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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벚꽃 질 즈음

2007.04.17 07:0304.17

0.
벚꽃은 질 때가 특이하다. 천천히 시들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벚꽃은 꽃봉오리 자체가 툭 떨어져 나간다.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이 찰나에 살다가 죽음으로써 영원이 되는 존재라고 믿었으며, 4월 초 중순 경에 단지 일주일 동안 화사하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그렇게 져 버리는 벚꽃을 그러한 자신들의 운명과 같다고 여겨 사랑했다고 한다.

1.
오늘 아침은 해가 뜨지 않았다. 잿빛으로 가라앉은 하늘에서는 안개비가 뿌리고 있었다. 희뿌연 대기가 사위를 채워 수평선을 지워버리고 있는 가운데, 하늘과 바다는 하나가 되어서는 음울하게 울부짖고 있고 함상에 걸린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쿄쿠지츠쇼우텐키)는 안개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일본제국 해군 장교, 히나츠 모리시마 소위는 멍한 눈으로 더 이상 나부끼지 않는 기를 응시했다.
단상에 서서, 지금 항공모함 갑판 위에 정렬해 서 있는 스물 네 명의 특공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비를 맞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사령관 오니시 중장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군들도 익히 알다시피, 제국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위기로부터 제국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대신도, 군령부총장도 아니다. 물론 나같은, 낮은 지위의 일개 사령관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제군들처럼 순진하고 기개에 찬 청년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리시마 소위는 중장의 훈시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축 늘어진 채로 굳어 버린 듯한 기에만 못박혀 있었다. 그러나 훈시는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나는, 일억 국민들을 대신하여 제군들에게 부탁한다. 제군들의 성공을 기원한다. 제군들은 이미 신(神)이기에, 세속적인 욕망은 없을 것이다. 만약 있다면 특공의 성공 여부일 것이다….”
중장의 침중한 음성이 잠시 멈췄다. 오니시 중장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다 보다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제군들은 영면할 것이기에, 그 결과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제군들에게, 그 결과를, 알릴 수 없다. 나는, 다만….”
음성이 토막토막 끊겼다.
“제군들의 노력을, 끝까지 지켜보고, 그 결과를… 그 결과를, 하늘 나라에 알릴 수 있을 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모두 안심해도 좋다.”
안개비가 중장의 벗겨진 머리와 눈가를 적시고 있었다. 그의 군복도 축축히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혹시 중장은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눈물일까. 모리시마 소위는 잠시 생각했다.
“이 이십 사인의 특공조는 훗날, 신의 바람(神風, 카미카제)이라고 불리며 충성과 희생의 대명사로 신민들의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세키 유키오 대위!”
“넷!”
모리시마는 슬쩍, 자신의 친구이자 특공조장이며 일본 해군 최고의 에이스 중 하나인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깡마른 검은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항상 그랬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어떠할까. 이제 신혼 6개월 째인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각오는 되어 있나.”
“명령하신다면, 언제든 죽겠습니다!”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천황폐하를 위하여.”
한 줄기 거센 바람이 단상과 도열한 특공조원들 사이를 스쳤다. 오니시 중장은 거수경례를 붙였다.
“천황폐하 만세!”
“만세!!”
착. 스물 네 명의 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니시 중장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해산. 5분 내로 출격준비하라.”
바람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으나 기는 여전히 펄럭이지 않았다. 필리핀 근해, 10월 20일, 1944년. 어느 차가운 아침이었다.

2.
1941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지휘 하에 행해진 진주만 폭격은 미군에 큰 피해를 입히긴 했으나 이걸로 미국의 전쟁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는 일본군 지휘부의 예측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일본군은 이듬해 미드웨이 해전에서 분노한 미군에게 참패하고, 그를 기점으로 미군의 공세는 본격화된다. 사이판과 괌을 점령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남은 필리핀 공격을 위해 집결하고, 필리핀 동부 레이트 만에서 해전을 벌이게 된다. 레이트 해전은, 전투 초반에는 일본 해군의 별동 함대가 미군의 주력을 유인해 내는 데 성공하며 전황이 일본 측으로 기우는 듯 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당시 4척의 항공모함을 잃었던 결과 항공력의 부재로 인해 일본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미군은 물량공세로 나서기 시작했고, 오니시 중장이 이끌던 필리핀 1항공 대대의 항공기는 개전 초기의 10분의 1로 줄어 있었다.
  
