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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뱀파이어 나이트

2011.01.01 01:2601.01





felias@naver.com
 #1. intro

 여기 혼자 중얼거리는 남자가 있다. 이름은 맥시밀리언 W. 리펜키. 통칭 맥스. 긴 코트에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다. 걸어가던 남자가 무언가를 예측한 듯 우뚝 서자, 그 순간 남자의 양쪽에서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뛰쳐나와 남자를 공격한다. 그들의 송곳니가 흉하게 입술 밖으로 드러나 있다. 뱀파이어! 남자는 침착하게 코트 안쪽에서 잘 세공된 봉같은 것을 꺼내고…… 놀랄만한 빛이 뱀파이어를 덮친다. 빛과 함께 사라지는 동료를 보고 격노한 뱀파이어들과 맥스의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싸움이 끝났다. 흩어진 옷가지에서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긴 맥스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매끈하게 생긴 에어 오토바이 한 대가 그의 앞으로 와 멈춘다. 오토바이에 올라탄 남자는 다시 혼잣말을 시작한다. 간간히 반복되는 어구가 들려온다. “시끄러워, 데이비드.” 맥스의 오토바이가 메트로폴리스의 거대한 건물들 사이로 매끄럽게 이동하다,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액션 활극 미드를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의 저자는 김이환 작가다. [양말 줍는 소년]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의 동화적인 상상력을 기대한 독자라면 이 도입부를 보고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반면 [절망의 구]의 빠른 스피드나 시트콤을 떠올리게 하는 옴니버스 구성이 인상적이었던 [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을 먼저 접한 독자라면 이 책이 무척 반가울 것이다. 영상을 방불케 하는 빠른 전개와 ‘오다외’에서 시도했던 독립된 이야기 진행은 [뱀파이어 나이트]에서 한층 성장했기 때문이다.

 #2. 구성

 뱀파이어 나이트가 자신의 여왕을, 그리고 복수를 위하여 그들의 적수인 뱀파이어를 상대한다는 큰 줄기를 기반으로 하여 열 개의 챕터들은 각각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미드가 하나의 큰 배경과 캐릭터를 만들고 각각의 화에 각기 다른 주제를 심고자 한다면 뱀파이어 나이트는 주제의 다양함이 아닌 형식적으로 다양한 기법을 취함으로써 이야기의 다양성을 살리고자 했다. 오로지 대화만으로 구성된 ‘정원사와 기사’나, 제3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근심많은 보안관’,추리소설처럼 꾸며낸 ‘콧수염, 외눈안경, 파이프, 손수건 그리고 바보’는 그중 특히 흥미롭다.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답게 작가는 뱀파이어라는 장르계의 케케묵은―――그러나 매력적인―――소재를 십분 활용한 동시에, SF적인 배경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관과 스토리로 재구성했다. 혹시 띠지에 적힌 ‘강렬하고 감각적인 사이버펑크’라는 소개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면―――출판사가 안티일 리가 없지만(;)―――[아기공룡 둘리]를 SF라고 소개하는 거랑 비슷한 마인드일 것 같다. 어찌됐든 작가 의도와는 상관 없을테니 오해 마시길. :D

 글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뱀파이어들은 지구의 종족이 아니라 외계에서 온 생명체이다. 혁명의 실패로 그들 행성의 에너지원이었던 왕족들이 모두 죽어버리자 간신히 행성을 탈출한 뱀파이어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지구였던 것. 어떤 음식물도 소화해내지 못하고 햇빛에 특히 취약한 그들은 천년 동안 인간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인간‘처럼’ 보이면서 재력을 얻은 위치까지 도달했다.

 #3.인물

 여기까지 읽다보면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공포의 대명사, 힘의 원천이라는 ‘피’를 끊임없이 갈구하며 영원한 생명력을 누리는 뱀파이어의 이미지가 천년동안 필사적으로 종족을 보존하려고 애쓰며 ‘보통의 인간들처럼’ 인간들 속에 녹아들어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도 얻으려고 ‘필사적’이라니. 뱀파이어가 이렇게 저렴해도 되는 거야?

