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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내일의 어스름

2011.05.28 00:2805.28

 

사이비 종교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근본은 모두 같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보통 사람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또 한 가지 특징은 신도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불가능해진 신도들은 더욱 더 사이비 종교와 사기꾼 교주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매달릴수록 정상적인 사회 생활은 불가능해진다. 악순환이다.


그들은 세상이 끝날 것이라 했다. 벌써 이십 년 전의 이야기다.


그리고 내 부모는 그들을 믿었다.




교주는 두 명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천존상제’, 즉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옥황상제의 현신이라고 했다. 여자는 그 아내인 ‘천상선녀’라 했다.


두 사람이 정말로 부부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 남편이 수없이 많은 다른 여자들과 정기적으로 잠자리를 하는 것을 알면서 허용할 뿐더러 심지어 권장해주다 못해 일정표까지 짜 주는 아내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옥황상제와 선녀의 현신이라고 믿는 정신병자들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랴 싶기도 하다.


내 부모가 그들을 믿은 이유는 평범했다. 인간은 약하고 인생은 종종 지나치게 무거우며, 누구에게나 마음을 기댈 곳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외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주 오랜 기간 친하게 지냈던 선배에게 사기를 당해 집안 재산을 전부 날렸을 뿐만 아니라 거액의 빚까지 졌다. 내 부모로서는 각자 세상이 이미 무너졌다고, 혹은 무너져가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 그것도 서서히, 가장 가혹하고 견디기 힘든 방식으로. 차라리 모두 다 함께 세상의 끝을 향해 웃으면서 절벽으로 행진하고 있다고 믿는 편이 더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라도 그 절벽의 끝에서 붙잡아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선다면, 구세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는 나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의향도 없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천존상제와 천상선녀는 삼생, 즉 전생, 현생, 내생을 지배한다고 했다. 현생에서 천존상제와 천상선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전생에서부터 덕업을 쌓아 인연이 이어져 선택받았기 때문이며, 현생에서도 두 교주를 잘 모시면 내생에 다시 그 은덕을 입게 되리라 했다. 더구나 현생은 이제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영원한 내생만이 이어질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교주 부부를 신으로 받들어 복덕을 쌓지 않으면 현생의 종말이 찾아와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뒤에 빠져나올 수 없는 무저갱의 어둠 속에서 영구히 헤매어 다니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국민학교 (그 때는 국민학교였다) 4, 5, 6학년에 해당하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이야기다. 이십 년이 더 지난 지금도, 필요하다면 그대로 외울 수 있다.


나는 어째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이런 이야기들만 매일같이 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어쨌든 나는 아이였으니까.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뻤고, 지루한 교과서 대신 처음 들어보는 옛날 이야기들을 하루종일 듣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나 곧 친구들이 그리워졌고, 선생님도 보고 싶었다. 넓은 강당에 수십, 수백 명이 거적 같은 이부자리를 깔고 자고 식당에서 공동으로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생활은 며칠만에 질려 버렸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이 있고 내 방이 있었던 때가 그리웠다. 휴일도 주말도 휴식 시간도 없이 밥 먹는 시간과 최소한의 수면 시간만 빼면 언제나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꿇어앉아 교주의 말씀을 읽고 ‘치성’을 드리는 일과가 참을 수 없이 지겨웠다. 평일에는 학교를 가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학원을 다니고 주말이면 엄마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아빠와 손 잡고 나들이 가기도 하던 안정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은 나를 때렸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강당에서 부모님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맞으며 함부로 얻어맞는다는 것은 어린 아이의 마음에도 굉장한 모욕이었다. 그리고 그런 후에는 언제나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이 나를 데려다가 ‘반성’할 때까지 어두운 방에 가두었다.


그러나 내가 금방 적응해서 고분고분해진 것은 이런 처벌 때문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영양 부족과 수면 부족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공동 식당에서 배급해주는 음식은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양도 질도 밑바닥이었다. 바짝 메마르고 냄새가 나는 밥에 멀건 국물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 식사를 하루에 두 번, 어떨 때는 한 번만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어 ‘치성’을 드리기 위해 한밤중에도 자다 말고 몇 번씩이나 벨을 울려 사람들을 모두 깨웠다. 열 시에 취침했다가 열두 시에 깨서 ‘치성’을 드리고, 한 시에 다시 잤다가 새벽 네 시에 또 일어나서 ‘치성’을 드리고, 다시 조금 잔 뒤에 해가 뜨는 시각에 맞추어 ‘치성’을 드린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져 부모님이 어느 정도 ‘복덕’을 쌓은 후에 음식은 조금 나아졌고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게 됐지만 수면만은 언제나 부족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다 보니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제나 반쯤 몽롱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부모에게 반항하기는커녕 이전의 생활이 어땠는지, 아니 지금 여기가 어디이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잘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가 그곳에서 나를 데리고 나가던 날도 나는 그렇게 몽롱한 상태였다.




그 날 낮에 나는 초경을 시작했다. 다리 사이에서 이유 없이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다. 다만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몹시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식사 시간에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부모님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화를 냈고, 어머니는 슬퍼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어머니는 다른 어른 여자들과 함께 설거지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식당을 나가기 전에 식사 지도를 하던 ‘선생님’ 하나를 붙잡고 뭔가 말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저녁 치성을 드리기 위해 강당으로 돌아갔다.


