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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wonikcraft2@hanmail.net)



사실 아무래도 개신교적 환경과 문화에 둘러싸인 채 성장해서 그런지, 가끔 현행 기독교가 까일 때 가슴이 아플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부터 지적된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옹호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현실 기독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심술궂은 냉소와 회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화된 제도권 교회와 별도로, 기독교의 근본정신에서 만약 건질 게 있다면? 그건 대체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대안은 생명 존중과 다양성의 원리로 점철된 불교적 원리일까요? 혹은 도가적 생태주의일까요? 공동체주의일까요? 저는 어느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오늘 날에 들어 기독교만큼 인기 없는 종교도 없습니다. 혹자는 단순히 선하고 올바른 당위의 영역에서 탈선한 종교적 역기능들의 사례들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만 않고, 현행 기독교의 각종 폐해들의 거대한 근본 뿌리로 지적되고 있는, 배타적 사상, 독선적 태도, 완고한 비타협주의 등등을 거론합니다. 이런 근본적 비판은 기독교의 정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모든 제반 특징들은, 후기산업사회의 관용과 다양성의 정신, 혹은 포스트모던한 경향에 괴리되는, 그래서 이제는 없어져야만 하는 유물들로 간주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기독교야말로 유일한 근본적인 종교라면 어떨까요? 언뜻 퇴행적으로 보이는 기독교의 정수를 반복한다는 것에는 의외로 급진적인 전복의 힘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면 당장에야 돌이라도 맞을 분위기가 아닙니까. 기독교는 이제 모든 완고한 보수주의의 ‘수호성인’으로 표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은 관용성과 다양의 논리를 설파하는 포스트 모던 불교나 도가와 같은 '동양적 지혜'들이야말로 완벽하게 후기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체현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언뜻 급진적으로 보이는 그러한 사상이야말로 정확히 우리들이 몸을 내맡기는 타성에 완벽히 아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말에 100%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관용과 다양성의 무심함에 완벽하게 대립됩니다. 즉, 실상 우주와의 전일적인 생태론적 조화를 설파하는 각종 포스트모던 종교들은, 저마다 무심하게 개인주의적 소비의 영역에 빠져드는 라이프-스타일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는 현행 기독교가 퇴행적 사이비 산업화 세력과 군부독재잔당들의 수호성인이 되어주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사실 제 신변잡기를 말씀드리자면, 저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절대적 신의 충만한 은혜와 사랑으로 넘쳐나는 가슴 따뜻한 세계일까요? 이미 여러분들이 기독교에 대해 실망했듯이, 기독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불교와 같은 전일적인, 보편주의적인, 생태주의적인 사랑인 아니라는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한에서 기독교적 사랑은 한 점의 위선 없이 100% 인간적입니다. 게다가 통념과 달리 기독교적 사랑을 베푸는 중심 행위자로서 '신'은 여타 종교와 달리 '절대선' '절대지'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한 발 양보해서, 흔히 ‘절대선’과 ‘절대지’임을 공공연히 자처하고 다니는 언표상에서의 신은 실제로는 그 언표행위 상에서는 무언가가 굉장히 도착적인 괴리된 이면을 숨기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원래는 보편적 지혜나, 차별 없는 사랑, 생태적 조화, 무조건적인 관용과 같은 입발린 소리들을 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욥기'와 같은 데에서, 절대선으로 표상되었던 신은 그 이면에서 은밀하게 악마와 계약을 맺고, 신실한 신앙자인 '욥'에게 온갖 부조리한 형벌과 괴로움을 내립니다. 어딘가 왜곡되고 편향된 관점을 지닌 신이지요. 혹은 욥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을 못하는 그런 무지한 신이거나. 혹시라도, 욥이 불평이라도 하지 않을까 해서 시험삼아 그의 가족의 목숨을 빼앗아가죠. 야훼는 죄 없는 동물들을 막 죽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반생태주의자이지요. 이 것이 기독교의 신입니다. 여기서부터 절대지의 화신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의처증이나 의부증을 앓는 편집증 환자와 같은 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일부러 선한 자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은 결코 이전의 종교로서는 상상도 못한 도착적 행위입니다. 신도 여기서는 절대선이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에, 신이 온갖 기적을 행사하면서 욥 앞에 나타나,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지 으스대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가 나에게 불평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가 상상도 못할 만큼 위대한 존재란다"라는 식의 떠벌림은 마치 싸구려 할리우드 블록보스터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너는 이 영화를 보고 형편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너는 나처럼 이런 CG로 압도적인 영상을 만들 수 있니?"라고 으시대는 영화감독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신은 완벽하게 인간적 차원으로 '내려옵니다.'

