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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sia78@hotmail.com이번에 스티븐 킹 걸작선이라고 스티븐 킹의 저작들이 한꺼번에 출간되어 나오면서 출판사와 언론에서는 선명하게 숫자로 낙인찍힌 그의 기록들을 줄줄 읊었다.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한 작가. 극장과 TV 영화, 미니시리즈 등으로 제작된 것만 70여 차례. 35개국 33개 언어로 번역돼 3억 권 이상이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소설가.” 좋다. 아주 간명하다. 스티븐 킹보다 더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었거나, 스티븐 킹보다 더 많이 팔린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거나, 스티븐 킹보다 더 널리 번역된 작가는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숫자들을 한꺼번에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티븐 킹은 독보적인 존재이다. 숫자보다 더 선명하고 알기 쉽게 그 사실을 보여 주는 수단은 없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에 새겨진 스티븐 킹의 낙인은 숫자가 아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셜록 홈즈와 위상이 비슷했다. 이번에 다시 스티븐 킹을 읽기 전까지 필자가 스티븐 킹 하면 떠올리는 수식어는 “무서워서 책을 끝까지 다 못 읽은 유일한 작가”였다. 스티븐 킹으로도, 스테판 킹으로도 표기되어 있는 그의 이름 자체가 너무 무서워서 그 이름이 호러 킹으로 다가왔다. 무서워서만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 느낌은 변하지 않았고, 새로 나온 책의 표지를 보니 출판사 측에서도 그 점을 인지하고 내세우는 듯한데, 스티븐 킹은 그 자체로 ‘아이콘’이다. [쇼생크 탈출]이나 [스탠 바이 미] 등 공포소설이 아닌 걸 쓴다고 해도 여전히 스티븐 킹은 스티븐 킹이며 동시대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과 거장의 풍모를 지닌 작가는 찾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문학성이 뛰어나서 추앙받는 거장들과도 조금 다른 느낌인데, 설명하기가 몹시 어렵다. 사실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스티븐 킹은 스티븐 킹이다, 라고.

   예전에 필자가 무서워서 끝까지 다 못 읽은 책은 스티븐 킹의 단편 걸작선처럼 나온 단편 선집이었다. 꼭 집어 그만 읽겠다고 마음 먹었던 단편은 빠져 있지만(이 단편집은 스티븐 킹이 원래 출판했던 그대로이고, 그때 읽은 단편은 한국 편집자가 골라서 묶은 거였으므로 수록 작품이 좀 다르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이번에 나온 단편집은 무섭지 않았다. 물론 무서운 작품과 무섭지 않은 작품이 섞여 있기도 하고, 워낙 옛날 작품이라 (77년도작) 이제는 그보다 더 무서운 게 널리고 널렸거나 아니면 여기에서 새로웠던 아이디어가 이제는 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빛나는, 현재 2004년을 사는 우리가 보기에도 의미가 있을 만한, 특히 작가와 번역자와 독자 즉 소비자를 겸하는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의미가 있을 만한 키워드 몇 가지가 남는다. 공포, 단편, 베스트셀러.

