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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새로운 하늘

2008.04.26 00:4704.26

이번달엔 거울에 여기까지 올리겠습니다^^ 평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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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하늘


<아직 멀었어요?>
렉슬리가 천문 기기를 조작하고 있는 다이스케린을 재촉한다.
<거의 다 됐어요. 얼마 후엔 근사한 영상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세르카니아 초은하단 모두가 뒤흔들릴만한 비밀을요>
벌써 몇 번째 거의 다 되었다는 거야. 그 비밀 알았을 때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이 가만히 있기만 해봐라. 렉슬리는 투덜거리며 낡아빠진 심우주 관측용 기계들을 바라본다. 렉슬리는 텐타 거죽 아래 깊숙이 자리잡은 전파 망원대에 와있다.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은 두께 수십억 광년이나 되는 진공에 둘러싸여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다. 그런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에서도 가장 멀리 외따로 떨어진 체 홀로 휘도는 차가운 행성 텐타 아래 세르칸들이 살고 있으리라 곤 짐작 못 했었다. 낡아빠진 데다 링과도 이어져 있지 않은 궤도 엘리베이터에 자르딘을 비롯한 몇몇 부하들과 더불어 왕복선을 타고 내렸을 때에도 이런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굴 같은 복도 밑바닥에 섰을 때 거죽보다 온도가 60도나 높다는 걸 알아내 놀랐을 때부터는 짐작했었다. 별빛이라고는 한쪽 하늘에 아스라이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이 뿌옇게 비치는 정도여서 텐타의 거죽은 진공이랑 온도가 거의 똑같다. 지름이 3000km 남짓 밖에 안 되는 텐타가 지닌 핵이 제아무리 뜨거워도 그 정도 깊이에서 거죽과 60도 차이나는 온도를 만들 법하지는 않았다. 아니 텐타의 거죽은 물결치는 고체 메탄 화합물이었는데 복잡하고 질서정연해 제법 거주지 같은 동굴과 계단들을 찾아냈던 때부터 세르칸이 있을 수도 있다고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억겁의 피곤에 저며진 열정이, 적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선명하게 보이는, 은테 둘려진 붉은 눈을 매개체로 삼아 살짝 흔들리고 있다. 그런 렉슬리의 눈이 옆에 있는 의자에 뒹굴고 앉아 있는 자르딘에게로 간다.
텐타에 가자고 했을 때 자르딘은 죽자고 반대했었다. 연료가 아깝지 않느냐고. 함장은 렉슬리인데 자신에게 스카웃 제의가 많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비행단장의 힘을 과시했다. 지금이야 렉슬리의 의견에 감복하고 저렇게 자빠져 자고 있지만. 렉슬리가 못 마땅한 시선을 다이스케린에게로 돌린다. 다이스케린은 변함 없는 모습으로, 렉슬리를 놀라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천문 기계를 열심히 조작하고 있다.
다이스케린은 텐타의 다른 세르칸들이랑 마찬가지로 다 늙어빠져 엉그적 엉그적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천문대가 있는 곳으로 오면서 내내 지겨웠다. 렉슬리는 결국 화를 내고는 자르딘한테 다이스케린을 갱생시키도록 했다. 자르딘은 아무리 늙었어도 다이스케린이 여자라고 반쯤은 신나 하면서 다이스케린이랑 뒤엉켰다. 다이스케린이랑 자르딘은 젤리 같은 것에 둘러싸인 다음 액체가 되어 완전히 섞여서 활력 있는 세포들을 갈아 끼웠다. 육체적으로 젊은 쪽이 훨씬 더 손해 보는 의식이지만 자르딘은 워낙에 팔팔한 남성 세르칸이라 다이스케린만 활기 넘치는 미녀로 바꿔놓았다. 그때 렉슬리는 다이스케린이 적어도 고마운 기색 정도는 낼 줄로 알았다. 그런데 돌아온 소리는,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들 덕분에 저는 이제 텐타에서 영원히 떠난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제가 만든 단체에서 제명 당하게 생겼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텐타에서 갱생 의식을 통해 똑같이 늙어가면서 조금씩 기억, 활력, 덕성 같은 걸 잊고 잃어 가는 삶을 택했습니다.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서로를 느끼면서 위안을 삼았지요. 삶을 지키려고 그랬어요. 이제 저는 한동안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군요>
였다. 렉슬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이스케린이 텐타라는 깡촌의 신관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천문 기계를 다루던 다이스케린이 뭐라 말을 꺼낸다.