그 날따라 치성을 드리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배가 아파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굉장한 고역이었다. 게다가 강당 바닥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다리를 타고 냉기가 전해져 올라와 배가 점점 더 아파왔다. 배를 붙잡고 끙끙 앓다가 나는 꿇어앉아 웅크린 채로 잠깐 졸았다.


꿈 속에서 나는 어느 커다란 기와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긴 복도에 한지로 바른 문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곳을 지나 한없이 앞으로 나아가서 드디어 복도 끝에 이르렀다. 역시나 한지로 바른 미닫이문을 열었다. 가구라고는 없는 조그맣고 휑한 방이었다. 허술한 이부자리 안에 어떤 아저씨가 누워 있었다. 옆에는 조그만 양은 주전자와 보리차가 담긴 플라스틱 컵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아저씨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힘겹게 몸을 조금 일으켰다.


- 아가, 너무 빨리 왔구나.


아저씨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용하고 부드러워서, 왠지 안심이 되면서 몹시 그리웠다.


- 나중에 다시 오렴. 꼭 다시 만나자.


…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깨고 나서도 약 1-2초 정도는 귤처럼 노랗던 아저씨의 이상한 얼굴빛과 그 쓸쓸해 보이던 표정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밖이 몹시 시끄러웠다. 강당 안에 있던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때 ‘선생님’이 한 명 들어왔다. 강당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일어섰다. 그 때 큰아버지가 강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어서 할머니가 따라 들어왔다.


대소동이 벌어졌다. 큰아버지는 막아서려는 ‘선생님’들과 멱살을 붙들고 드잡이를 했고 아버지에게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높여 욕을 퍼부으며 싸웠다. 한참이나 그렇게 다투다가 흥분한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드디어 주먹다짐을 시작하려고 할 무렵에 어느 ‘선생님’이 들어와서 다른 선생님들을 말리는 바람에 상황이 진정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놓아주었고, 큰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를 사이에 끼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왔다. 부모님을 본 것은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나오면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말리는 ‘선생님’에게 붙잡힌 채 뭔가 몹시 아쉬워하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초경을 시작한 처녀를 교주에게 바치면 그 가족 모두 삼생의 업이 전부 소멸하고 내생에 굉장한 복록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천존상제’가 그런 교리를 설파하며 9-13세의 미성년 소녀들을 여럿 강간했다는 사실은 몇 년 후에 그가 체포되고 사이비 종교단체 ‘천제법도’에 대한 여러 가지 추문이 각종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고 나서도 한참이나 더 지나 내가 어른이 되어 그런 기록들을 일부러 찾아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자기 핏줄을, 그것도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딸아이를 과대망상증에 걸린 정신병자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업을 쌓는 짓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교주는 결국 부부 모두 감옥에 갔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하는지 증명할 수 없는 내세의 ‘복록’을 위해 이런 미치광이에게 어린 딸을 제물로 바치는 똑같은 미치광이들의 돈을 훔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치광이 중에 나의 부모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아이를 낳으면 절대로 내 부모와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따뜻하게 사랑하며 기를 것이라고 맹세했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면서 그런 사람들을 부모로 둔 나 같은 인간은 아예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자식을 가장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연이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인간 사이의 인연, 남녀간의 연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연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나의 할머니였다.


미치광이 사기꾼에 불과했던 교주 부부와는 달리, 할머니는 진짜로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절반은 친할머니의 혈육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사실이다. 증명은 아주 간단하다. 친할머니의 X 염색체와 친할아버지의 Y 염색체가 아버지에게 전해진다. 이렇게 아버지의 XY 염색체 중에서 다시 X 염색체가 딸인 나에게 전해진다. 어머니가 나에게 전해준 X 염색체는 외할머니에게서 왔을 수도 있고 외할아버지에게서 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에게 전해준 X 염색체는 친할머니에게서 왔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의 XX 염색체 중 절반은 친할머니의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나를 ‘보았다’고 했다. 불충분한 음식을 먹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사기꾼이 읊어주는 쓰레기 같은 이야기들을 하루종일 차가운 맨바닥에 꿇어앉아 외워야 하는 생활에 갇힌 손녀딸을 매일매일 ‘보면서’ 한없이 슬펐다고 했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내가 초경을 맞이한 것도 ‘보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함께 이해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큰아버지를 불렀다.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할머니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린 동생을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기던 큰아버지는 할머니의 호출에 발벗고 달려왔다.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나를 돌봐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강력한 요청과 나의 동의로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와의 생활은 가난했다. 할머니는 구식이었다. 행동이 느리고 대신 잔소리가 많았다. 내가 부탁한 자질구레한 일들이나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 같은 것을 종종 잊어버리기도 했다. 가끔 이상한 냄새가 나는 향을 피워 온 집안을 연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할머니는 나를 사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할머니의 X 염색체를 절반 이어받은 혈육이기 때문에 사랑했다. 나도 같은 이유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할머니를 사랑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할머니의 특징들이 가끔 약간씩 짜증스럽기는 해도 내게는 별로 큰 의미가 없었다.