   공포란 무엇인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스티븐 킹은 서문에서 자기 견해를 깔끔하게 밝힌다. 공포란 인생 여기저기에 존재하며, 사람을 눈멀게 하고 사람의 지각을 서서히 갉아먹는 감정이다. 공포, 그리고 공포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관심을 가지거나 심지어 거기에서 환희를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죄책감을 가진다. 그런 면에서 두려움은 성과 좀 닮았다. 공포소설이나 공포영화나 아무튼 공포를 다루는 예술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선과, 위험하고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 사이의 교차점을 짚어 낸다. 현실과 상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 공간에서 공포소설 작가는 작업한다. 공포소설은 있을 리 없는 존재와 일어날 리 없는 사건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는 동시에 남에게 일어난 것을 구경하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한다.
   이에 더해서 해야 할 이야기이자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면서 스티븐 킹이 덧붙이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지점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려면 “소설을 읽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눈과 귀를 얼마 동안 잡아 둘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그 세계에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다. 스티븐 킹의 서문에 앞서 실린 찬사를 쓴 존 D. 맥도널드도 외친다. “이야기. 이야기. 빌어먹을 이야기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를 따라 외친다. “그렇다, 그렇다, 빌어먹게도 정말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란 물론 영어로는 story라고 하는 그것이지,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읽을 만한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 탄탄한 이야기. 이야기를 잘 만드는 것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을 잘 이해하는 재능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교차점을 짚어 내는 것은 몹시 미묘하고 섬세한 감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티븐 킹이 아무리 문장을 잘 쓰고 분위기를 잘 몰아가도 이야기가 읽을 만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외의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 또한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무리 이야기가 좋아도 일단 두 가지에 실패하면 공포를 일으킬 수 없다. 분위기 몰기와 작가 죽이기. 물론 감동을 주는 것도 어렵고 웃음을 주는 것도 어렵고, 글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어떤 글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비유를 들어 조금 상상해 보자. 글을 제대로 몰입하여 읽는다는 것은 그 글이 보여 주는 다른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그 세계가 사실은 하나의 무대라는 것을 알아도 웃을 수는 있다. 슬픔? “에이씨, 눈물 짜려고 난리 치고 있네!”라고 생각이 들면 확 피가 식긴 하겠지만 그래도 울 사람은 운다. 그렇게 말하면서 손수건 짜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앞에 분명히 사람이 초를 들고 자신을 안내하고 있으며 초의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은 물론이고 촛불로 보아도 확연히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무대 장치라는 표시가 나는 순간 공포는 대폭 감소한다. 그렇다고 아예 환한 대낮에 조용하게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일상이 돌아가다가 본론이 튀어나온다면 공포를 일으키기보다는 깜짝 놀랄 것이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공포소설의 본질이 현실과 무의식의 교차점을 짚어내는 것이라면 보다 효과적으로 그 지점을 드러내고 그 지점까지 독자의 손을 끌고 가기 위해서는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긴박감과 개연성 사이에 놓인 좁디좁은 줄. 사실은 작가가 그 양쪽을 잡고서 이야기가 그 위로만 가도록, 옆으로 새지 않도록 계속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이면 안 된다. 존 D. 맥도널드는 작가의 간섭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저자의 간섭이란, 부적절함의 도가 지나쳐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고 이야기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하는 그런 구절을 말한다. 놀란 독자가 이야기에서 발을 빼 버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가 정말 중대한 결정을 이유 없이 틀어버리는 짓을 할 리야 없겠지만, 작가가 뒤에서 기계의 신Deux Ex Machina처럼 대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야기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 못한 것으로 낙인 찍히고 만다. 마치 버거운 시험을 보는 아이 뒤에 부모가 서 있으면 답을 귀뜸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섬세하게 교차점을 짚어 이야기를 만들고, 긴박감 있으면서도 개연성에 어긋나지 않게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러면서도 들키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다니, 작가가 아니라 초인에게 하는 요구 같기도 하다.

