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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존 로John Law

2007.12.29 22:4412.29




박가분 (wonikcraft2@hanmail.net)



  이번에는 특정 책을 대상으로 리뷰를 한 것이 아니라, 한 인물을 중심으로 리뷰를 쓴 것이므로 참고한 책 자체는 잡다한 편입니다. John Law입니다. 뭐랄까, 굉장한 인물입니다. 사기꾼과 천재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 그러한 매혹적이고 양가적이며, 소설의 소재거리로도 안성맞춤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유물론자로서, 저는 이 인물을 새로운 생산양식에 발맞추어 출현한 새로운 비극적 유형의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글에서 그러한 인물의 비극적 위상에 대한 언급은 아주 잠깐, 글 말미에 등장할 뿐, 대부분은 그의 아이디어의 전모를 분석(?)하는 데 할애했습니다. 경화된 논문투의 글자 사이로 어떠한 상상의 나래가 살랑살랑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릴지 무지 기대가 되면서도 그냥 두서 없는 글로 끝날까봐 두렵군요;;

   인용 및 출처

   

   <돈과 인간의 역사>, 클라우스 뮐러, 김대웅 역, 이마고, 2006
   <거시경제학>, 그레고리 멘큐, 이병락 역, 시그마프레스, 2007
   <자본론> 1권, 칼 마르크스, 김영민 역, 이론과 실천, 1990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권, 페르낭 브로델, 주경철 역, 까치, 1998
   http://en.wikipedia.org/wiki/Real_bills_doctrine



   1. 존 로의 생애와 그의 정책

   
   존 로, 이미지 발췌 Wikipedia

   ‘존 로’는 스코트랜드 금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가업에 동참했고 그의 아버지가 1688년에 별세할 때까지 은행업을 탐구할 기회가 있었다. 로는 그 이후로 가업을 잇는 것을 거부하고 더 많은 야심과 기회를 찾아 런던으로 떠났으나 그곳에서 도박으로 많은 돈을 탕진했다.  

   1694년 4월 9일, 존 로는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남자와 결투를 벌였다. 결투는 엘리자베스 빌러즈라는 여성에 대한 사랑을 둘러싼 것이었으며, 윌슨은 결국 사망하고 존 로는 그 죄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는 곧 벌금형으로 감형받았으나, 윌슨의 형제가 상고하여 존 로는 재차 투옥된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탈출하는 데 성공하고 영국을 떠난다.  

   로는 신용 창출수단을 발행하고 증가시키기 위한 중앙은행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것은 주로 땅, 금 그리고 은을 담보로 한 지폐를 발행하도록 하는 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른바 ‘로 체제Law’s system’로 불리는 그의 계획이 처음 발표된 것은, 1707년 그가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의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의회를 설득하는 등 전심전력을 쏟는 일이었다. 그는 책을 출간해가면서 논쟁의 불을 지폈지만 결국 그의 안건은 영국과 스코트랜드 의회에서 부결되어 그는 다시 추방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10년 동안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오가며 금융업과 투기를 일삼으며 소일하였으나, 마침내 프랑스 경제가 위기에 봉착함에 따라 그가 구상한 재정 정책적 체제를 실행에 옮길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4세 치하에 끊임없는 전쟁과 광적인 사치를 일삼아, 그가 1715년 사망하고서 루이 15세에게 왕위를 물려 준 시점에는 프랑스의 부채가 35억 리비르를 상회했다.

   로는 이른바 신용제도의 신봉자였다. ‘신용의 발전은 인도의 발견과 비견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신용이 복지와 고용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대담한 생각을 실현하고 주식을 팔아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기 시대보다 150년을 앞서 있었다. 그는 자기 구상의 연장선상으로, 국내에 남아있던 국지적인 조세 독점권을 폐지하고, 조세 징수권을 중앙은행으로 일원화시켰으며, 국가가 주관하는 상기업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거대한 무역 그리고 금융정책 상의 독점권을 보유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국채를 보전하는 열쇠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복안은 당대의 재무관과 상인들 그리고 재정자문 위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당대 경제적 재정적 상황을 극히 심각한 것이었다. 루이 14세가 벌린 전쟁으로 인해 국가재정과 국내경제는 동시에 파산 직전으로까지 치달았다. 결과적으로 금본위제에 기초한 당시 재정정책 상, 귀금속의 유통량은 수축하였고, 이는 유통수단으로서의 새로운 화폐주조에 장애를 불러들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존 로>를 재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1716년 5월, 섭정이 된 ‘존 로’는 Banque Générale Privée이라는 은행을 설립하여 지폐를 공식적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영은행이었으나, 당사 자본의 사분지삼은 국가에 의해 수용된 증권이나 정부 채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17년 8월, 그의 은행은 미시시피 회사를 또한 사들였다. 루지애나 지역의 프랑스령 식민지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동일 연도에 그는 토머스 피트의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오를레앙 공작에게 매각하는 거래를 중개했다. 같은 해에, 로는 미시시피 회사를 합동 증권 거래 회사로 변모시켜서, 웨스트 인디아 주와 북아메리카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 은행은 1718년에 왕립은행Banque Royale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로써 은행이 발행하는 증서는 왕에 의해 보증되는 셈이었다.  

