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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gmail.com   지난회 [파우스트]에 대해 소개하면서 파우스트계(系)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이번 두 번째 한국판에서는 그 파우스트계라고 일컬을 수 있을 만한 작품 내의 큰 경향을 엿볼 수 있어 좋은 비평적 텍스트로 기능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왕따(당)하는 인물’의 대두라 할 수 있다.

   이지메(집단괴롭힘) 및 왕따는 일본이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긴 역사(?)와 많은 사례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 일본 젊은이의 현상과 그에 대한 첨예한 고민이 젊은이를 위한 소설에 등장하는 건 필연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지메는 이미 한 물 갔고(?) 히키코모리의 유행도 지났다 말해도 좋을 시기에 등장한 [파우스트]의 작품에선 이른바 자따(자발적인 왕따)를 소재로 한 경우가 많아 이를 하나의 경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신본격 마법소녀 리스카]의 주인공 쿠기 키즈타카가 대표적인 인물로, 단순히 지능이 높을 뿐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어른의 사고방식을 지닌 초등학생인 그는 동급생들이 너무 어리석고 자신의 수준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정상적인 교우관계나 사교활동이 없어 그야말로 자발적인 왕따 상태다(하지만 반장을 맡은 걸로 봐서 악의적인 따돌림을 받지는 않는 듯 하다). [ECCO]의 네모토 유우는 사실 평범한 중학생이지만 자신이 특별히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따를 자처하는데, 실상은 왕따에 가깝다. 어쩌면 왕따를 당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따를 가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F 선생의 주머니]의 주인공 마츠다 코즈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장을 맡아 아이들의 행동을 선생님에게 고자질하여 미움을 사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으며, 이노우에 쿄코도 따돌림 밑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사토 유야의 색(色) 시리즈 역시 세상 사람들을 ‘고깃덩어리’라 부르며 경멸하고,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미나미와 친구인 주인공 역시 다른 이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 [DDD]의 카이에는 신체적 장애 때문에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따돌림과는 다르지만 작중에서의 모습을 보면 최소한 외로움 등으로 고통받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라는 의문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왜 [파우스트]의 작품 주인공들은 왕따를 자처하고 있는가. 그렇게 일본에선 자따가 유행하는가? 수록 작가들이 미리 이런 소재를 다루자고 공모라도 하지 않은 한 불가능할 정도의 일치점이 이렇게, 특히 이 2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사람의 편집자(오타 카츠시)가 모든 걸 지휘하는 독단적 체제의 소설지가 갖는 장점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 편집장이 좋아하는 작가와 성향이 강조되다 보니까 자따 당하는 주인공이 부각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사실 [파우스트]라는 잡지 자체가 일본 문학 안에서 자따인 상태라는 사실을 파악한다면 하나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 언급했듯 [파우스트] 및 그 소속 작가 대부분은 주류문단에선 라이트 노벨로, 라이트 노벨계에선 주류문학으로 취급되고 있고, 그 판매부수 역시 둘의 중간 정도이다. 한 마디로 어중간하고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자따’당하고 있는 처지인 것이다. 학산문화사는 이 모순을 돌파하기 위해 ‘장르소설’임을 강조하며 한국 작가진은 장르 작가를 섭외하고 장르 특집을 마련하는 등 자구책을 찾고 있으나 일본판은 이미 내외적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견고하게 구축한 상태다. 볼 사람은 확실히 보고, 좋아할 사람은 마음껏 좋아한다. 그러나 (양적으로 훨씬 많은) 대부분의 독자는 관심이 없다. 작품의 성향이 어둡고 과격하여 꺼려 하는 이들도 많다(심지어 나스 키노코의 작품 마저 그의 게임에 비하면 소설의 인기는 낮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매체의 차이점을 감안해도). 그러나 팬과 소수의 비평가들로부터 [파우스트]의 작가진과 작품은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너희들보다 훨씬 뛰어나고 잘났다, 따라서 너희들과 어울릴 필요 없다, 너희들이 따돌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이러한 태도가 현대 일본 젊은이(특히 오타쿠쪽)들 및 비교적 젊은 [파우스트]의 작가진들을 매료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비하당하고 따돌림당하는 오타쿠들이 사회성은 낮지만 자신이 몰두하는 분야에서는 뛰어나기도 하며 실제 일본의 서브 컬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 실제 그러함을 보이는 것에서도 이런 생각을 부정하기만 할 수는 없다. 특히 작가진 중에서도 히키코모리 생활을 했던 타키모토 타츠히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동인 게임과 18금 게임의 시나리오로 문학계에까지 충격을 주며 총아로 떠오른 나스 키노코(이후 흡사한 위치인 [쓰르라미 울 적에]의 용기사07도 [파우스트] 작가로 참여한다), 미스터리와 라이트 노벨쪽에서 활동하다 미시마 유키오 상을 수상하고 아쿠타카와 상 후보로 오른 마이조 오타로, [파우스트] 연재 당시까지 푸대접을 받다 이후에 결국 미시마 유키오 상을 받은 사토 유야 등 실사례로 들어도 좋을 인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자따당하는 인물들은 주류문학계와 독서대중들에게서 자따당한 [파우스트]와 작가들의 독야청청함을 설파하기 위한 페르소나 혹은 아바타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아마도 결코 외로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열광적인 팬이 있고, 주류문단에서 호평을 보내는 이들이 있고, 해외에까지 수출한다(현대 대만, 한국에서 발행중이고 미국판 발행이 예정되어 있다). [판타스틱] vol. 5에 수록된 칼럼 {과학소설은 왜 아직도 존중받지 못하는가}의 결론을 흉내내자면, [파우스트]와 소속 작가들은 대중에게서 존중받지 못하는 대신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개별 작품의 경우 모든 작품을 다루지 못했음을 양해 바란다.)

