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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한없이 깨끗한 세상

2008.04.26 19:3804.26

1999~2000년 사이에 쓴 글이 하나 더 있었네요^^;; 그래서 이것도 더 올립니다...;; 평가부탁드립니다.
*****
한없이 깨끗한 세상

1
지금이 2099년 1월 17일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뉴욕은 지금에야 그 시간에 이르렀다. 뉴욕의 시간을 결정지은 위선은 뉴욕의 어느 거리를 통과하고 있을까.
나는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하지만 중요한 일일 수 없다.
내 텃밭에는 푸성귀와 양배추가 이슬을 머금어 영롱해진 잎사귀들을 뽐내며 가득 차 있다. 난 그것들을 사랑한다. 이미 늙은 내가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있는 건 그것들 뿐이다.
말발굽 소리가 멈춘다. <진화> 뒤 세상의 대부분은 원시 시대로 가고 있다. 헌칠한 백인 청년이 백마 위에 높이 앉아 있다. 마지막으로 생산된 가죽 재킷과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20세기 이후의 기술이 깃든 의류 공장이 모두 문닫은 것은 <진화> 직후이니 벌써 오래되었다. 허리띠에 권총을 차고 있지만 그가 정작 믿는 것은 안장에 끼워진 날카로운 칼일 것이 틀림없었다.
말 탄 청년이 말한다.
-미스 오경혜, 공작님께서 옛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내 이야기는 사실이야.
-저도 당신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사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하하하. 사실이건 아니건 어떻습니까? 상상력이란 건 그 자체로서 뜻이 있는 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실은 손님이 오셨어요. 공작님은 당신 이야기를 손님과 함께 듣고 싶어 하십니다.
-도와 줘.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청년은 내가 말에 타는 것을 도왔다.
진동과 함께 텃밭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브로드웨이라 불려왔던, 뉴욕의 다른 곳들처럼 숲에 싸여버린 곳을 지나쳐간다. 마차가 아닌 말로 나를 태우고 다니라고 부탁했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이민 왔을 때 그이 등 뒤에 타고 달리던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때는 말이 아닌 그이의 모터사이클이었다.
옛날 오페라 하우스였던 건물 앞에 청년이 멈춘다.
몇 번이나 오고 갔던 곳이다. 직접 들어가서 짱한 감동을 맛 본 적은 없지만, 겉보기에 멋지다는 생각은 여러 번 했었다. 옛날에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더욱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담쟁이 넝쿨에 싸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작은 예술을 아는 사람이다. 비록 그 예술이 르네상스 시대 이전으로 퇴보한 것이라지만 과학과 예술이 기술에 의해 받게 되는 영향력은 종류가 다르며 더구나 둘 다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벽면엔 <진화> 이후 고대 아닌 고대의 예술가들이 그려낸 뛰어난 그림들이 보인다. 신고전주의 시대의 그림들 같은 그것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보디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을 연상시켰고 고야의 ‘크로노스’를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그림도 있었다. 그것들에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어떤 착상이 그 화가들의 머리를 자극해 이런 그림들을 그리게 했을까.
대답은 가까운 곳에서 왔다.
재단사들이 손으로 만들어냈을 기사들과 귀족들의 옷은 옛날에 영화들이나 컴퓨터 게임에서 본 옷들을 떠오르게 한다. 늙은이들이 살아서 아직 세상이 하나였던 시대의 기억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마저 죽으면 세상의 반쪽은 어떻게 될까. 내가 사라져도 나름대로 역사는 흘러가겠지. 목적 따위는 없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역사니까.
노인의 부질없는 걱정을 멈춰놓은 것은 공작의 음성이었다. 넓은 턱과 건장한 몸집을 지녀 냉혹한 야수의 분위기를 풍기는 공작은, 스스로의 뜻이 관철되기만 하면 천사처럼 굴어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지극히 부드러운 그 목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미스 오경혜, 말씀은 들으셨겠지요. 손님과 함께 저에게, 세상이 둘로 나눠지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나는 손님이라 불린 사람을 보았다. 공작 옆에 앉은 그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의 몸과 같은 꼴의 육체를 두르고 있다. 나는 별로 놀라진 않았다. 나는 공작을 매료시켰던 침착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
2055년 3월 7일 뉴욕.
죽은 그이 옆에서 나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눈물샘이 말랐을 때 이미 <진화>는 끝나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뉴욕의 옛 할렘가와 샌트럴 파크에 걸쳐 세워진 포스트-뉴욕을 떠올려 본다.
