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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엔 외계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패닉의 2집 앨범 <밑>에서 이적은 UFO를 너절한 현실 속에서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약자들을 구원하는 초월적 세계의지의 표상으로 상징화했다. 고유한 지성과 의지, 감정을 지닌 개체로써의 ‘외계인’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기계신(機械神) 적인 ‘UFO’를 구원의 상징으로 간주한 이적의 감성에 대해서는 패배주의적이고 몽상적인 감을 떨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노래는 세기말적인 불안한 정조와 맞물려서 너무도 아름답게 들렸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지금 돌아봤을 때, ‘모두를 데려갈 빛’은 내려오지 않았다. 세계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우리들 안에서, 우리들 주변에서, 우리들 위에서 그 비대한 몸을 웅크린 채 눈알을 굴린다. 이 책에 실린 15편의 단편을 써낸 사람들은, 희망도 분노도 갖지 않았다. 하늘로부터의 기적을 바라지도 신세기의 혁명을 꿈꾸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조금은 따스하게, 조금은 냉랭하게. 약간은 재치 있게, 약간은 생뚱맞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담담하게 우주를, UFO를, 외계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시, 이곳에서. 이번엔 외계인이냐고 자문하면서.



2. 그래서, 깐따삐야

{134340}. 이 책의 서두를 시작하는 작품이다. 극히 당연하다는 투로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는 사실이긴 하지만 명왕성에도 사람이 살았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이 글은, 하나의 별 속에 갇혀서 자기들끼리만 복닥거리다가 그럭저럭 그 별을 벗어나자 민폐를 서슴지 않는 지구인의 편협한 우주관을 가볍게 비웃는 한편 지구 내부에서 지금도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은근히, 그러나 가볍지 않게 비판한다.

{블랙 아몬드}. 합법적으로 상용화된 마약에 흥청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는 그들에게서 술주정뱅이라는 이유로 비난당하는 아웃사이더 주인공. 서로 유사한 데가 있으면서도 결코 같지 않은 두 요소가 충돌하는 가운데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러나 결코 이질적이지 않은 독립 변수가 등장한다. 신진 작가답지 않은 밀도 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박시은 특급}. 곽재식 작가는 거울에서도 가장 스토리텔링에 능한 작가 중 하나다. 연예인 박시은이 몇 년 전 출연한 단막극의 실존 여부를 둘러싸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박시은을 닮은 ‘그녀’를 둘러싸고서는 잘나고 뺀질뺀질한 라이벌을 굴복시키기 위해 주인공은 최선을 다한다. 다스베이더의 목을 노리는 루크 스카이워커가 무색할 정도로. 그리고 그 노력이 좌절당하기 직전, 그에게 요다가 강림한다. 소시민적이지만 결코 구질구질하지 않은 마무리가 돋보이는 준작.

{옆집의 영희씨}. 따스하고 소박한 소품. 그러나 너무 ‘착한 글’이라는 게 못내 아쉽다. {우주류}에서 보여 주었던 조용한, 그러나 간절한 우주에의 의지를 다시 보고 싶다.

{Running}. 감각적 이미지를 직조해 내는 솜씨는 주목할 만 했지만,  우주 택배원으로써 광활한 우주를 달리는 주인공의 인물 묘사가 너무 부족한 데다 ‘우주를 러닝한다’는 개념이 독자들에게 잘 와 닿게 표현되지 못했다. 좀 더 파고들었으면 썩 훌륭한 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짧은 분량 내에서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싶다.

{우주화}. 일차적인 우주만을 인식하는 인간인 주인공과, 그 우주 너머의 심연-저승 같기도, 화이트홀 너머의 아득한 심우주 같기도 한-을 내다보는 꽃 형태의 외계인과의 교감과 그를 향한 도전. 그리고 웅대한 목표와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듯한 개인적인 이유. 여러 개의 무게추 간에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정밀한 균형 감각과, 화려하면서도 서사를 배제하는 법 없이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색채적 이미지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번엔 외계인이냐?}. 가연은, 인간이 맺어 나가는 ‘관계’와 그에 대한 심리 묘사가 대단히 탁월한 작가다. 이 작품에서도 그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뱀파이어, 인어, 그리고 외계인으로 애인을 갈아치워 가는 바람둥이 여행 가이드의 일대기인 이 작품 속에서 성별을 넘어서고, 종족을 넘어서고, 성간을 넘어서는 주인공의 행보는 작중에서 동생이 지적하는 대로 ‘흥미로운 대상, 평범하고 지루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흥미에 더 가까워 보이긴 한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흥미 없습니다. 이 중에서 외계인, 이세계인, 초능력자가 있으면 제게로 오세요, 이상.”이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모 라이트노벨의 여주인공처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는 식으로 단언할 수 있을까? 호기심과 애정, 아집이 복잡하게 뒤얽히는 가운데 결국 주인공이 내리는 선택은 그를 짧게 판단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울림을 담고 있다. 일종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수 있겠다.