여기서 관건은 결국 유일신 하나님이 실제로는 형편 없는 화이트 트래쉬라는 결정적 사실이 폭로된다기보다는, 라캉이 정식화한, ‘나 진리가 말한다’라는 표현 자체가 주는 낯선 느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독교적 진리가 겨냥하는 실재는, 현상 이면에 있는 도착적 이면이라기보다는, 현상과 이면 자체의 불일치를 함께 사유하는, 신적 동일성 내에 삽입되어 있는 이물감과 함께 머무르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독교가 근본적 종교인 이유는 그 종교가 최초로 '신 없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단지 신이 부재한다는 것에 대한 자기만족적 선언에만 머물지는 않기 때문에 ‘근본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련지요.) 예수 역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를 외치고 절명합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것을 주관하고 간섭하고, 선한 의도로 이끌고 가는 보편지혜의 화신으로서의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이 붕괴하는 순간이 아닌가요? 신조차도 죽음 앞에서 무력한 장면을 최초로 보여준 것은 기독교가 아닌가요? 여기서 흔히 표준적 기독교인들이 하는 변명은, "아니다, 실은 그런 외침은 인간의 고통을 손수 이해하고자 하는 신의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신이 인간과 같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시겠죠. 그렇다면 이러나저러나 그분들은 최대의 불경을 저지르는 셈입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결국 신은 자기 자신과 하나의 게임을 벌였다든가, 냉소적인 연극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자기가 부활할 것임을 알면서도 한 편의 훌륭한 연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상투적인 구원의 서사를 가르치려 들 때, 드는 사례가 에덴동산입니다. 그곳이야말로 신과 인간의 완벽한 정서적, 인격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이상향이라는 것인데, 결국 죄악으로 인해 인간 스스로 그곳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은 우리를 에덴동산이라는 구원의 이상향으로 이끌고자 은혜를 베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기독교는 이교도와 다를 게 없어집니다. 그 친구들도, 항상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이란 실은 어떤 곳입니까? 성경을 자세 읽어보면 에덴동산은 어딘가 멍청해보이는 테마파크와 너무나 섬뜩하게 닮아있지 않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금지하면서 떡 하니 한 가운데에 선악과 나무를 심어주는 센스. 혹은 '담배는 각종 발암의 원인이 되며, 청소년과 임산부의 건강에...'라는 문구를 집어넣으면서도 버젓이 판매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센스. 오히려 에덴동산은 허무주의의 이상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면요? 오히려 그런 에덴동산을 떨치고 나온, 타락의 화신 아담이야말로 기독교적 구원의 첫 출발이라면 어떨까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적절히 지적했듯이, 예수는 아담의 반복입니다. 예수는 에덴동산이라는 테마파크의 전직 관리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을 떨치고 나온 아담의 화신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이방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것이 이상에서 시작해서 타락으로 끝나거나, 혹은 타락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그런 흔해 빠진 종교가 아니라, 타락(아담)에서부터 시작해서 타락(인간 예수)으로 끝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구원은 완벽한 보편지혜와의 신비주의적 합일이 아니라, 타락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세의 지평에서 '어떤 보상도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절명하는 순간에 '어찌 저를 버립니까'를 외친 예수의 모습에서, 그러한 구원의 의의는 명백해집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수많은 이교도들이 가정하고 희구하는 '모든 것을 아는 보편지혜'가 부재하는, 현세의 유한한 지평을 그 자체로 긍정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독특한 감수성은, 구원이란, 지금 결핍된 것을 먼 언젠가 보상될 것이라는 생각과, 혹은 다시 돌아 가야할 이상향으로의 회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구원이란 지금 유한한 지평에 '이미' 일어났다는 독특한 감수성으로 행동합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을 공유하는 성령공동체를 설립하는 그러한 전투적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마치 철저히 유물론적 사고관을 가진 볼셰비키들이 전투적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했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기도교의 ‘실재’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독교는 완전무결한 신 이면에 있는 도착적 이면에 대한 카발라적 비의로 가끔씩 퇴행하고 있는 유대교와 달리, 순전한 신적 동일성 자체가 항상-이미, 그 자체로 분열되어 있고 끔찍한 부조리를 겪는다는 사실에 대해, 일종의 반성적 거리를 내포한 인정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적 믿음의 정수로 직결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적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대타자가 분열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포스트모던한 냉소주의와 회의주의에 빠지는 대신, 그러한 대타자를 집단적 주체성(성령 공동체)과의 합치된 공정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기묘한 열광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는 신자는 그 자신의 믿음에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투사인 것입니다.

