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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환타지를 읽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유쾌한 상상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꾸는 꿈이 그러하듯, 환타지는 좌절당한 욕망이 나래를 펴는 곳임과 동시에 초자아의 주도로 인한 기묘하고도 새로운 원칙과 풍경이 성립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환상문학을 보며, 타인이 꾸는 꿈의 괴상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구조물을 관음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정신분석학을 문학에 적용시키는 것이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물론 논쟁의 여지가 있어왔으나, 환상문학만큼 ‘꿈의 해석’이 잘 맞아들어가는 장르도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그리고 여기, 가연이 만들어낸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그 무엇보다도 '꿈'이라는 단어에 적합할만큼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 곳에 초대받기 전에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드(Id)라는 것은 즐거운 만큼이나 또한 위험하기 때문이다.

   가연 단편선 [신체의 조합]에 실린 아홉 편의 작품들이 가지는 다채로운 소재와 발상들은 눈이 부실 정도다. 그러나 그러한 눈부심은 다만 그 상상의 참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절묘함과 촌철살인에 있다. 즉 현실과는 큰 괴리를 이룸과 동시에 현실의 체계를 기묘하고도 자의적으로 역전시키면서 두 세계간의 독특한 '통로'를 형성한다. 분명히 가연은 통렬한 일상의 ‘전도’를 시도한다. 일반적으로 건전하다고 말해지는 성의식은 쓰리썸이 통례인 사회(완전한 결합)에서 비웃음을 사고, 이종족간, 동성간의 결합이 허용되는 사회(밤의 시간)에서 부서진다. 안정적인 봉건적 가족윤리에 대한 편견은 아메의 불행한 운명에 대한 토로(완전한 결합)로 인해 무색해진다. 동시에 가정에 대한 소박한 행복론은 삭막한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늑대인간이라는 비인간적인 종족의 사회 속에서 생생하게 구체화되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나 늑대인간 맞아요).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가연이 준비하는 그 '통로'는 사회 고발과 풍자라는 이름으로 단순화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통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신체의 조합}속의 두 통로 속에 웅크리고 있는 미지의 괴물처럼, 가연이 자아내는 현실과 꿈의 층위들은 한층 더 복잡하고 음울하게 엉켜있다.
   그 까닭은, 그 상상의 층위들이 대부분 현실의 우리가 상정하는 ‘이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가연이 가차없이 분해의 칼날을 들이대는 대상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현상계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갈망하는 이데아의 세계이며, 이미 그 자체로 ‘이상적’인 세계이다. 그러한 곳에서 인물들은 하염없이 방황하고 절망하면서 그 사회의 이상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그와 동시에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우리의 관습체계 역시 신랄하게 부정하는 이중 비판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비판을 통한 이상과 현실의 혼란이 가장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표제작인 {신체의 조합}이다. 고래로부터 인류가 동경하고 이상화해왔던 신의 나라, 신의 말을 하는 전령, 메시아의 말씀을 받들고 수행하는 전쟁 등은, 그 ‘신의 나라’가 알고 보니 신체를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불완전하고 혼돈스러운 차원이었다는 것이 폭로됨으로써 충격적으로 전복된다. 인간들이 열망하는 '영원한 빛'이 가득한 세계는 사실 하루 빨리 완전한 신체를 갖추고 다른 세상으로 탈출하고 싶어하는 아수라장으로, 지옥이면 지옥이지 천국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은 현상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더 큰 긍정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부정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알고 보니 천국이라 알고 있던 곳이 지옥이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천국이더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라 알고 있던 곳도 지옥이고 우리가 사는 곳은 더 심한 지옥이더라’는 것에 더 가깝다. 천국과 연옥, 즉 이상과 현실의 층위는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마침내는 그러한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추구할 이상이 붕괴된 주인공은 급박하고 목적지 없는 탈주를 시도하여, 마침내 두 세계의 메커니즘을 완전히 파괴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구도는 계속해서 반복되며 ‘환상적 비극’을 생성해낸다. {완전한 결합}에서의 세 가지 성(性)의 완벽한 결합이 이상시되는 환상적 세계는 그 ‘완전성’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실상 불완전하고 공허한 세계이며,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모순과 불합리는 근본적으로 이 세계에서도 비슷하게 재생산된다. {누가 나의 오리 벤쟈민 프랑크푸르트를 죽였나}에서는 여성이 오리로 ‘치환’되며, 주인공은 그야말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케 하는 집착을 보인다. 남성집단의 근원적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그 곳은 총소리와 소유욕의 좌절과 근원적 결핍이 공존하는 혼란의 세계, 환상의 악몽이다. {치누아}에서는 부족사회의 기반을 형성하는 신앙 체계가 인간 본성의 잔혹함과 권력싸움에서 비롯되었음을 갈파하며, 이상과 믿음에 대한 고고학적 분쇄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항상 그 ‘이상적’ 세계가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깨닫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모두 그들 세계에서의 일탈을 시도한다. {신체의 조합}에서 자신의 세계를 이탈했던 ‘나’는 {누가 나의……}에서 아버지와 ‘형’이 된다. 인형을 모두 유치하게 여기는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의 세계에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인형을 아끼고 소중히 돌보며 사회의 통례를 부수는 리아로가 된다. 이들의 몸부림은 전도된 세계 속에서 또다른 이상으로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본연의 의미를 찾기 위한 초극의지이다.