뉴욕의 거대한 빌딩들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한 건물들로 채워진 포스트-뉴욕이지만 세계에 대한 힘과 영향력은 오히려 월등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최고급 생필품을 생산하는 회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사라지게 했고 그들을 뺀 나머지 인류에 대한 금융과 공공 서비스도 끊었다.
사람들은 고물이 되어버린 텔레비전, 컴퓨터, 통신기기, 현금 지급기를 때려 부수었다. <진화> 이후 며칠간은 돈이 통용되었으나 곧 사라진다. 약탈은 집, 옷, 식량등 원초적인 것들에 맞춰진다. 무방비가 되어버린 슈퍼마켓들은 약탈로 산산조각이 되고 불더미 속에서 끝장을 본다.
폭력 조직이 빼돌린 몇몇 무기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그들은 스스로들 세상이 왔다고 여긴다. 매우 뛰어난 해커 집단이 아닌 이상 새로운 세계에 동참할 수 없는 그들이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파괴를 일삼는 것일지도 모른다.
총기류 정도가 아니라 휴대용 미사일, 탱크 따위마저 심심찮게 보인다.
건물들은 무너지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기적만을 바라고 있는 듯이 보이나 그런 것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장애자들은 굶어죽고 어떤 소수 민족들은 구호품이 사라져 파멸한다.
주변에 식량이 널린 몇몇 열대 지방 국가들의 국민을 뺀 나머지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런 처지에 빠졌다. <진화>에 동참하지 못한 몇몇 나라의 지배층들은, 선진국의 윗분들이 사라지자 더욱 맛들이게 된 핵전쟁과 더불어 파멸해간다.
그 모든 것이 숨 가쁘게 진행되던 그 날, 그이를 잃은 나는 총알을 피해 무너져 내리는 백화점 건물에 뛰어든다. 아주 작은 상품 하나 없는 그곳엔 먼지와 녹슨 진열대, 그리고 나만이 있었다.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도 있었다. 나는 바닥없는 구덩이가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오래 오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정적.
한참 뒤 정신을 차린다. 뚱보인 나였기에 오래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이다. 난 저 거리에서 벌어지는 식인 행위에 당할 생각도 동참할 생각도 없다.
언제 안정될지 모른다. 끊임없는 고함 소리, 총격 소리에 나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빗물 받아먹은 것을 빼면 그동안 내가 먹은 것은 없다. 내가 떨어진 곳은 지하에 있던 백화점 슈퍼마켓이었지만 식량 따위는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난 제 발로 무너진 건물을 나왔다. 갇힌 지 15일만이다. 죽을 생각으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왔을 때 거리는 제법 안정되어 있었다. 포스트-뉴욕에서 약간의 구호 식량을 푼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들에게 약간의 인정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서양 중세식 봉건제도가 정착되어 가고 있다. 자급 자족식 장원제마저 서양 중세와 흡사하다. 미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구호 식량을 받아먹었다. 몸을 팔아서 총기 몇 정을 구했고 몇 사람 밖에 죽이지 않고도 살아남았다. 나는 생존자들 가운데에선 운이 몹시 좋았던 셈이다.
몇 블럭 사이로 미래와 과거가 함께 있는 야릇한 시대는 그때부터 비롯되었다. 현재는 어디에도 없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랍니다, 손님.
공작이 토를 달아준다.


3
2055년 3월 6일 뉴욕.
나와 그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늦게 일어났다. 늦잠은 생활에 아무런 하자가 되지 않는다. 그이가 약간 일찍 깨긴 했다. 그이는 나를 깨웠다.
-우리 꽃돼지, 빨랑빨랑 일어나야지.
나는 부스스 일어나서는 그이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또 그 소리야. 죽는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가상현실 체험용 콘텍트 렌즈도 켰다. 모두 내 몸에 붙어 있는 것들이다. 눈앞에 영상이 떠오르고 무선 이어폰에서 설명이 들린다. 나는 손을 움직여 영상에 있는 아이콘을 건드리곤 강의를 듣기 시작한다.
-안녕, 자기. 갔다 올게.
그러는 동안 그이는 일자리를 구하러 밖에 나간다. 나와 그이는 이 세상에 창궐하는 실업자 군단에 끼기 싫었다. 기계를 능가할 수 있는 재능을 얻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이는 좀더 가능성이 있는 나를 위해 희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여러 힘 있는 집단을 중심 삼는 사회 복지 사업은 2030년대까지는 늘어가다가 요즘 들어 다시 줄어드는 추세다. 1990년대에 예측한 바에 따르면, 세계 인구 가운데 20%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힘만으로도 세계화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 예측이 표면화되어 사람들을 짓누른지 오래다.