나에 대한 사랑을 할머니는 음식물로 표현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정상적인 할머니들과 거의 대부분의 정상적인 어머니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보통의 정상적인 아이들과 한참이나 교류한 뒤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자칭 천존상제와 천상선녀와 정신 나간 부모 때문에 한창 자랄 나이에 굶주리며 보냈던 3년 세월을 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보상받았다. 나는 무척 잘 먹었고, 할머니는 그래서 기뻐했다. 집에 놀러온 나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무척 잘 먹었고, 할머니는 더욱 기뻐했다. 친구들은 그런 할머니를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음식물로 인해 돈독해진 먹성 좋은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는 3년이나 지체되고 중간에 한 단계 건너뛰어 매우 혼란스러워진 나의 학교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었다.


할머니는 내게 공부나 성적을 강요하지 않았다. 성적을 잘 받으면 기뻐했지만 못 받는다고 그다지 화내거나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고 짓누르지도 않았다. “사람은 다 갈 길이 있는 법이니 너도 어찌 됐든 네 길을 가게 될 거다.” 할머니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가야 할 길은 알아서 가는 거니까, 무조건 밥 잘 먹고 건강한 게 최고다.” 나도 여기에는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 ‘가야 할 길’이 정확히 어떤 길이냐고 물어보면 할머니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언젠가 끈질기게 캐물은 날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뒤에 대학을 가야 할지 아니면 취직을 하는 편이 나을지 잘 결정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보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중요할 때 한 번만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의외로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 때 단 한 번 나는 할머니와 싸웠다.


화를 내며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나에게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듯이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그것을 입에 우겨 넣으며 나는 괜히 울음을 터뜨렸다. 나이 스물이 넘은 다 큰 손녀의 철없는 어리광이었다. 할머니는 내 어깨를 도닥여주며 속삭였다. “네 길은 네가 알아서 보게 될 거다.”


나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피는 속일 수가 없으니…. 네 아버지가 그런 이상한 길로 빠진 것도, 어쩌면 내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 나는 근 십 년간 잊고 있었던, 초경하던 날의 꿈을 떠올렸다.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고 했던 모르는 아저씨의 귤처럼 노란 얼굴과 지친 듯 기운이 없지만 부드러웠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어째서 그 꿈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할머니에게 이야기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절반이었고, 말하지 않아도 할머니라면 이미 아실 것 같다는 기분이 또 절반이었다.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매우 실용적인 학과를 단기로 마치고 졸업장과 함께 자격증을 받아서 취직을 했다. 첫 월급을 받아서 큰아버지 가족과 할머니에게 고기를 대접했다. 우리집에서는 어쨌든 먹을 것이 최고였다.


할머니는 그 뒤로 오 년을 더 사셨다. 무척 평온한 오 년이었다.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시리고 손목이 쑤시고 눈이 침침하다고 수시로 투덜거리면서도 나와 함께 나들이처럼 병원에 다니며 할머니는 건강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혼자 저녁상을 차려 드시고 퇴근해 돌아와서 설거지를 하는 나에게 세제를 너무 많이 쓴다고 잔소리를 했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졸다가 할머니는 이제 자러 가야겠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곤하니까 내일은 깨우지 마라.”


나는 방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절대로 결단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밤을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대신, 너무나 바보스럽게도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잤다.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아마 평생 후회할 것이다.




… 길을 걷고 있었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길 끝은 동이 트려는지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새벽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맑고 차갑고 깨끗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푸른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푸른 하늘을 향해서 걸었다.


그 길에 나보다 앞서 가는 사람이 있었다. 뒷모습을 보니 젊은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에게 급히 할 말이 있었다. 그래서 따라갔다.


그러나 여자는 걸음이 빨랐다.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걷다가 뛰다가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지쳐서 나는 여자를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 여자가 뒤돌아 보았다.


할머니였다. 지금의 할머니가 아니고 젊은 시절의 할머니였다. 어떻게 알아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젊은 할머니는 꽃처럼 아리따웠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젊은 할머니가 내게 외쳤다.


- 네 길은 이 쪽이 아냐!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할머니가 다른 쪽을 가리켰다.


- 저 쪽이야, 저 쪽! 안 보이니?


나는 할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랗고 휑뎅그렁한 기와집이 있었다.


어쩐지 낯익은 기와집이었다. 내가 가는 길은 어둡고, 할머니가 서 있는 곳은 푸르스름했는데, 기와집이 있는 곳은 빛 바랜 사진 같은 갈색을 띤 노란빛이었다. 저기가 뭐 하는 데냐고 물어보려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없었다. 할머니를 찾아서 나는 헤맸다.


정신없이 헤매다가 전화벨이 울려서 퍼뜩 깨어났다. 큰어머니였다. 큰아버지가 간밤에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다고, 전화해 보라고 했다는 말씀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 하늘은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그 푸른빛이 너무나 무서워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방을 나갈 수 없었다. 내가 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큰어머니와 큰아버지가 달려왔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얼마 동안 나는 밤에 사방이 조용해지면 그 때의 전화벨 소리가 귓가에 울려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이후로 석 달 정도 나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음식물이 위장으로 들어가면 불덩이를삼킨 것처럼 쓰라렸다. 나중에는 배가 아무리 고파도 음식이 눈에 들어오면 겁부터 났다. 옷이 전부 헐렁해졌다. 거울을 보면 갈비뼈의 갯수와 골반의 윤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혈육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적절하고 정당하다고 느꼈으므로, 나는 괴로웠지만 굳이 억지로 자거나 먹으려 하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집에서 할머니의 흔적들과 함께 지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뒤로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그것이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이미 가셨기 때문이라고,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었다.




