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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환상소설의 기원

환상소설(광의의 판타지)의 기원을 살펴봐도,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을 훑어봐도 독일, 영국, 미국의 작품이 주종을 차지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프랑스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독일이 [니벨룽겐 이야기]와 낭만주의와 E.T.A. 호프만으로 대표할 수 있다면 영국은 [아서왕 이야기]와 [베오울프]로 대표되는 기사도 로망스, [오트란트 성]으로 대표되는 고딕 로망스를 거쳐 현대 판타지의 거두 톨킨 & 루이스가 있다. 그런데 프랑스는 쥘 베른 이전의 작품을 찾기가 힘들다(라블레 정도?).

물론 찾아보면 나올지 모른다. 모파상의 작품에도 환상/공포에 속하는 글이 많고, [어린 왕자]도 분류에 따라서는 판타지에 넣을 수 있는 등. 그러나 판타지의 근원을 찾는 근대 이전의 작품이라면 문학적, 비평적인 텍스트로 삼을 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다.

참고할 만한 작품으로 프랑스 환상소설 앤솔러지인 [악마의 초상]이 있으나 일본어 중역본으로 의심되는 데다가 그마저도 절판된 지 오래된 상태.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환상소설의 기원이라고 불리는 본작의 출간은 환영할 일이다.



2. 사랑에 빠진 비온데타와 알바로

호기심 많은 근위대 대위 알바로는 어느날 선배가 혼령을 조종한다는 걸 알게 되어 그 힘을 얻고 싶다고 부탁한다.
선배와 동료들을 따라 깊은 산 속의 동굴에 이른 알바로는 그들이 시킨대로 벨제뷔트를 부르는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하고 흉칙한 낙타 머리 모습의 악마. 두려움을 이기고 복종할 것을 명령하자 낙타 머리는 하얀 강아지로 모습을 바꾸고 다시 아름다운 여인 비온데타가 되어 그의 명령에 따른다.
알바로는 악마의 도움을 받은 빚을 갚고 관계를 끊으려 하지만 비온데타는 스스로 육체를 얻어 인간이 된 공기의 요정이라고 밝히며 그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에게 반하여,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3. 악마가 사랑에 빠진다면

이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중세 유럽에서의 악마의 위상, 아버지의 상징 등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 해설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독자의 권리 중 하나인 오독을 활용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보겠다.

만약 비온데타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이 작품의 수수께끼가 상당부분 명료해지리라고 본다. 작품의 제목부터 생각해도 이러한 가정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내용만 본다면 합당한 제목은 [악마의 유혹]이나 [사랑에 빠진 알바로]쪽이 더 걸맞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러한 전제를 하게 되면 앞에서 소개한 줄거리는 이렇게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악마를 눈앞에 두고도 두려움을 이겨낸 용기 있고 잘생긴 청년을 마음에 들어한 벨제뷔트는 호감과 호기심을 갖고 그에게 접근한다. 처음엔 아름다운 여성의 육체를 갖고 그를 유혹하여 잠깐의 불장난(?)을 즐겨볼 요량이었겠지만, 그의 구애를 거부하는 알바로의 강직한 모습에 안타까워 하다가 그만 정말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는데 비온데타가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마침내 알바로가 사랑에 빠져 모든 걸 말해달라고 했을 때 비온데타는 자신의 공기의 정령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가 원하지 않는 진실을 감추고 싶어하는 건 (악마에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가난한 집안의 백수라도 좋아하는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부잣집 자식이며 대기업 사원이라고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은 머지 않아서 발각되고 만다. 거짓과 허풍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건 환상 속에 빠진 상태인 연애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결혼이라고 하는 현실이 다가온다면 어떨까? 알바로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비온데타를 소개시키려 하고 당연히 비온데타는 이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정확히는 한 사람과 한 악마)이 완전히 결합하려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모든 것, 감추고 싶은 부분까지 모두 알고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 알바로의 고향으로 향하며 불안해하는 비온데타의 모습은 이러한 심리를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마침내 비온데타가 자신의 진짜 모습(흉칙한 정체!)을 보이고, 그에 대한 알바로의 반응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순순히(?) 물러갔다는 건 알바로가 자신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실망과 슬픔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외모와 순종적인 태도에 혹한 것일 뿐, 상대를 영혼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다! 매정한 알바로는 그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걸 안도하며 어머니에게로 달려가며 끝을 맺는다…….

이렇게 읽으면 이 이야기는 악마의 순애보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독특한 로맨스물이 된다. 중세의 마녀사냥과 (조금은 억지로라도) 결부시키면 일종의 여성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아름다운 여성에게 갖는 남자의 이중적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다만 이러한 해석을 위해서는 말미에 등장하여 지루한 해설과 교훈을 남기는 케브라쿠에르노스라는 인물을 지워야 한다.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주인공이 신나게 악당을 두들겨 패고 끝에 가서 뜬금없이 교훈을 중얼거리는(이빨을 닦자는 둥) 아동용 미국 히어로 애니메이션처럼 되어버렸다.

해설에 따르면 본작의 결말은 두 번의 수정을 거쳤다고 한다. 처음엔 알바로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순간 끝났고, 그 다음엔 악마의 희생물이 되어 타락했다는 것. 그러나 종교의 권위가 막강했던 당시 악마가 승리하는 이야기를 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대와의 타협으로 인해 사건의 진위가 모호하고 주인공은 무사히 빠져 나오는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악마의 순애보로 읽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거나 도착하여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부분에서 끝나는 게 더 좋겠다. 실제 작품의 완성도나 미학적 측면에서도 그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 현실과 환상을 명료하게 가를 수 없는 모호함이야말로 환상소설의 미덕이 아닐 수 없을 테니.

그런 점에서 중세적 엄숙주의와 종교적 교조주의를 가득 담은 결말, 케브라쿠에르노스라는 인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막판에 돌연 등장하여 명료한 결론을 내리고 교훈을 읊는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환상소설의 독자들에게는 이야기의 재미를 깎고 용두사미로 만드는 결말이라고 여겨지겠지만 시대의 한계와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분석 및 비평의 자료로는 귀중한 사례가 되리라 믿는다.



덧1.
열림원의 이삭줍기 시리즈는 주로 퍼블릭 도메인 중에서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 위주로 선보이고 있다. 시리즈 발간사만 보면 마치 황금가지의 환상문학전집을 연상시키는데, 환상과 직관과 신화가 재주목을 받는다며 이러한 작품들을 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본작을 비롯해 실비나 오캄포 등 좋은 작품을 다수 냈고 최근에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두 작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긍정적인 시도가 이어지길 바란다.

덧2.
역자의 이력은 화려하지만 번역은 좀 낡은 느낌이 든다. 80년대에 나온 글을 읽는 듯 하다고 할까. 그러나 작중에서 비온데타의 말투가 변하는 것은 현실감이 느껴지면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비온데타가 굳이 악마기 때문에 반말을 한 건 아닐 테니까.

덧3.
이 작품은 로지 잭슨의 [환상성]에 [부도덕한 악마]라는 제목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프랑스어를 잘 모르지만 번역서의 제목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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