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R.U ready?

2008.04.21 00:3504.21

1.
"그러게 저처럼 나비 넥타이를 매지 그러셨어요."
양동이같이 커다란 머리통에 각기 다른 크기의 카메라 렌즈가 4개나 달린 중계 카메라 로봇이 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매인 넥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메라 로봇의 말에 영후는 맥이 빠졌다. 벌써 거울에 30분 째 서있다. 그는 연신 고개를 흔들며 넥타이를 바로잡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됐다 싶으면 목이 너무 조이고, 목이 편하다 싶으면 넥타이가 삐뚤어져있다.
"젠장. 큰 마음먹고 최고급 수제 넥타이를 구입했는데……"
영후는 지금 목에 걸린 수제 넥타이의 가격과 옷장에 처박아두고 온 싸구려 지퍼식 넥타이를 떠올렸다.
"제가 아까 해드린 게 정확히 대칭이었다니깐요."
카메라 로봇도 이젠 지친 듯 말했다.
"그래, 그랬겠지!"
영후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완벽한 대칭이 아닌데 넥타이만 대칭이면 뭐하냐고, 대칭보다 조화가 맞아야지."
영후는 애꿎게 카메라 로봇에게 성을 냈다.
"그럼, 코디 로봇을 부르지 그러셨어요."
"젠장,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초대장이 딸랑 두 장뿐인걸. 너랑 나. 됐어? 이젠 입 좀 닥치고 ……빌어먹을."
영후는 다시 넥타이를 비틀어 풀며 짜증을 냈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조심하세요. 인터뷰 때도 그런 말을 쓰면 국장님이 바로 해고하실 거예요."
영후는 카메라를 쏘아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투덜대도 인자한 성인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는 로봇에게 화를 내는 것만큼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카메라 로봇이 그런 영후의 등을 위로하듯 토닥이다가 멈칫하더니 영후의 등을 살피며 말했다.
"이런 셔츠가 땀에 젖었는데요."
"오, 맙소사. 여벌이 차에 있는데."
영후의 어깨가 힘이 빠지며 축 늘어졌다.
"제가 가져오죠."
카메라 로봇이 재빨리 돌아서 출입문을 향해, 마치 무거운 머리를 가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뒤뚱거리며 뛰어갔다.
그때 로봇의 등뒤로 문이 열리면서 검은 스커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집사가 나타났다. 그녀의 등장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는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든 차트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선 영후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송영후씨, 다음 차례인데……, 준비 안됐나요?"
그녀는 거울 앞에 선 영후와 달려나가던 카메라 로봇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뇨, 아뇨. 됐습니다."
영후가 벗으려던 셔츠의 단추를 급히 채우며 말했다.
그리고 허둥지둥 집사 앞에 다가와 서서는 양복 상의에 팔을 끼워 넣으며 애써 태연한 척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집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서 안으로 사라졌다. 영후는 고개를 돌려 카메라 로봇을 찾았다.
"이 봐."
"여기 있어요."
어느새 반대편에 바짝 따라붙은 카메라 로봇이 낮은 모터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우황청심환이라도 줄까?"
다른 방송국 기자들이 빈정거렸다.
영후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방 안에는 두 대의 커다란 원통형 멸균 세척기만 놓여있었다. 여집사가 그 옆에 서서 영후를 향해 세척기를 가리켰다.
"어? 벼, 별장에 들어올 때 이미 했는데요."
집사의 태도에 주눅든 영후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한 얼굴로 대답대신 집게손가락을 곧게 펴 다시 세척기를 가리켰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의 집사를 보며 영후는 더 얘기해봤자 소용없으리라 생각했다. 괜히 입을 열어봤자 시간만 뺐길 뿐이다.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세척기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카메라 로봇을 향해서도 세척기를 가리켰다.
"저도요?"
카메라 로봇은 뜻밖이라는 듯 움찔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자랑을 하듯 말했다.
"하지만, 전 표면 항균처리가 된 CM-305 모델로서 인간에게 어떤 유해한 세균, 박 ……"
"야, 그냥 빨리 들어와!"
영후가 재촉하자 카메라 로봇도 허둥지둥 세척기 안으로 들어갔다.
세척기의 유리문이 닫히자 세척기 내부의 순간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더니 형형색색의 빛이 번쩍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빛이 영후의 몸을 한 바퀴 감싸고돌았다. 영후는 자신의 몸을 휘감고 내려가는 빛을 쫓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카메라 로봇 역시 처음 들어와 본 세척기 안을 마치 관광 온 외국인처럼 카메라에 담느라 여염이 없었다.
