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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초록연필 : 배명훈 감상

2008.08.29 20:0508.29

bssina@gmail.com   I. 들어가는 말

   배명훈님의 글에 리뷰를 써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 지도 한참 지났고, 그럼 한번 써 보시라는 얘기를 들은 지도 한참 지났다. 마침내 진짜로 써 볼까 하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오프라인에서 출간된 책 <누군가를 만났어>에 있는 글들 중심으로 해 볼까 했지만 이미 새 글들이 많이 올라왔고, 최근 글들은 초기작에 비해 내용상의 의향도 미묘하게 달라진 느낌이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볼까 했으나 이래저래 내가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작업이고, 역시 과연 의의가 있을까 의심되는 작업이기도 했다.
   명훈님의 글에 리뷰를 써 보자고 한 것은, 명훈님의 글이 부드럽게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딘지 편안하지 못하게 걸리적거리는 느낌은 최근에 점점 강해지고 있다. 흘러가는 듯한 일상적인 언어 쓰임과 그 언어에 이미 가해져 있는 운명적인 폭력성 같은 것. 부드러운 블랙 유머 같은 초기작들(<다이어트> 등)에 비해 느끼지 않고 지나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내용적으로 드러나던 파국(<철거인 6628>)이, 예언자들이 등장하면서 말들의 문제로 직접 쓰여지고 있다.
   <초록연필>은 예언자들이 등장하는 작품들(거울에 업로드된 순서대로, <매뉴얼> <마탄강 유역> <예언자의 겨울> <초록연필>) 중 가장 마지막 것이기도 하고, 몇몇 부분에서 그의 언어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중심으로 배명훈의 단편 소설들 중 예언자가 등장하는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리뷰의 내용을 잡도록 하자: 이 예언자들이 등장하는 글들의 쓰기 방식이나 내용이 배명훈 작가의 글들을 대표한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그의 스펙트럼은 넓다), 그의 글에서 제시되곤 하는 파국-권력의 문제가 이 글들에서는 ‘걸리적거리는 말들’의 문제로서 가장 직접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II. 서사가 아닌 분석적 설명
   사물화로 가득 찬 세계: 파괴로서만 내쏘아지는 예언

   1. 분석적 언어

   기호화된 사물: 사물화된 언어
   배명훈의 글 대부분의 특징으로서(모두는 아니다), 특히 <초록연필>의 특징으로서, 그의 글의 사물들에는 비밀이 없다: 그의 글을 이루는 말들이 평안하고 일상적으로 제시되는, ‘읽기 쉬운’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의 글의 사물들은(즉 사물을 지시하는 말들은) 자신들의 보이지 않는 심층을 가정하지 않는다. 사물들을 지시하는 말들은 굳이 사물들의, 말로 파악되지 못하는 어떤 내부로 들어가거나 미끄러져 빗나가버리지 않는다. 말과 그것이 지칭하는 사물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다는 것, 그 사물에 말로서 지시되지 못하는 어떤 점이 있다는 것, 그러한 어두운 거리감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들은 즉 사물을 개념의 단계에까지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때 어떤 의미로는, 그의 글에는 문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언어로서 ‘세계의 집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언어들은 새로운 의미로서 부활하거나 새로운 담론을 생성시키지 않는다. 말들은 단지 사물의 일상적 상태를 고수한다. 여기서 사물들은 자체가 기호화되어버린 것 같고, 말들은 사물화된 것 같다. 사물화된 말들. 단순히 사물들. 즉, 상징에는 관심 없는 말들. 이 말들을 읽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그 사물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과 같다.
   이것은 문체에 능숙한 사람이 자신만의 담론으로서 한가지 다른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과 반대이며, 글쓰기에 미숙한 학생이 몇몇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단어에 감정을 집중하다가 단순히 글이 인위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것과 전혀 다른 경우이다. 지시는, 본질적으로, 사물을 지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비끄러진다. 사물들을 지시하면서 일상적 담론만에 ‘머무른다’는 것은, 오히려 계속해서 표면화되고 흘러다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언어가 되려는 순간에 명사적 사물로 변하기.
   그렇다면 어떻게 흘러다니는가? 예컨대 초록 연필의 초반부에서 가장 극적인 예를 목격할 수 있다. 이 비밀스런 초록 연필이 비밀스러워야 할 대목에 맞닥뜨리는데―――심층이 생성될 만한 순간(초록연필이 클로즈업되고, 그 외양이 설명되는 첫 순간!) 연필은 어이없이 다시금 공장제 명사(noun)들로 쪼개진다.
   비밀, 이야기와 전설이 자리했을 자리에, 즉 동사(시간성)과 형용사(주관성, 특성)이 자리했어야 할 자리에서 그저 다른 명사들이 당 사물을 구성한다. 즉 흑연, 삼나무, 점토, 흑연, 밸런스, 필기감으로 쪼개지고 역사적으로도 멕시코, 한정 생산품, 품질, 연필공장으로 쪼개진다. 공장, 사물들의 고유성을 컨베이어 벨트의 표면에서 잘게 분해해버리고, 동일하게 흐르게 하는 곳.