   왕립은행은 합병된 기업을 통해서, 그 밖의 식민지 자원과 해상 무역을 관장하는 회사들을 인수함으로써, 프랑스의 미시시피 인근 식민지의 수탈과 아메리카 해상 무역권을 완전히 독점하는 데 이르렀다. 이러한 무역과 상업을 아우르는 독점권을 기반으로 회사(The Company of the Indies)는 주식을 발행하였다. 처음에 회사에 독점적으로 부여된 상업상의 무역상의 엄청난 특권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장할 것처럼 보였고, 해당 회사의 주식에 대한 수요는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었다. 존 로가 창안해낸 시스템은 국가의 힘에 등 입어 특정 기업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지속적인 신용을 창출해내는 것이고, 이것이 해당 기업의 주식지분에 대한 거대한 수요 및 투기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여기서 해당 회사의 주식은 일종의 법정지폐로 통용되는 것이었고, 이러한 지불수단으로서의 주식증서는 또한 한편으로 화폐유통수단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The Company of the Indies의 주식에 대한 투기열풍은 비례적으로 증권을 발행을 증가시켰고, 이것이 유통수단으로 기능하는 한, 이는 화폐발행의 팽창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투기는 엄청난 화폐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는 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서민과 임금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으나 이러한 그림자는 사회에 만연한 투기 심리에 의해 가려졌다. 1720년, 은행과 회사는 합병되었고, 1월 5일에 ‘존 로’는 재정장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인수합병 이후, 은행은 자신의 은행권을 증식대금을 보전하기 위해 발행함으로써 과열투기 현상을 더욱 조장하였다. 그가 말년까지 펼친 정책의 마력은 그의 은행이 수백만 리브르의 은행권을 발행하여 주식대금을 지불함으로써 다시 수백만 리브르의 새로운 주식에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투기 열풍 속에서 이상 징조는 무시되었으며, 곧 불어 닥칠 경제공황 직전까지 ‘존 로’의 재정장관으로서의 명성과 영향력은 당대의 주가가격만큼이나 치솟았다.

   로는 탁월한 마케팅 기법을 통해 식민지령 루지애나 주의 부를 과장하였고, 그것은 1719년부터 회사의 주식에 대한 광적인 투기를 조장하였다. 1720년 하반기까지 회사 주식의 가치는 무려 일만 팔천 리브르에 도달했다. 이는 1719년 오백 리브르짜리 주식에서 시작한 것과 비견할 때 가히 폭발적인 가치증가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세는 실제 식민지 자원 수탈과 인도와의 식민지무역을 통해 얻을 이익에 비해 이미 과대평가된 것으로서 주식가격의 거품이 곧 꺼질 것이라는 전망은 자명한 것이었다. 결국 1720년 여름에 거품은 꺼지고, 주식에 대한 은행과 회사의 담보능력에 대한 확신이 동요하게 되었다. 결국 1721년까지 당초 500리브르짜리였던 주식은 40리브르까지 폭락하게 되었다.

   당시 로의 회사가 거두어들인 돈의 일부만이 실물경기에 투자되었고 그 돈의 대부분은 국채를 보전하는 데 쓰였다. 한편 주가가 폭등하였기 때문에 로가 약속했던 40퍼센트의 배당을 지불한다고 해도, 주식 시세가 워낙 높았으므로 실제로 1.1퍼센트의 이윤에 해당할 뿐이었다. 따라서 주식을 소유하거나 새로운 주식을 얻어도 그것은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 주가는 이렇게 하락세로 돌아섰다. 화폐가 과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동반하여 일반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주식 소유자와 은행권 소유자들은 자신의 종이 조각을 다시 귀금속으로 교환하려 아우성을 쳤다. 로는 사태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금광 발견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린다든지 귀금속을 압수한다든지 급기야 지폐의 금태환을 중지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는 은행권의 공신력을 정지시킬정도로 그 가치를 하락시켰다.