남자를 만난 것은 그렇게 잠을 자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던 무렵이었다. 남자는 내 친구의 남편의 친구였다.


할머니가 없는 텅 빈 집이 괴로워서, 주말이면 나는 주로 큰아버지 댁에 가거나 가끔 친구 집에 놀러가곤 했다. 친구는 학창 시절부터 먹성이 좋아 할머니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아이였고, 지금은 남편과 함께 영상 계통에 관련된 조금 특이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친구도 남편도 집에서 작업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작업에 관련된 스탭들이 집에 무시로 드나들었다. 나처럼 낯선 사람이 하나쯤 더 얹혀 있는 것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도 친구의 남편도 모두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했다. 나도 마음이 허전했기 때문에 북적거리는 것이 좋았다.


친구와 남편은 다른 스탭들과 함께 열띠게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차를 끓여주고 과자를 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 뒤에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서 별 목적 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회의하는 사람들은 목청을 높이는 중이라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아서 내가 나갔다.


문 밖에는 손에 종이봉투를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무척 낯익은 사람이었다. 나를 보고 남자는 종이봉투를 내밀며 다짜고짜 명령조로 말했다.


“이것 좀 감독님한테 전해 줘요.”


내가 스탭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도 딱히 설명하지 않고 고분고분 주는 대로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에는 울긋불긋한 헝겊 신발과 인형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촬영용 소품인 것 같았다.


“감독님이 찾으시면 나 갔다고 그래요.”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다가 멈칫 걸음을 멈추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우웅, 우웅 하고 진동하는 전화기를 꺼내 귀에 대었다.


“어, 나 여기 너네 집 앞. ? , 스탭한테 줬는데. 뭐가? … 빨간색밖에 없던데? … 보라색? 못 봤어. … 진짜 없었다니까? 얌마, 그렇게 필요했으면 처음부터 말을 제대로 했어야지!”


남자는 전화기에 대고 화를 내더니 내 손에서 종이 봉투를 홱 낚아채고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나도 당황해서 따라 들어갔다.


남자는 친구의 남편과 잠깐 말다툼을 했다. 그러나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에이, 찐따같은 새끼… 저리 비켜!” 하더니 남자는 친구의 남편을 쫓아내고 노트북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작업할 태세를 취하고 남자는 그 때까지도 어쩔 줄 모르고 한옆에 서 있던 나를 흘끗 보더니 다시 명령조로 말했다. “커피 줘요. 설탕 넣지 말고.”


“야, 저 분 스탭 아냐.”


친구의 남편이 옆에서 킥킥 웃었다.


“뭐?”


남자가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친구의 남편을 올려다 보았다. 친구의 남편이 다시 말했다.


“진짜야. 영은이 친군데 그냥 놀러 오신 거야.”


남자의 얼굴이 짜증난 표정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서서히 변했다. 친구의 남편이 다시 킥킥 웃었다.


“스탭인 줄 알았구나? , 생전 처음 보는 형수님 친구분한테 커피 내놔라, 설탕은 넣지 마라, 그게 뭐냐?”


남자는 친구의 남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점점 더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저는 당연히 스탭인 줄 알고….”


“아뇨, 뭐….”


나도 같이 당황했다. 스탭이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명령조로 이래라 저래라 해도 되는 건지 아까부터 궁금했지만 분위기상 입밖에 내어 물어보기는 곤란했다. 망설이는 사이에 남자가 다시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남자가 원한 대로 커피를 끓였다. 커피를 갖다 주자 남자는 다시 한 번 몹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올려다 보았다. 엉거주춤 일어나려다 말았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설탕 안 넣었어요.”


남자는 아주 잠깐이지만 야단맞은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저녁에 내가 집에 돌아간 후 남자는 친구와 그 남편에게 내 연락처를 물었다고 했다. 사흘 뒤에 남자가 전화했다. ‘사과한다’는 명목으로 별 이유 없이 밥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거절했다. 주말이 되자 남자는 역시 별 이유 없이 친구의 남편을 찾아와 공연히 객쩍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기다리다가 내가 나타나자 노트북을 붙잡고 몹시 바쁜 척하기 시작했다고, 친구가 웃으며 일러바쳤다.


알고 보니 남자도 ‘스탭’은 아니었다. 단지 내 친구의 남편의 친구일 뿐이었다. 그래픽 계통 일을 하고 있어서 가끔 급할 때 도와주는 편이라고 했다. 주말에 놀러 가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내 옆에서 남자도 함께 보릿자루 노릇을 해 주었다. 왠지 조금 기뻐하는 것도 같았다.


당시 나는 아직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남자는 내가 다시 정상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이후 약 1년 반 정도 남자는 별 이유 없이 내게 밥을 사 주었다. 나도 별 이유 없이 남자에게 커피를 사 주거나 끓여 주었다. 설탕은 넣지 않았다.