세척이 끝나고 문이 열리자 들어설 때와는 달리 높은 창문에서 밝고 화사한 햇살이 내리쬐는 복도가 나타났다. 세척과정 동안 세척기가 180°회전하며 이 비밀스런 공간으로 이어지는 출입문의 구실도 했던 것이다.
복도의 끝은 거실로 이어진 듯 문이 없었다. 영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나갔다. 화려한 복도의 장식이 고풍스러웠다.
"찍고 있어?"
영후가 뒤따라오는 카메라 로봇을 돌아보며 물었다.
"잠시만요, 잠시만, ……됐어요."
카메라 로봇은 상의 주머니에서 극세사 수건을 꺼내 렌즈에 낀 습기를 닦고는 영후의 뒤로 바짝 붙었다.
"하나도 놓치지마."
"알고 있어요."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영후는 잠시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며 안을 살폈다.
맞은 편 커다란 창문 앞에는 천장까지 닿은 넝쿨이, 국화 향을 내뿜는 커다란 주홍색 꽃을 피우며 자라고 있었다. 지구에선 본 적이 없는 꽃이었다.
"들어오세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어린 아이치고는 아나운서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복도 끝에서 목을 빼고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던 영후가 고개를 돌리자 꽃무늬 벽지를 바른 벽 앞으로 작은 단상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로코코 양식의 의자에 놓인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인형의 크기는 대략 7,8살 아이쯤으로 보였다. 얼굴에는 황금과 백금이 섞인 가면으로 정수리까지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레이스가 달린 부푼 셔츠와 반바지에 흰 타이즈를 신고, 발에도 역시 레이스가 달린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귀족 집안의 여자아이들이 안고 놀만한 인형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내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이 분명 살아있는 아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영후는 저 인형같이 꾸민 아이가 오늘 인터뷰할 테라성(Terra星)의 왕자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 모습에 먼저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나 무표정한 가면의 작은 구멍으로 보이는 살아있는 눈동자는 그 웃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후는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왕자에게로 다가갔다. 왕자에게 다가갈수록 웃음은 사라지고 아쉬움이 남았다. 왕자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얼굴은 고사하고 피부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투명한 갈색의 눈동자와 목 뒤로 묶은 붉은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러나 그 머리카락도 가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영후는 왕자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단상 아래 놓인 의자를 지나 단상 위로 발을 디뎠다. 그러자 갑자기 구석에 놓여있던 서랍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나오더니 영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작은 문이 열리더니 손이 튀어나와 왕자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난데없이 튀어나온 서랍장은 왕자의 경호 로봇이었다.
깜짝 놀란 영후는 거의 나자빠질 뻔했다. 그때 왕자가 '풋'하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렇게 놀래요."
왕자의 목소리에 천진한 아이 같은 웃음이 베어있었다.
"아,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저만 그랬으면 국장님한테 혼났을 텐데."
영후는 왕자가 기분이 좋다면 인터뷰도 잘 풀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같이 웃었다.
"이제 시작하시죠."
왕자의 목소리는 잔뜩 기대에 차 들떠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테라성의 왕자를 만나 단독인터뷰를 하는 영광을 얻은 12명의 기자중 한 명인 영후보다 더 들뜬 듯했다.
서랍장 모양의 경호 로봇은 뒤뚱거리며 뒷걸음질쳐 원래 있던 자리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카메라 로봇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우선, 지구를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왕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얼마만의 귀환이죠?"
영후는 가벼운 질문부터 시작했다.
"글쎄요. 저보단 기자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흐음. ……대략 500년이죠?"
"맞습니다."
영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지구를 다시 방문할 생각을 하시게 됐습니까? 아, 그러니까, 오해를 마시기 바랍니다. 전 그저 지구와 끊어졌던 연락이 다시 재개된 후, 30년 동안 테라성의 왕께서는 계속 지구 방문을 거부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격적으로 이렇게 왕자님이 방문하셨죠. 혹, 특별한 이유라도 있지 않을까,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거라 생각돼서 여쭙는 겁니다."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이제 테라인 중 누구도 지구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분명 지구에서 출발했고 우리의 먼 친척들이 여전히 지구에 살고 있죠. 전 그들과의 유대관계를 재확인함으로써 우리 테라인들에게 지구에 대한 관심과 우리가 잊었던 지구인과 테라인 간의 동질성을 찾고자 합니다."
왕자는 차분하고 진지했다.
"네에, 초기 테라에 정착했을 때,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얘기는 돌아가신 테라의 초창기 개척 선조께 여쭤봐야 할 질문 같군요."
