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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fantasy.pe.kr물안경 비슷한 동그란 뿔테안경에, 절대로 다듬을 생각 없다는 듯 자연 그대로 재배한 수염과 머리. 우리에게 보여지는 박민규는 그의 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칭 '무규칙 이종소설가'라는 그의 글은 때로는 과격하다 할 만큼 자기 이야기 위주에 충실하다가도, 가끔씩 현실과 타협하기라도 하듯 깊이 있는 성찰로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대중의 상당한 호응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어찌보면 꽤 신기한 일입니다. 올해 읽어볼 만한 소설로 여기저기서 손꼽히고 있는 <핑퐁>과 같은 글들은, 사실 '대체 결말이 의미하는 바가 뭐지' 하는 반응을 끌어내면서 독자를 '패닉상태'에 빠뜨리곤 하는, 말하자면 좀 불친절한 글이기도 하니까요.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독서시장에서, 그닥 독자지향적이지 않은 글을 쓰는 박민규에 대한 이러한 주목은 사실 그 자체로 의미있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하에서는 과연 사람들이 소설가 박민규의 이야기에서 어떤 점을 집어내어 대중적 취향과의 합치점을 찾아낸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어떤 작가인가: 그의 글들에 대한 개괄

적지 않은 수의 그의 글들이 현실의 부조리, 고통, 아픔에 대한 희화화로부터 시작합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 주인공이 성장 과정에서 점차 꿈을 거세당하게 되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의 남색(男色) 상사에게 성상납을 강요당하는 주인공이라든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는 지하철의 푸시맨(출퇴근길 만원 지하철에 사람들을 밀어넣는 일용직을 가리키는 말)으로 돈을 버는 청년이 자기 아버지를 밀어넣는 등등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박민규의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는, 분명 날카롭지만 뻔하지 않은 우리들 주변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현실을 묘사하면서 발휘하는 작가 특유의 언어유희는 골계미를 더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좌절하고 고통받으며 때로는 거기에 적응합니다. 그러다가 일탈이 일어납니다. 직장 열심히 다니던 주인공이 어느 날 기어이 명퇴를 당하고, 푸시맨 아들의 아버지가 어느 날 실종되고, 한 자취생은 덜덜거리는 냉장고를 바라보다 인류의 역사는 냉장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카스테라>에서). 일탈의 결과는 세상에 대한 유쾌한 반격입니다. 명퇴당한 주인공을 위시한 일련의 인생 낙제생들이 패배의 달인 삼미 슈퍼스타즈를 효칙하여 '절대로 이기기 위해 게임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 하에 야구팀을 설립하고, 사라졌던 아버지는 기린이 되어 나타나 아들 곁에 앉고, 상해 가는 세상을 정리하기 위해 부모님과 학교와 중국을 냉장고에 넣어 버리는 등이 그러한 반격의 양상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세상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논리에 반격하고 내가 나일 수 있는 자유를 찾는다는 것만으로도 주인공들은 위안을 받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세상을 통째로 부정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핑퐁>에서는 되살아난 말콤 엑스와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인류의 운명을 건 탁구시합의 선수로 뽑혀 승리한 끝에 주인공들은 세상을 Uninstall 해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로 인해 백악기의 두 마리 이구아노돈이 탁구에서 승리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리셋됩니다. '고등학생만큼 부패하면, 이런 결정은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인공의 말과 함께.


2.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유쾌한 판타지: ‘판타지’에 대한 재정의에 기인하여

박민규의 작품들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내용을 들으면, 아마도 제가 처음 그랬듯 '이 무슨 4차원이란 말인가' 하는 반응을 보이실 듯합니다. 그러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기제가 바로 박민규의 작품세계 전반에 흐르는 '유쾌한 상상력에 근거한 판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정의하는 판타지는 '현실을 벗어난, 그러나 현실에 근거를 둔 그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검과 마법이 나오고 레드 드래곤과 9서클 마법사가 싸워야만 판타지는 아닙니다. 사람이 환상을 추구하는 이유, 그것을 통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부조리나 모순을 반영하는 도구도 될 수 있는 환상의 본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아 판타지와는 별로 무관해 보이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예로 들자면, 2, 3위조차 쓸모없다는 프로 개념의 사회적 대두와 함께 몰락해버린 아마추어리즘, 1등 지상주의에 포획되어 그저 최고만을 향해 달려가는 현실, 패배자에 대한 동정 없는 세상 등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제시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삼미 슈퍼스타즈' 팀이 그러한 현실을 배격하기 위해 아마추어리즘의 선구자로서 꼴찌를 지향했다는 주인공 일당의 주장, 또 거기에 기인해서 만들어진 유쾌한 반격에 의해 그들의 삶이 나름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환상성을 띱니다. 사실 그들의 말처럼 삼미 슈퍼스타즈가 꼴찌를 지향함으로써 프로의식이라는 시대정신에 저항했을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반동적인 착상과 그에 근거한 작은 반란은 그 자체로 이미 그들이 추구하는 즐거운 '환상'으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단편집 <카스테라>에 실린 단편들에서 그러한 환상성은 명시적으로 부각됩니다. 냉장고 속에 보관된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하고 따스한 한 개의 카스테라가 되어 썩어 가는 세상을 모조리 냉장시키려던 주인공 앞에 나타나고, 푸시맨 아들은 자신에게 밀려 지하철에 구겨 넣어지던 아버지가 기린이 되어 자기 앞에 나타나자 눈물을 쏟습니다. 인공위성 밖에서 본 세상은 사실 넓적하고 푸짐한 개복치였고, 한밤중 사우나에서 남색 상사에게 당하고 허탈해하던 사회 초년생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너구리에게 시원하게 등을 밀리며 위안을 얻습니다. 카스테라와 동물들 등의 소재는, 비좁고 썩어 가며 개인에게 신경쓰지 않는 세상에서 고통받는 개인들에 대한 '본연적 위안'으로서 기능하곤 합니다.