어느 날 남자는 한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내 집에 찾아왔다. 내가 끓여준 커피를 마신 후에 앞으로도 계속, 평생 이렇게 커피를 끓여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민망해진 나는 진부한 멘트라고 비판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그 야단맞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더 끓여서 남자가 보는 앞에서 설탕을 잔뜩 넣어 내밀었다. 남자는 별 말 없이 받아서 끝까지 다 마셨다.


남자가 처음부터 몹시 낯익었다는 말을 나는 그 때도, 이후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어째서 그렇게 낯익었는지는 결혼하고도 1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임신중이었고, 모든 것이 이미 너무 늦었다.


혹은, ‘늦었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좋건 싫건 내가 가야 할 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애써 자신을 위로하곤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머니도 없었으므로, 내 인생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나섰다. 남자를 만나본 뒤에 두 분 다 만족했다. 결혼이라는 주제에 관한 큰아버지의 지론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알아보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큰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냄새를 맡는다’고 했다.


“그런 건 봐서 아는 게 아냐. 겉모습만 봐선 아무 것도 모르지. 사람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냄새를 맡아서 아는 거야.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비슷한 냄새를 맡으니까, 꼭 만나야 될 사람끼리는 천리 밖에 떨어져 있다가도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거다.”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지 그 때는 알지 못했다.




남자는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큰아버지에게는 단 한 가지 그 사실만 말하지 않았다.


남자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꽤 오래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만 계시는데 도시 외곽의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사신다고 했다. 형도 하나 있는데 결혼하고 분가해서 도시 반대편 외곽의, 역시나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산다고 했다.


남자의 형을 나는 결혼식 때 단 한 번, 아주 잠깐 보았다. 사진도 제대로 찍지 않고 식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도망치듯이 가 버렸다. 남자의 형수는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아이 둘을 맡아줄 사람을 구하지 못했고, 여섯 살, 세 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들을 결혼식장 같은 곳에 몰고 올 수도 없었다고 남자의 형이 설명했다. 그러나 식이 끝난 후에도, 남자와 내가 부부가 된 후에도, 주말이 지나고 명절이 지나도 남자의 형과 형수는 다시 나타나기는커녕 이후 연락도 한 번 없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가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신경쓰지도 않는 것 같았으므로 나도 굳이 묻지 않았다.


남자는 마찬가지로 자기 어머니와도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찾아가려 하지 않았고, 전화를 하든 직접 말하든 대화할 때는 언제나 표정도 목소리도 굳어 있었다. 남자는 특히 어머니가 나에게 연락하는 것을 대단히 경계했다. 남자의 어머니는 가끔 나에게 전화했으나, 아들의 눈치를 몹시 보았으므로 결과적으로 거의 왕래가 없게 되었다.


결혼과 시댁에 대한 세간의 이야기들, 즉 남자는 결혼하고 나면 갑자기 효자가 된다든가, ‘홀시어머니’라는 존재의 무시무시함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주변에서 말로만 전해듣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쩐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부모 없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관계로 ‘시’자가 붙었어도 어쨌든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딸 같은 며느리가 되리라는 얼토당토 않은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럴 기회도 필요성도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신혼이었다. 내게는 남자의 형과 형수와 조카와 어머니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남자가 훨씬 더 중요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기와집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을 꿀 때마다 매번 기와집에 들어가기까지 걷는 거리가 길어졌다. 처음에는 복도를 걷는 데서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마루에서, 그 다음에는 섬돌에서 마루로 올라서는 지점부터 시작했다. 그 뒤에는 마당부터, 그 다음에는 대문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종착지는 언제나 같았다. 긴 복도가 있었고, 미닫이문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가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서 문을 열었다. 얼굴빛이 이상한 아저씨가 나를 맞이했다. 여기까지는 같았다. 그의 대사만 매번 조금씩 달라졌다.


- 왔구나. 잘 지냈니?


- 왔구나. 지금 얼마나 됐지?


- 왔구나. 이제 얼마나 남았지?


나는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깨어나곤 했다. 그리고 꿈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모르는 산길을 걸어 대문 앞에 선 것으로부터 꿈이 시작되던 날, 나는 얼굴빛이 이상한 아저씨 외에도 처음으로 그 꿈 속에서 한 사람을 더 보았다. 그는 내게 대문을 열어 주었다. 만면에 친절한 미소를 띠고 안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는 그를 알아보았지만, 그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그런 것 같았다. 어차피 이것은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나도 굳이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날따라 복도가 길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힘겨운 복도를 천천히 지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을 밀어 열자 언제나 그렇듯이 얼굴색이 이상한 아저씨가 나를 맞이했다.


- 왔구나. 잘 지냈니?


그리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 … 을 봤지? 이제 때가 됐구나.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래 된 신문 기사를 찾아보았다.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나를 구출해서 데리고 나온지 3년 뒤에 ‘천제법도’는 경찰 수사에 의해 무너졌다. 그 시기를 전후한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제각각 종말론을 외쳐댔고 그 중 한두 곳은 정말로 커다란 사건을 일으켰었다. 그래서 경찰은 더 공격적으로 더 꼼꼼하게 수사했다. ‘천제법도’의 교주 부부를 비롯한 핵심 인사들은 탈세, 횡령, 사기, 강간, 폭력 등의 화려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하여 남자 교주는 8, 여자 교주는 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향하는 것으로 ‘천제법도’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교주 외에 체포된 ‘핵심 인물’들의 명단을 훑어본 뒤에 나는 큰아버지에게 전화했다. 큰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고집을 부렸다. 큰아버지가 졌다.


