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소설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2004.04.30 23:4704.30





readingfantasy.pe.krylpatae@hyosung.com0.

이 글을 준비하면서, 옥스타칼니스, 라는 말의 뜻이 궁금하여―――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슨 신의 이름이 아닐까라는 생각에―――네이버 지식IN 검색을 해보았는데 <재미있는 판타지 좀 추천해주세요> 라는 글에 대한 답글 중 이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이하, 아이들)]을 추천하면서, 게임 판타지의 장르를 개척한 글이라는 소개를 해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전에 [아이들]에 대한 정체성 논란에서 과연 이 글을 환타지로 보아야 하나 소위 순수소설로 봐야하는가 그도 아니면 이 글은 사이-파이인가 라는 논란을 봤던 기억이 났습니다.


   1.

   작년, 코엑스의 도서박람회에서 [아이들]을 구한 후 다시 읽었을 때, 특별히 눈에 띄었던 부분은 바로 시대의 배경이 2003년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더이상 미래라고 할 수 없지만, 작가가 글을 쓸 당시인 1998년에는 충분히 먼 미래인 2003년, 글을 쓸 당시와 글의 배경은 밀레니엄의 한계선 저 너머 아득해보이는 격차를 가지고 있던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글은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액자 구성은 그런 느낌을 강하게 살려주는 구실을 합니다.

   주인공인 원철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집단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입니다. 그리고 그는 정신적 외상을 가진 성불구자이며, 온라인 화상(?!) 머드게임인 팔란티어 내에서는 보르미어라는 우직한(!!)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이기도 합니다. 그가 살고 있는 2003년의 서울은 메마르고 건조하며 탁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는 도시입니다. 작가의 담담한 서술을 통해서 읽는 독자는, 정말 서울은 살만한 곳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아이들]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다른 여러 소설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살이 고단한 바를 직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의 (소위) 순수 소설들은 일상 속에서 묘한 괴리감을 느끼는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디테일한 일상, 묘하게 찌릿하게 울리는 글을 읽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어보게 만드는. (요즘 글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좀 읽긴 해야겠군요. 쩝;) 아직도 그런 글들은 계속되고 있고, 묘사는 살아있지만, 서사는 죽은, 그런 글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요.

   [아이들]은 여섯 권에 걸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액자 바깥에서와 안에서, 줄기차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신, 음모, 모략, 술수 같은 기본적인 인간의 미덕(?!) 뿐만 아니라, 공해, 소음, 단절, 부재 등 현대 문명이 우리 인간에게 덧씌워주어 인간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만드는 부분까지 성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철이 뒤통수를 맞는 것이나, 보로미어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들을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은, 실제로 인간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럼에도, [아이들]이 수작인 것은, 묘사는 투박하더라도 서사가 유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을 잡아내더라도 단지 묘사 뿐이라면 <보여주기>에서 마치는 미완의 글일 뿐이겠지만, 묘사는 조금 거칠더라도 짜임새있게 흘러가는 글이라면 작가와의 소통을 조금 더 깊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

   많이 읽지 않은 주제에, 저는 90년대의 한국 소설을 그다지 좋지 않게 보고 있습니다. 시대 속의 개인에서 개인 밖의 시대로 그 초점을 옮긴 이문열 씨 이후로, 한국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쏠려버렸습니다. 처음, 박일문 씨의 글을 읽었을 때, 처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았을 때, 그 느낌은, 같은 것들의 홍수 속에서 부닥치다 보니까 이제는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조금 투박하더라도, 공감대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혹은, 상황과 형편에 기대이지 않은 인간의 이야기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철 그리고 원철의 친구인 형사 욱의 우정과 정의. 원철과 미란이 현실과 가상 세계에서 느끼는 갈등과 신뢰. 이런 거창한 단어가 우리나라의 소설 속에서 얼마나 배척되고 있습니까. 비현실, 이라는 단어로, 어린이들의 동화와 소위 장르 소설이라는 울타리에 갇혀버린 순수와 환상.

