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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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자. 예전부터 필자는 언젠가 올지도 모를 좋은 시절을 위해서, 번역 소개되면 좋을 고전 장르소설의 목록을 작성해왔다. 여기서 고전이란 퍼블릭 도메인, 즉 작가의 사후 50년(미국은 70년)이 지나 번역하는데 별도의 절차나 비용이 필요치 않은 작품을 일컫는 것으로, 이는 출판사에서도 좀 더 부담 없이 출간이 가능하리라는 계산도 있지만 무엇보다 장르소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모아온 개인적인 목록이었다(비록 필자의 지식과 언어 능력의 한계 덕분에 목록의 거의 전부가 영국, 미국, 일본 작가이며 원서를 직접 읽은 경우가 거의 없어서 국내외 리뷰와 소개문, 작가 소개의 저작 목록을 참조하여 작성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시간이 흐르자 목록의 일부는 출간되기도 하고 다른 이에 의해 소개되거나 아마추어 번역 등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이 목록에서 오래 전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소설이 ‘아담 이전’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던 잭 런던의 작품인데, 제목 그대로 현생 인류 이전을 그린 프로토SF라는 소개만으로도 기대를 갖고 있던 글이다.

출간 가능성이 없어서 그대로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마침 궁리에서 잭 런던의 대표작들을 좋은 번역으로 소개하면서 이 작품도 빛을 보게 되었다. 잭 런던이라면 아동 및 청소년에는 [야성이 부르는 소리], 성인 독자에게는 [강철군화]로만 알려져 있던 게 사실인데(장르소설 팬덤에서는 출간 직후 갑작스레 사라진 [마이더스의 노예들]을 기억할 것이다).

본작의 출간은 희망이 없을 줄 알았던 장르소설 고전도 언젠가는 번역 소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준, 개인적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이런 사심(?)이 리뷰를 쓰도록 만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여기서 잭 런던이 무슨 장르소설 작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잭 런던 걸작선에 실린 소개문에서 인용하자면 잭 런던은 ‘미국 문학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하나였으며, 장르소설은 곧 대중소설이다(OECD 회원국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 중에서 장르소설이 이토록 매니악한 소수문화로 다뤄지는 나라는 한국 외에 몇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런던의 대표작 중 [강철군화]는 프로토SF로 불리며 [야성이 부르는 소리]는 동물 판타지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통해 현실이 아닌 곳을 통해 현실의 사회상을 그려내었다는 점에서 알레고리로써의 환상소설과 상통하며 개성적인 등장인물과 강렬한 스토리텔링으로 현대 장르소설의 길을 열어온 런던이야말로 장르소설의 시조,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일인자라 평가해 마땅하다.

본작 [비포 아담]역시 앞서 거론한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상과 다른 존재를 통해 현재와 인간을 그려내었는데 현대인이 선사시대를 체험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시간여행과도 같은 느낌이 들어 프로토SF로 분류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직접 읽어본 인상은 내용적인 면에서 오히려 동물 판타지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진화론이 발표된 지 오래 되지 않아 나온 글이라 과학적 사실과 고증보다는 작가의 상상에 의지한 바가 더 많으며, 등장인물은 사람과 동물의 경계에 선 존재들이라 그 행동도 동물에 더 가까웠던 까닭이다(대표적인 경우로 언어가 없어서 대사도 거의 없다). 그래서 작가가 준비한 안전장치(?)가 바로 꿈이라는 도구를 통한 액자식 전개다.

소설의 내용은 현대인인 주인공이 거듭된 꿈을 통해 원시인 ‘큰 이빨’의 기억을 체험하고 이를 기록했다는 설정으로, 그 원시인은 자신의 조상이며 그의 기억이 현재의 자신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한다.

사실 선사시대를 생생하게 그리려면 1인칭 시점이 적절한데, 언어도 없고 도구도 거의 만들 줄 모르는 미개한 상태의 원시인이 화자가 되면 상세한 서술과 깊은 심리묘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꿈이라는 설정으로 현대인의 렌즈를 통해 과거를 보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3인칭 시점으로 1인칭을 그렸다고나 할까. 덕분에 독자는 원시인의 심정과 선사시대의 사건 및 풍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렇듯 현대인의 눈으로 본 선사시대는 인간의 속성과 계급을 나눠 가진 듯한 여러 부족들 간의 갈등, 힘과 공포로 군림하는 안타고니스트 ‘붉은 눈’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폭력성, 계급의식과 생존을 위한 투쟁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도 흥미진진한 사건의 연속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사실 잘 쓴 장르소설이 그렇듯 잭 런던의 소설은 도피를 위한 판타지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의 재미를 준다. [강철군화]를 읽을 때 굳이 머리띠를 두르고 눈에 힘을 줘가며 계급 투쟁과 사회 비판의 맥락에서 해석해가며 읽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작은 유인원의 모험담만으로 가치가 있다. 이른바 엔터테인먼트 소설, 그 자체라고나 할까.


어떻게 읽고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자유라고 해도, 본작이 선사시대를 다룬 소설들의 효시이자 나침반이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서브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대지의 아이들]시리즈를 들겠지만, 본작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는데 이견은 없으리라.

아울러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와도 견줄 만한 동물 판타지의 걸작으로 뽑을 수도 있겠지만, 유인원을 동물로 보자는 의견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이건 필자만의 즐거움으로 남겨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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