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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wonikcraft2@hanmail.net)



미나소타 대학 출판사에서 2003년에 출간된, 피터 홀워드의 <바디우-진리에 충실한 주체>라는 책입니다. 프랑스 대륙 철학에 대한 충실한 영어권의 입문서로서 매우 희귀한 케이스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서문과 저자 자신의 서론을 번역해 두었습니다. 미심쩍은 번역에는 원 단어를 병기했습니다. 별표가 첨가된 괄호 안의 문장은 제가 별도로 첨부한 것입니다.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 자체의 전모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서론에 나왔습니다. 그의 철학의 약점 또한 마지막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서론에서, 책의 구성에 대한 저자 자신의 소개는 생략했습니다. 지젝은 서문에서 대신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책을 재료 삼아 늘어놓고 있군요. 아무튼 오늘날의 주류적 코드에 불화하는 것은 바디우나 지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선가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에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저자인 아사다 아키라 씨가 그들을 "좌익 독단주의자"라고 씹더군요. 그렇습니다. 희귀하게도 이 둘은, "레닌이 뭐가 나쁜가?" "모택동이 뭐가 나쁜가?"라고 반문하는 존재이지요. 이미 홍세화씨에 의해 널리 알려진 그 좋은 "똘레랑스"(물론 굳이 프랑스 발음으로 번역할 이유는 없었지만, 우리나라 사정상 그러한 번역이 더 임팩트 있을 듯)에 대해 단호히 반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아직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그렇게 보면 지젝은 그렇게 '유명'하던가?) 현대철학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대중적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말미에 다시 제가 사족을 붙여, 가라타니 고진을 거론하며, 바디우의 약점에 대해 피상적으로 생각한 바를 적겠습니다.

  오늘날만큼이나, 다양성에 대한 존중, 타자에 대한 관용, 상대주의적 태도, 의사소통에 대한 강조, 정서적 공감의 필요, 기타 등등의 쿨하거나 혹은 성실한 삶의 방식이 인기 없었던 적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태도들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를 겨냥하거나 대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태도 자체가 바로 후기 자본주의와 공모한다는 점에서, 이들만큼 탈출구 없는 태도도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볼 것은 바로 그러한 회로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제스처입니다. 다름 아니라 지금까지 회의되고 의심되고 논박되었던 절대적 '진리'와 그것에 대해 교조적인 '충실함'을 되살리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조차도 못했던 완전히 낯선 모습으로 드러난 '진리'와 '충실성'의 부활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디우에 관해서, 상투적인 광고 문구대로,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점을 보증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미리 흘리자면, 바디우와 조우한다는 것은, 종교보다 더 위로가 되고, 사랑보다 더 쓰디 쓴 체험을 선사하며, 하루키보다 더 쿨하면서, 체 게바라만큼이나 순수하고 진실한 형상과 마주친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혹은 단호한 태도로 현대의 모든 사상적 천박함에 대해 흉기를 휘두르는 철학계의, 말쑥하게 차려 입고, 시인 보들레르 못지 않게, 과격하며 우아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한 베가본드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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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서문과 서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몇가지 예비 지식이 있습니다. 우선, 라캉의 '실재' 개념과, 바디우의 순수 '다수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올 몇 가지 개념적 배치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단독성singularity' 개념도 더불어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실재real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분열 및 재배가redoublement입니다. 실재는 현실의 외관 이면에 있는 게 아니라 반복되는 외관 '사이'에 존재합니다. 가령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예를 들자면, 누군가에 있어 애인의 실재real란 애인의 가장 멋지고 이상적인 모습도 아니고, 애인의 숨겨진 이면의 추한 모습도 아닙니다. 애인의 리얼real한/실재적인, 진실(사랑의 진리)은, 정확히 두 모습이 교차하는 데에서 산출됩니다. 그러한 한에서 사랑하는 자의 실재가 산출됩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두 모습을 동시에 배려하라는 진부해빠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재와의 마주침은, 내 바로 옆에서 땀 흘리고 코를 고는 무언가가 동시에 나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더욱 더 예상치 못한 낯선 장면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디우의 순수 다수성에 대한 사례가 됩니다. 순수 다수성은 동일한 '현상'(그리고 이 현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에서도 전혀 다른 상이한 '(사랑이라는)사건'이 출현할 수 있음을 가능케 하는 존재론적 범주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외면과 내면, 앞모습과 뒷모습이라는 기존의 공식을 전환해서, 사랑하는 자의 반복되는 '외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변화 가능성, 창조, 사건, 마주침을 긍정하자는 것이 바디우의 모토에 가깝겠습니다.  

  이런 실재와 순수 다수성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랑(바디우에게 있어 진리의 네 가지 조건들 중 하나인)과 마주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호 간의 현실적 궁합이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충실함인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는 충성스러운 선언은 그것만으로도, 남자와 여자의 객관적 특성과 환경을 넘어서는, 완전히 예상치도 못했던 새로운 차원(순수 다수성)을 열어젖힙니다. 그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대의 객관적 특성을 참조하고 고려하고 맞추어가지만, 그것과 냉소적 처세술을 가르는 선은 희미합니다. 그러한 점은 정치적 선언과 예술적 선언 과학적 선언 등과 같은 사건과 똑같습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상황의 진리에 대한 선언은 상황 자체를 둘로 나누어(애인의 두 모습, 과학의 두 모습, 예술의 두 모습, 사회의 두 모습) 미처 생각지도 못한 순수 우발성의 차원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행위를 불러일으키지만, 이 역시 그 사건에 충실한 집단/주체가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집단/주체는 더 넓은 의미에서 사랑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성원의 객관적 특성과 배경을 넘어서는 충동에 충실한 한에서 결속력을 가지는 공동체 말입니다. 그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도 높은 규율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을 유지하는 것 만큼이나.

  앞으로 보겠지만, 실재와 순수 다수성은 순수 상징적인 차원만큼이나 순수 수행적인 차원과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상징적인 것으로 회수되지 않는 빈틈에, 실재가 산출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것을 초월한 게 아니라 정확히 내재적인 것입니다. 가령 0에서 1까지의 실선을 어떤 방식으로 무한하게 세어보든, 여전히 세어지지 않은 것이 남습니다. 그것이 기존의 셈을 분열시키고, 바꾸게 강제하는 힘인데, 순수 다수성이라는 것도 세어지지 않고 상징화되지도 않지만 어쨌든 그 실선에 머무르는 내재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실재 역시도 상징계 내부에 머무르는, 상징계의 빈틈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것은 어떤 내용도 없고 상징화에 저항하지만, 상징계 자체에 변화를 가능케 하는 순수하게 수행적 효과를 가져다 옵니다.