왕자의 눈이 온화하게 웃었다. 영후 역시 따라 웃었다.
이어 왕자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대신 왕자답게 말했다.
"우리 선조는 어둠 속에서 출발하셨죠. 초기 이주민들은 처음 지구에서 보내졌던 선단 중에 몇몇 우주선과 화물선이 실종되면서 고작 19만 명만이 무사히 테라성에 도착했어요. 그 중에 대형 발전설비를 싣고 출발했던 화물선은 고작 1대만이 무사히 테라에 도착했죠. 물론 이주 1세대들에게는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인구가 증가하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발전시설이 부족해졌죠. 그땐 정말 암흑시대였대요. 모든 전기가 오로지 광산과 기반시설 건설에 쓰이면서 밤에도 불을 켤 수 없었대요. 물론 그 덕에 인구가 많이 늘었대요. 19만이던 인구가 개척 400년 만에 5천만 명으로 늘어났죠."
왕자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요. 최근 지구에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 각 국 정부가 골치죠. 테라성의 예를 각 국 정부에서 참고해야겠군요."
영후도 웃으며 말했다.
"얘긴 들었어요. 이젠 100억이 안 된다면서요?"
"이젠 90억이 조금 넘는 정도죠."
"그렇군요. 처음 개척민이 출발한 건, 당시 지구에 인구가 많아 새로운 행성이 필요해서였다고 들었는데, 많이 변했군요."
"예, 그렇습니다. 500년 전에 비하면 40%가 줄었죠. ……그런데 아버님이 왕이 신데, 왕자님이 다음 왕위를 물려받으시나요?"
영후가 질문을 하는 동안 카메라 로봇은 왕자의 주위를 돌며 왕자의 모습을 찍었다. 그러다가 행여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서면 서랍장으로 위장한 경호 로봇이 달그락거리며 다가와 카메라 로봇을 향해 서랍을 내보였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아뇨. 우리의 왕권은 세습되지 않아요. 우리 테라인들은 인격과 외모를 중요시하니까요. 왕은 선출되고 죽을 때까지, 혹은 탄핵될 때까지 왕위를 유지할 뿐이에요."
"아쉽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전혀요. 지금도 과분한 대접에 몸둘 바를 모르겠는걸요."
영후는 무릎 위에 올린 왕자의 손이 가볍게 모이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테라성에서 외계인과의 접촉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물론이죠. 그 덕에 제가 테라성을 떠난 지 3일만에 지구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그들이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우리에게 전수해주면서 웜홀을 이용한 여행이 가능해졌어요."
"아아."
"그들은 웜홀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공간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음, 1년 전에 지구로 출발한 화물선이 앞으로 보름 후에야 지구에 도착하지만, 이젠 3일이면 도착하게 되죠.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건 아니에요. 천문, 물리, 수학, 철학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있었지만 기술·공학분야에서는 우리가 월등했죠. 어쩌면 그 덕에 우린 서로 협력해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외계인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영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죠. 그들은 우리보다 뇌가 크고, 체격이 작아요. 깊은 철학적 사고의 결과라고 하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우리와 조금 다르게 생겼어요. 소식(小食)을 하고 매일 12번 하늘을 보죠. 스스로를 칼람인이라고 하는데 근력은 인간에 비해 나약한 듯하지만, 민첩해서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그들을 만질 수 없어요. 하지만, 무척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대해 무척 우호적이시군요."
"우리 이웃이니까요."
"말씀을 들어보니 무척 흉물스럽게 생겼을 것 같은데요."
영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왕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에 영후는 재빨리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외계인들과 전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들과 전쟁을 하신 건가요?"
"아니요. 그건 칼람인들이 아니라 곤충들이었어요. 흉물스럽다는 건 그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죠. 테라성의 개척박물관에 오시면 그들의 박제를 볼 수 있어요. 뇌가 작아서 욕심만 많았죠. 하지만, 엄청난 괴물이었대요. 핵미사일에도 죽지 않는……"
"핵이요?"
영후가 놀라 물었다.
"아, 이제 지구에는 핵미사일이 없는데, 테라성에는 아직 있나보군요?"
"네, 중성자탄이라고 하는데 그건 지구를 떠나올 때, 만약을 대비해 무인경비함으로 운반해온 거래요. 모두 12개가 있었는데 그 곤충들과 싸우면서 7개를 쏘고, 남은 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지구에선 이제 볼 수 없는 물건인데, 그 박물관에 꼭 가보고 싶군요."
