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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데이」

2008.04.11 23:0204.11

「데이」

내가 처음 눈을 뜬 세상은 암흑이었다.
온 세상에 돌아다니는 ‘그들’. ‘그들’의 존재는 내겐 공포 그 자체였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공포를 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먼저 말이 없다. 입을 열어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또한 ‘그들’의 몸은 하얀 사슬과 끈에 매여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 몸을 이끌고 세상을 방황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감정이 없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몸만 있고, 마음이나 감정은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
그러나 지금 내 옆에는 ‘그들’ 중의 하나가 있다. 숨을 쉬거나, 무언가를 먹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감정도 마음도 감각도 그 아무것도 없는 ‘그’이다. 사실은 ‘그’가 왜 내 곁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눈을 뜬 ‘그날’, 이 세상은 암흑이었고 내 옆에는 ‘그’가 있었다. 빛도 없고 물도 없고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세상. 존재하는 것은 모래와 먼지, 그리고 ‘그들’과 ‘내’가 유일했다.
끝간데를 알 수 없는 검은 모래가 휘날릴 때면 어김없이 ‘그들’ 중의 하나와 마주쳤고,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같은 ‘그들’ 중의 하나를 쓰러뜨렸다.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무거운 사슬과 끈에 매여 움직임이 느렸고, 거의가 손에 든 쇠붙이를 휘두르는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를 도울까도 생각했지만 ‘그’나 ‘그들’은 나와는 다른 존재였다.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돕지 않은 오늘의 싸움도 역시 ‘그’의 승리였다. 피조차 튀지 않는 ‘그들’의 싸움은 오히려 공포스럽다. 쇠붙이와 쇠붙이가 느리게 깎여나가는 소리, 이따금씩 사슬과 쇠붙이가 내는 기이한 마찰음 소리를 제외하면 ‘그들’의 싸움엔 다른 소리가 없었다. 거친 호흡이나 빠른 움직임도 없었다. 퍼석거리는 모래는 움직이는 자들의 발자국 소리조차 먹어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는 싸우지 않을 때는 좀처럼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항상 그 공허한 눈동자를 위로 하고, 멍하니 있었다. 어쩌면 그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작은 빛도 찾을 수 없는 암흑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공허한 눈 안에 암흑을 가득 담고서.
‘그’의 머리카락도 하늘의 암흑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 결은 모래처럼 거칠었고 윤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머리카락은 흘러내리는 암흑처럼 ‘그’의 목을 덮고 있었다.
하얀 목. 그러나 그림자가 지면 ‘그’의 살은 마치 쇠처럼 잿빛으로 보였다. 몸에 얽매여진 하얀 쇠사슬과 끈들은 단단히 고정되어 ‘그’의 몸을 구속한다. 목부터, 어깨, 팔, 몸, 다리까지 친친 감겨있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도록.
그래서 역시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껍질만 인간일 뿐, ‘그’는 이제 무엇인가에 매여 이렇게 힘들게 방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이 힘들다는 것이나 감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처가 나도 그것을 모른다는 듯이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것이 ‘그들’이니까.
‘그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겉모습이 인간이라고 해서 ‘그날’ 전에도 ‘인간이었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지 않을까 싶다. ‘그’도 언제는, 생각과 감정을 가진 자유스러운 인간이었던 날이 있었겠지…….
바람이 분다. 검은 모래의 바람. 무언가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들’일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그들’.
“드디어 찾았군요”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들’의 목소리다. …아니,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이란 입을 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존재이니까.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정중하게 모자를 벗어들고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한다. 새하얀 모자와 새하얀 옷. 암흑에서 빛나는 보석 같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그들’처럼 공허한 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의 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 눈은 암흑,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소용돌이치는 저 깊은 곳의 회오리…….
“설마 아직 모르셨던 겁니까?”
새하얀 옷의 존재가 입에 띄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눈웃음을 지었다. 이곳에선 처음 보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존재는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잡으라는 듯이.
“힘드셨겠군요. 죄악의 육체에 갇혀서.”
죄악의 육체…, 내 몸을 말하는 모양이다. 하기사 이 세상은 암흑 천지였고, 물이나 거울도 없어서 나 스스로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그 존재가 내민 손을 잡자 몸이 가벼워졌다. 두꺼운 껍질에서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무언가가 원래대로 돌아온 걸까. 애초부터 ‘그들’만의 세계에 나라는 존재가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길을 잘못 든 불운한 여행자였다고나 할까.
“아…….”
뒤를 돌아보고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있던 자리에는 이전의 나, 그러나…, ‘그들’이 된 내가 있었다. 나와 같은 키, 흑갈색의 거칠고 긴 머리카락, 하얀 사슬과 끈에 매인 소녀, 내가 서 있었다.
“당신은 자신이 말을 할 수 있지만 안한 것이라 생각했겠죠. 그렇지만 저게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들’이라고 부른 자들과 같은…. 하지만 ‘우리’들은 저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죠.”
하얀 존재…, 키가 큰 금발머리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가 말을 이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우리들은 저들을 ‘죄악의 육체’라고 부릅니다. 저들은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이죠. 그것도  죄를 짓고 죽어, 그 육체가 이 암흑의 세계를 평생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자신의 영혼을 찾아서.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어 감정도 고통도 욕구도 그 아무것도 느낄 수 없죠. 하긴, 영혼이 없는 ‘시체’가 무슨 마음이 있겠습니까?”
마지막엔 거의 장난조로 긍정을 요구하듯 질문을 던진 그 존재는 잠시 시선을 ‘그’에게 두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신의 ‘그’는 단순히 당신에게서 영혼의 흔적을 느끼고 쫓아다닌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엔 있어선 안돼는 존재, 그러나 와버린 존재가 당신이니까요.”
그 존재의 말은, 즉 내가 죽었다는…. 그런 말인 것인가. 그럼 내가 이 암흑의 세계에서 눈을 뜬 ‘그날’은….
“내가…, 죽은 날…….”
“딩동댕! 이해가 빠르시군요. 바로 그겁니다. 이젠 모든 걸 다 아시겠죠?”
그 존재는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꽉 잡았다.
“자자, 그럼 가실까요?”
이미 육체에서 빠져나온 나, 즉 나의 영혼은 그의 손에 이끌려 거침없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이미 죽은 몸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미소지었다. 그 존재는. 그리고 예의 그 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이 갈 곳은,”
웃었다.
“지옥입니다.”


- 끝 -




*제목 ‘데이‘는 They(그들)과 Day(그날)의 이중의미를 가진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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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처음 온 신입(?)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메일 : kay_kay@naver.com




카엘류르
댓글 2
  • No Profile
    야키 08.04.11 23:08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두가지의 흡사한 의미가, 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멀어 보이는 군요.
  • No Profile
    카엘류르 08.04.12 00:01 댓글 수정 삭제
    사실 원래의 의도는 한글로 똑같이 발음되는 두 개의 단어가 영어로는 다른 의미의 두 단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상 별 관련은 없지만 반복되어 등장하는 단어이기 때문이죠. 어쨌든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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