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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프지 않아요?

2008.04.22 03:2304.22


어디서 이렇게 머리카락이 나오는지 모르겠어. 아침에 나올 땐 이렇지 않았는데 말야.

나는 대충 손으로 줍던 것을 포기하고 미니 청소기를 돌리며 말했다. 지아는 대답도 없이 뚫어지게 머리카락과 함께 덩어리 진 먼지들이 청소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이 좀 지저분하지? 가서 걸레 좀 빨아올게.

민망함에 못이겨, 나는 항복하고 화장실을 향해 등을 돌렸다. 우리집에 걸레가 있긴 있던가.

- 선배, 잠깐만요.
- 응? 왜?
- 아프지 않아요?
- ... 뭐가? 신체사지 다 멀쩡한데.
- 나요, 난 아파요.

이게 무슨 동문서답이야. 나는 지아를 바라보았다. 지아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아, 말을 꺼냈으면 사람을 보고 얘기해야지.

- 갑자기 아프긴. ... 몸이 안 좋아? 감기 기운 있니?
-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뭔가 선배랑 저랑 같은 걸 다르게 느끼는 것 같은데... 이걸 보면... 설마..
- 무슨 소리야. 갑자기 중얼중얼, 답답하게스리. 정리 좀 하고 말해봐.
- 그게.. 정리가 잘 안되는데... 머리카락 말이에요. 그러니까...
- 머리카락? 그게 뭐.

이제는 엄지손가락까지 깨물고 있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눈친데. 왜 주저하는 거지? 지아의 말을 되새김질하고 있자니 생각이 불쑥 튀어올랐다.

- 머리카락 빠질 때 아프냐고?
- 예, 선배. 그게...
- 아, 그거 당연한거 아냐. 머리 잡아당기면 당연히 아프지. 그거 말하려고 그러고 있었어? 아니, 왜 그걸 말을 못해. 머리카락 잡아당기면 아프냐고 왜 말을 못하냔 말야.

유명 영화배우의 어투를 따라하며 슬쩍 눈웃음을 치자니, 이 지지배가 입을 뻐끔거리다 살풋 웃었다. 고롬, 그렇게 넘어와야지.

- 선배, 진짜 안 어울리는거 알아요? 그리고 그거 언제 적 드라만데 아직도 하고 있어요. 왠만하면 레파토리 좀 바꾸시죠.

- 만고 불변의 법칙이라는게 있어, 멋있는 놈은 뭘해도 멋있어 보이고 아닌 놈은 아닌 거지. 난 전자니까 이걸로 한 오백년 해먹을란다. 요건 알콜 좀 들어가야 진국인데. 감정도 실리고... 캬~ 작업 끝나고 나면 이따 한잔 할까?

- 어이구 왕자병. 됐어요. 실연당한 지도 얼마 안됐는데 술은 무슨... ... 기분만 더 꿀꿀해지잖아요. 난 후딱 작업하고 쿨하게 집에 가서 잘래요. 병나발은 혼자 부세요. 오늘 마침 달빛도 좋네요. 달빛으로 안주 삼고 벽으로 친구 삼고..... 딱이죠? 왠지 선배는 평소에도 잘 그럴 것 같아요.

- 머리끝까지 기어올라라, 응? 하늘 같은 선배님이 얼라 앞에서 애교 좀 부렸더니 아주 목마를 타는구나. 내가 지금까지 널 어떻게 키웠는데.
- 동방에서 학관 밥 한 번 시켜준 것 밖에 더 있어요? 지금까지 있었던 오만 가지 엠티에서 선배가 돈내는 건 한 번도 못봤어요. 뭣하면 증명해봐요? 간단한데. 아, 오늘 갑자기 파파 존스 피자가 땡기네.
- 하늘 같은 후배님아, 우리 작업이나 하자. 할거 많다.