3.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함내에 마련된 사령관 침실 내에는 촛불 하나만이 파르락 거리며 켜져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침실 내부에서, 오니시 중장은 내일 있을 특공의 조장으로 임명된 세키 유키오 대위를 마주해 앉아 있었다. 한참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오니시는 천천히 그의 앞에 마련된 잔에 독한 사케를 따랐다.
“괜찮겠나, 대위.”
유키오 대위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어른거리는 촛불 빛 속에서, 그의 날카로운 검은 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결행일은 내일이다. 정말, 괜찮겠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그러나 그의 손은 잔을 집지 않았다. 그 냉랭한 눈은, 지금 오니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는 지금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향해 있을 것이다. 조용히 그를 쏘아보던 오니시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켠의 탁자 위에 걸려있던 칼을 집어서는 다시 정좌를 하고 앉아 대위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받게나. 우리 가문에 내려오던 칼일세.”
“…….”
대위의 눈빛이 어른거렸다. 그의 시선이 자기 내부에서 벗어나, 오니시를 향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듯, 무사가 주군에게 하듯 충실히 따라오던 그의 눈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흔들림 없었으나, 그러나 지금 그 눈은 사무라이의 눈이 아니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세키 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오니시의 음성이 격렬히 떨렸다. 그 음성은 어둠 속에서, 잘 갈린 칼날 같은 푸르름이 아니라 저물어가는 태양 같은 붉은 어둑함으로 퍼져 나갔다.
“장군님. 저는 죽음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패망이 임박한 조국이나 천황 폐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 군인이기 전에 사내이며, 사내이기 전에 한 여인을 사랑하는 인간입니다. 제가 특공 임무를 받아들인 건 단지….”
처음으로 세키의 음성이 잠깐, 흔들렸다.
“…제국이 패할 경우, 미군 놈들이 저의 그녀를 범하고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너무도 먼 교토에 있고, 지금 저는 그녀의 곁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목숨으로 미군 놈들에게 우리가 다만 무력하지만은 않다는 걸, 한번 패배했을망정 결코 손쉽게 짓밟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란 걸 보여줄 수는 있을 겁니다.”
“….”
“지금까지 군인으로써, 조국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하늘 위에서 수많은 적들의 목숨을 불꽃으로 바꿔 놓으며 무사의 도리에 어긋나는 게 아닌가 고민도 몇 번이나 했지만 기관포의 방아쇠를 당기는 제 손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헌신해 온 조국은 제 목숨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의 능력이라면… 단 두세 번의 출격으로, 한번의 특공으로 적에게 입힐 수 있는 피해 그 이상을 줄 수 있을 텐데도.”
“세키 군, 그렇게 말해선 안 되네!”
오니시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뚫고 세키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오로지 조국만을 위했던 삶, 그런 저의 죽음만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고 싶습니다. 저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죽을 겁니다. 그러니 그 칼은 받을 수 없습니다.”
오니시는 침을 삼키면서 세키를 응시했다. 지극히 담담한 눈빛,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음성. 그러나 무릎 위에 얹힌 그의 두 손은 격렬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보살펴 주신 장군님의 은의에 기대, 이 잔만은 받겠습니다.”
“세키 군… 세키 군!”
오니시는 알수 없는 감정이 끓어 오름을 느끼고는 결국 오열하며 그의 앞에 부복했다. 그의 떨리는 손이 잔을 집어, 그것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의 목젖이 움직이고, 한 줄기 술이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4.
1944년 10월 20일. 세키 유키오 대위가 모는 미츠비시 제로 기를 필두로 한 4대의 자폭 기체와 20대의 호위 기체, 총 24대로 이뤄진 사상 최초의 카미카제 특공조가 이륙한다. 어떤 이들은 상부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어떤 이들은 우국충정의 사명감을 가슴에 안고, 어떤 이들은 오로지 개인적인 이유로 죽음을 결의하고서.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작전은 취소되고, 오니시 중장은 2항공 대대 사령관에게 탐색을 요청 하나 무모한 작전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다.

