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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음의 감옥, [팔묘촌]

2006.08.26 01:0508.26





cinebox@hanmail.net   [팔묘촌]을 소개하는 매체들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꼭 언급하는 사실이 있다. “킨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이 영상화된 작품” “세 번의 영화, 여섯번의 드라마로 만들어진……” 단순한 광고문구나 사실 소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책을 다 읽고 받은 느낌은 “그럴 만하다”라는 것이었다.

   여러 번에 걸친 영상화의 이유는 물론 작품의 인기와 지명도, 그리고 작품성에 있다고 하겠지만, [팔묘촌]이 단순한 퍼즐 미스테리가 아닌 모험소설로서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팔묘촌]의 이러한 특성은 작품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드러나는데, 바로 ‘나’라는 일인칭의 화자를 등장시켜 사건을 진행시켜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팔묘촌의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자, 과거의 대량살인과 현재의 연쇄살인에 모두 연관되어 있는 듯한 인물이지만, 정작 스스로는 자신과 팔묘촌에 얽힌 악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마치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처럼 사건에 휘말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팔묘촌을 다시 한 번 뒤흔들어놓는 살인 사건과 이 마을의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 속에서 목숨의 위기를 겪거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친애하는 우리의 명탐정 킨다이치 코스케는 조연의 한 사람으로서 바람처럼 나타나 머리를 북북 긁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잠깐 늘어놓은 다음, 다시 홀연히 사라질 뿐이다. 모든 것이 설명되는 후반부에서도 그의 활약은 크지 않아, 명탐정의 활약을 기대했던 독자로서는 다소 김이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그 명탐정 나으리는 꽤 발이 느리다... 마치 그의 외손자 킨다이치 하지메 군처럼 말이다)

   하지만 킨다이치 탐정의 다소 실망스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요코미조 세이시의 또 하나의 걸작으로 추앙받는 데에는, 이 소설의 모험적인 요소가 킨다이치 코우스케의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고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주인공 ‘나’가 본격적인 모험을 하는 부분의 묘사는 너무나 치밀하고도 독특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동시에 시험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작품이 가장 많이 영상화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 하다. 눈앞에 잡힐 듯이 그려지는 그 광경을 ‘육체의 눈’으로라도 제대로 한 번 보고 싶다라는 욕망을 느끼는 건 나 뿐만이 아닐테니.

   개인적으로는 일인칭을 선택한 점이나 소설의 전개가 많은 부분 모험적인 요소에 할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 추리물로서의 전개에도 소홀해지지 않는 점에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거장적인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추리소설 리뷰라 자세히 밝힐 수 없음이 아쉽지만, 피해자들의 관계에 관한 트릭은 기존 추리소설에서도 접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트릭이 '현재진행형'으로서 사건에 복합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깊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팔묘촌’이라는 사건의 무대였다. 지난번에 출간되었던 요코미조 세이시의 또다른 걸작 [옥문도]에서도 그렇지만, ‘팔묘촌’ 역시 하나의 거대한 밀실로서 작용한다. 특히, 섬이라는 물리적 밀실을 창조해냈던 [옥문도]와는 달리 [팔묘촌]은 외지와 통하는 시골 동네일 뿐이지만 ‘정신적인 밀실화’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기존의 가치나 질서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과정 중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악몽처럼 남아있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편견에 가까운 가치들이 맞물리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두는 자신들의 '마음의 감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소설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는 단순히 살인사건의 연속이나 소설 첫머리에 소개되는 과거의 사건에서만 연유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갇힌’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광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도 고이면 썩고, 돌도 구르지 않으면 이끼가 끼듯이 사람의 마음도 과거나 한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다 보면 뒤틀려 버리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특히 전쟁에 패배한 뒤의 섬나라 일본인의 뒤틀리고 무너진 정신에 ‘살인사건’이라는 메스를 대어 그 속을 냉정하게 해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코미조 세이시 작품의 무대는 단순히 도시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시골 마을이나 외부와 단절된 섬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며, 그는 살인 뿐만 아니라 연속되는 사건이 불러온 극한의 공포와 불신, 그리고 나아가 그런 경험 중에 어쩌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 밖에 없을 우리 안의 악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전통적인 퍼즐 미스테리 처럼 보임에도 그의 소설에서 거칠게 말해 어떤 ‘일본적인 으스스함’, 혹은 사회파 미스테리 이상의 ‘무거운 분위기나 씁쓸한 뒷맛’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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