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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딜레마-뫼비우스

2008.04.09 15:2604.09



뎅. 뎅. 종소리는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비오는 거리는 차갑다. 바라보기 싫을 정도로 음침하다.
조용한 가운데. 은은하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가 스스로 갈증을 달래는 듯, 혼자서만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다.




조용히 예배드리고 있던 흡혈귀 하나가 옆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나는 흡혈귀오."

인사를 받은 남자가 성경책을 뒤적거리며 씨익 웃는다. 한쪽은 닳아 없어진듯 보이지 않지만 뽀족한 송곳니가 인상적이다.

"나도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린다.

"허어, 잘되었군. 마침 식사를 할 참이없는데 같이 하지 않겠소?"

처음 입을 열었던 흡혈귀는 우연찮게 동네 친구를 만난 꼬마아이처럼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 입가에는 나지막한 기대감이 베여있다.

"먹이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여기 널려 있지 않소."

짜증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 남자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흡혈귀는 손바닥으로 조용한 교회 안을 빙 두르며 말했다. 마치 '행사장은 저쪽입니다.' 라고 말하는 어딘가의 젊은 아가씨 같다.

"어허! 큰일날 소리!. 하나님 백성을 다치게 하면 지옥에 가게된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그가 소리질렀다. 기도중이라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처음 말을 걸었던 흡혈귀(그의 옷은 붉은 색이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리고 오래 생각했다.

"그럼, 불교신자나 이슬람 교도들의 피를 마셔야 하나?"

"아니되오! 몸속에 이단의 피가 흐른다면, 그또한 지옥행이오!"

이번에는 더욱더 화가 난 듯이 말한다. 붉은 흡혈귀는 멋쩍은지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오르간 소리가 울려퍼진다. 기도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러면 무신론자들은 어떻소?"

"안되오. 그들의 그릇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아직 구원의 여지가 있소, 주님의 피조물을 함부로 해치면 안되오."

붉은 흡혈귀는 슬슬 지겨워졌다. 그보다는 배가 고파졌다. 그리고 또 그보다는 갈증이 났다.

"그럼 무엇을 먹어야 하지?"

"하긴, 그러게 말이오."

두 흡혈귀는 기다란 예배의자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한다. 성경을 놓을 수 있게 앞 의자에 부착된 간이책상은, 머리를 박고 생각하기에도 좋다. 때로는 졸기도 했다. 더러는 빙고게임을 하기도(주로 여자 연예인의 이름을 두고 했었지. 붉은 흡혈귀는 잠시 딴생각이 들었다.)했다.

붉은 흡혈귀는 질렸다는 듯 의자를 탕 치며 중얼거렸다.

"안식일에 포도주나 마셔야 겠소."

"나도 그래야 겠소."

그 말과 동시에, 두 흡혈귀는 나란히 앉아서 주기도문을 외운다.

오르간이 멈추고, 분위기는 경쾌해진다. 이제는 주님보다 점심이 가까워 졌음을 눈치챈 사람들과 동시에, 예배도 끝이 났다.







『조금 높은 곳』


"전사들이 몰살했습니다. 벨제뷔트여, 사탄이여,위리놈이여,몰로크여,앙그라 마르이누여,레오나르여,판이여,가이아여,아무르여,나의 왕이시여. 지금은 파리의 모습입니까. 부디 그 노여움을 푸소서."


파리가 왱왱거린다. 그를 질책하는 듯 하다.

"날개짓을 거두어 주소사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군주여. 나는 아버지의 작은 종이옵니다. 부디."

파리는 왱왱거린다. 잠자리채 안으로 들어가버리라고 명령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파리대왕이시여. 나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저희들의 신형 핵무기보다 강력합니다. 정밀조준 핵탄두를 가졌던 전사 열 일곱명이 그자리에서 사살당했습니다. 우리는 침몰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가 강해진다."

파리는 위엄있게 말했다.

"무엇을 말씀하시옵니까?"

"피."

파리는 짧게 대답한다. 묵음이 겻들어진 어려운 단어를 소리내어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아.. 피군요."

남자(그는 처음으로 남자라고 불리었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남자가 된 것이다.)는 웃었다.

그리고는 파리채를 들어 강하게 파리를 내리친다. 지직 하고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우주의 균형은 오른쪽으로 기운다. 저승은 왼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벨제뷔트며, 사탄이며, 위리놈이며, 몰로크이며, 앙그라 마르이누며, 레오나르며, 판이며, 가이아며, 아무르였던 파리는 다리 한쪽을 남겼다. 나머지는 그가 있던 세상과 또다른 방법으로 조우했다. 예컨데 환생이라고 불러도 좋을것이다.

남자는 골똘히 생각했다. 다음부턴 신세대에 맞춰 새로운 장비를 쓰자고 다짐했다. 요즘에는 딱히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전기 파리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을 파리를 잡고 있었다. 남자는 지금 죽은 그의 왕 역시, 죽어가는 파리들중 하나였다고 자신을 이해시켰다.  파리는 어디에도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다.

사람들은 즐겁고. 새벽따윈 오지 않아, 라고 누군가 부추긴 듯 땅조차 흥겹다. 온갖 먹을 것이 공중을 부유한다. 대개 멀리까지 날아간 챔피언은 입가에 때를 잔뜩 묻힌 금발머리(씻을수만 있다면야 예쁘다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소녀의 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멀리멀리 날아라! 잔뜩 기대를 건채 하늘로 쏘아올려진 행복은 다음날까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화가난 달이 그들을 쫓아보낸다.
달에게는 그들이 파리떼처럼 귀찮기 때문이다.