   DDD | 나스 키노코
   [월희]와 [Fate/stay night], [공의 경계]로 ‘신전기’ 장르를 부흥시키며 게임과 라이트 노벨 쪽에서 수많은 아류작을 낳게 만든 나스 키노코의 소설은 의외로 아류작들과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언급한 ‘추리와 전기의 양립’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야심찬 도전으로, (흔히 신전기에서 연상되는) 화려한 전투신이나 장황하고 복잡한 설정 설명은 배제하고 대신 악마빙의자의 행동 원인 탐색을 통해 침착하고 차분한 미스터리 호러에 가까운 분위기를 조형한다. 수족이 없어 의수와 의족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는 카료 카이에가 안락의자 탐정 역할, 왼팔을 잃은 대신 악마빙의자를 퇴치하는 진짜 악마(?) 사역자인 이시즈에 아리카가 조수 역할이지만 직접 움직이며 사건을 해결(악마를 퇴치)하는 일을 맡았다는 점에선 아치 굿윈에 가깝다.

   천국의 왕 | 듀나
   대산문화에서 발행한 웹진에 실렸던 동명의 짧은 SF꽁트를 중편으로 확장한 작품으로, 원작에서 기본 설정만 빌린 신작에 가깝다. 아마도 강병융보다는 [파우스트]에 대해(혹은 [파우스트]의 독자에 대해) 잘 파악했는지, 원작에 없는 젊은이들을 주요 인물로 설정하고 극적인 사건을 집어넣어서 이야기 자체는 더 풍성하다.

   F 선생의 주머니 | 오츠 이치
   우리나라에 소개되면 비교적 큰 반향을 부르리라 생각했던 오츠 이치의 작품이 비로소 번역 출간되고 있긴 하지만, 이 글은 (평소 성향대로?) 마감 직전까지 놀고 있다가 마침 읽고 있던 만화 [도라에몽]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려 부리나케 마감 직전에 써낸 글 같다. 진짜 오츠 이치를 알고 싶다면 [고스]와 [ZOO]를 읽어야 될 듯.

   Limbo | TAGRO (만화)
   만화를 폄하하거나 낮추어 보는 사람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어지간한 소설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파우스트] 2호 수록작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최고로 꼽는다. 표면적으로는 정신이상에 시달리는 여인 쇼코를 만난 작가 고미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소설을 쓴다(혹은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지만, 쇼코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혹은 거짓인지), 혹은 쇼코나 노무라가 실제 인물인지 고미(혹은 쇼코)의 상상(창작)의 산물인지 점점 모호해진다. 이러한 메타 픽션적인 구성에 대한 해석은 몇 개의 대사와 노미가 쓰는 소설의 제목이 작품과 같은 ‘Limbo’라는 점, 마지막에 쇼코가 소설을 썼다는 부분 등에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메타 픽션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애담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매혹]과 비교해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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