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Running

2007.04.21 01:0004.21

  소리는 진공 속에서 침묵한다. 그래도 나는 숨을 죽였다. 자원 채취선 하나가 내가 숨은 소행성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엔진을 끄고 비상전력을 최하로 돌려둔 뒤 불까지 내렸지만 그는 수많은 소행성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있는 소행성으로 다가왔다. 희망을 품기보다 순간 가속 추진기 버튼에 손을 올려둔 채 대기하는 게 낫겠지. 모든 노력을 다 쏟았고 숨조차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모양이다.
  잠시 후 몇 개의 광물을 채취한 채취선은 다른 소행성 테두리를 향해 떠났다. 나는 호흡을 뱉어내며 추진기 버튼을 눌렀다. 다시 러닝이다.

  나는 원래 택배원이었다. 거대 군용선 중 하나인 그 유명한 카운티스의 창고실 고아원에서 자라 파일럿 실습선을 훔쳐 타고 도망쳐 나왔을 때부터 나는 끝없이 우주를 달리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일단 돈을 벌어야 했고, 택배일을 하며 러닝에 미쳐 더 빠른 엔진과 가속기를 찾아 다니다가 깨달았다. 몸이 더 가벼워져야만 한다는 걸.
  나의 우주선은 작고 더 가벼워져 갔다. 수많은 항성계들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지만 적재량이 큰 화물선을 모는 택배원들의 수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더 가벼워질 수가 없었고 그 즈음 슬슬 남들이 꺼리는 <주의사항이 3가지 이상 붙은 의뢰>들을 받기 시작했다.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 어느날
  화상 통화를 꺼리는 의뢰인이 작은 상자 10개를 주며 1. 상자 안에서 어떤 빛과 소음과 진동이 일어나도 절대 열면 안되며 2. 싣고 날기 시작하면 배달하는 내내 1AU/h의 속도로 날아가야 하며 3. 그러므로 목표 좌표에 도착했으면 해치를 열어 상자들을 우주로 내보내고 속도 그대로 날아가다가 돌아오라고 말했다. 더불어 4. 통상 항로로 가지 말고 지정해주는 좌표 순서대로의 지역을 거쳐 가야 하며 5. 그 중에는 블랙홀로 추정되는 지역 근처 좌표도 있다고 했었다. 난 해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은 없었고, 상자들은 폭발적인 빛으로 별의 탄생을 알렸다.

  그 어느날
  괴이한 생체 가면을 쓴 의뢰인이 작은 풍경이 들어있는 주먹만한 유리공을 주었다. 1. 안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신경 쓰지 말고 2. 가끔 유리공 안의 액체가 핏빛으로, 아니 붉게 물들면 재빨리 급속 냉동 장치에 넣었다 빼두고 3. 정거장에 도착하거든 누구든 간에 제일 첫번째로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라.라고 의뢰인은 말했다. 어째서 가는 내내 냉동 상태로 두면 안 되는 겁니까?하고 묻자 의뢰인이 말했다. 4. 그리고 더 이상 질문 하지 말 것. 나는 유리공을 배달했다. 수취인은 어둡게 웃으며 유리공을 삼켰다.

  그 어느날
  오르간 연주와도 같은 목소리의 외계인이 말했다. 어둠의 절반을 배달해 주시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의심 속에서도 중력에 곤두박질하듯 의뢰를 수락했다.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의뢰인은 그 외엔 말이 없었다. 나는 전쟁중인 소행성 테두리로 날아갔다. 정찰선들을 따돌려 소행성들에서 엔진에 보충할 광물과 연료들을 구하고 조금 전처럼 채취선을 따돌렸다. 엄청난 속도, 거절할 수 없는 달리기, 항성계들을 돌파하는 러닝. 떠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어둠의 절반을 나를 수 있는 방법이. 한때 느린 실습선으로도 속도를 즐길 수 있었던 나의 비밀 장소가 있었다. 나는 달렸다. 버려진 정거장은 옛날 그대로 그 좌표에 떠다녔다. 나는 오래된 기계를 작동시켰다. 빛으로 쏘아진 나는 흩어진 별 먼지를 뚫고 박살 난 정거장을 지나 별들이 모이는 검은 구멍에서 휘어져 불안정한 터널 속을 달렸다. 의뢰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짐을 버리고, 출력의 한계까지 올렸다. 나는 이 의뢰와 더불어 받았던 사소한 의뢰 더미들을 버렸다.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빛들이 인식하기도 전에 지나가는지 눈앞은 온통 어둠이었다. 나는 여분의 산소통을 버렸다. 계기판은 더 이상 지표가 되어주지 못했다. 폐가, 아니 그것보다도 심장이 달리고 있었다. 온 맥박이 눈앞의 영원을 향해 뻗어나갔다. 나는 우주를 갈랐다. 공기도 무엇도 없는 암흑물질은 깨끗이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 나는 어둠의 절반을 채우던 별들을 실어 날랐다.


  우주선 안에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 퍼졌다. "멋진 완주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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