   공장
   이러한 의미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연필은 바로 그 등장과 동시에 ‘명품’으로서 출시되고, 연필에 대한 꿈은 ‘제조 공장에 견학’을 가는 꿈이고, ‘사무실’에서 몇층에서 몇층까지 층수로 계산되는 단위로 컨베이어 벨트를 타듯이 흘러다니며, ‘2000만원이나 5000만원’으로 값이 매겨지다가, ‘950개’인 총 개수로서 투하되어 소비된다.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배명훈 소설에서 인물들은 역시 내부의 끓어오름이 없는, 임무를 나타내기 위한 물품들인데, 이를테면 이들의 대화는 각 인물들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에 대한(예컨대 연필에 대한) 사물적인 설명이다. 그들은 연필에 대해 냄새와 색깔, 용도, 끝에 붙어있는 지우개, 연필의 현 위치, 한정 생산에 대해, 형용사와 동사를 가능한 한 배재한 채(이것은 실제로 우리의 일상적 대화에 아주 가깝기도 하다) 명사들 위주로 떠들어대는데, 그 뿐이다. 이는 동사를 완전히 괄호 속에 넣고 잘라버리는 <예언자의 겨울>의 고래의 언어에서도 기묘하게 확인된다.
   이 소설의 언어들 전체는 연필 공장처럼 흘러다니고, 즉 사물들이 사물적으로 분해되며 생산되고 있다.
   종합해보자면, 이것은 서사―――시간성과 고유한 사건들이 아니라, 분석이다. 이러한 서술에서 서사의 힘은 소멸되고, 설명의 분석력이 더 앞에 등장한다. 보고서적 형식이 채택된다.

   2. 폭력적 예언

   말하는 자: 예언자
   그러나 이 와중에도 마치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듯한 사람은, 예언자이다. 그는 그 명칭부터가―――‘예언’―――개념이 아닐 수가 없는 것 같다. 예언자로서 그는 시간성을 지닌 말들, 즉 동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사물들과 그 조각에서부터 벗어나 심층부: 미래와 과거, 파악할 수 없는 부분과 결코 다 파악되지 않는(혹은 그때 당시에는 파악할 수 없었던, 지금은 파악되어 죽어버린) 과거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키고 있는 것 같다.
   <초록연필>에서도 유일하게 그 자신 인물로서의 개성적 특질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듯한, 그것도 스스로의 언어를 사용하는 듯한 인물이다: ‘예언’은 현재 사물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의 위치에 있는, 이 글에서의 사물과 인물을 통틀어 유일한 존재자이다.