   이러한 까다로운 요구에 ‘단편’이라는 요건을 더하면 다시 또 제한이 줄줄 이어진다. 단편을 애호하는 이들은 장편을 쓰기 전에 단편부터 쓰며 연습하겠다고 하는 이들의 무지를 점잖게 교정해 준다. 단편과 장편은 아예 특성이 다른 장르라고. 글의 길이가 짧아서 소재와 주제에 제한이 생긴 것이든, 단일한 소재와 주제를 간명하게 나타낸 결과로 길이가 짧아졌든 간에 단순히 장편을 줄이면 단편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충분히 보이고 싶었던 것을 다 내보이고도 완결성을 가지는 소재와 주제를 선택하여 완성해야 제대로 된 단편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개 단일한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쓰게 되고, 단일한 것이니만큼 발상이 중요해지고, 또한 발상을 얼마나 모자람 없이 흡족하게 펼쳤는가가 관건이 된다. 발상이 신선했으되 글에 강약이 부족하고 기승전결을 잘 배치하지 못해서 흐지부지하게 끝나면 역시 단편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잘 쓴 단편은 대개 완벽한 균형과 대칭성을 지니거나 완전히 불균형하게 주제와 소재만을 위해 돌격하는 양 극단을 보여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완결성. 장편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거나, 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결말, 또는 일껏 분위기 조성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를 잔뜩 품게 만들었으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독자의 기대와 함께 결말이 슈슛 소리 내며 사그라지는 것은 단편 이전에 이야기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공포소설’을 잘 쓴다는 것, 그리고 많이 팔아먹을 수 있다는 것, 소위 말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것에서 스티븐 킹은 위에서 말한 저 요건들을 잘 충족하는 작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첫머리에서부터 무언가 비틀린 틈새가 있음을 자연스럽게 내비춘다. 첫머리에서 묘사하는 풍경이 섬뜩하다든가 충격적이고 기괴한 사건을 먼저 던져 놓고 시작한다거나, 이야기를 시작하는 인물의 불안증, 신경증, 정상이 아닌 집착 등이 자연스럽게 대사에서 배어나온다거나. 딱히 짚어서 독자들이 이거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긴장하고 뒤에 무엇이 올지 준비한다고 해야 할지 각오한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충분히 경고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트럭}이란 단편에서 불안에 덜덜 떠는 쇠꼬챙이 같은 남자로부터 시작하는 묘사, {옥수수 밭의 아이들}에서 길을 잃어 미치도록 불안에 떠는 여자와 자기도 불안하지만 여자에게 퉁명스럽게 답함으로써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남자의 대화, {맹글러}에서 충격적인 시체 묘사가, 아니 차마 묘사도 다 나오지 않을 참혹한 사건을 보여 주는 첫 장면 등. 게다가 그가 건드리는 지점, 그가 만들어 내는 공포란 것은 그저 잔혹한 것이 아니라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일어나면 무척 끔찍하겠다고 생각하는 일에 상상력을 발휘했다거나, 인간이(특히 미국인에게는 직빵으로 보였는데) 피하거나 꺼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항상 관심을 가지는 주술적이고 악마적인 의식과 존재를 눈앞에 내놓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 면에서 공포도 웃음과 마찬가지로 지역색이 강한 분야인지라 그가 미국에서 엄청난 베스트셀러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이콘은 될지언정 판매부수로 증명된 적은 없다는 점을, 읽으면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스티븐 킹의 글은 그야말로 ‘참 잘 썼다.’ 어느 하나 과도하게 감정이 넘치거나 하지도 않고 섣불리 작가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단편과 장편의 구조나 패턴을 완전히 파악하고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몇 편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할 정도로 완벽한 구조와 완결성을 가진 작품들이 [스티븐 킹 단편집]을 채우고 있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그 하나만으로 완벽한데 모아 놓고 보니 어떤 경향이 보이면서 비슷비슷해 보이게 되는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또 단편집의 특성을 결정짓는 요소이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는 면이라고 할 수 있다. 리뷰를 쓰는 입장에서 밝히는 또 하나의 단점이라면, 각각의 단편이 단일한 아이디어를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어서 한 마디라도 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된다는 점이다. 도대체 줄거리 소개를 할 수가 없다(웃음)!

   그러나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스티븐 킹에게는 있다. 공포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작가가 그걸 단초로 해서 인간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로 나아가는 모습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의 한 감정에 대한 이해가 전체로 퍼져 나가서 결국 작품 세계가 풍요로워지는 그 미래가 이미 이 단편집에서 보인다. {벼랑},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나 {사다리의 마지막 단}, 그리고 {방 안의 여인}을 보면, 특히 {사다리의 마지막 단}을 보면 공포보다는 인간의 욕망이나 추악하고 나약한 본성에 대해서 다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스티븐 킹은 스티븐 킹이라서 그걸 나타내는 방식 또한 결국 공포 소설이긴 하지만 {사다리의 마지막 단}은 그렇지도 않다. 그건 그야말로 심리 단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섬뜩한 인간 본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포물이라는 인상이 압도적인 [캐리], [세일럼스 롯], [샤이닝] 등에서 휴먼 드라마라고 분류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린 마일], [돌로레스 클레이본], [사계]와 같은 작품들로 훨훨 멀리까지 헤엄쳐 나가며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고도 세계를 확장하는 대가의 풍모가 엿보이는 단편이다.

   물론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이 단편집은 진짜 초기작들이어서 스티븐 킹이 쓴 것치고 유치하기도 하고 이제는 낡은 아이디어가 된 작품도 많고 깊이도 얕은 편이다. 정서가 너무 미국적이라서 우리에게 잘 안 와닿을 부분도 정말 많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괜찮은 단편집이고,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앞서 한 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설명은 끝난다. 스티븐 킹이 아닌가.
   결국 스티븐 킹은 스티븐 킹인 것이고, 그것이 스티븐 킹에게 존재하는, 스티븐 킹이 쌓아 올린 단순한 베스트셀러 공포물 작가 이상의 ‘아우라’이며, 그것이 스티븐 킹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제나 덧붙일 수밖에 없고 결국 결론을 거기로 끌고 갈 수밖에 없는 ‘플러스 알파’인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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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3.11.29 01:58 댓글 수정 삭제
    ecrir님이 쓴 리뷰를 보면 그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리뷰가 맛깔스럽달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