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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Rain

2008.05.07 21:5405.07



곧 비가 올 것이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새롭고도 낡은 도시의 틈새로 촘촘히 스며들었기에. 물을 먹어 둔해진 바람은 어둡고 침울한 구름을, 그 못내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의 등을 떠밀며 끈기있게 몰고왔다. 마지못해 움직였던 구름은 얼굴에 불평과 불만을 가득 품었으나, 결국 새로운 논밭에 둥우리를 틀었다. 하늘이, 도로가, 사람들 모두 낮게 드리운 잿빛 그림자의 지배를 말없이 수긍했다.

「전국적으로 다소 흐린 가운데 국지적으로 집중호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울, 경기, 강원도 등 중부지방에서 주로 많은 비가 내릴 것이며, 서울 경기 일부 지역에서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상 강수량은...」

그녀의 언어는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생기발랄했다. 그녀는 작고 네모난 상자-인간이 만들어 놓은 훌륭한 세뇌장치다-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이 우울하고 청량한 습기와 전혀 만나지 못한 탓일 것이다. 단단한 땅위에는 강철로 된 괴물들이 여전히 느릿하게 기어가고 있었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바삐 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성급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들은 더 이상 그 때와 같지 않았다.

비가 내렸다. 구름이 인간이 깔아놓은 보도 위에 검은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조그맣고 연약했던 그것은 점점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래, 그렇게 시작되는 거야. 새로운 시대는 으레 한 알의 물방울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지. 나무들은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온몸을 맡기고 짙푸른 내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후, 뒤늦게 나무의 필요를 깨달은 몇 안 되는 인간들의 손에 다시 돌아왔지만 좁고 영양도 형편없는 땅에서밖에는 살 수 없었는데도, 이들은 오늘 하루를 충분히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기다렸다.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지기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도시는 먹구름의 지배 아래 있었다. 정복은 끝났다. 이제 ‘우리’의 세상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모든 것, 모든 곳 속에서 숨어있던 우리가 맘대로 뛰어놀 시간이라구. 모두 나와. 가로등 아래서, 자동차 뒤칸에서, 지나가는 사람 머리칼 속에서, 휴지통 속에서, 폭우에 푹 빠져버린 팬지꽃 위에서 어서 다들 나오란 말이야. 놀자!

숨어있던 것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연약하게, 소심하게, 능청스럽게, 또 어떤 녀석은 뻔뻔하고 당당하게-예를 들어, 나 같은 녀석-어둠의 세계에서 물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를 무서워하는 인간들이 비를 피해 여전히 우왕좌왕 하는 동안, 우리들은 수를 늘려갔다. 나는 혀를 내밀었다. 물이 입안 가득 들어왔다. 물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시간. 오늘만큼은 우리도 더 이상 땅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늘에는 새조차 날지 않는다.

별도의 예비동작 따윈 필요없이, 물을 거슬렀다. 지상의 모든 소리는 구름이 대지로 퍼붓는 이 축복에 항복하라! 오직 우리만이 빗속을 가르며 세계를 유영한다. 지상의 모든 빛이 비의 바다에 휩쓸려 뿌옇게 떠있었다. 땅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구름과 가까워졌다. 인간이 땅위에 꽂아놓은 거대한 쇳덩이 위로 물방울이 부서졌다. 허공에서, 나는 내 옛 친구들을 만났다. 간혹 조그만 아이가 미처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기새처럼 떨었지만, 내 동료들은 그에게 다가가 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법이래도 별 것 없다. 그저 날고 싶어하기만 하면 되니까.

도시를 가로지를 때마다 동료는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간들이 지어놓은 거대한 다리, 그 사이에 떠있는 커다란 섬, 섬 위에 빼곡히 박힌 도도한 건물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마음껏 구경했다. 어둠 속에서는 그저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에 방해받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묶여있지 않았다. 해방이다!

나는 구름과 강물 사이에 촘촘하게 새겨진 빗방울을 섬세하게 밟았다. 발가락 하나하나, 손가락 하나하나 건드려도 보고 휘파람도 불어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뻗을 때마다, 발을 구를 때마다, 입술을 오므릴 때마다 내 온 몸과 정신에 부딪혀 무수히 명멸해가는 빗방울을. 빗방울 하나하나가 품고 있던 저마다의 우주를, 나는 일일이 깨부수며 전진하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물줄기 위로 자그마한 원들이 무한히 부딪히며 생멸(生滅)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한한 탄생과 죽음에 기쁨의 노래를 부르자!

모두가 손을 잡고 원을 그렸다. 접신(接神)의 시간이 왔다. 우리는 푸른 빗방울이 되었고, 서로 다른 온도와 질감을 가진 잿빛 공기가 되었고, 그들이 만나 이뤄진 오묘한 균형 그 자체인 검은 구름이 되었다. 초록빛 강 위에 그려진 곡선이 되었다.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영겁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항상 새로웠다. 곧 거대한 구름이었고, 곧 커다란 물줄기였으며, 곧 위대한 짐승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매끄럽고 긴 육체를 짙푸른 강물 속에서 끄집어내었다. 은빛 비늘이 빗방울을 머금어 한껏 빛을 발했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우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길고 우아한 손톱으로 그 중의 우두머리, 나를 가리켰다. 그녀의 가느다란 흰수염은 언제나 그랬듯이 차분했다.