{잘 가시오, 외계인이여}.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소리라는 소재를 집어내어 그를 외계인과 연결시킨, 재치 있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적절한 소품.

{가릉이가 가릉가릉}. 진실인지 농담인지, 일상인지 음모인지 알 수 없는 당황스러운 작품. 이 작가, 무한슬픔은 다른 대부분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써내는 모든 글들이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유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타 작가들과 무한슬픔을 뚜렷하게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 글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고양이별}. 글쓰기를 공부하는 학생 입장에서, 거울의 작가들을 통틀어 문학적인 기본기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작가들 몇 명을 꼽으라면 은림은 단연 수위에 들어갈 것이다. 뚜렷한 주제와 견고한 구성,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그 전체를 관통하는 잔잔하고 따스한 감성.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일원으로서 갖는 유년시절의 아픔이 정화되는 과정이 환상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지금껏 읽어본 은림의 단편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최고의 추천작. 단, 길을 걷다가 저만치서 무심히 이쪽을 바라보는 도둑냥이를 발견하고 움찔하는 증세가 생기더라도 내 책임은 아니다.

{꿈, 그 너머}. 작가 적어의 작품세계가 점차 Positive―――단순히 ‘긍정적’이라고 1대1 대응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는 묘한 뉘앙스가 있다―――한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 솔직히, 글 자체는 그렇게 뛰어나다고는 보기 힘들다. 평이하고 고식적인 전개에, 쉽게 씌어졌다는 인상을 떨치기 힘든 마무리.

{K씨의 개인사정으로 이번 호의 연재는 쉽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품. 아니, 가볍게 읽혀야 정상일 짧고 쉽고 유머러스한 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읽고 난 뒤에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떨어야만 했다. 이 글 읽고서 찔리지 않을 작가는 별로 없을 것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을 준다. 게으른 자의 소심한 위안, 으으윽.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작가 이중인은, [혈중환상농도 13%]에 실린 전작 {침입}에서도 드러났듯이 러프크래프트 광이다. 그는 여전히 부분적으로는 러브크래프트 뮈토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색채로 그를 녹여내고 덧칠하는 재주를 이 작품에서 보여준다. 일견 극히 비현실적이고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주인공. 그러나 소설을 안에서 제시되는 ‘현실성’이란, 어쩌면 다른 픽션들을 통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온 또 다른 형태의 양식화가 아닐까? ‘이런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일종의 장르적 법칙에 불과한 게 아닐까? 나 자신이, 현실 속에서 이러한 경우에 직면한다면 나의 행동은 소설 속의 주인공을 닮아 있을까 과연? 이 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러한 자문을 던지게끔 만든다.

{지구의 중력은 안녕하시니}. {꿈, 그 너머}에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이 작품에서 적어는 단번에 역전 홈런을 터뜨린다. 남루한 일상 속에서 남들과 약간 다른 사람들의, 조금은 소소한 상처와 절망. 그러나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기에, 이 현실 속에서도 잠시만 둘러보면 흔하게 발견할 수 있기에 오히려 그 상처들은 더욱 절실히 와 닿는다.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믿는 사람. 그러나 결국 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이 별에 속한 모든 것들을 속박하는 중력의 속박을 벗어나 ‘그’는 달 속으로 날아오른다. ‘그녀’는 지구의 중력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발목을 붙잡는 중력이 나를 놓치는 피안의 찰나, 그게 아니라면 끝없는 길을 달리는 영겁의 백일몽….”(본문 354p) 상당히 잘 된 작품.

{석기창비록}. ‘내맘대로 선정 거울 대표작가’ 중 일인인 작가 배명훈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배명훈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된 풍부한 지식과 꼼꼼한 시대상 묘사, 넘치는 넉살과 여유가 돋보인다. 다 읽으면 정말로 이 비슷한 일이 예전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곱씹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서를 뒤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배명훈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발상에서 오는 즐거움이 가득한 글.



3. 삐리삐리해서 삐리삐리야

UFO가 신의 천사처럼 나팔 소리와 함께 나타나 선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 같은 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이 세기 초에서, 그들은 다시 외계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글 속에서 우주는, UFO는, 외계인은 신비와 미지의 거룩한 후광을 벗었다. 대신 그들은 약간은 친근하고 약간은 한심하게, 훨씬 이해하기 쉬운 모습을 두르고서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위압적인 번뜩임과 견고함으로 무장한 UFO를 타고 지구인의 머리 위에 고고히 떠 있는 대신 지구인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지구인의 손에 피박살이 나기도 하고, 자신의 별로 데려 가기도 하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면서. 그들이 언젠가 ‘타자’가 아니게 되는 그 날을 위하여.

이 지구도 우주일 그 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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