   로는 결국 직위해제되었으며 모든 지위에서 물러나 궁핍한 상황에서 브루셀로 이동하였다. 다음 몇 해 동안 로마, 코펜하겐 그리고 베니스에서 도박으로 소일하였지만, 다시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는 후일 런던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락을 받는 사면권을 1719년에 이미 부여받았다. 그는 런던으로 건너가 4년 동안 거주한 뒤 베니스로 이주하여 1729년에 결핵으로 가난하게 사망하였다.  



   2. 존 로의 경제학적 아이디어

   우리는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추동한 몇 가지 경제학적 착상들을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되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진성어음주의Real Bill Doctirne>라는 다소 고전적 견해에 기초해 있으며, 둘째는 <신용제도Credit System>에 대한 철두철미한 추종이며, 셋째는 마지막으로 <관리통화제도Manage Currency system>의 아이디어이다. 우리는 이것들이 존 로의 재정정책적 실천에 실제 기여한 바에 관하여 가능한 한 공평하게 논의할 것이지만, 어느 것이 가장 기발하고 선구자적인지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공정해질 요량이다. 그 기준은 공간축과 시간축 양편에 걸쳐있다. 시간적으로 그것이 현대 경제정책 운용이론의 핵심적 측면을 선취했는지 여부 그리고 어떤 이론을 선취했는지의 여부를 논할 것이며, 또한 동시대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 시도였는지에 대한 평가가 행해질 것이다.

   1) 진성어음주의Real Bill Doctirne

   진성어음주의는 경제학적 논쟁이 진행되던 기간 동안 화폐수량이론과 대립되는 통화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의 핵심요체는 다음과 같다: “화폐가 주어진 실제 물리적 자산에 대응하여 발행되는 한, 화폐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발행되었느냐와 무관하게 그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1) 이러한 통화이론은 우리의 논의 주제와 밀접한 인물인 John Law를 필두로, Simon Clement(1710), Adam Smith(1776), Charles Bosanquet(1810), Thomas Tooke(1845) 등에 의해 표방된 바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해 뒷받침된다.

은행 대차대조표
자산부채
100온스의 금100달러 지폐
200달러 가치의 농부의 차용증서200달러 지폐 대부
300달러 가치의 도박사의 차용증서300달러 지폐 대부

   가령 첫째 열에서 은행은 100온스 상당의 금을 예치하고서 이에 대한 증서로서 100달러어치의 지폐를 발행한다면 1달러는 1온스의 금에 상당한다. 제2열에서 농부가 100달러 어치의 현금을 대부하려는 상황을 가정한다. 제3열 역시 도박꾼이 적어도 300달러에 해당하는 자신의 저택을 담보로 판돈을 대부하려는 상황을 나타낸다. 결국 은행이 발행한 총 화폐가치는 600달러가 된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면 초기 금 100온스에 대응하여 100달러를 발행한 이후 추가 발행된 지폐는 과연 기존 지폐가치의 하락을 가져오는 것인지의 여부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대차대조표의 최초 자산인 100온스에 대응하여 발행된 100달러에 더해 500달러가 추가적으로 발행된 셈이므로 그만큼 화폐가치는 떨어졌다고 볼 것이다.

   문제는 경제주체의 담보능력이다.

   제2열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은행이 농부가 적어도 200달러를 상환할만한 가치를 지닌 건전한 담보를 갖추고 판단하면, 예를 들어, 후일 220달러로 상환하겠다는 계약 하에 이자가 할증된 200달러의 차용증서를 은행은 자신의 자산으로서 보유하게 된다. 이때 농부가 그의 농장에서 얻을 장래수확이 대부에 대한 담보로서의 가치가 보장된다면, 우리는 진성어음주의의 가정대로, 추가발행된 화폐는 그만한 실제 자산에 대응되는 진성어음real bill인 것이다. 제3열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은행이 도박사-차용자가 자신의 돈을 모조리 잃는 최악의 경우에도 그가 자신의 부동산을 담보로 내놓을 수 있으며 그것이 적어도 300$ 가치라고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면, 추가 발행된 300달러 대부금의 가치는 차용자의 담보능력에 비례적으로 일치하여 기존의 화폐 가치의 교란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대차대조표로 표현된 상기 예화를 통해서 우리는 진성어음 이론의 명제인 “화폐가 주어진 실제 물리적 자산에 대응하여 발행되는 한, 화폐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발행되었느냐와 무관하게 그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앞서 든 예화 자체도 ‘존 로’ 체제의 실제 통화발행 방식과 일치한다. 다만 대부-차용 관계가 뒤바뀌었을 뿐, 실제로 아예 증권의 형태를 띠거나 증권구입에 투입된 은행권의 발행은 그것이 회사의 담보능력에 뒷받침되는 한 정당화되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존 로의 미시시피 회사는 거대한 차용자이고 중앙은행은 거대한 대부업체이다. ‘존 로’의 자기순환적 신용 제도는 위의 예화의 형식을 따라 다음 형태로 정리된다. “미시시피 회사는 법령으로 부여된 식민지 자원 채굴권과 해상무역 독점권을 담보 삼아 막대한 양으로 발행된 은행권을 중앙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셈이다.” 다만 해당 회사가 직접적으로 은행권을 대출받은 것이 아니라 발행된 은행권으로 당사 주식에 투자하는 형식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어쨌든 로는 진성어음 이론에 따라 충실히 은행권을 발행하여 통화공급을 급증시킨 것이다. 흄에서 리카도를 잇는 고전학파 계열의 화폐수량이론에 따르자면, MV=PT(통화량×유통속도=가격×거래량)로 표현되는 이러한 수식에서, 화폐유통속도와 거래량을 일정하다고 가정했을 때, 화폐량의 급격한 증가는 이에 대응하여 화폐가치 하락과 동시에 가격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후일 실제로 일어난 결과이나 로는 애초에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진성어음이론에 따라 담보능력이 뒷받침된다면 이에 기초한 대부형태로서의 통화발행은 화폐가치 하락이나 화폐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사실 진성어음 이론에 보다 충실하자면, 만약 <존 로>체제에서 보다 합리적으로 담보 지불능력에 대한 평가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면 후일 뒤따른 공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으리라는 역사적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2)