"저희는 언제나 환영이죠. 여러분이 준비가 되면."
"아, 저희야 언제든 준비가 돼있죠. 초대만 해주십시오."
왕자의 말에 영후는 반색하며 말했다.
그러나 왕자는 곧게 폈던 등을 구부리며 의자에 기대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바마마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어요."
그때 영후는 가면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코끝을 간질이는 야릇한 냄새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살짝 상체를 기울여 냄새를 맡았다. 그건 꽃향기에 가려 그동안 맡지 못했던, 아세트산 코발트와 비슷한 냄새였다.
"아, 이런."
고개를 떨궜던 왕자가 놀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죄송해요."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영후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정말 조심하셔야 될지도 몰라요."
"네? 왜죠?"
"그건, ……물론 지구의 위생청에서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제가 바른 보호제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우리도 확실히 모른다고 했거든요."
"보호제요?"
"네, 우리 환경이 지구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때 다시 서랍장이 뒤뚱거리며 다가와 왕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왕자님, 그건 극비사항입니다."
"응? 응."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영후를 바라보았다.
경호 로봇이 말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해주시겠습니까."
"아, 네, 그러죠."
영후는 뭔가 특종을 올릴 기회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호로봇 때문에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젠장.'
머릿속이 하얘졌다. 온통 보호제 생각뿐이었다. 뭐라고 물어야 보호제에 대한 대답을 더 들을 수 있을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지친 영후는 한숨을 내쉬며 너무나 평이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지구에 오신 소감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지구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겠습니까."
"네, 우선 지구에 오니까……. 우리 선조가 어떻게 살았는지 볼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쁘고 신기해요. 우리 테라성에는 지구처럼 고층 건물이 없거든요. 그리고 작은 꽃들이 너무 귀여웠어요. 우리 테라성에선 제일 작은 꽃도 제 손보다 큰데, 정말 신기했어요. 음…… 그리고 전하고 싶은 말은……, 음, 꼭 우리 함께 서로를 이해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칼람인들과 그랬듯이, 우린 죄가 없잖아요. 다 지난 일일뿐이에요."
밝은 목소리로 소감을 말하던 왕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주눅든 듯 끝맺었다.
영후는 그런 왕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2.
왕자와의 인터뷰를 마친 영후는 카메라 로봇과 함께 저녁 파티가 열릴 연회장에서 세계 각 국의 외교사절을 취재했다.
그들 중에는 테라성으로부터 거의 무상으로 공급되는 엄청난 자원의 혜택으로 경제난을 극복하고 호황을 누리는 기술강국의 외교사절도 있었지만, 그 이전 200년 동안 호황을 누리다 테라성의 지원으로 사양산업이 된 광산업자들의 끈끈한 로비를 받으며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국의 광산업보호를 위해 보호주의 정책을 표방하며 테라성의 유일한 수출품인 지하자원의 저가공급을 비난했다. 그 중에는 원색적인 비난도 있었다.
"그들은 악이요. 그들의 저가공세로 더 이상 태양계에는 남아난 광산이 없어요. 지난 30년 동안 2백 개가 넘는 광산업체가 문을 닫았소. 실업자만 10만 명이 넘어요. 지금은 우리가 물처럼 낭비하며 철과 금을 쓰고 있지만, 저들이 갑자기 공급물량을 반으로 줄인다면 그 혼란은 누가 막을 거요? ……내가 말하는 건 자원의 무기화를 막자는 겁니다."
그는 우크라이나 재무장관 빅토르 프란추크였다.
"하지만, 지난 200년 동안 자원을 고가로 공급해 거의 무기화한 건 귀국이었잖습니까."
어느 기자가 반박하자 그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그건 정당한 대가였소. 광산개발의 리스크를 감수한 기업의 입장에선 정당한 가격이었지. 하지만, 테라성을 보시오. 그들은 고작 운임도 안나오는 톤당 1유로에 철을 공급하고 있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kg당 3유로보단 말이 되는 것 같은데요."
빈정거린 건 일본 외상 다카시였다.
대부분의 자원을 수입에 의존해오던 동아시아의 공업국들과 유럽의 정치인들은 그렇게 테라성의 편을 들고 있었다.
"흥, 그 가격이 얼마나 갈 것 같소? 그리고 당신들은 테라인들이 어떤 환경에서 노동을 하는지 생각은 해봤소?"
프란추크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건 당신들도 모르긴 마찬가지죠. 그리고 요즘 세상에 어느 광산에서 인간이 노동을 합니까. 모두 로봇들인데."