나는 12시간동안 쉬지 않고 공부를 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정보를 수용하고 응용력을 키우기란 쉽지 않았다. 기억을 증진시킬 수 있는 DNA 메모리칩과 신경 세포를 강화할 수 있는 신경망칩을 좀더 사서 내 몸에 이식시키지 않는 한 포스트-뉴욕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내가 지닌 정보량은 19세기 초 전 인류의 정보량과 거의 대등했으나 이 정도로 현재의 정보력에 대응할 수는 없다. 한참 모자란다. 개인이 똑똑해지는 속도와 폭 보다는 사회가 똑똑해지는 속도와 폭이 월등하기 마련이다.
-자기야, 나 왔어.
그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일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못 얻은 모양이다. 영어, 스페인어, 포루투갈어, 프랑스어를 본토인들만큼이나 잘하는 그이가 말이다. 번역기와 통역기 덕분에, 그런 장비들이 없는 곳에서나 어학 실력이 필요하다. 언어가 뇌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는지 밝혀진 지 오래다. 내가 말한다.
-괜찮아. 다음 기회도 있잖아. 자기가 못나거나 게을러서 그런 것도 아닌데 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어. 상점이란 상점은 모조리 자동 판매 로봇, 감시 카메라를 갖춘 채 그나마 홈쇼핑 형태로 운영되고 있잖아. 청소도 모조리 로봇이 하고 있고. 연예인도 거의 없지. 인터넷에만 가면 무수한 가상 미인들을 만날 수 있는데 뭘. 옛날 책이 없어 지지 않을 것이란 낙관론을 펴는 기호학자가 있었지. 없어졌잖아. 단백질 메모리칩을 쓰면 분자 하나에 백과사전 1만권을 담을 수 있는데 무엇하러 힘들여 책을 보지? 그것을 이식시켜 작동시키는 순간 독서의 짜릿함까지 느낄 수 있는데 말야.
-가난한 동네에서 찾아보면...
-찾아보았어. 너무 낙후되어 20세기 초기로 돌아간 동네들 말이지. 가난한 앵글로 색슨이나 잡종이나 니그로들이 판치는 곳에서 한국 사람이 들어갈 틈은 없더라고. 거기도 일자리가 모자라긴 마찬가지였어. 사회 보장이 아니었으면 당장 그곳은 소멸이야.
나는 그이가 너무 걱정되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3시간 뒤 다시 돌아온 그이는 나에게 입맞춤을 요구했다. 나는 기꺼이 들어준다. 한 번의 달콤한 입맞춤이 끝나자 그이는 말했다.
-난 자기 모르게 이곳의 혁명가들과 만나고 있었어. 안 좋은 놈들이지. 평소 같았으면 거리에서 강도질이나 하고 다닐 놈들이거든. 오늘 눈 딱 감고 한 번 더 일자리를 찾아 본 거였지. 거리 거리마다 혁명의 물결로 가득 차 있더군. 거기서 난 혁명을 이끄는 제이크 루터를 만났어. 매우 굳센 북한계 미국인이지.
그이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좁은 방 안을 가로지르며 말한다.
-칼 마르크스의 예언이 실현되려 하고 있어.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최초의 공산국가가 탄생될 것이라 했지. 소비의 주체여야 할 사람 가운데 대부분이 사회 보장으로 근근히 지탱되고, 스무개 남짓한 다국적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모조리 망해 버린데다, 몇몇 조만장자가 지닌 재산이 전세계 빈민층의 그것을 능가하며 이 시대!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 공황기의 모습과 일치해. 나는 제이크 루터에게서 참된 혁명가의 모습을 보았어.
날 설득하려고 한참 외운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농을 걸 기분은 나지 않는다.
-자기야, 맑시즘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은 옛날에 증명되었어.
-난 공산주의에 도덕성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아. 나는 오직 김일성의 북조선을 원해. 조지 오웰이 그려낸 <1984년>으로 가기를 바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이룩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아무리 압제가 심하더라도 인간이 노동의 주체가 되고 실업자가 없으며 사랑을 이룰 수 있고 기억 바꿔치기를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상관없어.
-지금 상황이 마르크스의 예언과 비슷한 곳이 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노동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데다 소비의 주체조차 사람이 아닌 상황에선 자본주의의 파멸을 기대할 수 없어. 제발 그러지 말아.
창문을 열며 그이가 말한다.