   2) 신용제도Credit System

   <신용제도Credit System>란 이른바 ‘지불수단’3)으로서 화폐기능의 사용이 제도화, 정착화됨에 따라 수반되는 어떤 법칙적 경향과 법적 관계 전반을 지칭한다. 자본론에 따르면, <상품의 유통이 발전함에 따라 상품의 양도를 상품가격의 실현으로부터 시간적으로 분리시키는 사정들이 전개된다.4) 이때 기존 구매자와 판매자의 경제적 관계에서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가 발생한다. 이러한 관계를 강제할 공적 보증과 적합한 신용제도가 마련될 때 이러한 시스템이 존속될 수 있다. 혹은 이러한 채무자-채권자 관계 전반을 규율하는 동시에 이를 장려할 수 있는 시스템 전반 자체를 신용제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신용제도는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이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특히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히 확대 재생산되어 자본주의적 기구의 중요한 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15세기 상파뉴의 정기시에서 어음이 일상적인 결제수단으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신용제도를 상품유통의 발달에 따른 산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기구의 중요 요소”로서의 신용제도는 앞서의 단순한 신용제도와 차원을 달리한다. 자본주의의 기본 단위인 ‘자본’을, 맑스를 따라, 자기증식하는 화폐라고 정의할 때, 신용은 또한 신용의 발전에 의거하여 ‘주식회사의 형태’를 가지는 기업형태를 성립시킨다. 자본주의적 신용제도 하에서는 산업자본의 운동 중에 생기는 유휴자금이 은행에 집중되어 대부자본화하고, 은행신용을 통하여 자금을 조달받은 산업자본가가 이에 대해서 이자를 지불하게 된다. 이렇듯 신용제도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독자적인 대부시장을 출현시키고 나아가 이러한 시장은 국경을 넘어 세계적인 단일시장으로 통합되어가는 운동을 수행한다.

   다시 신용의 유래를 고찰하자면, 신용이란 사실상 “상품→화폐의 유통과정(W-G)”에서 화폐의 지불이 연기되어 신용이 주어지는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신용의 기초가 되는 신용형태는 상업신용이다. 우선 신용은 유통면에서 유통에 소요되는 여러 비용을 절약한다. 유통의 여러 비용에서 주요한 것은 화폐이지만, 신용은 이 화폐를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절약한다.

   ①거래의 대부분이 신용거래로 되면 신용화폐로서의 지폐가 금속화폐에 대신하여 유통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채권ㆍ채무의 상계에 의하여 결제가 이루어지는 한, 화폐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 신용을 통하여 통화의 유통속도가 높아지고 유통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화폐량은 그만큼 적어도 된다. 더욱이 상업신용이 행해지고 은행신용이 성립되면 구매 또는 지불을 위한 준비금이나 적립금 등 각 자본의 운전에 필요한 각종 보장화폐형태의 자본이 감소된다.