  '단독성'은 '보편성'과 연인과 같은 한 쌍을 이루는 것을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각각 '특수성/개별성'과 '일반성'에 대립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을 함축하는데, 가령 보편성은 결코 일반성이 아닙니다. 일반성은 개별성의 총합으로서 성립하지만, 보편성은 그러한 개별성/일반성의 외연에 거주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것은 개별적인 요소들과 개별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일반성과의 모든 관계를 절연하고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가령 '나'라는 존재가 보편적이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일반성/개별성의 특성들을 빗금 쳐야만 합니다. 내가 보편적인 원칙에 충실하게 위해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과, 남자라는 것과, 모 대학 학생이라는 것과, 등등의 온갖 특수하고 우연적인 사회적 ID를 자꾸 제거해 나가다보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리지만, 완전한 단독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한에서 '보편적'인 게 됩니다. 이상 가라타니 고진의 설명에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여기서 단독적인 것은 바디우에게 있어 진리의 보편성을 체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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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서문

  리처드 도킨스의 잘 알려진 공식에 따르면, 살아 있는 자연에 있어서, “신의 유용 함수God's utility function”은 유전자의 재생산이다. 다시 말해, 유전자의 의의란 생명체의 재생산의 수단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 생명체가 오히려 유전자의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역시도 마찬가지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ISA)의 유용한 기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유물론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유용 함수는 관념의 그물망network, 감정 기타 등등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재생산도 아니며, 이런 이데올로기에 의해 합법화된 사회적 상황의 재생산도 아니라,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 그 자신의 재생산이다. 동일한 이데올로기도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회적 양태에 그 자신을 맞출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의 관념의 내용을 바꿀 수 있다, 기타 등등. 하지만, 때때로 생존과 재생산의 자기 충족적인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가 출현한다. : 사건, 고집스레 자신의 내적인 필요를 따르는, 모든 기회주의적인 고려들을 무시하는, 보편적 대의를 위한 참여.




  철학이 어떤 진리 사건?그 자신의 외적 조건으로서 의지한다는 그의 중심적 생각과 더불어 알랭 바디우는 무엇을 겨냥하는가? 바디우의 위대한 맞수, 들뢰즈가 영화의 역사에서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로의 중대한 이동에 대해 설명할 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실재의real” 역사, 이차 세계 대전의 외상적인 충격(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에서부터 미국의 필름 느와르에서 느껴지는)을 있는 그대로의 방식으로서 참조한다. 이런 참조는 충분히 들뢰즈의 일반적인 반 데카르트적인 분출과 부합한다 : 하나의 생각은 절대로, 그 자신으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그 자신의 내적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를 생각하게 자극하는 것은 언제나 외상적인, 그 자신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외적인 실재와의 어떤 폭력적 조우이며, 우리의 확립된 사고방식을 산산조각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실한 생각은 언제나 탈중심화되어 있다 : 누군가는 자기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하게끔 강제된다. 그리고, 미묘하게 다른 어조일 터이지만, 바디우는 들뢰즈에게 동의할 것이다: 하나의 진정한 철학적 사상은, “내재적인 개념적 필요”를 따라라가며, 그 자신으로부터 거미줄을 쳐내지 않는다; 그것은 되려 어떤 외적인 진리 사건(정치, 과학, 예술 그리고 사랑에서 발생하는)이 주는 불편한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 사건의 조건과 그것에 대한 충실함을 윤곽 지으려 하는 시도이다.




  바디우--자크 알랭 밀레, 장 클로드, 캐서린 클레멘트, 알랭 레놀드, 그리고 알랭 그로즈리야르와 더불어 국면 돌파적인 60년대의 라캉-알튀세르적 Cahier Pour L'analyse의 창립 멤버중 하나인--는 궁극적으로 카리스마적인 지식인의 형상이다. 그는 특유의 방식으로  엄격한 수학적 지식, 진실한 철학적 열정, 예술적 감수성(그는 단지 말라르메와 메케트에 대한 놀라운 분석을 행한 저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유명한 극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60년대 모택동주의적인 행동에서부터 시작되고 <르 몽드>로의 편지에서 베트남의 78년 침공에 대항해 크메르 루즈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간, 급진적 정치 참여를 결합한다. 과학, 미학, 그리고 정치적 혁명에서 위대한 세 개의 M들을 결합시킨 저자에게서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mathematics수학, Mallarme말라르메, Mao모택동? 하지만 그의 개인적 면모에 매혹되는 것에 저항하고서, 그의 작업 자체에 진지하게 빠져드는 시점에서야말로 바디우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코마르와 멜라미드, 각각 70년대 중반에 서방으로 망명한 전직 소비에트 화가들은 평균적 미국인들의 전형적 샘플을 대상으로 행한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삼아 1990년대에, 각각 “최고”와 “최악”의 두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최악의 작품은, 물론, 칸딘스키 풍의 밝은 빨강과 노란 색으로 칠해진 날카롭게 각을 세운 삼각형과 사각형의 추상적 구성이었다. 반면에 최고의 것은 한 전원적인 풍경으로, 모두 파랑과 초록으로 칠해진, 명확히도, 조지 워싱턴이, 그림 한 가운데를 달리는 강변을 걸어가고 있으며 밤비처럼 보이는 한 사슴이 나무 뒤에서 그를 수줍게 관찰하는 모습이다. 지난 몇 년 동안에, 그들은 이러한 여론조사를 확장해가며,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와 여타 국가들에서 각각 “최고”와 “최악”의 그림들을 뽑아보았다. 이런 아이러니한 실험은, 여타 여론의 압력에 맞서 누군가가 진리에 충실히 하는 바로 그 관념을 불관용적이고, 유럽 중심적이고, 기타 등등으로 폄하하는 오늘날의 “똘레랑스Tolerance”의 지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낡은 플라톤적 방식으로, 거부할 때의 바디우와 대립되는 그 무언가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즉, 오늘날의 지배적인 자유주의적 정치의 철학자들은 정치를 의견(취향, 선호, 등등)의 영역으로 격하하고, 정치와 진리의 결합을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거부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자명하지 않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정치적 진술의 진리성을 주장한다면, 당신은 타인의 관점을 “거짓”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똘레랑스의 기초적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 아닌가?





(*)미국인이 원하는 최고의 그림??




