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당신이 원하는대로

2008.04.13 01:5804.13

1.
그녀는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바라는 것이 적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직장이 대기업인 것은 아니다. 국가에 속한 공무원으로, 고위직인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하급직인 것도 아니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나 할까. 예전 같았다면 그런 위상을 차지하지도 못했을 직업이니 말이다. 입사한지 5년 만에 7급을 단 그녀에게는 딱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었다. 그 5년 동안 그녀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들였던 노력과 열성을 생각한다면 딱히 운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인생항로는 그녀가 설계한 대로 되어갔다. 모든 것이 적당했다. 이미 첫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그녀는 바라는 것이 적었으니까...단 하나, 그녀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남편 말고는.
남편은 부지런하고 조용한 성격의 남자였다. 그녀는 그런 남편이 늘 불만이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 그녀의 평소 입버릇처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인품‘ 그 자체였으니까.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 두 사람이 주말부부라는 것과, 남편의 회사 실적이 점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남편의 회사는 대기업중의 대기업이고, 거기서 살아남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것, 그러나 그건 월급 명세서를 보기 전의 이야기였다.
월급은 작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생각한 수준보다 턱없이 낮았다. 그녀의 월급보다 더.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남편은 피곤한 얼굴이었다.

“나, 이번에 발령받았어. 지방출장소야. 당신 근무지에. 안 그래도 몸이 많이 안 좋았었는데 다행이지.”

드디어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어. 라고 씁쓸하게 그는 덧붙였다. 우리, 예전부터 같은 근무지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말한 대로 된거네. 난 항상 내가 말한대로 되더라. 라고 그녀는 대꾸하긴 했지만 불안했다. 지방출장소?
그녀의 연고지인 이 지방에 좌천된 남편과 함께 근무한다고?
그러니까, 이게 문제였다. 바라는 것 없는 그녀였지만 적어진 금액과 언제 잘릴지 모르는 남편에게까지 만족할 수는 없었다.
주말부부였기 때문에 애틋하고 더 서로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두 부부가 벌어들인 금액이 적지 않았기에 만족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부인보다 좀 더 오래 근무했던 남편의 월급이 많았기에 남편도 만족하고 그녀도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지방출장소에 근무하면서 버는 남편의 돈은 더 이상 예전만큼 되지 않았다.
남편은 양말을 아무데나 벗었다. 그녀와 떨어져 살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남편의 발에는 발톱무좀이 있었다. 그는 밥풀을 잘 흘렸다.
자잘한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갈등을 안으로 삭혔다. 말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하는 모든 일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지방출장소도, 양말 집어던지는 것도, 그녀가 보는 TV채널과는 전혀 다른 채널을 선호하는 남편의 취향도.
그건 어느 책에선가 배운 것이었다. 모르는 것처럼 하면, 잊을 수 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그녀의 눈에는 남편의 하는 행동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와 반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신 말야.”

출장소에서 돌아온 남편은 소파에 몸을 눕힌 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응?”

그녀는 안경을 낀 채로 당첨된 경품권을 체크하면서 대답했다.

“저번에 말야. 당신 그 경품권 당첨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응.”

“왜?”

“어, 며칠 전에 사놓은 시금치가 다 떨어져서. 이 경품권대로 하면 시금치를 더 얻을 수 있으니까. 공짜잖아. 6천원어치.”

“...소박한 꿈이군.”

남편은 중얼거리면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다시 그녀에게 질문했다.

“살면서 좀 다른 것을 생각해 본적은 없어? 이를테면 공무원이라도 사무관이라거나, 차관이라거나, 장관이라거나. 나의 무병장수라거나.”

“...당신 이상한 소리하네. 갑자기?”

그리고 대화는 끊어졌다. 남편은 그녀에게 뭔가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가볍게 코고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남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처음 이곳으로 발령받았을 때보다 더 가볍고, 아파보였다.
그리고...그녀의 눈이 난시가 심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몸은 어딘지 모르게 희부옇게 보였다.

“난시가 심해졌나?”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경품권을 체크했다. 안경을 벗고 다시 눈을 비비자 시각은 다시 선명해졌다. 아직 난시가 심해진 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안경을 쓰다가 다시 벗었을 때 남편의 몸은 여전히 빛의 반사로 인해서 희부옇게 보였다. 그녀는 그것이 빛의 장난이라 생각하면서 안경을 다시 썼다.

2.

남편이 암에 걸렸다는 걸 아는 데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남편은 그녀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지만 의사는 그녀에게 바로 연락을 취했다.

“암입니다.”

“......”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녀의 인생좌우명이 잠시 흔들렸다. 흔들거리는 시야에 두고 의사가 선언했다.

“이 암, 수술 안 되는 암입니다. 부군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더군요.”

무슨 종류인지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의사에게 물었다.
묻고 싶지 않아도 물어야 했다.

“무슨...암이죠?”

“위암인데 수술은 전혀 안 되는 암입니다. 길어봤자 1년이겠군요.”

“남편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요?”

“아니오. 이제 아셨습니다. 저도 숨기려고 했습니다만...”

마치 예지라도 받은 것처럼 의사가 들어온 순간 물었다는 것이었다.
극심한 고통이 진행되어지고, 마지막에는 귀신처럼 피폐해지는 그런 암.
방사선 치료도, 그 어떤 약물치료도 본래대로 되돌릴 수 없는 암.

“네...”