   ②신용은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거래를 성립시키는 동시에 그 거래의 개별기업적 구속을 사회적으로 해방시킨다. 이로써 각 자본은 그 자본력을 증대시켜 생산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신용의 이와 같은 사회화적 과정이 개별기업적으로 이용되어 거기에 투기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③신용은 상품유통의 속도, 따라서 자본의 회전을 증진시키고 아울러 자본의 재생산과정을 촉진시킨다. 다른 한편에서는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장기에 걸쳐 분리시키므로 이 면으로부터도 투기가 개입될 여지가 생긴다. 호황기에는 신용투기가 왕성해지고, 그것은 과잉생산의 하나의 계기가 된다.  

   ④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자본의 경쟁이 끊임없이 행해져서 자본이 이동하고, 자본이 사회적으로 분배되는 동시에 자본의 일반적 이윤율이 균등화하는 경향이 있다. 신용, 특히 은행신용은 이러한 과정을 매개하고 실현시킨다. 산업자본은 제각기 그 운동 중에 생기는 자금을 은행신용을 통하여 서로 사회적으로 융통하면서 생산을 반복하게 된다.

   ⑤신용의 발전에 의거하여 주식회사의 형태를 가지는 기업형태가 성립한다.

   정리하자면 신용의 발전은 화폐와 상품유통속도의 증가효과를 산출하며, 이는 또한 대규모 형태로 전개되어 자본의 운동을 가속화시키는 효과를 창출한다. 14세기 상파뉴 정기시에서부터 등장한 환어음 시장이나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대두되기 전의 근세 신용제도가 지닌 자본주의적 잠재력은 상당한 함의를 지닌 흥미로운 연구분야이나, 우리는 신용제도의 이러한 자본주의적 전개의 최종 귀결을 보기보다는, 그것이 지닌 보다 협소한 제도적 측면, 사회적 효과, 당대에 실제로 실현된 투기의 가능성, 그리고 이 모든 것과 연관되는 실제 <로 체제>를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앞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가 신용제도의 지지자임을 보았다. 그는 장래 결제를 보증해줄 ‘신용’과 그것의 사회적 실체인 ‘신용제도’가 확대될수록, 경기순환을 가속화시키며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믿음을 가졌다. 신용제도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어음과 태환증서의 발행에 기반한 신용제도나 주식회사의 역사적 기원은 보다 이른 시기로 소급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러한 신용제도 자체를 거대한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창출하여 완전히 새로운 경기적 순환을 창조하겠다는 야심 자체는 실상 전무후무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가 창안한 중앙은행, 거대 독점적 국영회사 설립, 은행권 발행, 주식 발행 등으로 맞물린 자가발전적 신용제도는 미래 담보물에 대한 자기보증적 ‘신용’에 기초하여 새로운 거래를 발생시켰으며, ‘자본’이라 불릴만한 거대한 화폐의 순환적 움직임을 창조해내었다. 또한 그의 신용제도는 ‘주식회사’라는 형태의 자본소유구조를 근대적인 모습에 가깝게 더욱 더 확장시켰다. 다만 본격적인 자본주의 체제와 차이점이 있다면 그러한 자본이 단일한 독점적 국영회사로 집중된다는 점과 그러한 자본이 대개 국채 보전에 사용되는 점이리라. 또한 신용제도 상의 허점이 투기의 위험성을 일으킨다는 점에의 고찰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존 로> 체제의 말로와도 들어맞는다. 신용제도는 자금회전을 가속화시켜 마치 원심분리기처럼 구매와 판매행위의 분리를 촉진함으로써 그만큼 투기의 여지를 열어놓는다. 실제로 당대 신용제도가 창출한 주식제도가 상업과 생산에 필요한 자금을 주식으로 쏠리게 함으로써, 그러한 투기가 상업과 생산을 마비시킬 위험 역시 그가 신용제도의 운용범위를 광범위하게 확장시킨 것만큼이나, 증대된 것이다.

   3) 관리통화제도Manage Currency system

   왕립은행Royal Bank을 창설하여 은행권 발행을 독점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케인즈가 제창한 관리 통화제도라는 현대 경제학적 발상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 왕립은행이 발행한 은행권과 이를 통해 구입된 주식증서가 사실상의 지폐Bill발행이었다는 점에서 왕립은행-미시시피 회사의 합작 형태가 오늘날 통화공급을 조절하는 중앙은행의 기능을 이미 선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리통화제도란 금태환제도 혹은 국제적 금본위 제도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기 규제적 통화정책으로서, 더 이상 금이라는 단일한 국제적 가치척도에 의해 자국 통화량이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경기사정에 따라 자국의 고용과 물가 그리고 생산량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통화발행을 귀금속 보유량과 단절한 불환지폐를 위주로 통화량을 조절하는 금융정책인 것이다.