 뱀파이어들이 저렴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여왕을 위해 일단 잡고 보자는 식의 무식한 작자가 있었으니 그게 뱀파이어 나이트 맥스 W. 리펜키이다. 인간세계에 신체적으로 적응한 최초의 뱀파이어인 그는 광선총을 팡팡 쏴대며 뱀파이어들의 영혼을 수집하기에 늘 바쁜데, 그 와중에도 늘 머릿속의 데이비드―――그의 몸속에 내장된 나노머신의 인격체―――와 말다툼을 하기 일쑤다. 이게 말장난 같으면서도 묘한 빠져드는 매력이 있어 책의 재미를 더한다.

 베스나 동네사람들 같은 일상적인 사람들을 대할수록 더욱 독특함을 발하는 그의 성격은  그가 뱀파이어이자 인간의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경계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천 년 동안 지구에 적응하기 위해 뱀파이어의 몸구조를 변화시키고, 판단력을 지닌 나노머신 ‘데이비드’를 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지구에서 뱀파이어가 갖는 여러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깨어난 ‘여왕’처럼 맛있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혀도, 다이아몬드를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사고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기에 충분한 데이터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오로지 뱀파이어들을 잡기 위해 갖춰진 몸으로 태어난 그가 모든 임무를 완수했을 때,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사는 물었다.
 “천국의 뱀파이어들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실겁니까?”
 “다 죽여야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건 그 다음에 생각해야죠.”
 여왕은 술잔을 비우고 로봇 바텐더에게 한 잔 더 주문했다.
 “기사님, 한꺼번에 중요한 질문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영화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아니면 뭐가 기분 나쁜 거에요?”
 “제 말은, 여왕님은 여왕으로 사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스리는 백성이 없으면 어떻게 여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뱀파이어를 다 죽이겠다는 내 결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군요.”
 “아닙니다. 저도 놈들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지구를 돌아다니면서 몇백 명의 적과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지 않았다면 왜 그 고생을 했겠습니까? 이미 놈들의 영혼에서 충분히 에너지를 쥐어짰으니 전부 사형시켜도 됩니다.”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그건 기사도 대답을 모르는 문제였다. (p.301)

 기사가 모든 뱀파이어들을 사로잡고 마침내 뜻한 바를 이루었을 때, 안정되지 못하고 고장난 기계처럼 임무 완수에 집착하고 뱀파이어들을 차마 완전히 죽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4.끝

 과연 어떻게 될까 싶었던 마무리도 예상보다 깔끔하게 끝났다. 편한 결말이다 싶기도 하지만 개연성으로 보면 무리가 없기도 하고, 독특한 배경과 구성을 감안하면 제법 내실이 알찬 편이어서 만족하며 읽었다. 한편으로 더 충분한 분량을 잡고 진행했더라면 감정적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작가의 다음 책을 기대해 볼 수밖에. 늘 기대한 것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이는 작가라서(이번 작품도 충분히 여러 의미로 놀라웠고―――), 다음 책도 즐거운 마음으로 마주보게 될 것 같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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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11.01.04 00:03 댓글 수정 삭제
    나노머신 이름이 David라는 걸 보고 주인공 이름이 Hal이었더라면 저 오토바이를 타고 목성까지도 갈 수 있을 거 같다는 망상을 잠시 했습니다.

    ...엉뚱한 소리 죄송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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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아니마 11.01.14 22:39 댓글 수정 삭제
    작가님께서 원래 2권 분량으로 잡아놨다고 해서 그런지 내용이 상당히 압축적이더라고요. 다른 건 다 좋았는데 분량이 적어서 아쉬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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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elias 11.01.17 09:59 댓글 수정 삭제
    세뇰님/.. 목성까지만요? ~.~
    니아니마님/네, 좀 더 길게 이야기를 할만한 뼈대였는데요.. 아쉽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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