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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형 종족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는 이가 없다. 다만 지금의 혹독한 환경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을 보아 어느 끔찍한 행성에서 이주해왔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나선형 종족이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신세계는 생지옥에 다름없었다.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산성비가 내리고, 땅에서는 염산이 솟구쳤다. 나선형 종족의 과학자는 신세계의 수소이온지수를 측정해본 결과 pH 4라는 강산성으로 판명되어 족장에게 철수할 것을 건의했다.
“왕이시여, 이 땅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당장 우리별로 돌아가시지요.”
그가 보고를 올리는 와중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일족이 염산에 데어 죽었다. 하지만 족장은 현명한 지도자였다. 신세계의 대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자신들이 이 곳에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들 땅을 살펴보라. 이 곳의 땅은 강한 산에도 녹지 않고 우리들이 들어가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표토가 깊다. 우리의 나선형 신체는 땅을 파고 들 수 있다. 또한 위대한 정신문명을 가지고 있는 우리 종족은 명상을 통해 피부를 암모니아로 감쌀 수 있다.”
나선형 종족은 신세계의 땅속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들은 몸통에 달린 대여섯개의 꼬리를 움직여 땅속을 헤집고 다녔다. 염기인 암모니아가 그들의 외피를 둘러싸 강산의 화학물질들을 중화시켰다. 그들은 새로운 별에서 번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숫자는 처음 도착했을 때 보다 1만 배 이상 증가해 있었다. 그들의 문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 멸족의 위기가 닥쳤다.

어느날 하늘에서 하얀 폭탄이 가만히 내려왔다.

.........그리고 일족의 99.7%가 죽었다. 현명한 족장은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을 땅속에 불러 모아서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했다.
“우리가 재앙을 맞이한 것은 별을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주거지가 부족해지자 표토층을 뚫고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살았다. 별이 아팠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종족은 인구조절을 하면서 별과 공생해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숙연한 모습으로 족장의 말을 경청했다.

의사는 웃는 낯으로 내게 말했다.
“항생제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네요. 헬리코박터 균이 안 보이네요.”
“그런가 봐요. 속 쓰린 것도 없어지고. 항생제를 좀 더 먹어볼까요?”
“아니요. 균을 완전히 박멸하게 되면 위산이 역류하는 등 부작용이 생깁니다. 균의 농도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좋아요.”
“공생하란 말씀인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야쿠르트 정도나 마셔볼까요?”
“‘윌’ 말씀인가요? 뭐, 안 마시는 거보단 낫겠죠.”
나를 괴롭히던 위궤양은 이렇게 평화롭게 사라졌다.
김몽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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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몽 08.04.10 14:18 댓글 수정 삭제
    헬리코박터 파이로리는 위 점막 속에 살고 있습니다.
    헬리코는 '나선형'이라는 뜻이고 박터는 '세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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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수 08.04.12 00:37 댓글 수정 삭제
    오 센스있습니다. 재밌게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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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owinrain 08.04.17 13:37 댓글 수정 삭제
    나선형이란 단어때문에 순간 그렌라X이 생각났었습니다. ㅎㅎ
    재밌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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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려운 08.04.18 00:18 댓글 수정 삭제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재미있게 봤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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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씨 08.04.23 20:32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시각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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