저게 사람이야, 여우야. 아까랑 사람이 싹 다르네. 나는 주섬주섬 작업물을 비닐봉투에서 꺼내들었다. 그 후 작업을 하며 몇 번이나 재기의 기회를 노렸지만, 지아의 말빨이 어찌나 화려한지 번번히 지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단단히 삐져서는, 작업이 끝날 무렵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아가 그런 내가 딱해보였는지(아니면 싸울 사람이 없으니 심심했는지) 술 한 잔 사주겠다며 나를 독려했다. 술 한 잔에 선배의 위엄을 팔 나는 아니지만. 후배가 내는 술을 한 번 쯤 먹어주는 것도 또한 선배의 예의가 아니던가.

- 역시 파전에 동동주가 최고야. 캬! 주욱인다. 한 동이 더 시켜도 되쥐? 너 가진거 돈밖에 없잖어... 헤헤. 말빨 칼같지, 성격은 또 죽여도 안 죽어요. 너 누가 데려갈래, 응? 푸헤헤헤.

나는 손을 휘저으며 병신같이 웃었다. 막 웃음이 나왔다. 테이블 너머에서 지아가 재수없게 웃고 있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리는 웃음, 난 저런 웃음이 싫다.

- ... 선배, 보기보다 술 약하다. 걱정마, 선배보고 데려가라고 안 그럴테니까. 나 데려갈 놈은 진작에 날 찼고... 아씨, 아파. 또 떨어졌어. 이번엔 두 개나. 씨..

- 너 그러고 혼잣말 하니까 넋나간 것 같애. 떨어지긴 뭐가 떨어져? 술 떨어졌냐? 더 시켜, 그럼. 너 돈 많잖아. 남자 복은 지지리 없고. 푸헤헤헤.
- 그것도 유머라고. 쯧, 복학생 티내긴. ... 아파! 아프다고!
- 너 미쳤어? 어따 대고 소리질러, 하늘 같은 선배한테에! 누가 보면 내가 때린 줄 알겠따아!
- ...아픈걸 어떻게 해! 누가 건들지 않으면 내가 왜 아파! 왜 그런 거냐고!

아무래도 안되겠다. 한번 따끔히 얘기해줘야지.

선배의 군기를 잡고자 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뚜벅뚜벅 걸어(그런데 왜 다리가 휘냐) 지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하고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지아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퍼뜩, 술이 꺴다. 맙소사. 얘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지아는 펑펑 울고 있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빗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입술이 흉하게 일그러진 채로 아이처럼 지아가 울고 있었다. 아프다며 훌쩍이는 지아를 나는 말없이 안아줬다. 으흐흐흐 하며 이제 오열하는 애에게 딱히 이렇다할 말도 없었다. 지아는 푸들푸들 어깨를 떨면서 오랫동안 울었다. 그건 아주 오랫동안 참아온 것 같은, 표현하지 못했던 울음이었다.

뚝뚝 흐르던 눈물이 멈추고, 어깨 떨림이 잦아들 무렵에도 지아는 으흐흐흐 울었다. 상가집의 메마른 곡소리같은 슬픔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 선배, 선배, 나, 흐끅, 미쳐 가나봐, 흐끅, 으흐흐... 머리카락이 떨어질 때마다 아파, 빠질 때마다 아파, 그애가 예쁘다고, 부드럽다고 칭찬해줬었어... 사람이 원래 못느끼는 건데... 왜 있잖아, 일부러 뽑지 않으면... 그런데 아파..... 미친거야, 미친거지. 으흐윽, 심장 떨리게, 근데, 그렇게 아파... 으흐흐...흐끅...

- 괜찮아, 괜찮아아. 아팠구나. 응. 말하지 그랬어.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이제 안 아플거야. 다 괜찮아.

나는 지아가 한 마디 한마디 할 때 마다 지아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고, 최대한 분명하게 얘기해주려고 애썼다.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을거야. 그말만이 중요했다. 내가 누구던, 이 행동을 나중에 후회하게 되건, 그녀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하고 싶어하던 말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미련맞긴. ... 미련쟁이 고집불통 녀석같으니. 융통성도 없는.