5.
새벽 4시.
히나츠 모리시마는 잠을 이루는 것을 포기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미카제 작전은 반려되었고, 특공조는 작전에 투입되지 않은 채 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 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한 2항공 대대가 자체적으로 300여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로 습격을 감행했다가 경 항공모함 1척을 파괴하는 미미한 성과만을 남긴 채로 대부분의 항공기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카미카제. 미츠비시 제로와 나카지마 하야테를 비롯한 고기동 소형 전투기에 최대 250Kg까지의 폭탄을 적재해서는 적 항모에 육탄 돌격을 감행, 활주로를 파괴함으로써 적기의 이륙을 원천 봉쇄한다. 항공모함의 활주로가 목재로 덮여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공시 상당한 전술적 이득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과연 전략적으로도 그럴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투하되는 폭탄은 음속에 이르지만 폭탄을 잔뜩 매단 전투기의 속도는 그에 크게 못 미친다. 미군 전함과 항공모함에 설치된 대공화기가 그것을 막아내지 못할까 과연.
피식, 웃으면서 모리시마는 침대에 엎드려 손전등을 켜고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성경을 펴 읽기 시작했다. 모리시마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다. 시골의 노모가 보내온 물건이 성경책과 로자리오라는 걸 안 모리시마는 처음엔 실소했으나, 대기 기간이 길어지며 딱히 할 일도 없던 참에 한 두 페이지 씩 읽기 시작하던 것이 점차 버릇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 오히려 주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자.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 마다 잘 되리라.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 곁에 감히 서지 못하리라. 의인들의 길은 주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장, 1절에서 6절. 모리시마가 가장 좋아하며 유일하게 완전히 외우고 있는 구절이었다. 이유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일본군, 미군. 축(Axies)과 연합(Allies). 어느 쪽이 죄인이며 어느 쪽이 의인인 걸까. 심판의 날, 신은 어느 쪽을 악으로 규정할까.
웃긴 소리다.
애초에 신 같은 게 있다면 전쟁도 있을 리가 없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는 공정한 절대자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더없이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존재일 것이다. 모리시마는 자신이 결코 천주교 신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대동아공영을 외쳤던 우리의 신념은 애초부터 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틀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우리는 얼마나 충실히 헌신해 왔으며,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가.
모리시마는 손전등을 끄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탈영을 하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항공모함 위, 사방이 바다인 곳에서 어디로 탈영을 한다는 말인가.
오니시 사령관은 내일 쯤에라도 카미카제 작전을 발동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범국가의 군인으로 죽을 것이다.
적어도, 한 순간에 져 버리는 벚꽃일 수 있기를.