그 아래서, 두 남자가 만났다.

"포도주가 있소?"

붉은 흡혈귀가 물었다.

"그건 왜묻지?"

전기 파리채를 쥔 남자가 답한다. 굉장히 차갑게 말했기 때문에 흡혈귀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안식일만 아니라면 콧잔등을 물어주었으리라.

"목이 타기 때문이오. 포도주를 마시고 싶소."

파리채를 쥔 남자는 비열한 표정으로 흡혈귀를 쳐다본다. 능글맞은 미소는 광대처럼 우습기조차 하다.

"너 같은건, 절대로 포도주를 마실 수 없을거야."

킬킬 웃는 남자, 흡혈귀에게는 그의 얼굴이 동글동글한 마늘처럼 보인다(동글동글하다면, 어쩌면 마늘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심각하오. 포도주가 없으면 나는 죽소."

"지옥불은 어떨까?"

"무슨 소리오."

"너는 어차피 지옥에 가게 될 거니까. 매도 미리 맞는게 더 좋지 않아?"

"당치 않소. 나는 주님을 섬기오. 주님을 섬기는 자는 지옥에 가지 않소."

"지옥에 가지 않는 자는 피를 빨지 않는 자 뿐이지. 너는 못 가. 이 멍청한 작자야."

붉은 흡혈귀의 눈이 어두워진다. 순간, 눈앞의 남자가 포도주가 잔뜩 든 병으로 보여진다. 조금만 마개를 열어주면 시원한 포도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흡혈귀는 커다란 손톱으로 남자의 목을 잘라버린다. 전기 파리채는 한번 써보지도 못한채 툭 하고 떨어진다.
마침내 포도주의 뚜껑을 연 흡혈귀는 꿀꺽꿀꺽. 시원하게도 마신다. 단 삼십모금으로. 한병을 다 마신 흡혈귀는 눈살을 찡그린다.

그도 그럴듯이, 오히려 더 목이 말랐던 것이다.






『심판소』

"저자를 어찌해야 좋겠소."

"잘 모르겠소. 피를 빨았으니, 지옥으로 가야겠지."

"아니되오!"

"루시퍼. 말씀해 보시오."

"저자는 우리의 법을 어기고 우리의 동족을 죽였소. 그런 작자는 우리의 영토에서 방출되어야 하오. 지옥은 커녕 연옥도 열어줄 수 없소."

"알겠소. 그럼 그대의 뜻대로 처리하시오. 회의를 마치겠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시오."

탕탕. 메마른 소리가 울렸다. 단조로운 그 소리와는 다르게 회의실 내부는 활기차고, 재빨라진다.







"아빠!"

그림책을 둘러보던 소년이 말했다. 표지를 보니 요즘에 나온 책인듯 싶었다. 아이는 거의 끝까지 책을 본 듯 한데, 악마를 표현한 그림체가 상당히 해학적이라 어린아이가 읽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어보였다.

"응. 왜그러니."

"여기 이 붉은 흡혈귀는 지옥에 가게 되나요?"

남자는 동화책을 집어들고 처음부터 죽 흝어본다. 말이 어눌한 소년에게 듣느니, 차라리 읽어보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다. 5분만에 50페이지 짜리 만화를 다 읽은 남자가 설명하기 시작한다.

"대충 알겠다. 잘 들어보렴."

"네?"

"너도 엄마따라서 성경 읽어봤지? 나중에 커서 그것을 끝까지 읽게 된다면 흡혈귀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꺼야. 벨제뷔트도, 파리대왕도 나오지 않지. 그러니까 이들은...('존재하지 않는'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5살짜리 아이가 너무 어려보였음으로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원래부터 없는 이름들이지. 음... 딱히 말하자면 아마도 지옥에 가게 될꺼야."

"어째서요?"

남자는 큼 하고 기침을 했다.

"요한계시록에 써 있거든. 성경의 글귀중 하나라도 빼거나 덧붙이면 누구든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이녀석들은 전부 덧붙여진 이름들이야. 원래부터 없지만, 단지 글씨로 씌여졌기 때문에 있는 이름들이지. 말하자면. 저번에 동화책에서 본 '크레타 사람' 이야기 같은 걸까."

"모르겠어요 아빠."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래. 그렇겠구나. 그럼 다른 놀이를 찾아보자."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간다. 또다시 큼 하고 기침을 했다.








『뫼비우스의 띠』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눈앞에는 열두개의 허수아비. 그들은 예수님을 빙 둘러앉아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있다.

"이것은 나의 피니라."

예수님은 포도주를 부으며 말씀하셨다.

"어째서 입니까?"

가장 곁에 있는 허수아비가 말했다.

"성경에 씌여있기 때문이다.

끄덕. 모두들 기분좋게 긍정한다.

전혀 흥이 나질 않는 식사가 계속된다. 누군가가 이것을 최후의 만찬이라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중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근엄하게 말했다.

허수아비들은 웅성웅성 거린다. 그 와중에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손가락 끝으로 자신을 가르킨다.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

붉은 흡혈귀가 물었다.







포도주 잔이, 툭 하고 땅에 떨어진다. 텅 빈 잔에는 포도주 한방울이 남아 똑 하고 떨어진다.
이로써. 땅은 피로인해 이루어 진 것이 되었다.
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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