<생각보다는 좀 걸리네요>
<그걸 이제 아셨나요?>
<렉슬리, 세르카니아의 역사를 좀 말씀드릴까요. 아는 세르칸이 의외로 적은 걸로 아는데>
<좋아요>
대충은 아는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의 역사지만 렉슬리는 다른 세르칸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게 다른 느낌이 있겠다 싶었다. 간만에 목소리로 의사 소통할 수 있는 곳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통은 키보드를 두들기거나 이마에 둘러가며 나있는 24개의 반점을 깜박거리거나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두 방식 모두 하자가 많았다. 키보드는 가지고 다니다가 이야기할 때마다 상대의 후두부에 선을 끼워서 쳐대야 하고 반점 같은 경우엔 가능한 세르칸이 많지 못하다. 기술 뿐아니라 유전자 풀도 많이 쓰지 않으니까 퇴화되어 버렸는지 렉슬리의 초광속 우주선에서는 반점을 쓸 줄 아는 세르칸이 함장인 렉슬리와 비행 단장 자르딘뿐이다. 그나마 둘 모두 그리 잘 쓰지 못해서 고작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며 서로를 놀래켜 얼마나 많이 놀란 척 하나를 서로 구경하는 것말고는 별로 할 게 없다.
다이스케린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르칸은 작은 행성을 넘어 끝없이 넓어져 갔어요.
그러나 통신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작은 행성을 벗어나기 한참 전부터 예견되었던 문제였지요. 태양계를 벗어나기 전부터 벌써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어버렸죠.
상호 이해, 관용,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 욕망과 수요의 전면적 파악 등을 가능케 했던 빛을 통한 통신은 점차 쓸모가 없어짐에 따라 잊혀져 갔어요. 지혜를 모아주고 진리를 나누며 슬픔을 삭여주던 사이버네틱스는 나타났던 때만큼이나 급격히 물러났지요. 이에 편승해 강제적 기억 바꿔치기와 같은 악랄한 신종 범죄도 더불어 사라져갔어요. 문명의 어미 행성과 멀찍이 떨어져 자율을 주장하던 공동체들 가운데 새로운 기술과 그에 맞는 체제를 이뤄내어 양적 팽창을 빠르게 할 수 있던 것들은 더 이상 스스로 공동체로 남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웜홀은 뚫리지 않았고 타키온은 발견되지 않았던 겁니다. 중력으로 시공을 구부리는 워프 항법만이 초광속의 유일한 방식이 되자 통신과 운송의 가격은 같아졌지요. 다시금 낡은 방식인 우편 통신이 힘을 얻었어요. 우주선을 탄 우편 배달원들은 커다란 권력 체제에 편입되었죠. 너무나 멀어진 우주의 거리 앞에,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어려워진 세르칸들은 소문과 선동에 점점 더욱 더 기대게 되었어요. 개체는 갖가지 공학의 덕분으로 아주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문제는 판단할 재료 즉 외부에서 오는 정보가 불완전했던 거죠. 우주 공학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렇게 되어 갔어요.
서로 나누고 사랑하고 아끼며 살았던 덕택에 숨죽였던 중앙 집권체와 시장, 차별과 격차가 다시금 거세게 고개를 들었지요. 비대해진 권력은 자신을 줄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수십 억 광년이 넘는 진공에 싸여 있는 걸 잘 알면서요. 정신이 한계에 이르러도 작아질 줄 몰랐죠.
세르칸들이 다른 수많은 생물들을 각자 따르는 방식대로 자기 체제 속에 편입시키려고 날뛰던 때부터 이건 예견된 일이었을 겁니다. 세르칸은 우주에 나가서도 그런 짓을 멈추지 않았죠. 수많은 지성들을 융합시키고 땜질해서 그들은 똑같은 문화와 유전자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세르칸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세르칸이 아닌 모든 지성을 자기 체제 속으로 끌어들이고 무너뜨렸어요.
에너지주의의 시대였습니다. 모든 가치는 모조리 에너지의 양으로 환원되었지요. 에너지를 모으거나 몇몇 세르칸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단기적으로 도움 안 되는 기술이나 문화들을 폐기처분하고 양적 팽창만을 중시하며 멈출 줄 모르던 이 체제는 결국 에너지 부족으로 약화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이스케린은 이 말을 트집 잡아 날뛰어대는 렉슬리를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그런 기색이 보이면 비밀이고 뭐고 때려치울 작정이다. 그러나 렉슬리는 그냥 가만히 있다.
렉슬리의 예상대로 아는 이야기다. 다이스케린이 렉슬리가 아는 것보다는 옛 역사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기는 했지만, 거의 비슷했다. 죽음을 모르는 세르칸은 그런 식으로 태어나 지금 멸종해가고 있는 중이다. 늙더라도 기억이나 감각, 인식 같은 것들이 흩어지고 신진대사가 느려져 단순한 생물이 될 뿐이다. 설령 정말 죽음이라 말할 수 있을 법한 상태가 되더라도 체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일은 없다. 세르카니아 초은하단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될 것이다. 진공 속으로 느리게 흩어져 이 터무니없이 가벼운 우주와 함께 마멸한다. 제 종족의 너무나 뻔히 내다보이는 운명을 다이스케린 때문에 떠올린 렉슬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의 수명은 이 우주 보다 길다. 원래 있던 우주에서 보통 진공의 상전이가 일어나서 더욱 더 진짜 진공에 가까운 진공으로만 이루어진 우주가 떨어져 나왔다. 그때 이어진 우주론적 장난의 결과로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은 다른 물질들과 떼어지고 휘말려 이런 우주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팽창은 계속되었고 세르칸이 태어났다. 발전하는 데에는 500만 년이 걸렸지만 닫힌 우주 앞에서 진행된, 경제적 절망에 기초한 정치적 낙후는 기술의 전반적 수준을 10억 년 정도에 걸쳐 조금씩 갉아먹었다.