“입원이 소용없기는 합니다만, 부군께서는 입원하시겠다고...”

의사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남편께서는 부인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군요. 이대로 작별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암. 남편을 가구처럼 치워버리고, 보고 싶지 않아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런데...”

남편의 거추장스러웠던 행동들을 기억하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1년이면 사별하게 될 남편을 추억해보려고 했지만 최근 몇 달간의 행동도 기억나지 않았다.
“남편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녀는 조용히 흩어지는 말의 파문을 씹으며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는 대답대신 그녀와 함께 그녀의 남편이 입원하고 있는 병동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남편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의 얼굴에는 전혀 고통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랄까.
그녀는 그나마 안도하면서 병원을 나섰다.
하지만 안경은 여전히 잘못된 듯 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옅어지는 것 같았다.

3.

남편이 병원에 있는 동안 그녀는 일을 했다. 짬짬이 남편을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암은 진행 중이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꿈속에서 머무는 그에게 암덩어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서운 것은, 전혀 움직이지 않기에 생기는 욕창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옅어져가는 피부색과 몽롱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변화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했다. 암으로 인한 식물인간 상태는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 뭘 보고 있는지 입가에 살짝 미소조차 띄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눈을 뜨고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떠나더라도 말을 주고 받고 싶었다.
1년이라는 시간동안, 그 어떤 말이라도...
그래서였을까. 기적은 일어났다.

4.

그건 그녀가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날의 일이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는 손길이 느껴졌다. 남편이었다.

“...왜 날 깨운 거야...”

그녀가 잠들어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인 듯 했다.

“당신이 날 깨우지 않으면, 날 이대로 잠들게 한다면 난 고통 없이 갈 수 있어. 즐거운 꿈만 꾸면서...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녀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뭐든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어. 당신은 생각하는대로 뭐든지 할 수 있잖아. 처음에 당신이 날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나가서 처음 이 꿈을 꿨을 때는 당신을 원망했어.”

더더욱 알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이 꿈이 내 고통을 줄여주니까 다행인걸까. 이대로 당신 기억에서 잊혀져버리면 난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어. 당신에게 잊혀지는 것과,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것. 이 두 개 중에서 어느 게 나한테 더 나을까...”

난 이대로 사라지고 싶어...
남편의 눈물이 그녀의 이마에 떨어졌다.
당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꿈을 꾸면서 천천히 사라지고 싶어...
그녀는 천천히 모든 것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그녀 기준에서 실패해 본 적 없었던 인생.
준비된 직장, 준비된 등수, 준비된 남편, 준비된 가족.
모든 것이 그녀가 원하는대로 되었었다.
그래. 그녀가 남편을 좋아할 수 없었던 그 시기를 빼고는.
그녀는 남편에게 뭐라고 말하기 위해서 이마를 들었다. 그때 그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손끝은 완전히 투명해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5.

남편이 깨어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와 반대로 투명해지고 있던 몸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병색이 완연해지면서 남편의 신경질도 늘어났다.
그녀는 부지런히 남편의 간병인을 챙겼다.
이미 그녀에게는 예전의 그 적은 월급이라던지, 남편의 사소한 결점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는 두려운 사실이었다.
결코 고칠 수 없다면, 1년만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그와 대화해야했다.
고통없는 잠은 결국 죽음이니까.

“왜 날 보내주지 않아? 왜 날 보러오지?”

남편은 깎은 머리를 매만지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아직 안 죽었어. 살아있잖아. 당신을 만나러 오는 건 잘못된 게 아냐.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안 죽었으니까. 내 남편이고.”

“시치미 떼지마.”

그날 따라 그녀의 남편은 거칠게 대꾸했다.

“날 안 보러오는 게 날 도우는 일이야. 니가 내가 아픈 걸 어떻게 알아?니가 이 고통을 알아?”

“.......”

“날 가전제품처럼 생각하잖아. 고장난 가전제품. 고치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냥 골칫덩어리니까 저 한켠에 치워놓는 가전제품.”

“가전제품 아니야. 당신 내 남편이라고.”

“거짓말!”

그가 마시라고 사놓았던 캔 음료수가 벽에 집어던져졌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니가 제대로 맘만 먹으면 날 다시 고칠 수도 있잖아! 지금 안 낫고 있는 건 다 너때문이라고!”

그녀는 아무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는 남편은 다시 잠들어있었다.

6.

그날 저녁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기뻤던 이야기,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을 때 기뻤던 이야기.
그와 함께 살아서 즐거웠던 이야기...
그때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랑 살아서 기뻤어?”

잠든 게 아니라 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응.”

슬픈 일도 많았고, 기쁜 일도 많았어.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럼, 날 이대로 보내줘.”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대로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그대로 인간으로 체화시켰다고나 할까...당신의 능력으로 날 고통없이 보내줘...암보다는 그게 더 나아. 날 잊어버려줘...”

“......”

“잊혀지는 건 슬퍼. 하지만 지금은 몸이 아픈 게 더 싫어. 이대로 이대로 날 보내줘...”

그녀는 뼈만 남은 앙상한 남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남편의 뺨에 닿았다.
남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결국 만족했다.

세이지
댓글 2
  • No Profile
    야키 08.04.13 11:50 댓글 수정 삭제
    점점, 보기에 예쁜 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조금만더, 아주 조금만 더.
  • No Profile
    세이지 08.04.13 19:10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야키님. 더 노력해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야키님 덕분에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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