“네 어머니가 한 번 연락하긴 했었다. 그 사단 나고 다 잡혀간 직후였지, 아마.”


그 때 나는 한창 예민할 나이였고, 3년이 지나 간신히 학교 생활에 적응해서 평범한 또래의 소녀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큰아버지 부부도 할머니도, 어렵게 되찾은 평범한 청소년 시절을 망쳐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큰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몇 번인가 울면서 전화했고 찾아온 적도 있었지만 다 물리쳤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 어머니는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라 했다.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나온 후 ‘천제법도’가 무너질 때까지 3년 동안 그 안에서 상당히 출세한 듯했다. 교주 부부와 함께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명단 중에 아버지의 이름도 있었다.


남자 교주는 감옥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여자 교주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뒤에 ‘천제법도’는 이름을 바꾸어 부활했다. 홀로 남은 여자 교주를 선녀로 모시는 교리는 이전과 비슷하지만 시대의 바람을 타고 방향을 약간 바꾸기는 바꾼 모양이었다. 종말론과 내세의 영원한 복록 대신 ‘천상심법회’에서는 근래의 대세인 ‘웰빙’을 예견했는지 여자 교주가 불치병을 낫게 해 준다고 선전했다. 그것이 10년 전의 일이었다.


내세의 복록은 현실에서 증명할 길이 없지만 불치병이 낫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다. 4년쯤 전부터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모여서 단체로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나 ‘천상심법회’는 의료시설이 아닌 종교단체로 등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모든 광고, 선전, 홍보에서 의료 행위에 대한 언급을 교묘하게 피하고 ‘수련’이나 ‘기도’를 하면 ‘의식 개혁’을 통해 ‘몸과 마음의 생명력을 자생시킨다’ 등속의 상투적이고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전문가들을 만나보았으나 딱 집어 법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인터넷에 카페나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지금도 사이비 종교단체를 성토하고 법적인 조치를 고민하고 있었다. 한편 ‘천상심법회’에서는 여전히 ‘신도’ 혹은 ‘수련생’이라는 이름으로 중병에 걸린 절박한 사람들과 괴로워하는 가족들을 끌어들여 거액의 돈을 받아낸 후 환자가 죽어서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감금하고 방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현재 진행형이었다.


사이비 종교단체의 실태를 파헤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천상심법회’를 다루었다. 취재진이 ‘법회’의 사무실을 찾아갔고, 그곳 관계자가 여러 책자와 서류 등을 펼쳐보이며 ‘법회’의 행정적 적법성과 영적이고 철학적인 정당성을 주장했다.


나는 그 ‘관계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꿈 속에서 기와집의 대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낯선 타인 같았다.




아이는 네 살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아이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그 흔한 입덧도 전혀 없었다. 임신 초기부터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졌다. 배가 부르고 완연히 임산부 티가 나게 된 후에도 허리도 아프지 않았고 발도 그다지 붓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몸 안에서부터 나와 아이를 받쳐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묘한 표현이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출산도 초산인 걸 생각하면 예외적일 정도로 순산이었다.


태어난 아이는 노란색이었다. 눈과 얼굴뿐 아니라 온몸과 손바닥, 발바닥까지 모두 노란색이었다. 신생아 황달은 보통 태어난 후에 며칠 지나서 알게 된다고 했다. 아이는 갓 낳았을 때부터 눈에 띄게 노란색이었다. 나는 몹시 무서웠다. 병원에서는 며칠 두고 보자고 했다. 의사는 일주일이라 했다. 열흘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아이는 따로 치료받지 않고도 보통의 아기들이 그렇듯이 뽀얀 분홍빛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기침 한 번 하지 않고 콧물 한 번 흘리지 않았다. 피부에 발진 한 톨 돋은 적이 없었다. 아이는 잘 먹고 잘 컸다. 배가 고프면 곧장 소리부터 질렀고 배가 부르면 웃었으며 졸리면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중간에 투정부리거나 보채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전에 유아와 접촉한 경험은 별로 없었지만 본래 아기들이 이렇지 않다는 걸 나도 알고는 있었다. 걱정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아랑곳없이 배고프면 소리지르고 배부르면 잤다. 아이가 순하고 건강하다는 이유로 병원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의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아이는 순하고 건강했다.


그리고 아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남자의 아버지는 간암으로 죽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병원에 가서 정식 진단을 받은 공식적인 병명이었다. 피해자 유가족 단체의 홈페이지와 인터넷 카페에 올린 게시글에서 남자의 형은 영양실조와 중금속 중독을 의심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남자의 어머니는 이 문장 중에서 ‘희망이 없다’는 부분만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하여 희망을 줄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상심법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희망이 있다고 주장했다.


남자의 형과 남자는 아버지가 정식 의료 기관에서 ‘요양 치료’를 받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남자의 형은 당시 첫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정신적, 물리적으로나 몹시 여유가 없었다. 남자는 늦게 입대해서 아직 군복무 중이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했을 때 두 사람 다 그 말을 믿었다.