  바디우는 단지 진리의 정치로 돌아갈 것을 열정적으로 주창할 뿐만 아니라, 모든 지배적인 포스트모던 정치와 철학적 잠언들과 대립한다. 그의 사상이 명확히 프랑스의 특정 정치철학적 맥락에 의해 표식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맥락과 관계하는 방식(“전체주의”에 대한 자기만족적 비판을 포함한, 지배적인 유사-칸트적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거부 뿐 만이 아니라, 철학적 “해체주의”--그가 새로운 종류의 소피스트적 궤변으로 격하하는--에서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문화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포괄하는, 소위 더 “좌파적인” 입장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은 또한 현재의 앵글로-색슨 이론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개입을 더욱 중요하고 생산적으로 만든다. 중요한 점은, 바디우가 단지 “해체주의”(앵글로 색슨 강단이 저자들을 해체주의라는 텅 빈 용기(그릇)에 집어던지는 것을 당사자가, 만약 그들 중 죽은 이가, 가령 라캉이, 본다면 아마 무덤 속에서 돌아눕고 싶은 심정이리라.)와 더불어 “프랑스적”인 사상이라는 여전히 지배적인 정체성에 대한 필요한 교정자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모든 주어진 분류방식을 명확히 벗어나는 사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로 해체주의자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며, 그는 분석철학의 “언어적 전회”에 반대하는 만큼이나 명확히 하이데거에 반대한다. 그가 한나 아렌트에 의해 주창된 일련의 자유 민주적 “정치 철학”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더욱 중요한 논점은 아마도, 오늘날 현행하는 자본주의를 유일한 게임의 규칙으로 인정하고, 의회-자본주의적 질서의 바로 그 근본에 집중하는 대신, 상이한 문화적, 성性적, 종교적, 그리고 타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하는 데로 강조점을 옮기는, 그래서 원한의식ressentiment의 논리를 승인하는 오늘날 지배적인 형태의 좌파 정치학에 대한 비판적 거부이리라: 오늘날의 “급진적,” 다문화주의적, 리버럴한 정치학에서는, 누군가의 주장을 합법화하는 유일한 길이란 더더욱 그 자신을 피해자victim로서 내세우는 것뿐이다. “차이를 향한 권리”Right to difference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체성의 정치학identity politics에 맞서, 바디우는, 특정 집단의 우연하고 개별성을 정의하는 실체적 특징에 의해 정당화된 어떠한 정치적 요구도, 원칙적인 평등의 근본적인 민주적 공리axiom를 위반한다는 것을 강한 어조로 주장한다. 그것은 즉, 오히려 방어되어야할 권리는 “차이를 향한 권리”가 아니라, 정 반대로 그리고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하게, “동일성을 향한 권리”이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좌파는 우파의 기초적 전제(“복지국가의 시대는 그것의 방만한 지출과 더불어 끝났다.” 기타 등등)를 수용함으로써 고로 우파의 이데올로기적인 협박에 굴복한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그 유명한 오늘날 사회 민주주의의 “제 3의 길”의 모습이다. 이러한 조건들에서, 진정한 행위란 “급진적” 조치에 관한 우파적 선동(“너는 불가능한 것을 원한다. 이것은 파국으로 향할 것이다. 보다 많은 국가 개입을 불러들일 것이다, 기타 등등”)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제안은 국가 예산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 지출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 것이다, 투자를 촉진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널리 울려 퍼지도록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정확히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거다!” 현상 유지를 바라는 냉소가들이 소외 혁명가들이 모든 것이 가능함을,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음을 믿는다고 비난할 때, 그들이 결과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세계가 그저 생겨 먹은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결국 어느 것도 실제로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는 실제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그의 철학 자체에 적용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오늘날 철학적 풍경에서, 과거의 오래된 철학적 행렬matrix(분석 철학, 하이데거적 현상학, 해체주의, 후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의사소통적” 전회)들이 더욱 포화되어 보일수록, 그들의 잠재력이 소진되어 보일수록, 바디우적 사건개념의 충격은, 정확히, 기존의 철학적 성좌의 “증상적 뒤틀림”1)의 지점에서부터, 기존의 철학적 성좌에 개입하는 사건event의 충격이다. 해체주의적 노력의 이론의 여지 없는 배경으로서, 오늘날 해체주의에 의해 수용된 일련의 선호--동일성에 대한 차이의, 질서에 대한 역사적 변화의, 폐쇄성에 대한 개방성의, 경직된 도식에 대한 생기 있는 동학의, 영원성에 대한 시간적 유한성의 선호--에 의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피터 홀워드의 이 책에 관하여, 누군가는 또 한 번 바디우 고유의 범주에 의지하고픈 유혹을 느낄 것이다: 만약 바디우의 최근 작업이 현대 철학의 그 사건이라면, 홀워드의 책은 그러한 사건에 대한 최고의 충실성을 지닌다, 교조적인 충성이나 이력서를 맹목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닌 한에서의 충실성을 말이다. 철학적 충실함은 저자가 쓴 모든 것에 충실함이 아니라, 오히려 저자 안에 있는 저자 자신보다 더 한 무언가에 대한, 저자의 끝없는 작업을 작동시키는 충동impulse에 대한 충실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홀워드는 놀라운 활력과 함께 바디우 사건의 결과를 추적하며, 바디우의 거대한 성취뿐만 아니라, 국지적 비일관성, 해결되어야 하는 난국, 추가적인 세공화를 기다리는 과제를 지적한다. 물론 바디우가 라캉을 그의 스승들 중 하나로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반철학”(내가 즐겨 참조하는 그 반철학으로서)에 대한 그의 비판적 차이들은 홀워드의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들에 관하여, 나는 오직 표준적 구절을 인용하여, “이러한 ‘적’과 함께라면, 친구 따윈 무슨 상관이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0년 전에 바디우가 모택동주의적인 정치 단체에 참여했기에, 모택동 주석의 잘 알려진 구별, 끈기 있는 논증으로 해소될 수 있는 인민 사이의 비적대적 모순, 그리고 인민과 그의 적들 간의 적대적인 모순 사이의 구분을 되살려보자: 라캉으로부터 바디우를 구분시키는 간극은 절대적으로 비적대적인 모순이다.







  더 나아가, 영어권 저자가 프랑스 철학자에 관한 책을 썼다는 사실은 그동안 영어에 있어 최고인 것과 “대륙” 철학적 전통에 있어 최고를 결합시키는 드물고도 기적적인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은 것은 명료하고 분석적인 논증과 “대륙적” 철학의 사변적 반성의 그 불가능한 교차이다. 내가 홀워드의 책에 관해 유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탁월함 덕택에, 그것이--저자의 의도와 물론 상관 없이--원저자 자신의 작업보다 그것에 대한 소개서를 선호하는 최근의 개탄할만한 경향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홀워드의 책이 철학자, 수학자, 철학자, 정치 이론가, 그리고 미학자들 사이에서 응당한 성공을 누릴 것이라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의 성공이 바디우 자신의 저서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에 기여할 것을 바란다.






피터 홀워드의 서론






 사건 바디우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은 그 자체로 의심의 여지 없이 최근의 프랑스 사상에 있어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바디우는 아마도, 의미는 없겠지만 피할 수도 없는, "가장 중요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라는 타이틀에 대한 데리다와 들뢰즈와의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라이벌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요 저작인 <존재와 사건>(1988)은 확실히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 이래로 단일 작품으로서는 가장 야심차고 가장 압도적인 철학적 작업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수준에 도달하는 그의 작품들이, 바디우의 전체 철학이 철저한 변혁에 맹렬히 몰두한 이래로, 영어권 독자들에게 너무나 새로우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은 집합의 질문들에 대한 세심한 관여이다: "어떻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 세계에 진입하는가? 어떤 종류의 변혁이 충분히 보편적인 차원의 긍정을 불러일으킬만한가? 어떻게 그런 종류의 변혁이 불가피하게 초래된 세계 내의 무관심과 저항에 맞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변혁을 긍정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의 긍정을 지속해 나가는가?"




  바디우 그 자신은 그의 길고 다양한 이력을 통틀어 적지 않은 저항을 겪어왔지만, 그는 유망한 그러나 동시에 논쟁적인 지위를 프랑스 철학 내에서 누린다. 파리 제 8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수년 이후 그는 Ecole Normale Supieure의 철학과장으로서 1999년에 임명됐다. 그의 공개 강의는 지속적으로 수 백 명의 청취차들을 끌었다. 1970년 대에 마오주의자로서 투신함으로써, 그는 급진적 정치에 관한 강한 주장들을 펼쳐 왔고, 이민 문제, 노동 문제, 그리고 광의의 의미에서 정치적 정의에 관한 수많은 캠페인에 관계해 왔다. 열 두 권 가량의 철학 책들을 제하고서라도, 그는 상당수의 소설과 희곡을 출판했고, 가장 강도 높게 논의된 여러 현대 수학적 분야들이 지니는 개념적 함축을 탐사해 왔다. 바디우는 전통적인 분류불가능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그의 작업은 다양하고 낯선 분야들을 포괄한다--정수론, 정신분석, 현대 시, 정치이론, 희곡 그리고 공연이론. 그의 동반자들은 칸토르, 코헨, 라캉, 말라르메, 그리고 레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특히 그는, 그리고 아마 다른 어떤 현대 프랑스 철학자보다 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사이의 명확한 구분선을 보기 좋체 철폐해 보인다. 평소 수학적 논리에 대한 비판자이면서도, 그는 헤겔 니체 들뢰즈에 정통한 것만큼이나, 수학을 따라 프레게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괴델에 정통하다. 그는 그 나름의 철학에 대한 개념을 통해 '분석적' '대륙적' 이라는 수식어들을 거부하는 동시에, 명확히 구분되는 혹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정치, 미학, 인식론이라는) '측면'들을 거부한다.