"당신 말대로 대부분 로봇이 일을 하지요. 그리고 그 로봇의 대부분은 일제고요. 그 형편없는 로봇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아서 당신들이 철의 가격을 올린 건 다카시 씨도 인정해야할 겁니다."
"그건 당신들이 로봇에 들어갈 알루미늄과 텅스텐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렸기 때문이잖소."
이번엔 다카시가 발끈하며 말했다.
"웃기는군. 당신들 때문에 초기 투자자본이 과도하게 들어가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니요."
두 정치인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자 몇몇 기자들은 키득거리며 구경했고, 몇몇은 자리를 뜨며 다른 정치인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그때 영후도 기자들이 많이 몰린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왕권이라니. 아무리 왕이 죽으면 새로 선출한다고 해도 그렇지. 평생 집권을 한다는 건 독재요. 그곳엔 왕이 죽을 때까지 투표도 없다더군. 인구가 고작 5천만인데 투표도 안 한다니. 그런 법이 어딨소. 이 문제는 기자 여러분들도 분명히 따져봐야 합니다. 테라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과연 자유가 보장돼있는지 말이오. 봐요, 지난 30년 간, 테라성과 다시 연락이 닿은 뒤 그 누구도 테라인들을 직접 만난 적이 없어요. 5천만이라는 개척민의 후손을 우린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느니, 번성하고 있다느니, 이런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요."
"더구나 개척민을 호송한 경비정으로부터 연락이 없다는 것도 의심스럽죠."
누군가 떠드는 정치인의 장단을 맞추자 그는 기세 등등하며 말했다.
"맞소, 개척민으로 보내졌던 45만 명은 모두 극악무도한 범죄자였소. 연쇄살인, 강도, 강간, 테러. 이쯤대면 여러분도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갔던 호송선단은 왜 연락이 두절됐을까요? 그들이야말로 위대한 도전 정신을 가진 선량한 사람들이었소. 테라성의 왕은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그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오. 그전까진 테라성의 광물에 대해 높은 관세를 물려야 합니다."
"과연 그게 효과가 있을까요? 보도자료에 보면 지구의 1.5배 크기의 별에 인구는 고작 5천만 명, 그들은 부족할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면 우리가 대 테라성 수출을 중단해야죠."
"고작 꽃과 나무, 영화나 음악 같은 서비스 산업인데 오히려 지구에 손해가 아닙니까?"
기자의 질문에 그 정치인은 궁색하게 변명했다.
"5천만이 사봤자 얼마나 사겠소."
그때 황금나팔이 울리고 왕자의 입장을 알렸다.
왕자가 연회장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의 시선이 왕자에게로 쏠렸고, 박수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비난을 일삼던 정치인들도 마지못해 박수를 치며 왕자를 맞았다.
왕자는 여전히 금빛 가면과 레이스가 달린 로코코 양식의 옷을 입고 있었다. 왕자는 연회장을 가로질러 경호 로봇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연회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계단 위로 올랐다. 그리고 계단의 중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준비된 환영사를 읽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온 왕자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테라성에는 계단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있다하더라도 모두가 자동계단이기 때문에 계단을 직접 오르내린 적이 없어 난감했다며 계단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갑작스런 환경변화로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며 자리한 외교사절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각 방송사의 카메라 로봇들은 그런 어린 왕자의 모습을 담느라 여염이 없었다.
영후는 구석에서 좋은 그림이나 인터뷰할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살폈다. 그때 영후는 등뒤에서 누군가 죄인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는 거라며 왕자의 가면에 대해 빈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이들은 얼굴이 못생겨서, 또 어떤 이들은 쌍둥이가 있는 것 아니냐며 빈정거렸다.
그런 어른들의 비아냥거림을 들어서인지 삼삼오오 모여있던 아이들까지 왕자를 손가락질하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왕자는 또래 아이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자신을 비웃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왕자를 보며 영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왕자의 말이 새삼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후와 함께 온 카메라 로봇은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왕자 곁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영후는 파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마땅한 사람을 찾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어린 왕자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보려고 가까이 다가가 처음 만난 지구아이들을 마냥 신기해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은 황금과 백금으로 만든 왕자의 가면을 신기해하다가 한 아이가
"오늘은 할로윈 데이가 아니야."
하며 왕자의 가면을 벗겨버린 것이다.
그렇게 왕자의 얼굴이 모두에게 공개되고 말았다.
