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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 닦는 카나리아」

                                                                    에도르(이전 닉네임입니다)

아침
눈이 떠졌다. 내 몸이 나를 일으켰다. 내 다리가 나를 옮겼다. 어느새 화장실에 도착했다. 나의 손이 칫솔에 치약을 짰고, 칫솔을 나의 입에 가져갔다. 구석구석 나의 이빨 주위를 돌아다니던 칫솔은 3분 뒤 내 입에서 빠져 나갔다. 손은 이번에는 물을 가져다 내 입에 넣어준 뒤 뱉게 했다. 입을 헹구어 낸 물이 빠진 뒤, 입의 물기가 수건으로 닦였다. 다시 다리가 나를 작은 방으로 가져다 놓았다. 내 몸은 일어나기 전 누웠던 모습 그대로 나를 눕혔다. 눈이 감겼다.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나의 희망, 나의 모든 것. 그러나 흐릿하다. 손을 내밀어 더듬어 보자 딱딱한 것이 만져 진다. 그것은 유리창. 창 너머의 그를 바라보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기다리라고 하며 창문을 연다. 그러나 창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창문 밖에 있는 깊은 어둠에 몸서리치며 창문을 닫는다. 그러자 그가 다시 보였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그가 창문에 손을 댄다. 얼굴을 가까이 한다. 여전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나도 창문에 손을 대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디…있어….
그러나 입을 열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의 얼굴을 꽉 막고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말하는 방법을…잊어 버렸다.
-어디 있어…어디 있어….
급기야는 창밖의 그가 주먹으로 창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여기 있다고, 안심하라고,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입을 열어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를 발음하고, 공기를 끌어올려 입 밖에 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디….
다급하게 유리창을 두들기던 그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창문으로 흐릿하게 보이던 그의 모습도 사라졌다. 그제야 답답하던 느낌이 사라졌다. 나는 크게 한번 숨을 내쉰 후 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주위는 온통 하얀색. 마치 아까 그가 있던 세계 같다. 또다시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아. 뒤로 누워서 위를 바라보았다.
그와 헤어진 지도 어언 1년. 그사이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던 권태로운 일상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나의 몸이었다. 언제부턴가,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니, 잃어버렸다고 해야 하나. 여태까지 배워온 모든 언어를 발음하고 내뱉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그 뒤에는 글을 읽는 법을 잃어버렸다. 분명 낯익은 글씨와 글자인데 눈을 통해 머릿속으로 들어가면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 되어버린다. 검고 하얗고 검고 하얀 이상한 형태의 덩어리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어 하얀 바닥에 글씨를 썼다.
ㄱ….
그러나 쓰기는 쓰되 알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이것은 이제 내게는 형이상학적인 그림에 불과하다. 글씨를 보아도 이해할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저편 어딘가에서 노란 것이 움직인다. 너무 멀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서 본 모양새다. 벌떡 일어나서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걸어가도 걸어가도 끝이 없다. 조금도 가까워지는 기색 없이, 나는 땀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너무나 더웠다. 주위는 어느새 누런 모래가 가득한 사막이다. 이 익숙한 풍경, 그렇다면…나의 몸이 움직일 시간이다.

점심
눈이 떠졌다. 내 몸이 나를 일으켰다. 내 다리가 나를 옮겼다. 어느새 화장실에 도착했다. 나의 손이 칫솔에 치약을 짰고, 칫솔을 나의 입에 가져갔다. 구석구석 나의 이빨 주위를 돌아다니던 칫솔은 3분 뒤 내 입에서 빠져 나갔다. 손은 이번에는 물을 가져다 내 입에 넣어준 뒤 뱉게 했다. 입을 헹구어 낸 물이 빠진 뒤, 입의 물기가 수건으로 닦였다. 다시 다리가 나를 작은 방으로 가져다 놓았다. 내 몸은 일어나기 전 누웠던 모습 그대로 나를 눕혔다. 눈이 감겼다.

그래.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밥을 먹는 방법과 걷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손에 잡기는 잡되 음식을 집을 수가 없었으며, 겨우 집었다 하더라도 입으로 가져가 지지가 않았다. 가까스로 입에 집어넣은 경우에도, 음식을 씹는 것과 삼키는 것을 어떻게 해아 하는지 기억나지가 않는다. 그래서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지도 어언 이틀이 다 되어간다.
그전, 걷는 방법을 잃어버렸을 때는 방을 나왔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걷기를 거부하듯이 멈추었고, 나는 고꾸라졌다. 더 이상 다리에 균형을 주고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을 잃어버렸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이제 오로지 기억, 뿐이다.