  만약 바디우의 작업이 아직 당대의 유명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가 어떠한 지배적인, 프랑스와 앵글로-아메리카로부터 유래한 철학적 기원과도 너무나 확고하게 대립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디우, 그는 당파적인 것을 제하면 시체나 다를 바 없다. 그가 겨냥하는 과녁들의 목록은 길고 다양하다. 그는 니체가 최후의 형이상학자였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일상언어의 교육적인 사용으로 모든 철학적 무의미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플라톤 헤겔 그리고 맑스가 전체주의의 전조였다는 것을 거부한다, 아우슈비츠가 철학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혹은 스탈린의 범죄가 의회 민주주의 제도로의 회귀를 강제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혹은 문화 인류학이 보편적 개념들을 대체해야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혹은 무엇이든 '잘 먹혀 들어가는 것'이 '원칙'들의 처방을 대체해야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철학은 싸잡아 '타자'라 불리는 것에의 윤리에 의해 희생되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존재론은 레비나스와 데리다로부터 낸시와 라쿠아 라바르트에 이르는 신 하이데거적 유산과 절연한다. 절대적인 존재론적 다수성multiplicite에 대한 그의 단언은 어떠한 은밀한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신학에의 의존(들뢰즈)이나 존재 너머의 일자(라르드로 장베)도 거부한다. 그의 계몽주의에 있어서 전투적 무신론에의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묘한 포스트-라캉적인 실재론realism은 여타 모든 실용주의에 대한 원칙적 거부이다. 바디우는 단 한번도 한 때의 맑스주의자들이 이제는 굴복해 들어간 '급진적 보편주의의 황혼'을 받아들인 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보편성의 단일한 개념은 그를 칸트와 초월론적 전통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그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단순한 절차적 정의 개념에 대한 그의 경멸감보다 더 강하다. 진리의 철저한 보편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그를 다른 모든 언어론적 전회나 상대주의적 전회에 대결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 전통과 연결짓는다. 그러나 주체에 대한 그의 개념은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개념에서의 과학과 알튀세르주의자들의 과학으로부터의 단절을 표식한다. 마지막으로, 바디우는 70년대 후반에 등장한 프랑스 철학과 앵글로-아메리칸 문화-비평, 즉 문화적 성性적 윤리적 정치적 등등의 차이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 가장 강한 의미에서, 반대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근접한 과녁들은, 비록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흔히 신-철학자Nouveaux-Philosopher들로 불려왔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레비나스와 라울과 더불어 북미의 문화연구라 불리는 다양한 입장들과 공공연히 대립한다.




  아마도 바디우의 작업은, 승세를 잡은 앵글로 아메리칸 강단의 코드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 읽혀지지 않는 해도 과언이 아니다.--철학적 의미에서든 정치적 의미에서든-- 바디우는 거리낌 없이 이러한 중대한 주변화를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심지어는 과시하기까지 한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은 언제나 '의견'doxa으로부터 절연되어왔다. 철학자에게 있어 합의consensus된 것은 모두 의심스럽다." 바디우 철학 내에서 그를 동시대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근본적이고 즉각적인 충격적 움직임이란,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비타협적이고 완고한 그의 긍정과, 판결과 해석의 입법행위로부터 이러한 진리를 구해내는 그의 끊임없는 작업인 것이다. 그 '진리'가 무엇이든 간에, 아마도 바디우의 기본적인 가정이란, 진리는 의견(이해관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모든 확립된 규준으로부터 단절적으로 깨어져 나가는 공정process에 의해서만 도달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두 개의 주요한 함축을 지닌다. 우선, 만약 우리가 '상황의 진리'the truth of situation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이 진리는 가장 명확하게 확인가능하고 판명한distinct 요소element들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장 "난포착적으로 포함된"evasively included" 요소들의 그룹 또한 문제삼는 것이다. 상황의 진리는 상황에 있어서 무엇이든 가장 불분명indistinct하거나 "유적인generic" 것에 관여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그룹의 요소들을 헤아리는 공정은 그 자신이 일상적으로 요소들을 헤아리는 방식의 위반에 의해 성립한다. 진리의 혹은 유적 헤아림은 기존의 현 상태status quo에 균열을 가져올 그 무엇이다.




  바디우 철학의 전체 개념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전체 개념은 "어떠한 존재라도 언젠가 그것에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변환되고, 그 이후로는 그 자신을 보편을 향한 대의를 위해 투신할 수 있다는 가장 단순한고 강력한 이념"에 의해 고취되었다. 그것은 라캉의 소박한 진단이기도 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고수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디우는, '진리란 세속적 중요성과 역사의 속된 조류에 대항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는 중심 통찰을 지닌 개입주의적 사상가들의 기나긴 계보를 잇는 때 이른 후계자이다--그러한 사상가들로서는, 성 바울로, 파스칼, 클라우델, 데카르트, 칸토르, 힐베르트 뿐만 아니라, 레닌, 루카스, 그리고 브레튼을 포함한다(그들은 역사의 단순히 객관적 경향만으로는 과거의 관성에 진정한 균열을 절대 불러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각각의 사례에 있어 진실로 결정적인  순간은--신의 현존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확신, 정의불가능한 수학적 공리axiom에 대한 세심한 공식화, "정당화 불가능한" 정치적 혹은 미학적 혁명에 대한 투신들이다. 그러한 결단은 가히 문자 그대로 그 무엇에도 기반하지 않는다. 그 무엇--어떠한 지식도, 규칙에 대한 어떤 친숙함도, 어떠한 게임에 대한 감feel for the game으로도, 어떠한 관습이나 전통도--도, "기존의 방식대로"에서 (*심연적) 결단을 연역해 낼 수 없다. 혹은 기존의 방식으로부터 수행된 어떤 작업(합리화, 명료화, 추리, 과장, 다양화, 도출)에 의한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각자의 결단은 '기존의 방식'으로부터의 원칙적 절연에 의해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의 중요성에 대한 요구는, 존재에 대한 우리 개념의 급진적 변환, 세계와 세계에 대한 직관, 그리고 역사에 대한 철저한 재평가를 가져오리라 약속할 수 있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진정으로 창조적인 것이, 예외 없이, 단순히 반동적인 것으로, 진리에 대해 부끄럼 없이 열정적이고 편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명백한 차이들을 제한다면, 20세기 철학의 세 가지 위대한 조류--분석철학적 전통, 해석학적 전통, 그리고 데리다와 리오타르에 의해 발전된 후기구조주의--들이 공유하는 바는, 언어를 철학의 근본적 매체로 간주하자는 공약 외에도, 진리라는 단어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의심이기도 하다. 현대철학은 지금까지 일종의 일반화된 소피스트적 논변을 포용해온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바디우의 작품은 작정하고서, 명석판명한clear and distinct 것과 의견/의미의 불확실성 사이의 분별을 철학 본연과 연결짓는 고대의 전통으로 걸음을 옮기는 현대적 노력을 재현한다. 여기서 '현대적'이라 말함은, 바디우의 진리의 철학이란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공정으로의 단순한 회귀 그 외에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바디우가 제시하는 철학은, '우리'의 시간을 특징짓는 특정한 진리에 의해,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 조건 지어진다.