  그러한 갈등은 의미심장하게도 성(性)의 문제를 통해 제시된다.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결핍은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서 극복되는가? 어머니의 태내로 돌아가려는 본능, 사랑하는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고 합일하는 일체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맺음, 영원한 동반자와 이해자가 존재한다는 것, 선명한 선혈과 고통과 희열로 기억되는 첫 사랑의 원초적 공유―――그 모든 성애(性愛)의 법칙은 인간의 구원일 것인가?사랑이라는, 절대적으로 소중한 ‘그 무엇’의 의미는 불합리한 세계에서의 도약인가, 그 세계의 일부분일 뿐인가? 가연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꿈과 환상의 근간에 있는 리비도에의 열망과 그와 연관한 결핍, 자아 상실, 자아완성에 대해서 과감하고도 농밀한 기술로 탐닉한다.
   {완전한 결합}은 그 기술의 정점이다. 아메, 샤하, 주트라는 세 가지 성으로 이루어진 그 곳에서 벌어지는 카메와 길로스의 언쟁은 사랑으로 인한 결합에 대한 화두의 집약이라고 할만하다. 사람들은 세 성별 간의 ‘완전한 결합’을 찾아 적합한 상대방을 끝없이 찾아다니며 섹스를 하고 후손을 잉태한다. 그러나 그러한 결합 속에서 완전한 사랑은 찾을 수 없고 관계의 파행은 반복되며 양육과 가족구성을 둔 사회모순은 확장된다. 영원한 동반자를 약속한 리론과 사스카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 아메인 리론이 출산 후 급속히 늙어가면서 자신의 삶의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과정은 사랑의 찬연함과 그 희망의 좌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연이 그리는 모든 세계는 그렇게 사랑에 대한 추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혼의 원초적 교감을 갈망하는 그 성애의 세계는 달리의 한 폭의 그림과 같이 그려지면서 욕망의 분출과 변형, 억압을 복잡다단하게 교차시킨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속에서 주인공들이 경험하는 것은 실패이며 좌절이다. 그들은 모두 극적인 체념과 자기파괴에 봉착한다.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이 가졌던 꿈과 갈망을 체념시키면서 과거로부터 쌓아왔던 자신의 일부분을 부정하는 그들의 모습은 절망적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은 그 자체로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절망은 더욱 위태롭지만, 그 위태로움은 그들의 눈물과 고통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의 소녀가, {나 늑대인간 맞아요}의 아들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고 어엿한 인간이 되기 위한 ‘성장’의 일환인가? {신체의 조합}에서의 ‘내’가 통로를 부수는 것으로서의 절망은 극단적인 탈주의 발로인가?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의 리아로가 자신의 소중한 분신을 처절하게 파괴하는 것은 자기부정을 통한 절망인가? {루운 평원}에서의 키건은 아이섭의 상실을 두고 무엇을 후회했으며, 무엇을 다짐했는가? 어떤 방식이든, 혹은 어떤 목적들의 조합이든, 그들의 절망은 가파르며 극단적이고 위태롭다. 이것은 다만 가연의 필력에 있어서의 호흡의 가파름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상실에 대해서 “이 빈 공간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겠지만, 그 대가로 난 다시는 울지 않을 수 있을 거다.”(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라고 눈물을 삼키며 노래한다. 그러나 그러한 다짐은 상실과 좌절으로 텅 비어버린 공간을 가슴시리게 간직하겠다며 슬퍼하겠다는 것인지, 혹은 그러한 상실의 화전(火田)을 일구어 자신의 자아완성의 기틀로 삼겠다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리아로가 카의 토로를 듣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는지, 이렇게 모호한 절망과 체념, 안정의 교차는 그 자체의 불안정함으로 순수하며 그렇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동시에 한계로 남는다. 그들은 그저 ‘상처를 입은 가축은 재빨리 죽여서 고통을 없애’줄 뿐이다. 그들이 그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희망과 고집과 염원에 대한 그 어떤 깊은 재고도 통찰도 없으며 따라서 변증법적 발전도 전면적인 부정도 없다. 그 모든 것은 황급하게 뒷걸음질쳐 사라지고 사람들은 위태롭게 입술을 깨문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키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결핍으로서의 완성은 다시 말해 완성인가, 결핍인가? 환상은 환상일 뿐인가? 우리가 믿는 사랑은 존재하는가? 상실과 욕망의 줄타기 속에서 가연은 우리에게 우리가 잊어가고 있던, 혹은 잃어가고 있던 그 무엇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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