   해방된 말
   예언자 베르데 씨의 조치: 이 챕터―――소설 전체로서는 두 번째 챕터이며, 예언자가 등장하는 챕터로서는 첫 챕터―――의 위치를 눈여겨 봐 두어야 한다. 이 챕터 이전까지 연필들은 멈추어있으나, 이 이후에 연필들은 그 흐름이 관찰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지막 챕터에서는 연필 즉 사물들 자체로 도약하며, 이 사물들은 높이 쏘아올려진 즉시 투하된다.
   우리는 배명훈의, 예언자가 등장하는 다른 단편들을 참조할 수 있다: <메뉴얼>에서는 예언이 사물을 그 일상적 용도에 정확히 맞추어서 다루는(사물을 정확히 기호화된 바대로 작동시키는) 언어로서 쓰여 있으며, <마탄강 유역>에서 예언자는 자신이 예언자라는 다른 예언자의 말을 믿으며 스스로 예언을 성취하고, <예언자의 겨울>에서 예언자는 자신이 예언자임을 부정하며 아예 사물에로 예언자되기를 일임한다. <초록연필>에서, 연필은 내용적으로도 그 공장적 성향을 완결하며, 즉 자기 자신이 생산된 목적이 되기 위해 예언대로 쏘아올려진다. 예언의 희망: 속도감있는 상승(고래의 솟아오름, 연필들의 솟아오름, 군대의 돌진함)은 멸망은 일치되어 있다.
   분석적인 문장이라고 위의 1번에서 언급한 바 있다. 사물의 설명을 사물로서 하는, 지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분석적인 문장은, 사물들로 세계를 꽉 채워둔다. 예언자와 같은 ‘말함’은 여기서 사물을 스쳐 달리지 않는다(“손수레라고 말하면 내 입을 손수레가 달려간다”가 아니다). 언어의 시간성이 사물을 생성(“나무가 푸르러진다”는 하나의 외관)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가 “푸르러진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동사는 나무를 시퍼렇게 불붙여 다 탈때까지, 다 타게 되는 방향으로 미사일처럼 쏘아보내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이러한 문장을 쓰는 글에서는, 그러니까 글 자체를 이룬 문장들이 사물들로 꽉 찬 상태에서는, 아마도 거의 필연적으로 예언의 형식을 빌려서밖에 등장할 수 없었던 이 동사들, 이 ‘말함’: 진정 언어의 자격을 갖춘 언어는 무섭도록 폭력적이고 죽음을 뜻하며 절망 속에서 결과적이다. <마탄강 유역>에서는 예언을 실행하며 몇 천의 피에 젖은 채 마침내 악마들을 보게 되는 예언자가 있다. <예언자의 겨울>에서 예언자는 아예 언어를(노래: 기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극한 언어) 잊고자 하며 예언할 권리를 다시 사물에, ‘예언’을 파멸의 현시 자체에 맡겨버린다. 사물 아닐 수 있는 언어는 파괴와 죽음 뿐인 것 같다.
   <메뉴얼>은 약간 특별한 경우인데, 마로하는 물론 앞에서 말한 예언자들의 폭력적이고 순환적인 면모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미성이는 자신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쓰여진 문자 언어의 의미를 읽어내고 있고, 여기에는 언어 내적인 생성이 자리한다. 이것은 배명훈의 글에서 특별한 것이다. 미성이는 예언자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이야기꾼이다. 그럼으로서 주변에 보다 목적없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이야기를 믿거나 동참하기보다 호감과 애정을 느끼는 공동체를 끌어모으게 된다. 여기서 깊은 갈등은 다른 예언자가 등장하는 소설과는 달리 예언자가 아니라, 이 공동체 내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공동체
   공동체는 이 예언들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인데, 예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마탄강 유역>의 군단과 기사단, <초록 연필>의 은경과 양홍의 연계, <예언자의 겨울>의 고래들의 불어나는 모임, 연계되는 노래가 그렇다(노래나 예언은 간혹 구호로 연결된다). 이 공동체들이 예언의 돌진에 참전하는 반면, <메뉴얼>의 미성이와 그 주변 공동체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언급한 인물들의 면모, 즉 사물들을 위한 것 뿐이거나(<초록연필>의 양홍과 은경) 익명적 합창(<예언자의 겨울>에서 고래들), 어떤 경력을 가진 인물의 ‘전형’같은 모습(<마탄강 유역>의 하누납)으로 나타난 것과 <메뉴얼>에서 이모, 어머니의 면모는 분명 각자 개성있고 애정어려 있다. 이는 배명훈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특이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며, 이 리뷰를 마무리짓기 위해 <초록 연필>로 되돌아가도록 하자.