   그 올무를 풀어버리는 것들에 열광하는 것이 지금 독자로써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아이들]은 적나라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련되지 못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정직하다 못해서 속보이는 투박함. 인물들은 있음직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지만, 너무 뚜렷하게 보여서 부담스러울 정도이지요. 원철을 자극하는 수정의 일련의 행동은, 현실적인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을 뿐더러, 등장인물들이 전형적인 모양을 띠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입니다. 초기의 환상 소설들이 대체로 그러하지만, 인간의 다변함을 세심하게 터치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론, 그러한 전형적인 인물상이 환상 소설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낸다는 식의 글을 이미 한 번 쓴 적이 있고, 그것이 [아이들] 정도의 글이라면 그다지 흠잡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액자 속의 가상 세계에서는 한 개체로써의 인간 속에 숨겨져 있는 본능적인 다중성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보로미어의 단선적인 내적 갈등부터, 함께 파티를 이루는 인물들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시점에서 드러나는 개인적인 갈등 및 집단의 갈등이 보로미어를 중심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은 세련되어 보입니다.

   이런 이야기의 흐름 바깥쪽에는, 작가가 가진 의사라는 포지션이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양하게 등장하는 의학적 용어와, 끊임없이 암시되지만 저같이 느린 사람은 쉽사리 잡아내지 못한 반전의 이면에는, 작가의 무시못할 배경지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상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작가가 들인 정성은, 1998년에 보여준 밀레니엄 이후의 시대라는 무시못할 압박과 함께 독자를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글이 독자에게 던져주어야 할 가장 큰 덩어리는, 단연코 재미여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분명히 그 부분에서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투박한 스토리를 설득력있는 배경의 구축과 거부할 수 없는 화제들을 통해서 독자를 소설의 구렁텅이로 밀어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두가 눈치채셨다고 하는, 그러나 저는 결코 알지 못했던, 충격적인 결말의 반전까지.

   비록 정치적으로, 결말은 실패한 것임에 분명합니다만, 작가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것을 촉구하기보다는, 미래가 미래다라는 당위로 설득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만, 글이 정치적인 성과까지 거둘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작가는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제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는 분명히 성공하였습니다. 저는 작가의 아날로그적인―――사랑과 우정, 그리고 정의―――가치관을 믿기로 하였으니까요.

   사족이지만, 디지철의 총아인 환상 소설, 통신 문학이 주로 이야기하는 것들이, 아날로그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 할 뿐입니다.

   작가가 많이 배웠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정말 많이 공부하였습니다. 직업과 관련된 공부이던, 혹은 미리 알고 있는 것을 써먹었던 간에 말입니다. 이 글은 서울대 의대 졸업생의 글로써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습작가였을 작가가 그의 소설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열정을 들였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이영도 씨를 워낙에 좋아한다는 사실이 이미 주지된 것이지만, 다른 부분보다도, 그의 성실함을 좋아합니다. 그만큼의 다작도 찾기 드물며, 가지고 나오는 작품마다 문제작을 들고 나오면서도, 한 번 정한 글은 마지막까지 끌고 가 주면서 독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독자가 느끼는 글의 힘은 바로 그런 것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겝니다.


   3.

   그 재미라는 것이 워낙에 주관적인 것이라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윤세 씨의 글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재미를 주니 그것도 글로써의 의의가 있다고 하면 지나친 상대주의겠고, 만약에 칼로 순두부를 썰듯이 글과 잡문을 구분할 것 같으면 엘리트주의자(?!)들과 별로 다를 것 없을테니 말입니다.

   조금 더 물고 올라가면 결론도 없을 문학성 논쟁까지 갈터이니, 재미에 대해서만 몇가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면,

   우선, 주관적으로 재미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취향에 달린 바이고 사람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재미의 요소가 다를테니, 이것으로써 <재미있다>라는 결론을 끌어낸다는 것은 억지몽룡일 것입니다만, 분명히 우선되어야 하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독서가, 실은, 누가 읽었으니까, 누가 좋다고 하니까, 읽게 되고 별 감흥도 없이 중간 즈음에서 던져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독자 자신을 사로잡지 못하는 책을 아무리 좋다고 외쳐봐야 별무소득일겝니다.

