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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달들

2007.04.21 00:5904.21

  "아빠, 달이 쪼개져."
  푹푹 찌는 여름 밤에 꾸벅꾸벅 졸다가 별 보여 달라는 딸아이에게 옥상으로 끌려나온 내가 애시당초 의욕이 있을리가 없었다. 이런 날의 천체관측은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물체에 90mm 굴절 망원경을 고정시켜 놓고 하드를 빨며 부채질을 하며 '응, 응' 거리는 것이 상책이었고, 그렇게 해서 7월의 보름달은 여섯살짜리 꼬마 여자아이에게 스토킹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10여분간 열심히 달을 바라보며 '우와- 우와-'거리던 아이가 호기심과 당혹감이 똘똘 뭉친 얼굴로 날 바라보며 한 말이 저것이었다.
  난 덜컥 겁이 났다. 렌즈가 금이 갔으면 큰일인데. 작년에 사서 몇번 써보지도 못한건데 벌써 망가지다니. 성남으로 이사올 때 떨어졌었나? 옥션에서 택배가 올 때 부딪친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혹시 그 인간 사기꾼 아냐?
  "아빠아- 이거 봐봐, 이거 이거."
  딸아이의 보채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혹시 멀쩡할지도 몰라. 나는 나도 모르게 씹어대고 있던 하드 막대기를 의자에 내려 놓고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댔다.
  이럴수가. 진짜로 달이 쪼개지고 있었다.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쩌억-'하며 갈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아래가 눈에 띄게 옴폭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두 틈은 점점 안으로 파고 들었다. 옆에서 딸아이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지? 맞지? 달 쪼개지지? 흐흐흐흐-"
  난 펄쩍 뛰어 집으로 내려갔다. 여섯살짜리 악마와 서른 다섯살짜리 곰에게 해방되어 TV와 푹신한 소파를 즐기던 아내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방 서랍장을 습격하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쌍안경과 디카를 움켜쥐고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매섭게 올려다 봤다. 달은 거기 그대로 떠 있었다. 갖 빚어낸 찹쌀떡 두쪽을 엉성하게 붙여놓은 것 같은 저 창백한 천체가 달이 맞다면 말이지만.
  나는 신중하게 줌인을 하고 동영상 모드를 선택했다.
  "왜 그래, 당신? 비행접시라도 본거야?"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엔터프라이즈호를 발진시키는 근엄한 선장의 표정으로 달을 가리키며 쌍안경을 건넸다. "세상에, 저게 뭐야. 저거 달이야?" 기대했던 반응이었으므로 꽤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달은 맨눈으로 보기에도 두조각이 확실했다. 아내와 나는 각각 렌즈와 액정화면에 집중하느라 아무 생각도 없었다. 확실히, 집안에 뭐가 빠졌는지를 알아보는 데에는 남편보다 아내가 더 우위에 있는 것 같다. 5분쯤 후, 내가 막 완전히 둘로 갈라진 달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아내가 꽥 하며 비명을 지른 것이다.
  "어머나! 당신, 시현이!! 시현이 놔두고 온거야?"
  가슴이 뜨끔했다. 이런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시현이 여기 있어요."
  돌아보니 딸아이가 제 키를 훌쩍 넘는 망원경을 끌어 안고 낑낑대며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내는 도끼눈으로 날 흘겨보더니 후다닥 뛰어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망원경은 쓰러지면서 삼각대와 분리되어 구석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심한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시현아. 아빠가‥‥‥"
  "아빠, 나 저거 알아요. 유치원에서 배웠어."
  "응??"
  "아기 만드는거. 조그만 알 하나가 두개로 돼요. 하나는 엄마고 하나는 아기야."
  세상에. 요즘 유치원에선 성교육도 하나? 그런데 아이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았다. 유성색식과 단성생식을 혼동하는 모양인지라 나는 친절한 교육자의 웃음을 띄며 아이의 말을 정정하려고 했다.
  "시현아, 그건 말이지‥‥‥"
  하지만 나는 아내의 싸늘한 눈초리에 말문을 닫아야 했다. '애도 놓고온 주제에 설교까지 하려들어?'라는 무언의 질타. 나는 웃으며 아이의 말에 맞장구 쳐 주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이는 베란다로 종종거리며 다가가더니 이제 완전히 두개로 갈라져 버린 달을 가리켰다.
  "어느게 엄마고 어느게 아기야?"
  "음, 글쎄. 시현이가 보기엔 어느 쪽이 커보여?"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외쳤다. "왼쪽이 더 커요!"
  "그럼 왼쪽이 엄마고 오른쪽이 아기."
  그때 아내가 자상하고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러면 왼쪽은 엄마달, 오른쪽은 시현이 달이네?"
  내가 '나는?'이라고 눈으로 물었지만 아내의 대답은 '시끄러워'라는 표정 뿐이었다.
  "아빠. 아빠. 저게 시현이 달이래요."
  나는 체념하며 아이를 안아들고 달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두개의 작은 반달이었던 것이 점점 둥그래지며 서로를 중심으로 천천히 멤돌고 있었다.
  "시현이는 좋겠네. 달도 가지고 있고."
  아이가 까르륵 웃었고, 나도 미소 지었다.
  "그런데, 좀 걱정이다. 달이 저렇게 되면 뭐 큰일 나는거 아냐?"
  아내가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불안한 목소리였다.
  나는 달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 말대로 꼭 세포 분열 같기도 했다. 엄마와 아기. 꼭 닮은 부모자식. 생물이 흔적을 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벌이는 몸짓.
  시현이가 불편한 모양인지 품에서 꼼지락 거렸다. 사람은 이렇게 자식을 낳아 기르는데, 달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을까? 어쩌면 지구나 태양도 몇십억년간 살면서 꾸준히 자식을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하늘의 별들이 저마다 자식을 만들어서 우주를 차근차근 메워 가고 있다고 상상하니 왠지 마음 한켠이 기분 좋게 묵직해졌다.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둘로 갈라져 왈츠를 추고 있는 달들을 보고 있노라면, 물리학자들의 '초'자로 가득찬 이론들보다 별과 행성의 부모자식 관계가 훨씬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법이다.
  "무슨 일이 날지도 몰라. 근데, 이상하게 걱정이 안된다. 왠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 당신은 안그래?"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응. 나도 그래. 참 이상하다. 그렇지?"
  이제 완전히 둥그래진 달들은 한쌍의 단세포 동물들처럼 밤하늘에 떠서 느릿하고 평화롭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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