즉, 박민규라는 작가는 자신의 글 속에서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역시 현실적으로는 부조리하고 어긋난, 뭔가 당황스럽기까지 한 해법을 내놓으면서, '잘못된 현실'에 대한 투영이자 비판인 '판타지적 상상력'에 기인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현실은 이런 판타지를 제시해야 풀릴 만큼 뭔가 제대로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그의 글은 비판과 담론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염세성이라곤 찾기 힘들고, 가끔 세상을 모조리 없애버리기도 할지언정 그의 글은 따뜻합니다. 빚 갚을 길이 없어 치매 걸린 아내와 동반자살을 결심한 남편이 마지막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퇴폐 마사지사에 의해 단편 내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아내가 소생의 비명을 내지르듯이(<누런 강 배 한 척>에서), 유쾌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내내 우울한 이야기로 점철하는 그의 줄거리는 사실 현실이 이토록 잘못되었음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카스테라가 되어 주고 마사지를 해줄 수 있는, '한 캔의 맥주가 아직 냉장고에 남아 있는' 세상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인 것입니다.


3. 오늘날 대중에게 작가의 판타지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서론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오늘날의 독서시장은 경제논리에 잠식되어 온통 자기계발, 재테크, 전략서적으로 가득합니다. <빌린 돈은 절대 갚지 마라> 같은 제목의 책이 버젓이 팔려나가는 세상은 오랫동안 논의되어온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양상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보다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냐가 나를 더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며, 성장과 발전 이외의 가치를 담론화하려 하면 무한 경쟁의 글로벌 시대에 뒤쳐지는 낙오자, 철부지로 지목받기 십상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라면 박민규의 소설이야말로, 낙오자와 철부지의 이야기를 담은 ‘세상 물정 모르는 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상 이력을 작가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선 곤란하겠지만,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2005년 황순원문학상 후보로 올라가고 <누런 강 배 한 척>이 2007년 이효석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것은, 그리고 <핑퐁>이 김훈의 <남한산성>, 신경숙의 <리진>등의 쟁쟁한 문학계의 거두들의 작품과 나란히 각종 일간지 심사위원단에서 뽑은 올해의 읽어볼 만한 책으로 선정된 것은 그의 글이 오늘날의 시대적 맥락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왜 이 ‘반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요?

저는 바로 이 반동적인 작가의 ‘발칙함’에서 그러한 맥락을 짚어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세상 사는 법이기 때문에 다들 시장의 논리에 따라 살려 애쓰고 있지만, 사실 대중들도 이것이 ‘옳지 않은’ 세상임을, 왜 국가경제순위 세계 100위 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방글라데시와 부탄의 국민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우리는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라면서 늘 누군가가 신발을 벗고 다리 밑으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하는 부조리를 공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박민규가 제시하는 판타지는, 사실 그 판타지만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지적과 그러한 현실이 중학생의 아직 때 묻지 않은 눈으로 보기에는 ‘Uninstall’ 해야 할 만큼 모순된 것임에 대한 지적이며 독자들은 이에 공감합니다.

사실 그것이, 앞서 말한 '환상의 본연적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환상을 통해 일탈하며, 현실로 돌아올 때는 현실을 해결할 힘을 얻게 됩니다. <반지의 제왕>이건 <핑퐁>이건 문학에는 그 시대가 마주한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기 마련이며, 그래서 사람은 환상 속에서 현실을 담지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학이 사회성을 띄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글에 담아내게 되어 있고, 그 장치로서 판타지의 기능은 '낯설게 하는' 동시에 '당의정'으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비틀어 보아 문제를 발견하고,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능을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박민규라는 작가의 대두는 동네 대여점을 점거한 소위 '신무협 판타지' 등 하위 장르로서의 판타지 외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의의를 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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