   III. 나가는 말: 고래들을 위한 묵도식

   <초록연필>과 <마탄강 유역>, <예언자의 겨울>은 물론 <메뉴얼>의 경우에도(이 경우 여지가 있지만) 파국으로서의 예언이 늘 전제되어 있다(혹시라도 <마탄강 유역>의 결말을 착각하지 말자. 이것은 폭력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찬양으로, 직선적으로 드러난 부조리이다). 이때 ‘예언’의 자리는 이 뿐인가, 하고 잠시 되묻게 된다.
   그러니까 이 시발점은 배명훈 소설에서의 언어였던 셈이다. 사물화된 언어. 그리고 동시에 기호화된 사물들. 현대의 고질병과 같은 그것이다. 이 하나의 현상. 물샐 곳 없는 통합. 자기들끼리 동일하게 쪼개지고 흘러가는 순환적이고 무한한 흐름. 자기 배설물을 도로 먹는 것 같은 미디어의 언어. 그러니까 배명훈 소설에서의 언어는 이러한 경향을 아주 능숙하게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의도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일상적인 언어로만 사물들을 보고하려 하고 상당부 성공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언어는 정말로 갈 곳이 없는가: 어떤 작은 희망도, <메뉴얼>의 미성이처럼 그저 어린애(어린 소녀)의 육체로나 나타나야 할까. 그래서인지 작가도 이 소설도 결국 멸망의 그림자로 슬쩍 닫아두었다.
   배명훈 작가의 문장을 소위 ‘비문학적이다’ 하는 식으로 공격할 수 있다면 이런 면에서일 것이다. 작가는 직접 언어를 발굴해보려 했는가? 의미들을 생성하려 해 보았는가? 차이들을 생성하려 하지 않는가? 절망을 피해가거나 연장해보려 하지 않는가? 그저 존속하는 현대의 언어 속에 ‘말할 수 없는’ 절망들을 가둠으로서 끝나는가? 그러기 전에 작가는 직접 언어를 가지고서, 그 언어 자체로서 무엇을 시도해 보았는가? 작가는 한번이라도 언어를 믿어본 적 있는가, 언어 자체의 힘을 활용하고 그것으로 집을 지으려 애써본 적 있는가? 그 자신이 직접 작가로서 언어 앞에 확고하게 절망해 보았는가(그것은 가능하기나 한가)? 예언에 대해 절망하려면 이렇게 하는 와중에 절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어떤 독자는 예언자들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에 대해서는 이와 같이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배명훈 작가는 많은 사람들, 누구든지 간에,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글을 쓴다. 이 세상에 함께 사는 사람들. 이는 그가 일상적인 언어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어했던 많은 작가들이 이미 그렇게 하려 했듯이, 배명훈 작가도 바로 지금의 보편 상황의 필연성을 전달한 후 나머지는 각자에게 맡겨주면 된다. 일단의 묵도식같은 공동체의 형성. 고래들을 위한 장례식. 독자들에게만 남아있는 폐허. 생은 각자의 몫이고: 그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텍스트를 쓴다. 독자적인 길을 자신만의 언어 속에서 가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쉬움을 남기면서도, 필자는 순전히 개인적 기대일 뿐인 기대를 묻고 배명훈 작가에게 당신의 언어를 좀 만들어 보시지요? 같은 투덜거림은 전하지 않기로 한다(아, 이미 전해버렸군).
   다만 그의 건강과, 단순히 에너지원이 될 것 이상의 행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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