6.    
25일, 2항공 대대의 작전 실패 결과 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 오니시 중장은 필사즉생을 외치며 다시 특공조 이륙을 명한다. 이는 육군 전투비행단과 해군 잠수함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7.
폭음과 함께 또 한대의 호위기가 허공에서 폭발과 더불어 사라져갔다. 귀축미영 일억옥쇄(鬼畜美英 一億玉碎)의 구호를 새긴 미츠비시 제로 기 또 한대가 격추당했다. 맑게 개인 하늘에 긴 불의 꼬리를 남기며 바다로 추락하는 호위기의 모습을 콕핏 너머로 흘깃 보면서 히나츠 모리시마 소위는 조종간을 밀었다. 눈 아래의 세상이 핑그르 반전하면서 한 순간 붉게 물들었다. 급강하로 인한 중력 변화로 눈에 피가 몰리며 시야가 붉어지는 레드 아웃 현상이었다. 히나츠 모리시마는 현기증을 참으면서 다시 조종간을 힘껏 당겼다. 수평 항행 중 기수를 떨어뜨리며 반바퀴 기체를 뒤집음으로써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작은 반경으로 180도 방향 전환을 가능케 하는 이멜만 선회. 시야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며 불과 0. 몇 초 전까지 자신의 기체가 있던 머리 위로 지대공 미사일의 화선이 스쳐 지나갔다.
미군 항공모함, 세인트로 호는 바로 엊그제 2항공 대대의 습격을 막아낸 것으로 잔치 분위기였다. 그러나 불과 이틀 간격으로 재공격이 있을 것은, 게다가 그 재공격이 불과 24대의 전투기로 행해지고 있으며 그 중 4대는 자살 공격기라는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들은 함재기를 띄울 여유를 갖지 못했고, 몇 문 밖에 장전되 있지 않던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 기관포로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대일본제국 만세!
무전기에서 울려 나오는 발악에 가까운 함성 소리와 함께 제로 기 한대가 세인트로 호의 활주로를 향해 급강하해 갔다. 이름이 카이 야마지로라고 했던가. 모리시마는 자신의 기체를 향해 불을 뿜었던 대공포좌를 향해 기관포의 방아쇠를 당기며 전우의 명복을 빌었다.
이 하늘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눈 아래 항상 지옥을 두고 있으니, 잘 가게나 친구.
활주로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았다.
-미안하다, 시즈에!
조장, 세키 유키오 대위였다. 그의 제로 기는 대공포의 탄막을 그대로 뚫고서 무모한 기세로 돌멩이처럼 세인트로 호를 호위하고 있던 경순양함을 향해 내리 꽃히고 있었다. 순양함 승무원들의 비명 소리와 욕설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대폭발. 250Kg에 달하는 폭탄의 위력은 경순양함 한 척 정도는 한 순간에 대파시키기에 충분했다. 화염이 내달리며 작은 경순양함을 갈가리 찢어 놓는 걸 보며 모리시마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단말마의 비명마저 삼켜 버리는 폭발음으로 귀가 멍멍했으나 그는 이상하리만큼 유쾌했고, 정신은 지독히 맑았다. 마치 이 하늘처럼.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문득 모리시마는 어느 사이엔가 자살조는 자신 하나만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 아래에서 거대한 항모 세인트로 호가 불타오르고 있었고, 유키오 조장이 달라 붙었던 경순양함은 침몰했는 지 흔적조차 없었다. 그는 외롭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그 느낌을 떨쳐 버렸다. 어차피 곧 다들 만나게 될 것이다… 지옥에서. 연료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목표는 세인트로 호의 관제탑. 격렬한 충격과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한쪽 날개가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이런 경우 기체가 가벼운 제로 기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다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육중하게 실은 폭탄과 급강하의 관성으로 모리시마의 제로 기는 주인의 마지막 의지에 따라 충실히, 유성처럼 관제탑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마지막 순간 아내의 이름을 외쳤고, 누군가는 제국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어차피 이 전장에서는 죽고 죽이는 자, 그를 넘어서 스스로를 죽이는 자, 모두가 죄인이며 악인일 뿐. 히나츠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조종간을 움켜쥔 채 급속도로 확대되어 가는 세인트로 호의 관제탑을 응시하며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전신을 울려오는 이 격렬한 요동은 나의 심장박동일까, 기체 이상일까. 콕핏을 뚫고 적탄이 날아 들었는지 조종간을 쥔 손은 피에 젖어 있었다. 이 전쟁이 끝나고 수 십년 쯤 지나면, 그 때 일본의 아이들은 나처럼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될까. 나를 대신해 만발한 벚꽃을 보며 웃을 수 있을까, 그 때 쯤이면. 히나츠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게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마지막 순간, 히나츠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아멘.

8.
최초의 카미카제가 시행되고서 남은 호위조는 퇴각하며 본부에 경과 보고를 올렸다. 특공조 호위 편대에서 본부에게. 항모 1척 격침, 항모 1척 화재, 경순양함 2척 침몰. 300기의 공격기로도 불가능했던 전과를 4기의 희생으로 올렸다는 사실에 고무된 지휘부는 육군 전투비행단과 잠수함대에도 공문을 보내 자폭조를 조직하게 했다. 패전 시까지 카미카제 부대는 300여 회 더 출격했으며, 2,500명 가량의 항공 요원이 죽었다. 미군 선박은 30척 가량이 침몰했고, 350척의 선박이 피해를 입었다. 갈 수록 미군 측의, 카미카제에 대비한 대공 방어 전술은 보다 정교해졌고 그 결과 종전 시 카미카제의 전체적인 성공률은 약 6% 선에서 그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세뇰
댓글 2
  • No Profile
    '300기의 공격기로도 불가능했던 전과를 4기의 희생으로 올렸다는 사실에 고무된 지휘부는 육군 전투비행단과 잠수함대에도 공문을 보내 자폭조를 조직하게 했다.'

    ...전쟁이란....(쓴 웃음)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세뇰 07.04.17 18:34 댓글 수정 삭제
    여하간에 전쟁이란 너나 없이 다들 미쳐 돌아가게 만드는 거죠, 낄. 읽어 주셔 감사합니다.

    저 데이터는 자료마다 약간씩 달라서,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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