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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혈중환상농도 13%

2006.10.28 01:3210.28





bssina@gmail.com

제목이 ~13%였고, 13개의 단편이 있었습니다. 제목 센스도 좋고... 표지 그림도 잘 어울려요. 처음 받고 나서 책이 예뻐서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하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



전반적으로 즐겁게 읽었습니다. 스타일이 다양한 글이 실려있었는데, 개중에 그럼에도 어딘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고독해하고, 광적으로 고독해하고, 그러니까 광기 때문에 고독해지거나 고독하다는 것 자체가 광기가 되어버리거나... 이 양자를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불합리에 갇혀버린 자들. 사람-사람의 연대는 ‘먹고 살기’의 문제가 되어버렸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까지도. 아니, 사랑의 문제는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죠. 철저하게 재편된 생존의 공간이 사람들의 살과 피를 이미 삼켜놓고 있으니까요. ‘흡혈귀’의 문제는 {선물}이나 {전직 흡혈귀의 회고}에서 ‘먹고 살기’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전직 흡혈귀의 회고}에서는 혼자 걸어가는 절망과 의지를 봅니다. {선물}에서는 그래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일상을 붙잡아오는, 결론은 아닌 실날같은 믿음을 봅니다.

더 마음에 닿았던 결말은 {선물}이지만, 읽는 동안 더 강하게 감정적으로 몰아치는 건 {전직 흡혈귀의 회고} 쪽입니다. 억울함(?)과 분노로 드글드글 넘친다는 느낌입니다. 연민이 들어갈 자리는 거의 없어요. 거기 반해 {카나리아}는 자기 연민을 하다가 연민을 깨버리면서 글을 씁니다. 결말은 연민의 자리를 완전히 부수어버려 황량한 냄새만 남습니다. 고독과 광기의 인상으로 읽어내려간 세 소설 중에 가장 파괴적으로 느낀 것이 {카나리아}였지 싶습니다. {선물}은 상당히 조심스러웠고 절제했던 반면에요.

멸망의 예언 때문에 영생을 선택했는데, 피냄새에 절어서 영생을 어떻게든 포기하고 싶어했던 흡혈귀의 이야기 {어느 냉동인간의 인터뷰}는 대단히 인상적이고 아이러닉합니다. 1차 대전 중의 전투에 관해 쓸데없으리만치(!) 흘러나오는 디테일이 전혀 쓸데없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치밀한 디테일이예요. 이놈은 또 왜 베르둥이 어쩌구 횡설수설이야 하다가, 주인공의 그 특유의 넉살좋은 말투로 “사냥을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고 할 때는 가슴이 뭉클합니다. 사람으로서 이 흡혈귀에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순간 떠올리고 맙니다. 무엇에 대고 사죄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이 영생하는 존재는 순간 희미한 답이 되고 맙니다.

{별}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쓴 글이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3 아, 하지만 한 가지만... 전혀 다른 의미일 텐데, 어쨌거나 같은 앤솔러지 안에서 읽다 보니 이런 식으로 걸리는 게 있습니다. {별}에서 작가는 상품 이전에 글을 씁니다. {루벨나이트}에서 흡혈 이전에 흡혈 광고가 있지요. 흡혈귀는 완전 연예인급 공무원에... 재미있는 설정이었어요. 껌벅 쓰러지는, 실제로 죽여주시는(!) 연예인에 = 공무원이라니! 즐거운 풍자예요. 그런 식으로 세상이 닫혀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주 체계적인 듯 하면서도 스스로에 도취된 채로. 과거는 얼마든지 진부하게 부활할 수 있지요. 그런 와중에 주인공이 취하는 반항의 형식이 또 소설, 그 중에서도 싸구려 포르노 소설이라는 점은 유쾌하면서도 의미있어요. 그리고 주인공은―――보이지 않는―――아마 곧 들리지도 않을―――고대의 인간으로 ‘돌아갑니다’. 후반부가 갑작스레 진행된 듯한 느낌은 있지만, 재미있었고, 좋은 글이었어요.