 





  <진리>, <주체>, 그리고 <사건>



  그렇다면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여기서 파악되어야할 본질적인 것은, 바디우가 받아들이듯이, 진리란 (그때 그때마다) 무언가가 '일어나는'happen 것이다. 마르크스와 같이, 바디우는 인간의 사상이 객관적 진리를 성취하느냐의 문제는 단지 이론 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용적인 문제라는 것과, 진정한 사상은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기보다는 변혁한다는 것을 안다. 진리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그것을 불러내고 지탱하는 주체에 의해 선포되고, 구성되며, 그리고 지지된다. '진리'와 '주체'는 모두 우발적이고 예외적이다. 그것들이 출현할 때, 그들은 '지식'과 '객체'라는 대립적 범주와 질적으로 달리하며, 서로 동시에 출현한다.




  이러한 구별(진리와 지식의, 주체와 객체의 구별)은 바디우의 전체 저작을 관통한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이고 세분화된 지식, 실증적 동일성과 차이들, 명확히 확립된 이해관계의 지속적인 영역--질서의 영역 혹은 질서를 배태한 장소--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매 순간마디 출현하는, 어떠한 질서와 연속성도 없는, 충분히 단독적singular인, 엄격히 주체적인 진리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진리들은 객관적 영역에 속하는 개별 행동으로부터 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미 알려진 이런 요소들의 특수성으로부터의 일종의 감산subtraction을 경유한다. 바디우의 철학은 어떠한 객관성 없이도 진리에 있어서 엄격한 일관성을 단언한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그는 단언하길, "진리란(혹은 그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듯이--정의란) 어떠한 객관적 집합objective set으로도 소급될 수 없다, 심지어 그 진리의 대의나 그것이 도달하는 바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디우의 작품은, 우리가 아마 앞으로 말하겠지만, 익숙한 관용구, "시도와 진리tried and true"로 연결된 각각의 두 단어들을 분리한다. 진리는 주체를 시도되지 않은 영역으로 밀어넣는다. 혹은 다시 말하건대: 모든 주체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서도 무언가를 믿는다."




  진리는 특정한 상황 하에서 유물론적으로 산출된다. 그리고 각각의 상황을 구조짓고 지배하는 대세적인 논리로부터 벗어나는 발견 혹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디우는 라캉에게 동의한다: "실재에의 모든 접근은 조우/마주침encounter의 질서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단독적singular 진리는 사건에서 연유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반드시 일어나야happen한다. 심지어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어떤 '마주침'이 있어야한다, 무언가 계산되지 못하거나 예측되지 못하거나 관리될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한다, 오로지 우발성에 기초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마주침 혹은 사건은 어떤 객관적이거나 실증적인 내용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황 속에서 새로 발생한 것이지 상황 그 자체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런 다음, 오로지 불확실한 사건에 충실성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진리는 지속된다. 그러한 사건의 발생과 귀결에 대해 그들--그들, 다른 말로, 그 사건의 이름으로 '주체'가 되는 자들이다. 비록 어떠한 '개인individual'도 '주체subject'가 될 수 있지만, 단순한 개인의 실존은 일반적으로 일종의 객관적 일상의 보존에 얽매여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일상도, 득세한 재현의 지배적 영역에 맞지 않는, 무언가와의 마주침에 의해 깨어질 수 있다--은 긍정한다. 순수한 놀라움의 찰나, 어떤 종류의 위기, 개인만으로 대처할 수 없는 것(그/그녀가 쉽사리 재현할 수 없는 무엇) 그러한 사건에 직면해서, 한 개인은 그것을 억압하거나 부인하곤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러한 일상에 가해진 긴장을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기회로 잡을 수 있다. 만약에 행위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여진 이러한 창조가 적절한 보편적 원리와 함께 이후에도 일관될 수 있다면 (이에 직면한) 개인들은 바디우적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오로지 그것(창조)을 '모두가' 원칙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오로지 그러한 원칙만이 이어질 새로운 연속 상의 진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확신의 문제이고, 모든 '주체'는 "어떤 확신이야말로 지금, 여기, 그리고 영원히 유효한가"를 보여준다. 진리verite라는 프랑스 단어, 바디우가 쓰듯이, "무언가에 진실하다"(truthful to something) 혹은 "무언가에 충실하다"(faithful to something)에 가까운 우리식(영어식) 표현을  함축한다. 바디우가 주체화라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의Cause--다른 어떤 여지 없이 자기 자신을 동일화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대의 말이다--와의 동일시 경험 혹은 더 나은 표현으로 대의로의 투신이나 전환이라는 능동적 경험을 묘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당신이 참여, 설립한 사건을 선포하고 결과를 도출하든지, 혹은 바깥에 머물러 있든지, 중개나 매개 없는 이러한 구별은 완전히 주체적이다." 주체의 정체성은 다음의 공약에 완전히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의존한다. "나는 (우리는) 투쟁한다(새로운 사회를 위해, 새로운 예술을 위해, 새로운 과학을 위해, 새로운 과학적 질서를 위해, 등등) 고론 나는 존재한다." 그것은 오직 그러한 순수 참여라는 드문 순간에만 존재하며, 바디우가 제안하듯이,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바대로 될 것이다." 그것은 즉, 우리는 우리의 정상적 한계 너머로 옮겨질 것이고 예측 가능한 응답의 범위 너머으로 떠밀려지리라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예측할 수 없는 영역, 이러한 순수 행위의 영역에서만이 누군가는 충실히,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의, 에누리 없이 전투적인 탈식민화 과정에 대한 설명은, 바디우가 염두에 두고 있던 일종의 '참여'에 대한 좋은 묘사를 제공해준다: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에 의해 부여된 제약 아래에서, 탈식민화는, 자신의 비본래성으로 찌그러져 있던 구경꾼에 지나지 않은 자들을, 그들 위의 역사적 광명의 휘황찬란한 광휘와 더불어, 특권적 배우/동작주체actor로 변환한다." 어떤 진리 공정truth process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식민지 해방 운동은 새로운 사람들의 진정한 창조인 것이다.







  진리, 주체, 그리고 사건들은 모두 단일한 공정process의 상이한 측면들이다. 진리는 그것을 공언proclaim하는 주체에 의해 존재 속으로 들어오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그 자신을 그 사건에 대해 충실한 주체로 세운다. 지젝이 말하듯이, "진리로의 여정은, 진리 그 자체와 겹쳐진다." 이러한 공유된 충실성은 주체적 공동체나 충실성만을 포함-기준으로 삼는 공동현존의 기초가 된다. 그러한 진리가 언제나 단독적singular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제도도 진리의 공정에 아무런 실체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어떠한 "손에 잡히는 일반성도 그 진리 과정에 보태주는 바 없다는 것이거나 진리를 지탱할 주체를 구조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단독적 진리이든, 달리 말하자면, 필수적으로 유적이거나 혹은 식별불가능하거나 초연한 급진적 평등주의의 동질성으로 채워져야 한다.