그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하며 나는 내내 얼굴도 모르는 녀석에게 마구 저주를 퍼부어댔다. 알게 뭐야. 이제 상관 없는 놈인데. 나는 그대로 잠들어버린 지아의 머리카락을 한 올 잡아당겼다. 뚝, 머리카락이 탄력있게 튀어올랐지만 푹 잠든 지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손가락으로 집은 그것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것은 내 숨에 따라 하늘하늘 흔들렸다. 그것은 내 숨을 받고 뱀처럼 꿈틀거리다가도 숨을 멈추면 시체마냥 맥아리 없이 축 늘어졌다. 이거 요물이네, 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이게 빠질 때마다 아팠단 말이지, 응? 나는 숨을 있는 대로 들이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 갓잖은 미련같으니라구, 싹 다 꺼져버려어어어!!! 다신 돌아오지 말아!!!

... 오 하나님 맙소사. 저 진짜 무슨 짓을 한건가요.
옆 테이블의 건장한 아저씨가 인상을 찌푸렸고, 주인아저씨가 바삐 움직였다. 이윽고 이 집에서 (너무 비싸서) 아무도 안 시켰을 것 같은 안주가 건장한 아저씨 앞에 놓여질 때까지 나는 싹싹 빌어야만 했다.

지아는 물론, 당연하지만, 쪽팔리게도, 깨어서 내가 하는 뻘짓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실눈 뜨고서 말이다.

그 후 한동안 지아를 보지 못했다. 사실은 내가 피해다녔다. 진정 현명한 선배란 몸가짐을 조신하게 할 필요를 느꼈을 때 정말로 그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강의만" 들어갔다. 학교 끝에서 끝까지 10분 밖에 안걸리는 교정에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선배란 원래 교내 지리에도 해박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딱 걸렸다. 지아는 숏커트를 하고 있었다.

- 선배, 여기서 뭐해요?
- 어, 응, 그게, 그러니까... 머리는 왜 잘랐어?
- 여름이잖아요. 덥잖아.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내가 살게. 뭐 먹고 싶어요?
- 어, 응, 난 더위사냥...
- 여전히 촌스럽네. 더위사냥이 뭐야. 어쨋든 가요.


지아는 저만치 앞서서 걸었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멍청히 따라갔다. 뭐 어떠랴.

그녀의 뒷목이 시원해보였다.


---

3시간 반... 3시 반. 흑.
sulim
댓글 4
  • No Profile
    야키 08.04.23 00:50 댓글 수정 삭제
    어.....아? 끝난건가요.

    재, 재밌었는데 이렇게 잘라 버리시다니.
  • No Profile
    유서하 08.04.23 01:43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어요!
    아이디어만으로도 읽는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을 만큼 멋진 아이디어지만, 완성된 소설은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충분히 뽑아내지 못한 것 같아요. 지금도 좋지만 조금만 더 수정하셨으면 좋겠어요.
  • No Profile
    볼티 08.04.23 13:4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대사와 서술의 경쾌함에 비해...이야기가 좀 허해서 아쉽네요.
    다음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 No Profile
    sulim 08.04.26 01:40 댓글 수정 삭제
    꼬릿말 감사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소재는 꽤 예전에 떠올린 것인데도 정작 글을 쓸 시간이 없어 마무리에 힘을 쓰지 못했어요. 글과 상관없는 소리를 좀 적었는데요, 3시간 반은 글을 쓴 시간, 3시 반은 오전 3시 반에 글을 끝맺었다는 소리입니다.; 제 평소 기상시간은 중국 코끼리가 점프를 해서 마리아나 해구에 빠졌다 해도 새벽 5시입니다.;;

    소재가 아깝다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 시간을 내서 쓰긴 했지만, 여러모로 쓴 사람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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