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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 시인의 묘비

2008.04.17 20:5104.17

내가 그 책을 구입한 때는 몹시도 무더웠던 지난 여름날, 이름모를 한 고서점 옆을 지나칠 때였다. 그 책을 사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내가 그것을 산 이유를 변명해 보자면, 먼저 살갗이 따가울 정도로 내려쬐는 땡볕을 피하기 위해 나는 그 건물로 들어갔을 터였고, 주인도 쉽사리 꺼내기 힘든 위치에 자리 잡은 그 책을 - 책장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창고에서 먼지 쌓인 사다리를 꺼내 계단 끄트머리에 간신히 발을 디디고 서서 손을 뻗어야만 표지가 스칠 정도로 - 보자마자 나는 그 책의 가격도 묻지 않고 다만 벙찐 표정을 짓고 있던 주인의 손에 두둑한 돈뭉치를 쥐어준 후 마치 무엇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서점을 걸어 나왔다는 것이다.

문제의 책은 제목도 없었고 출판사도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지은이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다소 황량해 보이는, 누렇게 바랜 하드커버지를 넘겨 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본 나는 이 책은 단지 ‘어느 시인’이라는 무명의 이 책의 저자가 쓴 10개의 짤막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름모를 그 서점에 참으로 어울리는 책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책을 펼쳐든 나는, 그 정체불명의 책을 무엇에 홀린 양 처음 이야기부터 끝의 이야기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열개의 이야기들은 제각기 글의 분량도 틀리고 주제도 달랐다. 어떤 글은 단지 한쪽에 불과한 것이 있는 반면 또 다른 글은 웬만한 중편 소설은 뺨칠 정도의 분량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글 하나 하나가 감히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소재와 소재의 연결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주제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읽는 독자 - 나로 하여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음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이 책에 담긴 열개의 이야기들 가운데 그 끝을 장식하는 글이 이제 내가 소개할 ‘어느 시인의 묘비’이다. 마치 이 책에 쓰인 이야기들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듯 이 이야기의 제목은 죽음 - 살아있는 모든 것이 마침내 도달할 최후의 상태 - 을 상징하는 묘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하지만 나는 함부로 가정해 본다. 제목을 그곳에 쓰인 그대로 시인 - 아마도 작가 자신일 터이지만 - 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리라고.

시인의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 시인이 세운 묘비라고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정 가운데 하나이다. 만약 후자의 가설, 그리고 나의 가설이기도 한 그것이 맞는다면 작가는 무엇의 죽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무엇의 종말을 애도하며 묘비를 세운 것일까...



       「어느 시인의 묘비」

나는 바래왔다.

문장 구조학의 용어로 말한다면 주어와 서술어.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된 기호로 읽는다면 알파와 오메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정의하는 바로 그 두개의 존재들이 서로 완벽한 융합의 과정을 겪는 모습을.

완벽한 융합에서 비롯된 완전한 산물. 가장 단순하지만 그 속에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최소의 [ ].

[ ]를 하나씩 합치면 둘이 되고, [ ]를 두개씩 합치면 넷이 된다.

으스러뜨리면 한줌도 안 될 연약하지만 강인한 [ ]들을 나는 아무렇게나 긁어모아 내 멋대로 하얀 허공에 흩뿌려 트리는 작업을 지난 수십 년 동안 해 왔다.

그것은 마치 바닷가의 하얀 모래사장에서 언젠간 허물어질 모래집을 짓고 또 지으며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끊임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뜻하지 않는 기쁨을 얻는 어린아이의 행동 동기와 그 처음을 같이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무엇으로 무엇을 만드는 지를.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 ]으로 { }를 만드는 지를.)

어떤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무엇으로 무엇이 만들어질 지를.
(모든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 ]으로 { }이 만들어질 지를.)

내가 장난스레 흐트러뜨린 하얀 허공속의 조그마한 것들은 이윽고 마치 하늘 속의 구름인 마냥 제자리에 못 박혀 사람들이 { }라고 부르는 신기하고도 재미난 것으로 그 모습을 탈바꿈했다.

{ }를 모른다, 나는. 내 자신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자 라고 자부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내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면서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체 내가 해야만 하는 작업을 지난 수십 년 동안 해 왔다.

완전한 { }에 대한 갈구는 느껴보지 않았다. 갈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지금까지 만족해 왔을 따름이다. 주어와 서술어라는 거대하고도 든든한 두 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작지만 완벽한 존재 - [ ]. 이것이 하나라도 존재하는 글은 누가 읽더라도 감탄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글이 될 것이고, 이것이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 글은 누가 읽더라도 실망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글이 될 것이니까.

지금 완전한 종말에 임박한 지금에서야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뒤늦은 깨달음은 나에게 후회를 가져다 줄 뿐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시작’이라는 시초를 가진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끝’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생성’조차 ‘소멸’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무서우리만치 절대적인 한계와의 싸움은 [ ]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실로 안타깝게도. [ ]는 자기 자신과의 한계와의 싸움에서 패하고야 말았다.

그 위대했던 싸움 - 아니, 전쟁에서 패한 [ ]는 백기를 흔들며 이내 항복의 증명을 나에게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고대의 유산인 양, 나는 그것을 품속에 꼭 움켜잡고는 작은 소리로 흐느낄 뿐이었다.

“.”



                                                             P. 78 ~ 79.
                                                           '어느 시인의 묘비‘



- 주 석 - (놀랍게도, 다른 아홉 가지의 글들과는 다르게 이 글에는 ‘주석’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부연 설명이 뒤를 잇는다!)

1. [ ]는 공백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들어내는 자의 의도에 따라 [ ]는 때론 공백 없이 바로 시작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다소 당황함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 ]가 공백으로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그들은 배워왔기 때문이다.

2. { }는 [ ]들이 서로 조합되어 만들어진 최후의 결과물이 아니다. [ ]의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결과물들 중 하나가 { }일 뿐이다.

3. 모든 문장은 마침표로 끝나야 한다. 비록 몇 가지 예외는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 경우는 극소수일 뿐이다. 마침표가 없는 문장은 계속되는 문장이고 끝이 맺어질 수 없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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