-에취! 에취!
그와 함께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감기라도 걸린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몸은 항상 내 의지와 관계없이 행동한다. 제멋대로 재채기를 하고, 제멋대로 콧물을 흘려보낸다.
-공기가 안 좋아서….
내 말에 그는 그 자리에서 카페 안을 한 바퀴 휭 둘러본다. 곳곳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실외에 파라솔과 테이블이 놓여 있는 카페였다.
-이제 괜찮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딸기샤베트를 시킨 후에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카나리아 같아.
-카나리아?
내가 반문하자 그는 설명을 해주었다.
-광부들이 탄광에 들어갈 때 자기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같이 가지고 들어가지. 그게 바로 카나리아야.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나리아가 왜?
-카나리아는 호흡기가 약하거든. 그래서 탄광의 공기가 안 좋으면 울어서 광부에게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리는 거야. 만약 카나리아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카나리아가 제때 울지 못하면, 광부의 목숨도 보장받을 수 없지.
-아…….
때마침 딸기샤베트가 나왔고, 그는 스푼을 들어 샤베트를 떴고, 내 벌려져 있던 입에 쏙 넣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붉어진 내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나의 카나리아….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내 얼굴에 주륵 흘러 내렸다. 땀이었다. 기억에서 빠져 나오자 그곳은 여전히 사막이었다. 불처럼 뜨겁고 목이 말라오는 사막에서, 나는 힘겹게 걷고 있었다.
카나리아….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되내어 본다. 이곳에서는 그나마 걸을 수 있다. 기억할 수도 있고, 밖에서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일들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다. 그래서 계속 몸을 움직인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밖에 나가면 쓸모없어질 거란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저녁
눈이 떠졌다. 내 몸이 나를 일으켰다. 내 다리가 나를 옮겼다. 어느새 화장실에 도착했다. 나의 손이 칫솔에 치약을 짰고, 칫솔을 나의 입에 가져갔다. 구석구석 나의 이빨 주위를 돌아다니던 칫솔은 3분 뒤 내 입에서 빠져 나갔다. 손은 이번에는 물을 가져다 내 입에 넣어준 뒤 뱉게 했다. 입을 헹구어 낸 물이 빠진 뒤, 입의 물기가 수건으로 닦였다. 다시 다리가 나를 작은 방으로 가져다 놓았다. 내 몸은 일어나기 전 누웠던 모습 그대로 나를 눕혔다. 눈이 감겼다.

다시 사막이다. 이제는 밤이 된, 춥기 그지없는 사막이다.
그러고 보니 내 몸과 자아는 마치 분리된 것처럼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 자아가 잊어버린 모든 것들 중에서도, 내 몸은 자연스럽게 끼니때마다 나를 움직여 이빨을 닦게 했다. 자아가 잃어버린 것을 몸만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활동할 때, 그 이를 닦을 때만큼은 난 나의 자아를 가둬둔다. 그것만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그 대신 몸이 잠들었을 때야말로 나라는 자아가 깨어난다.
깨어난 자아는 이 기억 저 기억 건드려 보기도 하고, 마치 처음 걸음마를 하는 아기처럼 모든 움직임을 연습하기도 한다. 그것이 지금의 나다.
나는 사막의 중간에서 멈춰섰다. 새카맣고 거칠어 보이는 어둠 사이로 노란별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저것은….

-그래본 적 있어?
난데없는 그의 질문에 나는 반문했다.
-뭘?
-순간 방에서 일어났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거야. 갑자기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것처럼.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든 걸 잊어버린 적이 있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 아직까진 없어.
-그럼 이걸 잘 기억해 둬. 그럴 때는, 몸이 가는대로 너의 마음을 맡겨. 그럼, 너의 몸이 너의 할 일을 가르쳐줄 거야.

할 일…. 그와 내가 헤어진 다음 날부터였다. 모든 걸 잊어버리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몸에게 맡겼다. 몸은 일어나서 이를 닦았다.
이것은 뭘까…….
1년간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몸은 하루 세 번 계속해서 이빨을 닦았고 잠들었다. 그러면 나의 자아는 깨어나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나의 할 일은 이빨 닦는 일인 걸까.
사막의 모래를 베개 삼아 누웠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당신은 특별한 카나리아야.
-왜?
-글쎄, 왜일까?
장난스럽게 웃던 그는 나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코가 서로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다른 카나리아에게는…웃을 때 보이는 새하얀 보석 같은 이빨이 없어서일까?

지금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다. 세상에 이빨이 있는 카나리아라니. 그래서 그는 나의 깨끗한 이를 더욱 좋아했다. 겨우 그래서…그래서인 걸까. 그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내 몸이 매일같이 이를 닦는 것은.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이빨을 닦는 것은, 나의 몸이 살아있다는 증거. 이빨을 닦는 것은, 그를 기억한다는 증거. 그러니까, 이것마저 잃어버린다는 것은 나에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된다. 그것이 깨달음.
주위가 서서히 하얗게 변하고 있다. 아침이 다가온다.

아침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옮겼다. 어느새 화장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빨을 어떻게 닦더라?


                                                                                                -끝-


*2007년 6월 28일 탈고.
*이빨을 닦는 것의 이유를 자각한 순간 이빨 닦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카엘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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