  바디우 고유의 사례는, 특징적으로 다양하게 등재된 바, 실증적이거나 이미 확립된established 중요성이 아니라, 전우주적 중요성을 지닌 사건(부활재림)에의 공언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성 바울로의 사도적 주체성에 대한 전투적 개념; 주체적 힘과 유적generic 범위에 있어 혁명을 불러온 개별 행동들을 초과하는 혁명적 사건에 대한 자코뱅과 볼셰비키의 충실성; 마주침의 순간적 사건에 대한 공유된 충실함에만 뿌리내린, 사랑하는 주체라는 연인-커플 자신의 개념; 전통과의 결별이나 새로운 발견에 의해 개방된 일련 창조적 질문에 대한 과학적 혹은 예술적 충실함이다. 나아가서의 정치적 사례는 아마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와 88년 버마 학생 운동, 그리고 최근에 들어 등장한, 멕시코의 치아파스 저항과 브라질의 Movimento dos Trabal hadores Rurais Sem Terr를 포함하는 것들이 있다: 각각의 연속들은, 가장 주체적으로 단언적인 의미에서, 정확히 각각의 상황에 있어, 가장 비가시적이고 비재현적이었던 인민들을 기동maneuver하는 데 성공했다.


 




 


  철학의 조건들




  앞으로 이유가 밝혀지겠지만, 바디우는 진리의 네 가지 양태를 기술하는데, 그것들은 진리의 네 가지 영역과 조응한다--정치, 사랑, 과학, 그리고 예술. 각각의 영역에서 주체는 그 자체로 (발생과 기원에 있어) 단독적인 동시에 (도달 범위에 있어) 보편적인 주체가 된다. 철학은 그 자체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어떠한 능동적 진리도 산출하지 못한다. 대신, 철학은 "시대의 진리"로서 이러한 네 가지 영역에서의 현대적 산출물들을, 그것이 존재한다면, 식별하고 분류하고자 한다. 그러한 진리는 이 시대에 있어 진정 불변적인 것을 구성한다.




  진리의 내 가지 양태들은 고로 문자 그대로의 철학적 "조건"을 제공한다--그것에 의해 철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은 항상 그것에 외부적인 사유 사건들의 조건 하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 혹은 "유적 공정generic process" 바깥에서는, 바디우가 현대적 천박함abjection contemporarie이라 진단한 것만이 득세한다: 현대적 천박함이란, 확립된 차이와 구분에 대한 감시, 물려받은 특권과 편견의 지배, 오직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조절되고, 인권이나 인류애적 의무라는 냉소적 용어로 공식화된 부정적 "윤리"의 족쇄에 의해서만 정당화된, 만연한 획일주의적 요구와 같은 것들은, 그것의 일상적 기능에 있어 "철학에 적대적인" 세계--그 세계란, 세분화된 이해관계, 상대주의적 판단, 측정된 계산의 세계이다--로 확인된 것의 본성이다. 이것은 왜 바디우에게 있어서, 파스칼이나 클라우델에게 있어서만큼이나, 모든 주체와 진리에 대한 공언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절연하는지, 일상적 업무business as usual에 끝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바디우의 주체라는 범주의 부활은 철저하게, 다른 최근의 주체로의 회귀와 구분되어야 한다. 그의 주체는 확고하기 반규범적이고 반도덕적이다. "텅빈, 찢겨진, 비실체적인, 비-반영적인non-reflexive" 바디우의 주체는 알튀세르와 푸코가 선언한 "인간의 죽음"에 완벽히 부합한다. 진정한 주체화는 합법적이거나 공동체주의적 규범이나 사회적 합의와 무관하다, 그리고 "모든 진리에의 단언이 언제나 주체의 탈도덕화로 지각될 수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비사회적이고 비문화적인, 바디우의 주체는 그만큼 확고히 반심리학적이다. 그것은 절대로 의식적 경험을 일구는cultivate 것과 일치할 수 없다, 그리고 주체의 확립은 언제나, 명확한 의미에서, 무의식적이거나 최소한 의식적이지는 않다. 엄격히 말해서, "주체의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 진리의 주체는 그것이 (신-헤겔적인) 부정negation이나 총체화가 되지 않는 것 만큼이나 (신-데카르트주의적) 반성의 기능일 수 없다. 결국 주체는 '차이와 타자'라는 범주를 통해 매개된, 포스트 사르트르적인 주체--그러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라는 관념은 메를로-퐁티, 이리가레이, 리쾨르에 의해 다양하게 탐색되었다--의 부활에 핵심적인 자기-지연self-deferral이나 자기-거리두기self-distance 따위의 복잡한 일거리와 무관하다. 주체를 바디우의 포스트-라캉적인 의미에서 '분열'split시키는 진리는 동시적으로 이 주체를 단순한 텍스트적인 혹은 상징적인 지연으로부터 구출한다. 바디우의 주체는 데리다와 바바에 의해 해체된 그것만큼이나 자기-충족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는 바디우적 주체가 (*데리다적) 차연differance의 논리에서 탈출한만큼이나, 또한 모든 비밀스러운 내면성으로부터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디우적 주체는 완전히 자기-단언self-affirm의 현재적 외관성exteriority 속에서 존재한다. 주체 고유의 창조적 확신의 힘에 의해서만 지탱됨으로써, 바디우의 주체는 본질적으로 타자 없이, 대면성vis-a-vis(face-to-face)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폭넓게 공유된 일종의 공약 덕택에 아무리 다양하게 표현됐든 간에, 대면성 없는 그러한 주체성 덕택에 개별성 없는 단독성 덕택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디우가 한편으로 오늘날 "하이데거주의자 그리고 들뢰즈와 리오타르를, 어떤 의미에서, 재분류--이것은 어느 정도 지난 삼십 년 간의 철학이 예측하지 못했던 공식적 재분류이다--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바디우 자신의 유적 단독성의 철학은 아마도 가장 격렬히 논쟁되고, 가장 엄밀하며, 그리고 명백히 새로이 출현하는 그러한 철학적 배치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기여이리라. 그것은 가능한 한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비범함extraordinary의 철학--사건의 철학--을 불특정한 혹은 비특정성의 철학과 연결짓는다; 그것은 동일성에 대한 플라톤적 기호 아래서의 비범성의 철학인 것이다. 그러한 연결점은, 바디우로 하여금, 실증주의로부터 이성을, 해체주의로부터 주체를, 하이데거로부터 존재를, 신학으로부터 무한을, 들뢰즈로부터 사건을, 스탈린으로부터 혁명을, 푸코로부터 국가 비판을, 그리고 미국 대중문화로부터 사랑을 해방시켜준다. 그는 현상학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의 철학을, 획일화에 의존함 없이 진리의 철학을, 역사주의 없이 사건의 철학을 단언한다. 그것은 놀랄만한 모험이다. 바디우의 성숙한 작업은, 최근에 발흥한, 신자유주의나, 신칸트주의에 한치도 양보함 없이, 여전히 인문학을 지배하는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용하지 않은 가장 강력한 대안을 제공한다.