-소리가 들리니? 사람들이 제이크 루터에게 열광하는 소리야. 전세계에 지지자들이 있어. 루터는 이미 몇몇 인공위성을 장악했어. 그의 주변엔 막강한 해커 군단이 있지. 전세계에 방송이 나갈 것이고 그것이 세계 혁명의 시작이 될꺼야. 러시아계 미국인, 윌리엄 스투로프츠키가 미국의 핵, 기상 무기, 슈퍼 스트링 폭탄을 배경삼아 로봇 군대와 해킹으로 빼앗은 세상의 주권을 같은 방법으로 루터는 되돌리려 하는 거야. 윌리엄은 세계를 하나의 연방으로 묶자고 하고 있잖아. 그래 놓고서는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세계를 하나의 지구 제국으로 만들려고 할 게 틀림없어. 윌리엄은 아우구스투스가 되고 싶어 할 거라고.
-혹시 윌리엄과 제이크가 짜고 벌이는 것이 아닐까. 세상을 반으로 나누기 위해서 말야. 제발 가지 마. 왜 헛된 희생을 하려 하는 거야? 자기가 계속 이런다면 난 뛰어 내릴 테야!
난 정말 뛰어내릴 기세였으나 그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토록 다정다감했던 그이가. 집단 욕망의 힘은 여전히 무서웠다.
-뛰어내리는 건 네 마음이야.
그이가 나를 <너>라 부른지 꽤 오래되었는데... 영원히 못 들을 것 같았던 그 낱말이 폭탄이 되어 내 머리 속에서 울렸다.
그이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더니 내가 잡을 수 없도록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것이 내가 본 살아있는 그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그이를 찾아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성나 포효하는 수백만 군중의 목소리와 난폭한 행동거지는 아무리 얌전한 사람이라도 폭도로 변신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군중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윌리엄 타도!!!
-제이크 만세!!!
곳곳에 멀티 비젼이 설치되어 전 세계 곳곳에서 같은 형태의 혁명이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파리, 시카고, 마드리드, 서울, 브라질리아...
하늘에 인공위성에서 띄운 거대한 영상과 빛줄기가 오간다. 포성이 있었고 매캐한 냄새가 있었다.
벌 떼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들은 마이크로 로봇이었다.
무능화 가스로 말미암아 군중은 무력하게 되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 로봇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시는 빛나는 안개에 휩싸여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제이크 루터를 위시한 혁명가들이 벌 떼와 로봇 군단에 의해 쓰러지고 어디론가 옮겨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세상은 둘이 되었다. 어느 한 종에서 돌연변이나 그에 준하는 이유로 다른 종이 떨어져 나온다고 원래의 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인간이 원시 원숭이에서 갈려졌을 때도 이랬을 것이다. 그때 <하등> 영장류들이 느꼈을 절망을 알 것 같다.
포스트-뉴욕으로 대표되는, <진화>의 세례를 듬뿍 받은 무리들은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까. 적지 않은 SF에서 말해왔던, 우주여행에서의 슬픔은 오지 않는다.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달린 결과로, 우주선 안에서의 몇 십 년이 지구의 수 십 만 년이 될지라도 온라인 위에서 존재하는 의식이 남아있는 한 가족 상실의 슬픔 따위는 없을 것이다. 아니, 가족이나 친구라는 개념이 그때까지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이미 거대한 접시를 앞뒤로 펼친 채 뒤의 접시에서 태양에 버금가는 빛을 내뿜으며 미지의 우주를 향하는 광자 로켓이 발사되었는지도 모른다.
문명은 깨끗함을 지향하는 그 무엇이다. <진화>로 충만된 세계. 그것은 한없이 깨끗한 세상이다. 몸이 없기에 배설물도 없다. 생태계를 포함하는 자체 정화 시스템이 있어 쓰레기의 양도 극소화된다. 20세기말의 실리콘 반도체 공장을 연상시키는 투명하리만큼 맑고 쾌적한 공기가 포스트-뉴욕의 돔 안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곳의 영혼은 투명한 이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스스로에게 적대되는 모든 것은 추악한 것, 쓰레기 같은 것이 된다. 그들보다 깨끗할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머지 반쪽 세상에서는 모든 문명의 이기가 사라졌다. 전기나 수도조차 끊겼다. 죽은 도시에도 어김없이 찾아 온 잔인한 새벽에 죽은 그이를 발견했다....
데카르트식 이분법이 참된 모습이 되어버린 세계여!


4
2099년 1월 17일 뉴욕.
공작이 박수를 친다.