   이때 케인즈의 복안은 통화량의 증감이 경제 내 총수요에 단기적으로 충격을 미친다는 아래와 같은 케인즈주의적 모델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단기적 효과에 상응하여 경기변동에 따라 중앙은행이 독자적인 화폐 발행량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정책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물론 1차 대전 이후 대공황 이후 국제적 금본위 제도가 위기에 봉착할 때에서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이러한 통화관리체제는 케인즈주의 학설의 지배 이후에도 여전히 보편적인 금융정책적 장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면 존 로의 발상은 시기적으로 수백 년을 앞선 경제학적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 <로 체제Law’s system>를 과도한 선의로 해석한다면, 적절한 신용제도와 결합한 통화공급이 유지되었더라면 프랑스는 존 로의 구상을 따라, 일정한 한도 내에서 안정적으로 선구적인 금융정책을 발휘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존 로의 체제가 케인즈주의적 통화관리 체제와 공유하는 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왕립은행과 미시시피 회사에 부여된 독점권과 금융정책적 권한이 후대 중앙은행이 가진 화폐 발행권과 통화공급 조절능력에 상응한다는 점이다. 물론 존 로가 그의 회사를 통해 조세징수권까지 지녔다는 점은 중앙은행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의 한도를 넘어선 것이지만, 이마저도 사실상 독자적인 지폐발행을 위한 부수적 기능에 지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둘째, 이것은 앞서 언급한 진성어음주의적 이론과도 연결되는 부분이지만, 로 체제에서나, 관리통화제도 하에서나 통화량이 중앙은행의 태환능력과 별개 사항으로서 조절될 수 있다는 점이 공유된다. 즉 로 체제에서는 미래 담보물의 상환능력에 대한 신용이 화폐가치를 귀금속 보유량 정도와 독립적으로 규정되게끔 하고, 관리통화제도 하에서는 화폐 가치가 어느 정도는 화폐수량설을 따르지만, 단기적인 케인즈 모형에 따르면, 부분적으로는 통화량 증가가 <화폐전달차> 기능을 발휘하여, 통화공급이 가격이 비신축적인 단기에서는 실질 거래량과 그 배후의 생산능력을 가속화시켜 화폐 인플레이션 분을 상쇄시킨다.5)

   이 논점은 셋째, 통화 공급의 증가가 인플레이션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논점과 직결되며 이는 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는 화폐 인플레이션이 부분적으로나마 수요창출로 인한 경기부양을 통해 상쇄된다는 케인즈의 신념과도 연결된다. 차이가 있다면 통화공급을 통한 수요창출이 아닌, 독점을 통한 담보상환 능력이 화폐가치의 저하를 방지한다고 믿었다는 점뿐이다. 즉 둘은 이른바 <화폐주조세에 따른 인플레이션 조세부담>6)을 과소평가한다는 면에서는 그 정도 상의 차이가 있을 지라도 경향적으로 일치한다.