  유적인 것the generic




  바디우 철학의 중심 개념은 유적인 것the generic의 개념이다. 유적 진리는, 그것이 존립하는 상황에서 비식별적이고 비인지적인 것으로 남을 것을 조건 삼아, 나아간다. 차이와 구별들의 관리감독으로부터 감산된 채, 유적 진리의 구성은 현대의 밀알인 "동일성에 대한 타자의 우위, 분류의 원리로서 기각되는 차이(유적인 것은 차이가 거의 아무 것도 아닌almost nothing 차원으로 축소된 것이며, 동일한 상황이나 동일한 현시present된 것들 자체의 '존재being'와 같다.)에 대항하여 그것의 진리를 단언하다. 진리는 부유하는wandering 동일성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건들은, 정확히, 정치적이든 수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사랑에서이든 간에, 가장 창조적으로 현실에 대한 온전히 유적인 개념을 탐색한 사상들의 실례들이다. 그러한 창조들은 현대 철학의 진실한 조건들을 결정한다: 다수성multiplicite을 향해 전환한 플라톤적 제스처의 개념적 핵심에서, 유적인 것은 현대 철학적 조건들의 공가능성compossibility에 대한 철학적 각인의 기초가 된다. 오늘날의 창조적 정치에서, 우리는 적어도 1793년 이래로, 그것들은 오로지 평등주의적이고, 반-국가적이고, 인간적 보편성의 형태를 띠며, 현상 유지의 해체이고,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재현/대의representation 질서의 파괴이고, 단독성의 코뮤니즘에 대한 단언일 수 밖에 없음을 안다. 시학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미분화된 언어가, 만인에게 주어지는, 비-도구적이고, 그 자체로 보편성을 정립하는 언어의 사용이라는 것을 안다. 수학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모든 현시present 가능한 구분들로부터 벗겨진 순수 다수성을, 다수적-존재multiple-being의 보편성을 이해한다는 점을 안다. 사랑에 있어서, 마침내, 우리는 마주침 너머로, 사랑이 그 자체로 자신을 설립하는 순수 이자the pure Two에 대한 충실함을, 그리고 그것이 여자와 남자 사이의 차이에 대한 유적 진리를 만들어냄을 공언한다는 것을 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디우는 이어지는 사건의 귀결을 발전시킨다: 수학에서, 칸토르에서 코헨에 이르는 집합론의 공식화; 정치에서, 중국의 혁명과 프랑스의 68 혁명에서 시작된 일련의 전투적 반란들; 시학에서, 말라르메, 페소아, 클레안느의 작품들; 사랑과 욕망에서, 라캉의 대표적인 작업들. 바디우의 작업은 이러한 사건들의 "공존가능성"Compossibility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읽혀져야 한다.






  <실재를 향한 열정>과 <순수 공식/형식>




  정확히 20세기 진리들의 특징에 대한 탐구에 헌신한 최근의 책에서, 바디우는 앞서의 것들과 더불어 다른 동등한 유적 선언generic declaration이 공유하는 바란, 그들의 "실재에의 열정"과, 그런 열정에 걸맞는 유일한 매개체로서 순수한 "공식화formalization"의 자원들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다. 바디우가 이해하듯, 라캉으로부터 차용한 '실재real'라는 용어는 그러한 유적인 것과의 능동적 조우에 다름 아니다. 완전한 "순간적 열정"에 사로잡힌 채, 지금 여기의 맹렬한 긴급함 속에서 경험되며, 완전무결한 이상적 전망에의 약속에 대한 무관심한, 도덕적 정당화에 대한 판단으로는 접근불가능한, 모든 개별성의 형식으로부터 감산된 채인, 실재와의 열정적 조우의 귀결은...... 오로지 문자 그대로 어떤 타협이나 재해석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공식적/형식적formal 수단들을 통해서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우리는, 바디우의 위대한 성취란, 우리 시대에서의 실재(즉각적 행위나 선언)와 이상(형식적 정합성이라는), 전자의 결과로서 시간에 걸쳐 후자가 구성되는, 사이의 관계를 재개념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적 형식화/공식화는 그들에 대한 가능한 모든 재현의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자신의 용어를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다른 어떤 수단으로 획득될 수 없이, 순수한 형식화/공식화에 의해서만 접근가능하다. 유적인 것은, 오로지 어떤 구체적 의미 작용에도 무관심한 한에서, 어떠한 호명하는 기호작용sifnification tout court에도 무관심한 한에서만, 제대로 묘사될 수 있다. 유럽의 가장 격렬하고 야심찬 세기를 아우르는 위대한 제안들은--힐베르트에서부터 부르바키에 이르는 수학적 과정의 형식화/공식화; 레닌에서 마오까지의 배타적 형식의 정치로서 정당 규율에 대한 세공; 프로이트에서 라캉에 이르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반현상학적이고 철저히 형식적인 분석의 발견; 말라르메, 쇤베르크, 피카소에서부터, 베케트, 베르벤, 폴록에 이르는, 컨텐츠와 의미를 결여한 예술적 형식의 창조--그들의 궁극적 목표로서, 투명하고, 자기 규제적인 사상의 형식을 고안해 왔다. 그러한 사상의 발생은, 그들이 해석하거나 재현할 여하한 대상의 부재 속에서, 실재의 유적 벌거벗음nudity과의 조우이다. 반면에, 현실reality을 재현하려는 모든 주장들과 모든 의미론적 깊이에 대한 참조, 사회적 복잡성의 물질적 실체에의 참조는, 단지 의미와 의견 그리고 잡다한 인상들에 대한 해석과 타협과 공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디우는 이전의 알튀세르와 라캉과 마찬가지로, 앞서의 '현실reality'를 간단명료하게 '이데올로기'와 등치시킨다. 그리고 현실은 실재를 은폐하는 과정에 개입하게 때문에, 모든 유적 사상의 실천에 있어 첫째 과제는, 실재의 공식화/형식화(*혹은 자기규제적 선언)라는 길을 닦기 위해, 현실과 관련된 그 어떠한 것이든 전부 소거해 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알듯이, 이런 것은 20세기 말(정확히 실재와의 조우에 대한 혐오의 지점에서 조직된 급격한 반동의 시기, 암울한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에 대한 요청을 보편적 모토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시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유적 사상은 반드시, 앞서의 지각이 결여된 퇴행, 혁명적 세기의 근본적 동요와 효과적으로 교전하는 의미에서, 거듭나야만 한다. 그것(유적 사상)은 반드시 "유사성의 다의성equivocity에 대한 실재의 일의적 관점의 우위"를 선언해야만 하고, 그러므로 공식화/형식화에서 해석으로 이동하는 것에 대항하는 고대 이래의 수많은 투쟁으로 한 걸음 더 옮겨야 하며,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훼손될 수 없는 명료함에서 외관의 혼란과 불확실성으로의 이행을, 사건의 속살로부터 전통의 관성으로, 저항의 충실함에서 교조적 체념으로의 이행에 반대해야 한다--이런 각각의 대립에 있어 "불멸적인 치열함"이 "생존의 다급함"과 대립된다.




  <관계성>으로부터의 <자유>




  그러므로, 앞서 정의되었듯이, 유적인 것은 어떤 순수함과의 동의어이다. 유적인 것은, '주체적인 것'과, '개별화 가능한 것의 순수화'를 통해 획득된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성은, 모든 것을 상대적이거나 지엽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진실한 사유로부터의 도피이다. 유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것 그 자체로부터 순수하다. 혁명적 세기에 대한 바디우의 가장 심원한 확신들 중 하나와 더불어, 그는 어디에서든, "상대성의 종말을, 비상대적인/비관계적인unrelative 자기self로의 비움"을 단언한다.