-미스 오경혜, 감사합니다. 정중히 모셔드려라.
지금 내 이야기는 전설, 음유시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라는 단편적 기억 세계에 묶인 그들의 의식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너무나 끔찍하기에 기억하기 싫어서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하나의 세상이 지닌 의지는 그들의 기억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것이라면 내 존재는? 내 기억이 제대로 된 것인지조차 확신이 서질 않아.
나는 나가는 길에 포스트-뉴욕에서 왔다는 손님을 힐끔 본다. 제이크 루터의 모습을 한 몸을 두르고 있다. 놀랄만한 활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이버네틱스를 신경 삼고, 로봇을 몸의 곳곳에 부착시켰기에 그럴 것이다.
나를 공작의 집으로 데려다 준 그 청년이 다시 내 집으로 데려다 준다. 내가 그 청년을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손님이란 존재는 육체 상인이었던 듯도 싶다.
내 집은 내가 잠시 공작의 집으로 나들이했다는 것을 개의치 않은 채 평화스럽기만 하다. 밝은 햇살이 텃밭을 비추고 있어 아침보다 더 생기 넘쳐 보인다.
난 집으로 들어가 오래된 컴퓨터를 켠다. AMD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 128비트 버전으로 <진화> 한참 뒤 어디 있는지는 잊어버린 창고에서 찾아낸 물건이다. 마루 한 쪽에 놓인 발전기도 컴퓨터와 더불어 켜진다. 나무를 떼어 전기를 만들기는 해도 효율이 좋아서 쓸만한 기계다.
워드 프로세서를 가동시킨다. 오래된 파일들이 나타난다.

2060년 3월 14일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완독했다. 정말 감동적이다. 결국 주인공은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가 품을 수 있었던 희망만은 진짜였다. 그의 말투를 흉내 내 본다. 희망은 나와 같은 소시민에게 있다. 또 이 말을 약간 바꿔도 본다. 희망은 생태계의 미물들에게 있다. 그들이 진화해서 우리와 같은 지능에 도달해도 이런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종을 완전히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은 SF 작가들은 다른 별의 목숨붙이들은 지구의 목숨붙이와는 본능이 다를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다. 지구의 다른 목숨붙이들도 분명 인류와는 다를 것이다.

나는 너무나 순진한 그 문장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목숨의 본질은 세포막에 있다. 세포막을 통해 목숨은, 스스로를 살찌게 하는 것을 빨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쓸모없는 것을 내뱉는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는 목숨의 태초에 매달려 있다. 그 어떤 목숨에게도 이기심을 초극할 방법 따위는 없는 것이다. 집단 이기심을 초극할 방법은 더욱 없다. 희망을 걸 수 있는 것들이 단지 그 문장들에서 언급된 것들이라면, 희망 따위는 없다.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나에겐 자살 따위를 할 생각이 없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포스트-뉴욕이 다른 포스트-도시들과 함께 지반을 포함한 체, 관성 및 중력을 제어하면서, 여러 열대 우림들과 더불어 우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단은 가깝고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목적일 터이니 금성이나 목성으로 갔을 거라고 난 예측했다. 새로운 신화가 될 이 사건은 더욱 커다란 혼란으로 인류를 몰아넣을 것이나 적어도 그들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인류와 생태계가 걷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몰랐다.
내가 키보드를 친다. 이미 죽은 SF작가에게 보내는, 결코 받을 수 없는 편지다.
-제임스 블리쉬, 당신은 <우주 도시>라는 연작을 통해 과학 기술이 권력을 초극한 완벽한 자유를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강력하게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보세요. 포스트-도시들은 이제 당신이 그렇게도 찬미했던 <오키>가 되어 지구를 떠나고 있어요. 권력과 결합되면 그게 뭐든지 간에 사악해질 뿐이지요. 당신은 그걸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했어요. 때문에 당신의 이상은 지금에 와서야 물리적으론 실현되었지만 조금도 아름답지 못하군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떠났고 새 역사가 비롯되려 합니다. 난 그 역사가 사랑과 과학이 합치된 미래로 수렴되기를 바라면서 조금이라도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을 뿐입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떤 청년이었다. 그가 든 권총이 불을 뿜자마자 가슴이 뜨겁게 아려왔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에 마지막 말이 비집고 들어왔다.
-헤헤. 할머니, 죄송하지만 당신 살로 배 좀 채워야겠습니다.

@1998년 3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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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9 단편 고양이와 엘리베이터 니그라토 2008.04.26 0
1098 단편 노래하는 도시 니그라토 2008.04.2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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