결국, 자기 믿음에 어떤 대가를 지불할 용의도 없는 채, 에덴 동산을 궁극적 이상향으로 간주하는 진부한 표준 기독교적 태도는, 그 이면에서는 무속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근본적 종교인 이유는, 그것이 결국 돌아가야할 실낙원, 이상향, 완벽한 합일감으로 충만한 세계에 대한 향수와 근본적으로 절연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돌아가야할 곳은 저기 어디엔가에 있다'라는 감수성 자체는 원래 초기 기독교에 이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현세적 순간이었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수동적으로 핥아주며 속세에서 떨어진 지역에서 망향의 세월을 보내는 대신(이것은 오늘날 위로와 치유의 정신분석 담론, 기공수련, 요가, Zen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전투적인 규율과 충실함으로, 지상의 성령공동체를 세우고자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의 육체의 부활을 진지하게 믿었으므로,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민족, 혈통, 문화, 계급을 무시한 순수 보편 교회를 세우고자 분투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환멸(세상은 너무나 다양해, 할 일은 많고 사람은 많어. 각자 서로 존중해주면서, 각자 할일을 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게 최고야.)에 대해 완벽히 대립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포스트모던한 후기산업사회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등장한 후기 로마제국 시대와 견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각자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기초한, 방임주의적 쾌락주의와, 퇴폐 그리고 향락을 최고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환멸과 허무함만이 주류를 이루는 그런 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후기 제정로마 시대야말로 '포스트모던'의 이상향 아닌가요? 여기에 대해 기독교는 전혀 다른 근본적 논리를 제시한다면 어떨까요. 오히려 충실한 믿음을 공유한 집단적 주체성의 이념을 되살려야하지 않을까요.

저는 초기기독교 저변에 흘렀던 '보편교회'의 이념을 되살려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새로운 교회를 지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온갖 모순(환경문제 빈부격차 시장근본주의 세계화 인간소외)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당Party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새로 지어야할 천년왕국은 이제는 종교적 차이마저도, 무시하는 순수 보편성의 이념으로 만들어져야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기서 기독교의 근본을 '반복'한다는 것은, 예수가 가르쳤듯이, 보편적 이념을 위해서, 형제와 부모와도 적대하는 것을 감수하는, 래디컬한 충실함을 견지하는 것이겠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철저히 당파적입니다. 그래서 계승된 문화 전통 혈통 민족적 정체성 심지어는 직업적 정체성마저도 부인할만큼 강력한 충실함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충실함을 가지고 사회 문제에 대처해야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유독 야곱이나 아벨을 편애하는 것 역시 당파적이고 편향되었듯이, 기독교는 주체가 보편이념에 귀속되는 한에서만 사랑하는 그런 정치적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무조건적이고 전일적이고 조화론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과 달리,) 그것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거짓과 비진리와 부정의를 솔직하게 미워하는 태도입니다. 사랑에 관해서도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당파적 종교인데, 그런 것이야말로 다른 종교나 철학에 비해 위선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종교랄까요.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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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xk160 07.09.30 22:18 댓글 수정 삭제
    에... 한마디로 끝내버리기 왠지 미안한 글이지만... 역시 걍, 잘 읽었습니다! ^^; 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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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7.10.08 22:28 댓글 수정 삭제
    첫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jxk님이라니, 영광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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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7.10.13 12:25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불교와 도교의 원래 형태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만(예. 원래 불교는 사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구원의 밧줄을 던지지 않는다고 태연하게 선언하고 나온 종교죠 ㅋ) 이 글에서는 그 앞에 '포스트모던'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두셨으니 동의.

    더하여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의 근본이 갖고 있는 성질이 다른 어느 종교와도 차별적인 것은 사실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굉장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건 현실 종교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고, 현실에서는 때로 위선이 정직함보다 나을 때가 있다는 건 지적하고 싶네요. 어떤 종교라도 현세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면이 있는 것은 결국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일 터...

    이것저것 한꺼번에 이야기하느라 횡설수설. 댓글로 쓰는것보다는, 언젠가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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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가분 07.10.28 18:38 댓글 수정 삭제
    저도 그럴 기회가 있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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