“항상 심술궂고 장난치는 것만 좋아하는 어린아이야, 이번에는 무슨 일로 날 깨운 거니?”
“당신이 잠든지 너무 오래되어서요.”
“여전히 영겁과 찰나를 구분하지 못하는구나. 시간이란 부질없는 것, 자연에는 시간이 없단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이내 특유의 높은 소리로 울었다. 그녀의 정기에 감응한 공기가 깜짝 놀라며 사방으로 부서져 밝게 빛났다. 구름이 세상이 부서질 듯이 울었다.

“넌 여전히 어리구나.”

그녀에게 표정이란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웃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그녀의 오랜 친구이며-설령 자연에 시간이 없다하더라도, 나에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녀는 내 오랜 친구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직도 인간이 남아있어. 어째서일까, 너는-이미-시간-공간-모두-박탈-당했-는데.”

세계에 대한 분노가 아직 남아있던 구름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왜 두 음절씩 말을 끊었는가, 그 이유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오래 전에 그녀를 위해 시간을-공간을-목숨을-바쳤던-것이다.

“너는 내 역린(逆鱗)을 건드렸어.”

그녀의 말에서 나는 감정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도 자연이 아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과거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지나간 어느 순간을 나는 지켜본다. 아직 강어귀가 더럽혀지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 자연에 순종했던 어느 때에, 나루터에서 고기 잡던 한 장난꾸러기 소년이, 어느 날 스스럼없이 어깨를 드러낸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한 소녀를, 그저 안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다가갔던 옛날 이야기. 그리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쓸쓸한 이별 이야기. 소년의 뒤안길에 남은 소녀의 원한과 복수에 대한 이야기...

“이제 그만 날 풀어줘.”

그녀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있었다. 과거의 감정도, 원한도, 슬픔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서. 나보다 더 난폭하고 더욱 잔인하게 소유하고 있으면서. 나는 잠시 인간으로 돌아가 있었던 나 자신을 원망했다. 자유도, 해방도 이 순간에는 없었다. 나는 어쩌자고 이 빗속을 헤쳐나왔단 말이야...
비가 조금씩 줄어가고 있었다. 언젠간 사그라들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비가 곧 그칠 거예요. 이제 올라가세요.”

그녀는 곧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강줄기가 끓어오르고 구름이 요동쳤다. 그녀의 매끄럽고 긴 나신(裸身)이 농염하게 부풀어오르는 듯 했다. 출발하기 전에 그녀는 말했다.

“다시는 날 부르지 마.”
“어떻게 하느냐는 내 마음에 달렸지요.”

난 그녀가 웃었을 것이라고, 인간이었을 때의 그 차갑고 기묘한 웃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제 몸을 공기로 감싸안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과 강에서 끌어올린 물방울로 옷을 해입고 하늘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구름이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렸다. 승천(昇天)의 순간, 나는 보았다. 그녀가 물방울로 꼭꼭 감춰둔 몸뚱이 한켠에서 슬프게 빛나는 작은 역린(逆鱗)을. 그 거꾸로 선 비늘을 건드린 댓가로 목숨을 잃은 나는, 대신 그녀를 영원히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구름 속에서 울었다. 그리고 날아오르면서 빛의 창을 땅에 꽂았다. 슬퍼서 우는 것인지 어떤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그녀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자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먹구름은 제 자식들을 세상에 뿌릴 기력을 점점 잃어갔다. 우리도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새까맣던 구름은 옅은 회색으로 변색되어 갔고, 용신(龍神)의 승천에 찢긴 살덩이가 새끼 구름이 되어 허공을 부유했다. 바람은 아직 습기를 머금었지만 제법 가벼워졌기에 제 심술궂은 성미대로 새끼 구름을 희롱하며 이곳저곳 바삐 왕래했다.

친구들, 우리도 돌아갈 때가 됐어. 재밌게 놀았나, 다들? 다음에 또 놀자. 비가 오늘처럼 퍼붓는 그 날에, 세상이 물에 잠기는 날에, 다시 한 번 세상을 가지고 놀아보자.

「예상을 넘어선 폭우와 천둥번개에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낙뢰가 심하니 밖으로 다니실 때 각별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서울에서는 한강 한복판에서 용오름 현상이 있었는데요, 워터스파웃(waterspout)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은 약 이십 년만이라고 합니다. 내일 날씨입니다...」
        
여자의 언어는 여전히 날씨와 어울리지 않았다. 공기가 바뀌었는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침울하고 호들갑스러웠다. 아직도 그 멍청한 세뇌기계에 몸이 갖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가로등 아래로, 자동차 뒤칸으로, 지나가는 사람 머리칼 속으로, 휴지통 속으로, 폭풍우를 견디고 살아남은 팬지꽃잎 위로... 그리고 나 역시 여름내음을 마음껏 풍기는 나무 틈사이로 숨어들었다. 아직 남아있는 습기를 살짝 들이마시며.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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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거울에서 주로 눈팅만 하다가 작은 글 한 조각 올립니다. 친구인 Lemon이 그린 그림에서 튀어나온 발상을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본... 습작이죠. ^^;;

칼날처럼 날카롭고 돌멩이처럼 묵직한 혹평, 기꺼이 받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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