그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왕자의 얼굴은 보호제를 발라서였는지 군데군데 하얀 반점이 나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좌우로 혹처럼 튀어나온 이마, 감길 것 같지 않은 눈, 튀어나온 광대뼈, 그 사이의 작은 코, 축 늘어진 볼과 피어싱처럼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 턱과 목은 구분도 가지 않았다.
"맙소사."
"오, 하느님."
"괴물이다."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계 카메라 로봇들이 보다 더 자세히 찍기 위해 조명을 켜고 왕자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왕자의 모습은 마치 서치라이트 빛에 노출된 괴물 같았다.
놀란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왕자에게서 멀어졌다. 왕자는 허둥대며 가면을 찾았지만 가면을 쥔 아이는 이미 엄마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테라성의 경호 로봇들은 이런 사태에 대해 대비하지 못한 듯, 그저 카메라 로봇과 기자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왕자 곁에 서 서랍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뒤늦게 집사가 달려와 왕자를 안고 구석의 작은 문으로 사라졌지만 오히려 연회장의 혼란만 가중시켰다.
누군가 속았다고 소리쳤고 이어 누군가는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고 소리쳤다.
삽시간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각 국 정상과 외교사절은 앞다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카메라 로봇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영후의 결을 누군가 '빌어먹을 외계인.'이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지나갔다.



3.
방송국으로 돌아온 영후는 인터뷰 방영을 놓고 보도국 국장과 설전을 벌여야했다.
테라인들도 인간이거나 최소한 지능이 있는 생명체라는 것에는 합의했지만, 방영을 놓고는 팽팽히 맞설 수밖에 없었다. 국장은 인터뷰를 테라인들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의 자료로 쓰려고 했다. 그러나 영후는 토론자들이 자신들의 편협한 생각을 대중에게 심어줄 수 있다며 반대했다. 영후는 시청자들이 각자 판단할 수 있도록 뉴스를 통해 보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터뷰는 토론 프로그램에서 방영되고 말았다. 그것도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잘 편집된, 특히 핵미사일을 가지고 있다는 왕자의 말이 부각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영후가 우려한대로 토론의 참가자들은 가증스런 외계인의 모습이라며 인터뷰 자체를 매도했다. 나중에는 인터뷰를 한 영후조차도 자신이 농락 당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토론 참가자들은 테라인들의 근원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테라성으로 이주한 개척민들이 모두 외계인들에게 몰살당했고 그들을 몰살시킨 외계인이 이제 지구까지 노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라성에서 수출한 철에 방사능 수치가 지구의 철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자료를 들이대며 저들이 핵무기를 실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들이 수입해간 영화와 음악은 저들이 지구 침략을 위해 인간들의 성향과 약점을 찾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영후는 문득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왕자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이 아직 왕자가 지구를 떠나기 전에 벌어졌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영후는 사람들의 과민한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린 왕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왕자를 인터뷰했던 기자들과 연락해 테라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다큐멘터리를 따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기자들은 테라인들에 대해, 최소한 어린 왕자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는 왕자가 바른 보호제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곤 이미 지구의 위생청에서도 테라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완성되기 직전 지구연합은 외계인에 의해 오염됐을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당시 왕자의 별장을 방문했던 모든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그들과 접촉했던 사람들까지 정밀검사를 실시하면서 영후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수용소에 격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구연합은 테라인들의 해명과 현지조사가 끝나기 전까지 테라성과의 모든 무역을 중지시켰다.
철과 금속의 가격은 순식간에 30년 전 수준까지 치솟았고, 경제는 거의 마비직전이었다. 지구인들은 모두 혼란에 빠졌다.



4.
그렇게 광란의 3일이 지나자, 왕자는 도망치듯 지구를 떠났다. 그 모습을 중계한 방송국 기자와 스탭들은 모두 방독면에 방독의까지 착용하고 마치 치사율 높은 전염병을 가진 괴물을 쫓듯 쫓아가며 왕자 일행의 지구 탈출을 중계했다. 기자들의 그런 모습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공항 측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항을 폐쇄하고 일주일간 대대적인 소독과 정밀검사를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기자의 보도에 수용소의 휴게실에서 망하니 앉아 TV를 보던 영후가 푸념처럼 말했다.
"외계인이 침략했어도 이보단 낫겠군."
그의 손에는 함께 왕자를 인터뷰했던 카메라 로봇의 마지막 유품인 렌즈가 쥐어져있었다. 당시 인터뷰에 참여했던 중계 로봇들은 모두 폐기된 상태였다.