   3. 케인즈 관리통화제도의 선구자로서의 ‘존 로John Law’와 그 사상의 시대적 한계

   우리는 지금까지 다루었던 희대의 풍운아 ‘존 로’를 추동했던 세 가지 경제학적 아이디어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 중에서 <관리통화제도>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부각시켜 살펴 볼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소거법으로 말하자면, 진성어음주의는 이미 통화이론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미흡한 이론으로써 사장된지 오래이며,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론이기 때문에, 그러한 틀로써는 존 로의 경제학적 발상의 진가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며, 신용제도를 틀로써 설명하자면, 그 자체로는 ‘존 로’가 구상한 금융정책의 고유한 특성을 포착하지 못한 채 하나의 동어반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관리통화제도>라는 케인즈주의적 경제학 이론은 존 로의 구상틀 전체의 잠재력과 동시에 그 시대적 조건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우선 이론 자체의 규모와 성격이 존 로가 기획한 의도와 일치한다. 그가 구상한 금융정책적 체제는 케인즈가 구상했던 것과 같은 한 경제권 내의 거대한 통화조절의 중앙집권적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기존의 금태환 능력에 기초하여 자국 통화가치를 평가하던 금본위제도의 국제적 질서에 도전장을 내미는 야심찬 기획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경제권의 재정 경제적 사정에 따라 금융정책을 달리 조절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서, 경기추이에 따라 통화공급을 정책 결정자의 주권에 따라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상황이 허용하는 만큼 마음대로 돈을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게 찍어내겠다는 혁명적 발상전환은 각각의 사상가에 의해 제기된 시점이 다르고 그것이 의도된 역사적 컨텍스트도 다르지만 어쨌든 그 핵심적 발상 전환만큼은 두 야심가들의 정신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할 인물은 더 이르게 동일한 발상의 전환을 이룩하고 이를 이론화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는 ‘존 로’라는 인물을, 다소 시적으로나마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나가 당대의 조류와 부조화한 비극적 인물로 표현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것이 과도한 감상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세간의 기존 평가와 달리, “그의 선구자적 통찰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결국 케인즈보다 이르게 도착한 주자로 평가되지 못한 이유를 그의 지나친 탐욕과 근시안적인 정책운용 상의 미숙함으로 돌리는 것”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완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한다면 오히려 그의 구상과 실행의 역사적 맥락이 ‘케인즈’ 당대의 시대와 변별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우리는 이런 시대적 한계라는 지평에서 그의 실패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존 로’라는 인물을 단순히 ‘모자란 케인즈’로 보지 않고, 동일한 정책들이 상이한 조건을 각자의 상이한 성패요인으로 삼는 역사적 전개과정을 고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존 로의 통화정책이 실은 그 정책목표에서부터 후대의 케인즈의 관리통화제도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케인즈의 경우 그것은 수요확대를 통해 경제주체의 경제적 활동을 촉진시키고 경기를 부양시키겠다는 것에 그 정책적 목표를 둔다. 반면에 로의 경우 그가 재정장관으로 임명된 당초 목표는 파산 지경에 이른 국가 채무를 상환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지 오늘날 현대 경제정책 입안자들이 추구하는 경제 내의 복리 후생의 증대 자체를 추구했던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필요한 곳에 상황이 허용하는 만큼 돈을 찍어내겠다>는 발상 전환은 동일하지만, 둘의 사고방식과 정책운용 방식은 전혀 다른 시대적 패러다임 지평에서 운동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보다 근본적인 변별점은, 가령 존 로의 시대에는 ‘중앙은행’과 ‘법정불환지폐’, 그리고 ‘주식회사’가 존재했지만 오늘날의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을 특징짓는 산업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로 체제와 관리통화제도는 분기한다. 가령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 관리통화제도에 따라 경기부양책으로 통화공급을 증가시켜도, 로 체제 말년의 파국과 같이 급격한 화폐가치 하락과 갑작스러운 신용경색에 따른 경제적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유는 화폐를 통해 추가적으로 창출된 자본이 가령 공장설비에 투자한다든지 하는 실물 경제에의 투자로 보전되는 등 마땅한 수요처를 찾기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존 로의 근본적 실책은 그가 단순히 허영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중반 케인즈주의자가 당대 지평에서 통화공급이 새로운 투자와 소비에 대한 수요증가에 의해 ‘뒷받침’되리라 기대했듯이, 존 로 자신이 식민지와 무역 독점권의 보유가 가져올 이윤이 새로운 통화공급을 ‘뒷받침’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즉 정체된 경제 내에 당국의 신용에 의거한 통화의 추가적 유입이 가져올 혼란을 수용할만한 투자처의 규모와 그것의 이윤율이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협소했던 것이 근본 문제였던 것이다. 자본의 이동과 투자 그리고 그것의 회수라는 회전 속도가, 식민지에 대한 강압적 착취와 중상주의적 경제관이 여전히 통용되었던 17세기 말 18세기 초보다, 훨씬 빠르고 발전된 형태여야만 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급격히 과잉공급된 화폐는 물론이고 과열된 신용을 수용할만한 시장규모와 투자여건으로 요약되는, 추가발행된 은행권과 주식에 대한 담보능력 자체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존 로가 바랬던 조건이 무르익는 국면은 그 자신의 사후에야 비로소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시대적 여건이 개인의 야심을 수용하기에 너무나 협소했던 것이다.

   그의 구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훗날 개인의 야심찬 기획으로서 동일한 천재적 개인에 의해 구상되었지만, 케인즈의 구상 역시도 그것이 제출된 시점으로부터 시차를 두고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양상에 발 맞춘 냉혹한 자연필연성에 가까운 형태로 뒤늦게 채택되었다.      

 