냉난방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기와집의 쪽방에서 빼빼 마른 채 배만 부어오른 시신이 된 아버지를 보았을 때 남자의 형은 자신의 어머니와 사이비 종교단체 양쪽에 대하여 격분했다. 아버지의 시신 머리맡에 놓여 있던 양은 주전자에 담긴 물 값으로 어머니가 노후 자금을 전부 쏟아넣은 것은 물론 상당한 빚까지 졌다는 사실을 알고 형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피해자 유가족 단체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물에는 사람이 섭취해서는 안 되는 중금속과 독성 물질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어머니는 그 물을 마신 덕분에 아버지의 암이 치료되었고 생명이 연장되어 병원에서 말한 기간보다 훨씬 오래 살다가 가셨다고 주장했다. 남자의 형은 아들로서 어머니가 진 빚을 떠안을 수는 있었으나 어머니의 잘못된 믿음은 감당할 수 없었다. 감당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돈 문제를 일단락지은 후에 남자의 형은 어머니와 연락을 끊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고 슬퍼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의 대부분은 어머니가 아닌 형을 향했다. 그 이면에는 군에 갇혀서 가족이 이런 파국에 이르도록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도 있었던 듯하다. 남자는 어머니를 심정적으로 감싸면서 ‘지 새끼, 지 마누라만 챙기다가 아버지 돌아가시는 것도 몰랐던’ 형을 ‘제일 나쁜 놈, 아버지를 죽게 한 개새끼’라고 비난했다. 몇 번의 고성과 주먹다짐이 오간 후에 형은 남자와도 한동안 연락을 끊었다.


남자가 먼저 형에게 다시 연락한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도 ‘천상심법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주는 생활비를 헌납하는 것은 물론이고 몰래 부업까지 해서 돈을 만들어 가져다 바쳤다. 그리고 남자에게 끊임없이 ‘마음을 고쳐 먹고’ ‘의식을 개선’하라고 종용했다. 시달리다 못한 남자가 화를 내면 짐을 싸서 ‘기도하러 간다’고 며칠씩, 심할 때는 몇 주일씩 사라져 버리곤 했다. 남자는 결국 포기했다. 어머니의 집을 나와 따로 거처를 구하고 의절을 언급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더 이상 남자에게 ‘의식 개선’이나 ‘마음 치료’를 종용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형과의 관계도 약간 개선되었다. 그러나 갈라진 가족 관계는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못했다.


이런 사연들을 남자는 결혼 전에도, 결혼한 후에도,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나에게 전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굳이 이야기해줄 필요도 없었다. 결혼과 가정의 행복을 즐기던 어느 부드러운 순간에 나는 남자의 어린 시절 사진첩을 부탁했다.


사진 속 남자의 아버지는 꿈 속의 기와집에 누워 있던 모습보다 젊었다. 얼굴빛도 노랗지 않았다. 남자의 형과 어머니까지 단란한 네 가족이 함께 찍힌 사진들은 내게 사진 속의 이미지보다도 훨씬 더 많은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나는 남자와 나 자신과 아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아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알지 못한다.




아이는 기와집의 그림을 그린다. 네 살 꼬마의 솜씨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남자가 보지 못하도록 나는 매번 그림을 숨긴다. 그러면 아이는 또 그린다.


아이는 그 집에 함께 가자고 조른다. 나는 안 된다고 거절한다. 아이는 울거나 보채지 않는다. 묵묵히 기와집의 그림을 또 그린 후에 그곳에 함께 가자고 또 조른다. 매번, 마치 지금이 처음이라는 듯,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 천진난만함이 때로는 견디기 힘들다.


아이에게 이유를 물었다. 네 살짜리에게서 이성적인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주 또렷하게, ‘그 집을 끝내야 하니까’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여전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


남자는 결혼 전에 두통을 자주 앓았다. 설탕 넣지 않은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으면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으며, 처음 만났을 때 그처럼 무례했던 이유도 두통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두통의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직장에 나가 있을 때 간혹 두통이 생겼다가도, 집에 들어와 아이를 안아주면 씻은 듯이 낫는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아이를 향한 온화한 사랑이 가득했다. 부성애와 관계없는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남자는 알지 못했다.


나는 기관지가 약했다. 환절기나 황사철에는 늘 기침을 심하게 했다. 그러나 뱃속에 아이를 품은 순간부터, 한 번도 아팠던 적이 없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그곳의 다른 아이들이 아프거나 다치면 아이가 가서 달래준다고 한다. 그러면 다치거나 아픈 아이는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아이가 참 착하다고 칭찬한다. 어린 남자아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놀라워한다…




꿈 속의 기와집에 더 이상 얼굴빛이 나쁜 아저씨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아이가 기와집에 있는 꿈을 꾼다. 되풀이되는 꿈속에서 아이는 점점 자란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정도.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 열 서너 살.


소년이 된 아이는 대청마루 위에 올라서 있다. 마당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마당을 가득 채우고 대문 밖까지 늘어선 사람들이 하나씩 차례대로 마루에 올라선다. 아이는 아픈 사람에게 손을 대고 기도를 한다. 아이가 기도를 마치면 앓던 사람은 평온한 얼굴이 되어 마루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올라선다.


아이의 곁에는 나의 아버지가 만족한 표정으로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마루 위로 우르르 몰려들지 못하도록 정리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이제 노인이다. 특이하게 고쳐 만든 화려한 한복을 입고 있다. 그 모습은 언젠가 어린 시절 단 한 번 보았던 ‘천존상제’와 비슷해 보인다.