카메라 로봇은 끌려가면서 인터뷰가 있던 그 날 여집사에게 말했듯이 '전 표면 항균처리가 된 CM-305 모델로서 인간에게 어떤 유해한 세균, 박테리아도 전염시키지 않는 완벽한 항균 로봇'이라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카메라 로봇은 마지막으로 24시간 동안 소독한 거라 괜찮을 거라며 영후의 손에 작은 렌즈를 쥐어주었다. 영후는 그 렌즈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죽여버려. 전쟁이다. 전쟁, 신은 우리편이야."
누군가 휴게실의 테이블 위로 올라가 미친 듯 소리쳤다.
방역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달려와 그를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그는 거칠게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고, 간염 될까 두려워한 간호사들은 더는 나서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때 갑자기 TV화면이 지지직거리더니 생소한 화면이 펼쳐졌다.
화면은 어느 신비로운 자연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고대 그리스의 신전 같은 건물들이 언덕 위로 보였다. 다시 화면이 바뀌어 어두운 스튜디오가 서서히 밝아지며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얼굴의 괴물, 아니 테라성인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테라성의 왕이자, 이번에 지구를 방문했던 왕자의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지구인들과 달리 외모만으로는 그들이 부자지간이라는 걸 쉽게 믿을 순 없었다. 그는 비록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졌고, 눈이 흘러내리듯 처졌지만 왕자처럼 괴물이라고 불릴 만큼 혐오스럽지는 않았다.
테라성인은 외모를 중시한다는 왕자의 말이 영후의 기억 속에 떠올랐다. 영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사이 왕의 연설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연설은 사전에 준비된 건 아닌 듯했다.
"…… 나는 처음부터 지구인과의 접촉을 반대했소. 당신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고, 또 두려운 만큼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변이를 시작했을 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30년 전, 지구의 신호를 수신했을 때, 우린 지구인들도 조금은 변했을 거라고 기대했소. 외모가 아니라 생각이 말이오. 칼람인들 만큼은 아니더라도 우주를 여행하는 수준의 문명이라면 그것에 걸맞은 포용력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소. 하지만, 세상은 변했는데 인간은 변하지 않았소. 개척 1세대처럼. ……우리의 변이는 개척 3세대에서부터 표출되기 시작했소. 이곳 태양과 천연의 방사성 물질 때문이었지. 처음 이곳을 조사했을 때, NASA는 모든 게 지구와 똑같다고 했지만, 그건 단지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았소. 같은 건 하나도 없었지. 어떻게 지구와 똑같은 곳이 있다고 믿을 수 있었는지. ……물론 모든 수치는 지구와 비슷했소. 이곳의 태양 역시 지구의 태양처럼 수소 핵융합으로 수소가 헬륨으로 변하면서 생기는 질량 소실에 의한 에너지로 방대한 에너지를 방출했소. 하지만, 그 외의 태양 구성물질은 지구의 태양에선 관찰된 적이 없는, 우리가 플라늄과 페티온이라고 명명한 물질로 이 물질이 핵융합과정에 관여하면서 지구에는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방사선을 배출하고 있었소. 또한 자연방사성 핵종 (방사능을 가지는 동위원소를 방사성핵종이라고 하며, 방사성동위원소라고도 한다. 그리고 지구창세기부터 주로 지각 중에 존재하는 방사성핵종을 자연방사성핵종이라고 한다. 그 대부분은 우라늄계열, 토륨계열 및 칼륨-40이다) 역시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소. 결국 방사능 수치는 지구와 비슷했지만, 그 종류는 지구의 인류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자연 방사능이었던 거요. ……그 방사능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소. 피부는 짓무르고 시력은 점점 약해졌지. 어떤 이는 이젠 이(치아)가 없는 이들도 있소. 그러자 우리의 선조는 우리를 괴물이라며 버렸고, 심지어……, 우리 모두를 죽이고 지구로 돌아갈 계획까지 세웠소. 하지만, 우리는 살고 싶었고, 그래서…… 우린 우리의 부모와 전쟁을 벌였소. …… 카드메이아의 승리(예전에 오이디푸스왕의 사후(혹은 은퇴 후) 에테오클레스, 폴리네이케스 형제가 왕위를 둘러싸고 골육상쟁을 벌였을 때, (그리스 신화의 테바이 원정) 폴리네이케스가 여섯 명의 대장들의 지원을 얻어 테베를 공격했지만, (이는 테베의 성문이 총 7개였기 때문에 7명의 장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두 형제가 말을 타고 일 대 일로 겨루다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았다. 따라서 테베는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왕을 잃어 싸움에 진 것과 똑같은 타격을 받았다. 바로 이 테베 고사에서 '카드메이아의 승리'라는 말이 유래됐다. 카드메이아는 테베의 별칭이다. 즉, 카드메이아의 승리.란 비록 전쟁에는 이겼지만 진 것과 같은 큰 피해가 뒤따른 경우를 말한다), 승리 아닌 승리 후,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건설했소. 그리고 우린 현실을 받아들이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했소. 모든 것을 사랑했지. 모든 생명체를 사랑했소. ……그러나 지구인들은 과거 개척 1, 2세대처럼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군. 사랑하고 이해하기는커녕, 왜 이렇게 됐는지 알려고 조차하지 않았소. 그저 괴물이라고, 괴물이면 어떻다는 거요. 괴물도 살아있고, 사랑하며 서로를 이해할 줄도 아오. 괴물도 괴롭히지 않으면 물려고 달려들지 않소.