  Lien(연루됨)은 바디우가 상대성 대신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것은 공동체나 유대관계의 유연한 역동성만큼이나, 유대bond나 관계link의 물리적 제한을 함축한다. 바디우가 보기에, 둘은 단일한 기만행위에서 비롯한 증상이다. 무엇이든 간에 진리는 본질적으로 비상대적이고 독립적이고 자기 구성적이고 자기 규제적이다, 반면에 "연루Lien나, 교류rapport에 대한 관념은 오도적이다. 진리는 절연unrelated되어 있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 공정이 작동함으로써 관계성이 끊기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한다. 진리는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국지적 산출물 외에 다름 아니다, 진리는 급진적 독립성이나 자기 결정성이라는 산출물의 자리잡음이다. 주체에 관해 말하자면, 진리로의 접근은 그러므로 순수하고 단순한 자유의 실천과 동일하다. 일상적 개인들은 차이와, 의무와, 위계질서의 관계망에 의해 제한되고 정당화된다;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문자 그대로 얽매여 있다. 반면에, 진정한 주체들은 우선적으로 그러한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그들 고유의 본질 외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순수한 주체적 자유는 말 그대로 관계망의 부재 위에 설립된다, 그것은 즉 주체적 자유란 그 어떤 것 위에서도 설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수한 자유는, 환언하자면, 언제나 헤겔이 말한 '절대적 자유absolute freedom'를 감수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마 유용하게도 바디우가 그의 철학적 유산으로부터 차용한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을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급진적인 주체적 자유에 대한 사르트르의 개념으로부터, '무로 존재하기being nothing'--다시 말해, 그것은 주체의 실존을 매 순간마다 결정하는 자유로서, 도정에 있는 무에서의 유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그리고 '아무것도 아님'을 가진(having 'nothing') 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맑스의 개념, "사슬 말고는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 사르트르로부터 바디우는, 효과적으로 그 자신을 공空void을로부터 창출하는 주체의 자유를, 어떠한 객관적 보증이나 사회적 정당화도 부재하는 그런 자유에 대한 관념을 얻는다. 바디우는 맑스로부터, 모든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전원적 관계망에 종말을 가져오는 과정(=자본주의)에 부합하는 주체적 개입의 힘을 수용한다, 그러한 개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공식화"한다: "자본의 순전히 부정적 힘(*기존의 관계망들을 절단하는)을 능가하는, 관계망 없는 질서, 비-관계적인 집단적 힘." 맑스가 지적했듯이, 이 힘은 절대적인 프롤레타리아적 곤궁impoverishment를 동등하게 인간의 절대적 "창조성"으로 만회하는 혁명적 전환 외에 다름 아니다. 간단히 말해, 바디우는 사르트르적 자유를 존재론적 정당화로부터 구해내고, (*부르주아 사회로부터의) 맑스의 deliaison탈연루를 그것의 특정 역사적 맥락(*생산 양식의 발전 단계)으로부터 떼어낸다. 바디우의 자유는 어떤 존재론적인 속성도 아니고 역사적 귀결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우리가) 우발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그 무엇이다. 자유에 대한 그의 개념은 우리에게 부과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써 지탱해야만 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궁극적 대안의 존재론적 기초는, 우리가 앞으로 보겠듯이, 위상학적인 혹은 상황에 고유한 空(neant)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갈 것이다.




  바디우적 자유의 위험




  그 자신의 공리적axiomatic인 정합성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기초한 사상은, 그 자신을 모든 상대주의적 혼란으로부터 정화함으로써 순수성을 얻는다. 실재the real의 차원에서 유적인 것을 공식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자신의 고유한 가정들의 결과를 특권적으로 도출한다. 진리는 자신을 추구하는 자들을, 모든 물려받은 끈과 매듭들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처음에 지지자들이 관계한 그것과 비관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라르메에 의해 영감을 얻은, 바디우의 '순수성'에 대한 단언은 그의 전체 작업에 대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순수성은 더 이상 어떤 무엇과의 관계로 얻어질 수 없는 이데아의 구성물이다, 그것은 모든 관계에 대한 그 자신의 무관심, 그 자신의 고립된 반짝임, 자신의 차가움, 분리disjunction, 순결함에 도달하는 관념이다. 그것은 순수성의 관념이 들고 나와 지정하는 것으로, 그것은 비-관계하는 존재의 고독이자 모든 연결하고 관계짓는 법과 조약에 있어서는 비효율적인 특성이다. [여타 진리 공정들과 더불어] 시詩는, "존재의 관건이란 그 무엇과도 관계하지 않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현대적인 고행이다. 그것은 사상을 순수하고 단순한 탈연루deliason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관계로부터) 분기해 나간다." 이러한 탈연루는 바디우 철학의 야심, 그것의 주저 없는 결단과, 동시 그 자신의 고유한 난처함--이 난처함은 어떤 가능한 진리와 지식 사이의 관계, 주체와 객체 사이의 변증법적 연결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근저에 놓여있다. 관계망을 변환시키려 하는 대신, 억압적 관계를 해방적 관계로 바꾸려 하는 대신, 바디우는 상대적인 관계를 강제하는 호명의 장으로부터의 감산을 모색한다. 이러한 감산의 요소 내에서 작업하는 한, 바디우의 철학은 항시 순수하고 단순한 처방의 공허한 영역에만 그칠 위험을 감수한다.








***










  마지막 빨간 줄은 저자가 바디우에게 제기하는 의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이 우리에게 환기시킨, '규제적 이념'과 '구성적 이념' 사이의 묘한 관계를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바디우의 철학은 단지 규제적인 이념에만 그치고, 실제 현실에서 무언가를 구성해 나가는 데 미흡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정치에 있어서 정당 강령에 대한 충실함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은 아무래도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해가며 정책을 고안하고 집행하는 것에 적합하지는 않을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실제 커플들이 전 사회와 투쟁해가며 사랑을 지키려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전범을 따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지점에서 과연 우리는 바디우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감수해야할 대가가 드러나겠습니다. 이 골치 아픈 원칙주의자, 교조주의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더 중요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것처럼, 착취 없는 평등한 교환관계라는 이념에 기초해서 실제 소비자 운동과 지역 화폐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영민함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디우는 이런 현실 구성적 실천에 등한시한다는 비판이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바디우가 '철학'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제스처만큼은 에누리 없이 받아들일 여지는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실제 현실에서 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이데올로기나 사고방식에서 '균열'이 출현해만 하고, 철학의 본 임무란 바로 그 균열을 일으킨 사건에 충실하는 기본 태도이겠습니다. 그것이 전제되어야만, 다른 어떤 세상을 상상하는, 칸트적 의미에서 구상력을 지닌, 그런 것을 획득할 수 있겠습니다. 칸트 역시도, 어떤 이념이 있어야만, 상상력[현실 구성의 힘을 지닌]이 작동할 수 있는 지점을 지적합니다. 오늘날 진보 운동도,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상상력'의 구호를 외치지만, 칸트가 말한 '이성이념'에 기초하지 않는 한, 그런 상상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바디우가 혐오하는 것도 바로 그런 현대적 조류이겠습니다. 철학 없는 진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단호한 거부에 있어 바디우를 중요한 참조점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철학은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든, 수용하든,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프레임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는데, 가령 들뢰즈의 유목주의라든가 하는 개념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변적 이론과 절연된 날 것 그대로의 현실에 충실할 것을 종용하는 [진보운동이 쉽게 굴복해 들어가는] 대표적인 생활인의 논리, 서민적 감수성은 그 자체로 궁극의 기만적 이데올로기입니다[애초에 현실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변화의 유일한 원천은,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는 것을 적절하게 사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는 오직, 철학 뿐이라는 바디우의 선언은 고유의 울림을 갖고 다가옵니다. 철학의 본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내밀한 감각에 완전히 이질적인 사건을 제대로 사유하고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제시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바디우>가 (지젝과 더불어) 여전히 집단적 주체성의 힘으로 역사의 조류를 바꿀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한 물 간 '구좌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들에게 바디우가 요구하는 것은 자그마하면서도 중대한 것입니다. '철학'을 받아들일 것 : 그들이 전에는 '상부구조'라고 믿었던 것에서 유일무이한 창조, 변혁이 일어날 것임을, 전에 가령 맑스에게 바쳤던만큼의 믿음을 가지고서,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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