사방이 어둡다. 마당에는 여기저기 횃불이 타오른다. 기와집의 지붕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스름하다.




그런 꿈을 꿀 때면 나는 새벽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한다. 옆에 누운 남자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일어나서 아이의 방으로 간다. 소리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이의 침대 곁에 앉는다. 세상 모르고 자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오래 전의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기와집 쪽방에 누워 있던 남자의 아버지는 ‘때가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임신했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꿈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익숙한 얼굴 윤곽을 찾아본다. 찾아낼 수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어쩐지 들여다볼 때마다 아이는 더욱 더 남자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방안은 어둡다. 아이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스름하다. 새벽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맑고 깨끗한 푸른빛이다. 저 푸른빛이 옅어지면, 완전히 녹아서 흩어지고 나면 동이 틀 것이다.


꿈속의 기와집 지붕 너머로 보았던 푸르스름한 하늘을 생각한다. 그것이 해질 무렵 어둠을 기다리는 저녁의 어스름인지, 동틀 무렵 해뜨기 전의 어스름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 남자의 곁에 몸을 눕히지 못한다. 해가 뜨기를, 아이의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기를 기다려야 한다. 내 눈으로 보아야만 한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얼굴에 드리운 이 푸르스름한 어둠은 조금만 기다리면 물러날 것이다. 그 사실은 일시적이나마 위로가 된다.


그러나 내일도, 모레도, 어스름은 언제나 찾아올 것이고, 잠든 아이의 얼굴 위에는 밤마다 어둠이 드리워질 것이다. 그 어둠은 지나고 또 새벽이 오겠지만, 그렇게 하루가 흘러갈 때마다 아이는 그만큼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머리맡에 앉아서 지켜주지 못하는 날에, 내가 막아줄 수 없는 어스름이 닥칠 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 혹시라도 오지 않기를,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올 때마다 아이의 기억 속에서 기와집의 모습이 차츰 희미하게 흐려져 마침내 사라지기를,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는 어느 날에 아이가 단 한 번이라도 열이 오르고 단 한 번이라도 기침을 해 주기를, 그리하여 남자를 깨워 허둥지둥 아이를 차에 싣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하여 자격 있는 의사의 위로를 받고 믿을 수 있는 약봉지를 받아들고, 주사를 맞고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들쳐업고 녹초가 되었지만 안심한 채로 집에 돌아오는 보통 부모의 행운이 한 번만 나를 찾아오기를… 푸르스름한 어스름이 드리운 방안에서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나는 누구인지 모를 존재를 향해, 어딘지 모를 우주를 향해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그저 바라는 것 외에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스스로 도는 한 내일도 모레도 찾아올 어스름의 순간을 막아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진정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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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11.05.31 23:15 댓글 수정 삭제
    마지막 문단이 정말 좋아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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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1.06.01 09:14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동정의 댓글을 진짜로 달아주시다니;;; 깽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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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랑 11.06.01 09:22 댓글 수정 삭제
    먹성 좋은 친구들 얘기에 빵ㅋㅋㅋ

    스탭은 되면 안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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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1.06.02 00:10 댓글 수정 삭제
    먹성 좋은 친구들은 인생의 즐거움이니까요 (엄숙)

    스탭 팔자는 감독님한테 달린 거 같아요. 실제 제 친구의 남편은 친절한 감독님이셔서 저런 푸대접은 절대 하지 않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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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11.06.02 02:31 댓글 수정 삭제
    동정의 댓글이라니!! 마지막 문단이 정말 좋다구요 흥흥ㅠㅠ
    그리고 로맨스물도 써주세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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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드 11.06.02 15:21 댓글 수정 삭제
    으스스하면서도 찡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이렇게 복잡미묘한 기분은 처음인것 같습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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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1.06.02 21:27 댓글 수정 삭제
    미로냥님/ 감사합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로맨스물.. 노력해 보겠습니다 -_-/ (과연;;;)

    노드님/ 헉 복잡미묘라니 최고의 찬사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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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mittis 11.06.16 11:42 댓글 수정 삭제
    아아...올해 읽은 글들 중에 젤 재밌었어요ㅋㅋ
    다 읽고 나니 제목을 정말 잘 뽑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슬픈데 아프지도 않고, 재밌는데 지나치지도 않고, 튼튼한데 무겁지도 않군요..^^
    머리가 상쾌해져요..ㅎㅎ
    아 그리고..개인적으로...로맨스물은 그닥 바라지 않지만, 혹 쓰신다면
    먼가 새로운게 나올 거 같아 기대가 됩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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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1.06.16 15:48 댓글 수정 삭제
    흐억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깽깽

    제목 나름 오래 고민해서 지었는데 칭찬해 주시니까 기뻐요! (왕단순)

    로맨스는... 본격적이진 않지만 다음호에 짧고 알콩달콩한 얘기 하나 올라갈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엽. (슬쩍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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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mittis 11.06.17 08:38 댓글 수정 삭제
    로맨스는...왕창이진 않지만, 슬쩍 기대해보겠습니당..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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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1.06.17 21:11 댓글 수정 삭제
    냐핫 슬쩍 기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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