그리고 우리는 지구의 자연과 문화를 통해 당신들을 이해하고 동경했는데, 고작 우리에게 돌아온 건 멸시와 천대뿐이군. 이 우주에는 태양계에 갇혀 사는 당신들이 모르는 다양한 지적생명체가 있소. 그들은 이제 우리를 통해 당신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려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들은 어떻소? ……이제 나와 우리 테라성인들은 지구인들이 우주의 다양한 지적 생명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로 결정했소. 그러기 위해 당신들은 모두 변해야하오. 물론 칼람인들은 반대했지만, 우린 당신들과 같은 피와 유전자를 지닌 존재로서 이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소.
우리는 지구에 선물을 보내기로 했소. 이 선물이 지구인들과 우리와의 마지막이 되지 않길 바라오. 그리고 이 선물상자가 열리면 지구인 여러분은 우주의 다양한 생명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믿소."

연설이 끝나자 화면에는 어두운 우주에서 웜홀을 통과해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커다란 비행물체가 나타났다.
영후는 그게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건 이제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후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부신 햇살이 동쪽하늘을 밝게 비췄다. 영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들이치는 빛을 온몸으로 받았다. 빛 속에 그가 있었다. 빛은 영후의 몸을 통과했지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지지직거리는 TV의 잡음과 사람들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영후는 눈을 뜨고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팔과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여행할 준비가 됐군."

---------------------------------------


댓글 2
  • No Profile
    sulim 08.05.05 08:01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 재미있는 소재들도 많구요, 상징적인 풍자가 즐거워요. 마무리가 가 살짝.. 해소시킨 소재와 해소되지 못한 소재들도 함께 있어서 뒤섞인 느낌도 받지만요,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 No Profile
    라퓨탄 08.05.12 02:54 댓글 수정 삭제
    읽어주셔서 감사.. _(__)_

    .......

    그냥... 인간의 진화와 돌연변이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인간이 진화나 돌연변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써본 글이라서.. 딱히.. 끝맺음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진화와 돌연변이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아직 진행형인 것 같아서요...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097 단편 스튜어트 모델 에이전시 하나씨 2008.04.25 0
1096 단편 바보사랑 하나씨 2008.04.23 0
1095 단편 꿈의 해석1 pientia 2008.04.23 0
1094 단편 아프지 않아요?4 sulim 2008.04.22 0
1093 단편 「이빨 닦는 카나리아」 카엘류르 2008.04.21 0
1092 단편 남겨진 자들 스아 2008.04.21 0
단편 R.U ready?2 라퓨탄 2008.04.21 0
1090 단편 미래를 박살내 드립니다8 볼티 2008.04.20 0
1089 단편 어느 시인의 묘비 alsinore 2008.04.17 0
1088 단편 엽편) 마지막 소원 butterk 2008.04.17 0
1087 단편 <b>고양이 앤솔러지(가제) 수록작 발표</b>4 mirror 2008.04.15 0
1086 단편 아이를 안고 있었다 FR 2008.04.14 0
1085 단편 당신이 원하는대로2 세이지 2008.04.13 0
1084 단편 「데이」2 카엘류르 2008.04.11 0
1083 단편 나선형 종족의 개척신화5 김몽 2008.04.10 0
1082 단편 딜레마-뫼비우스 야키 2008.04.09 0
1081 단편 3초 세이프 룰2 땅콩샌드 2008.04.08 0
1080 단편 마녀사냥2 야키 2008.04.07 0
1079 단편 <b>당신의 고양이를 보여주세요</b> - 3월 31일 마감2 jxk160 2007.12.03 0
1078 단편 어지럼증으로 인한 어느 쓸쓸한 죽음4 존재반향 2008.04.04 0
Prev 1 ...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