   결론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권에서 17세기에서 18세기를 거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네덜란드가 쇠퇴한 과정을 기술한 내용에 따르면, 17세기에 암스테르담에는 자금이 너무 많아서 당대 주요 산업이었던 면직물 공업에 투자한 자금으로도 자본의 과잉사태를 해소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이때 영국 자본은 산업혁명기의 여명에 야금업과 철도라는 막대한 투자처를 발견함으로써 자본의 과잉과 신용경색에 기인한, 네덜란드가 겪어온 간헐적 상업공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일 영국에서도 산업혁명이라는 환상적 모험이 끝난 뒤 20세기 초에는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현지에는 쓰일 곳이 거의 없는 현상이 다시 나타났고 금융업이 다시금 핵심산업으로 등장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금융상으로 만개하는 단계가 일종의 경제적 완숙기이자 황혼기라는 경제학적 순환의 논리는 베네치아 전성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아무튼 산업혁명 이전의 상업자본주의는 대부업에 투자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자금의 사용처를 찾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것은 가령 17세기 튤립 광풍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투기열풍에 노출되기 쉬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울러 여기서 우리는 복잡한 계산과 투기의 음모로 점철된 금융업의 역사가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의 역사보다 더 길고 복잡하다는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존 로의 시도를 상업자본주의의 복잡한 신용질서 속에서 감행된 가장 극단적 모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당대 전산업자본주의적 금융-신용-통화 제도 속에서 감행될 때 근본적으로 ‘모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산업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로의 신용체제는 근본적으로 자기순환적 돌려막기 체제가 될 수밖에 없으며, 신용과 통화의 창출은 어디까지나 눈 먼 자기보증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로 체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속임수로 귀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선적으로 추가적 통화발행과 이를 수요할 과잉된 신용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지대나 투자처를 통화정책과 신용제도 시스템의 ‘외부’에서 찾아야할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것이다. 존 로는 자기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하기 위해 그러한 외부가 정책 시스템의 내부에 있다는 환상을 퍼뜨린 것이고, 이러한 기만은 자기부정의 단계로까지 나아가, 결국 스스로를 속이고 만 것이다.

   존 로의 실패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존 로가 실수하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설립한 관리통화제도와 신용질서는 유지되어 프랑스를 유럽 금융업의 선두 주자를 만드는 역사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우리는 존 로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투기열풍에 취약하다는 구조적인 결함을 찾아낼 수 있고, 따라서 그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 그것이 단지 그의 책임만은 아니었다고, 그가 야기한 공황은 그의 시스템이 가진 근본적 결함이 대중적 광기라는 상승기류를 만나 발생한 중층적 현상이라고, 작은 위로 삼아 그 인물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로의 신용제도와 통화공급정책의 아이디어는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적이고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디어는 적절한 경제적 조건―――외부의 투자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산업혁명기 이후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만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결국 1차대전 후 경제공황 이후에 자연필연성으로서 채택되었다. 결국 그는 개인의 천재적 발상이 역사로부터 어떻게 소외될 수 있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역사적 인물로서, 순수한 경제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대응하여 그 속에서 전개될 수 있는 비극론의 최첨단을 보여준 미학적으로도 흥미로운 형상이라 논평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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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이론을 지지하는 저서와 저자들로서는,
Cranks in the Gold Community by Nelson Hultberg,
Detractors of Adam Smith’s Real Bills Doctrine by Antal E. Fekete,
The Future of Gold As Money: An Analysis of Antal Fekete’s Plan for a Parallel Gold-Coin Stan-
dard
by Nelson Hultberg,
A Response to the Real Bills Doctrine by Douglas V. Gnazzo,
Real Bills, Gold, and the Big Picture by Nelson Hultberg,
The Real Bills Doctrine and Honest Money by Douglas V. Gnazzo,
Real Bills: an Emergent Market Phenomenon a detailed refutation of Sean Corrigan’s Fool’s
Gold
by Bill Koures 등이 있다.

2) 이는 화폐수량방정식 MV=PT의 재해석을 수반한다. 상기 방정식에 대한 고전학파의 기본가정은, 유통속도 V와 거래속도 T가 고정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차용-대부 관계라는 형태로 창출된 통화량은 안정된 신용상태 가정할 때 거래량 T 자체를 비례적으로 증가시킴으로써 물가수준 P를 안정화시킬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이때 ‘지불수단’이란 ‘유통수단’과 변별되는 의미로 통용된다. 유통수단이란 맑스의 <자본론>을 따르면 상품유통을 실현시키는 수단으로서의 화폐기능을 말하며, 이때 상품의 사용가치와 그것의 일반적 등가형태로서의 가치자태와의 동시적 교환이 실현된다. 반면에 지불수단이란 상품의 물질적 속성의 전화된 화폐형태의 실현이 시차를 둘 때의 화폐기능으로서, 이때 화폐는 가령 어음이나 지불증서의 형태로 구매의 결제수단이 된다.

4) (국역) <자본론> 1권, 1990, 이론과 실천, 174p

5) MV=PT라는 상기 화폐수량방정식에서, V가 일정하다는 가정 하에서, M의 증가가 T에 정의 상관관계를 맺을 때, M의 증가율은 T의 증가율을 그 자신에 감한 증가율을 P의 증가율에 돌려줄 뿐이다.

6) (국역) <거시경제학>, 그레고리 멘큐, 9판, 1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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