한 꽃과 차례차례 태어나도 인간의 일곱 세대를 지나야 모두 헤아릴 만큼 많은 짐승들. 나아가 이미 죽고 세상에 없는 수만명의 목숨마저 달라 보챘다.


 소년은 과연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세상은 세 번 태어났다 세 번 시들었다.
 모든 목숨 붙은 것이 모든 목숨 없는 것을 갉아먹고 별마저 여위었다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길고 아득한 세월을 지낸 후, 다시 찾아온 소년이 겨울 정원의 돌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물었다. 소녀는 길게 기른 머리카락 위로 검은 베일을 드리운 채 소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무엇을?”


 죽지 않는 소년이 소녀를 사랑했다.
 소녀는 죽을 운명을 타고 태어난 인간이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바랐다.


 좋은 꿈과 아름다운 향기를. 지속되는 젊음과 변치 않는 연모, 자라지 않는 슬픔과 잊히지 않는 자애를 주사이다. 온유한 온기. 서늘한 적막을. 결코 멈추지 않는 정열과 시들지 않는 갈망을 바라나이다. 목마른 자 없는 왕국과 희생 없는 군림. 다투지 않아도 늘 자족하는 백성과 배반하지 않을 연인마저 제게 주십시오.


 소년은 소녀에게 그 모든 것을 주었다.
 영원조차 세월인지라 결국에는 다하고 소년은 소리 없이 겨울 정원으로 날아 내렸다. 소녀의 발자국이 흰 눈 위에 찍혀 있었다. 소년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제 발을 그 발자국에 겹쳤다.
 발을 떼어내자 소녀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소년의 발자국만이 거기에 남았다.
 소년은 슬퍼 눈으로 모든 것을 덮었다.


 “사랑하는 이여.”


 소녀의 발치에 엎드려 그 맨발이 닿았던 땅과 그녀의 그림자 사이에 입맞추며 소년은 물었다. 언제나와 똑 같은 애정을, 그대여, 그리고 또한 감미로운 청원을.


 소녀는 답했다.


 “이제는.”


 머리에 드리웠던 베일을 두 손으로 거두고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버섯구름이 피어 오른 사방에서 우레가 울었다. 피와 뼈와 모든 추악을 덮고 소복하게 내린 눈에 다시 눈이 겹치는 동안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온 우주에 봄이 왔다.
 검은 허방을 떠돌며 어딘가에 잠자던 봄이 눈을 녹이고 세상을 녹였다. 소녀는 손을 뻗었다.


 “이제는 태양을.”


 소년은 태양을 건넸다.
 소녀는 태양과 함께 새빨갛게 타올라 춤추며 영원을 살랐다. 소년이 준 모든 것이 함께 타올랐다. 세상은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 사라졌다. 죽지 않는 소년이 소녀를 사랑했다. 죽지 않는 소년이 죽어버릴 소녀를 몹시 사랑하여 모든 것을 주었다. 소녀가 죽을 때 그가 준 모든 것이 함께 죽었다. 소년은 슬퍼 흐느꼈다.


 사랑하는 이여, 무엇을 주면 그대 다시 한 번. 마지막의 마지막을 유예하며 다시 또 한 번. 찰나의 꽃처럼 웃어주시려나.


 소년은 영원히 울다 결국 영원마저 다시 여위자 세상에서 사라졌다.
 소녀는.


 비로소 마음 깊이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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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김진영 11.08.30 22:15 댓글 수정 삭제
    뭐랄까 마지막을 보니 소녀는 자기가 죽어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 불안했던 것 같네요. 그래서 탐욕을 부렸고 급기야 태양까지 달라고 해서 모든 것을 태워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빈 공허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를 만들어 마음편하게 되었네요.
  • No Profile
    미로냥 11.08.31 23:46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렇군요! 그렇네요... 사실 해석에 대해서는 제 안에서 어느 쪽으로 보일까?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오오... 덧글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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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11.09.25 16:29 댓글 수정 삭제
    미로냥님 글의 이런 분위기, 이런 느낌 넘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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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11.09.26 22:11 댓글 수정 삭제
    가연님/ 헤헤헤 감사합니다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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