   따라서 우리의 독서는 주관적인 재미를 느낀다는 전제 하에서,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조금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면 <재미의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서평과 추천의 중요함이 드러납니다. 무턱대고 재미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 서평을 보니까 정말 이 글은 나를 끌어안을 수 있겠다는 <재미의 공감대>가 만들어 질 여지가 있는 글이 비로소 재미있는 것일겝니다. 따라서 많은 부분, 독서는 객관적인 설득을 통해서 주관적인 재미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가집니다.

   (물론 우연히 잡은 글이 사람을 사로잡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말입니다. ^^ 제게는 [윈터 스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주관적인 것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테니 차치하더라도, 객관적인 재미는 반드시 재미의 요소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바로 <주제>일 것입니다. 제가 읽은 환상 소설 중에서 그 주제가 주는 재미가 지극하였던 글을 꼽으라면, [드래곤 라자]와 [퓨처 워커]를 꼽고 싶습니다. 물론 이 글들은 잔재미로도 유명하지만, 잔재미 이전에 고정관념을 환기시키는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글을 길게 끌고 갔던 원동력이니까요.

   [아이들]의 경우에는, 익숙함에의 재미일 것입니다. 1960~70년대에 헐리우드 키드가 있었다면, 지금은 초고속인터넷 키드(?!)가 있지요. 컴퓨터를 잡기 시작하면 누구나 시도했던 머드 게임의 추억을 자극하면서, 누구나 상상하는 가상 세계를 톨킨 식의 배경으로 풀어내면서 독자의 애간장을 녹인, 처음 독자를 지탱해주었던 것은 바로 익숙함에의 것입니다. 하나 더, 환상 소설에는 익숙치 않지만 추리 소설에는 익숙한 독자들이―――해문 걸작선이라든지, 빨간색의 애거서크리스티 미스터리는 대표적인 독서대상이었지요―――그 익숙함 속에서 쉽게 몰입하도록 해준 추리적인 요소 또한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영도 씨는 낮설음의 재미를 던져주지요. 사실 이영도 씨의 반전은 낮섬 때문에 가능한 것일 겝니다. 작가가 제기하는 새로운 세계는 충분히 낮선 바, 독자는 수동적이 되어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가 모든 것인줄로 생각하지만, 작가는 조금씩 조금씩 세계를 <더> 보여주고, 독자는 그것이 반전이라고 생각하면서 흥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영도 씨가 주는 <낮설음의 재미>는 탄탄한 스토리 라인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뜬금없는 반전은 결코 아니니까요.)

   그리고, 반전의 재미... 가 바로 그러하지요. [아이들]은 쉴새 없이 움직이는 형사 욱과 게임 속의 보로미어처럼 그렇게 독자들을 숨가쁘게 몰아갑니다. 그러다가 던지는 반전과 충격. 반전이 단지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 정도라면 그것은 반전이 아닙니다. 반전은, 충격 속에 여운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것은 다시 주제와 연결됩니다.

   [아이들]이 던져주는 <경고>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 인터넷 키드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어려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충격적인 것입니다.

   (하나 더, 저는 이야기의 재미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서는 지엽적인 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극대화시켜주는 글은 이영도 씨의 [폴라리스 랩소디]라고 생각합니다.)


   4.

   결국, 책의 줄거리는 하나도 소개해주지 않고, 글의 매력적인 에피소드는 하나도 늘어놓지 않은채, <한 번 읽어보라!>고 강권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하나 더, 글을 조금 보충할 마음이 있습니다. 게으르지 않다면, 5월 중순 쯤에 이 글에 덧달겠습니다.

   즐거운 글읽기 되시길.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댓글 1
  • No Profile
    르혼 04.05.06 18:09 댓글 수정 삭제
    글의 주제에 공감하고 끌어가는 구성력에 흡족해했지만, '한국 최고의 프로그래머' 및 기타 사회적으로 우월한 2000명이 자신이 빠져든 게임에 대한 탐색을 그리 등한시한다는 설정에는 좀 답답했었습니다.
    그것이 주제에 크게 연관있다거나 깊이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닌, 그저 '설득력'만 있으면 되는 단순한 설정에 불과했기에 더욱 그러했지요.

    훌륭한 작품이지만, 완성도는 좀 아쉬웠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