{침입}은 이미지로 된 글이고, 아주 잘 된 글이라는 인상입니다. 단편집 중에서 글 전체가 가장 쉽게 한번에 소화되었습니다. 장면의 전환―――이라기보다 이미지로 흐르고, 깨어지고, 하얗게 빛나면서 그대로 눈앞에 있어주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정으로 다른 세계로 가지 않고 바로 여기에서 공간의 그림자만으로도 눈을 뜨게 됩니다. 기분 좋았어요. 분위기부터 어투까지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인데, 그게 무척이나 매끄러워서 오히려 기대했던 대로 만족하게 됩니다.

{나와 그녀의 죽음}은 훌륭한 장르물이고, 흡혈귀는 무척이나 쿨하고, 장면으로 봐도 단편집 전체에서 가장 액션이 많은 거 같은데도 굉장히 현실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것도 한국에 사는 사람의 구체적인 현실이요! 이 글은 거의 말이 없어요. 심지어 주인공이 문장 하나하나 끊어서 소설 앞뒤로 따로 붙여줘도 말이 없습니다. 끝까지 주인공은 바로 그 현실 속에서 중얼거리고 그 중얼거림은 소설 속에서 그 캐릭터의 행동이 됩니다. 문장을 통해 글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적습니다. 바로 거기 그 구체적인 사람, 사건, 사물이 깨끗하게 번득거려요. 덕분에 무척 재미있고, 글로서도 감탄하게 되는 소설입니다.

{화이트 실루엣}은 눈밭의 이미지가 좋았어요. 새하얀 눈밭에 은발의 소녀, 사냥꾼이라니요. 그림이 딱 잡혀버린 가운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즐겁게 읽기는 했지만, 눈발 자욱한 분위기에, 소녀의 태도 덕분에 더욱 은근하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갑자기 설명투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결말 자체는 좋았는데, 그런 면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춘향비가}는 소개문에 나온 그대로예요. 은유를―――좋은 의미로, 뻔뻔할 정도로 그대로 밀어붙여서 남원을 핏빛으로 물들여주셨습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Nachzehrer}는 과연 불친절한 글이더군요! 틈새가 감추어져 있는 글이에요. 내용과 잘 어울립니다. 성별 불명의 앨리스는 피의 서 달랑 들고 헤매고 다니는데 이쪽은 편하게 읽어주실 이유는 없죠. 조금 편안히 읽을라치면 감추어진 틈새에서 써늘한 바람이 올라오는 느낌입니다. 내내 여유 없이 찌푸리고, 피의 서 페이지를 닫아둔 선을 따라가며 읽었습니다. 결말에서는 결국―――틈새가 의미 없어지면서 틈새로 떨어져버렸지만.

{그림자와 그림자들}을 마지막에 이야기하게 되었네요. {전직 흡혈귀의 회고}와 같은 작가분이 쓰신 글입니다. 여전히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었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지나치게 화를 내신 거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읽으면서 이입하기도 전에 글이 먼저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으니 저로서는 몸을 사리고 물러나게 됩니다; 강렬한 글이기는 한데, 독자가 가까이 가기가 좀 힘든 글이었습니다. 설정이나 표현들이 주는 거의 그로테스크한 전조를 놓칠 정도는 아니었지만요.


*



‘흡혈귀’라는 주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장르를 잘 읽는 편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앤솔로지에 있는 흡혈귀들에 몇 시간쯤 매료되어 있다가 깨어나 보니... 흡혈귀에 대해 막막한 증도 들고, 억울하기도 하고, 아니, 역시 제일 지배적인 감상은 막막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감상이 매일 살아가고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고 광고를 보고, 또 가끔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부딪치는 감상과 궤를 같이한다는 거예요. 이 앤솔러지의 흡혈귀들은, 확실히 현대의 흡혈귀들인가 봅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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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7.04.12 09:42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다는 댓글을 남긴다는 것이 너무 늦어져서-_-;; 민망하지만, 그래도... 마무리가 인상적입니다. 물론 제 글에 대한 평에 기뻐한 게 먼저지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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