<됐어요. 봐요! 이제 초점이 맞아요>
렉슬리는 다이스케린이 일어나자마자 의자에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렉슬리의 긴 갈색 머리채 뒤에 있는 섬세하지만 그만치 어두운 원반 모양의 장신구와 그에 이어진 짧고 검은 망토가 렉슬리의 마음을 비춘 만큼 흔들거린다. 다이스케린이 말한다.
<접안대를 건드리지 말아요>
렉슬리의 눈은 빛의 모든 스펙트럼을 본다. 희끄무레한 초은하단들의 조합이 어슴푸레하게 좁은 원 속에 떠오른다.
<77억 년을 넘어 이곳까지 온 겁니다. 우주가 초팽창한 직후 원래 우주와 시공이 얽혀든 게 틀림없어요. 그 빛이 이제야 우리에게 온 거예요.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이걸 왜 보여주는 거지요? 단지 텐타의 세르칸들을 살려주는 대가치고는 당신네 삶을 지나치게 유린할 가능성이 높잖아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새로운 하늘을 찾아내자 화가 났어요. 다른 곳으로 가서 이걸 알릴 수단이 없어서였죠. 비록 저희는 앞으로도 이렇게 죽어가고 싶습니다만. 죽음을 고를 권리는 중요하다고 여기거든요. 당신들을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 공동체는 선택지를 얻었고 더욱 결속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이스케린은 그녀만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를 잔뜩 가지고 나왔다. 옛날 공장들이나 무기들 가운데서는 쓸만한 것들이 있지만 상당수가 몇몇 염색체에만 반응한다. 맞는 염색체를 가진 세르칸을 얻지 못해 기껏 어렵게 찾아내고도 진공의 한 지점에서 썩는 무기나 공장이 한둘이 아니다. 다이스케린은 천문대 기계와 궁합이 잘 맞았던 것이다. 텐타에는 렉슬리와 자르딘이 전쟁에서 이기려고 얻으려 했던 고대 무기는 없었지만 다이스케린이 있었다. 두 세르칸은 만족했다. 다이스케린, 자르딘, 렉슬리는 그들을 꽁지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세르칸들이 모인 홀에 이르렀다. 홀에서는 다이스케린의 신자 서른 명 남짓을 렉슬리의 휘하 대원들이 감시하고 있다.
<자, 우리는 이제 떠난다. 빨리 짐 꾸리도록. 다시 젊어지고 싶은 세르칸은 우리랑 같이 가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남고요. 단 다이스케린은 우리랑 같이 가야 합니다>
다이스케린이 기막혀 하며 말한다.
<왜죠? 그러면 약속이 틀리잖아요. 이 자료는 다른 세르칸들이랑 궁합이 맞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세르칸을 찾지도 않고 이러지 마세요>
렉슬리가 다이스케린의 손을 붙들더니 구석진 곳으로 간다. 자르딘이 세르칸들을 그쪽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 렉슬리가 말한다.
<다이스케린의 정보가 빨리 유용해지려면 다이스케린이 가는 게 당연해요. 이것도 많이 사정 봐주는 겁니다. 아시는지도 모르지만, 저토록 쇠약해진 세르칸들을 방치해두는 건 위험스런 일입니다. 세르칸의 뇌 속에는 양자 블랙홀이 증발하기 직전의 상태인 체로 외부와의 물질 교환을 통제하는 전자기장에 둘러싸여 박혀 있습니다. 양자 블랙홀 속의 특이점은 회전 때문에 고리 꼴로 왜곡되어 있지요. 그 중심의 텅 빈 핵을 통해 양자 블랙홀과 나머지 부분이 고리와 교류합니다. 특이점은 매우 불안정하면서도 엄청나게 압축되어 있으며 몹시 빠르게 진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면 뛰어난 정보 처리 능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이 체계가 무너지면 재앙이 닥친다는 겁니다. 풍부한 물질 세계를 접한 양자 블랙홀은 마구잡이로 먹어댈 겁니다. 때문에 세르칸은 죽지 못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늙음은 단순하고 쓸모 없는 생물이 되어 가는 과정일 뿐이지 죽는 건 아닙니다. 만약 죽더라도 양자 블랙홀을 둘러싼 전자기장이라는 이 체계가 없어지지 않도록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체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안다면 자르딘은 당장 모두를 젊게 만들어버릴 겁니다. 늙을수록 위험할테니까요. 제 말을 따르는 건 텐타가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무시하고 내버려두어 외로운 블랙홀의 밥이 될지도 모르게 하는 일이지만 또한 다이스케린의 소망을 들어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알았어요. 그럼 같이 가죠>
다이스케린말고도 여덟 명 정도의 세르칸이 렉슬리와 자르딘 뒤를 따랐다. 골수 분자가 렉슬리의 예상보다는 많았다.
다이스케린은 렉슬리의 초광속 우주선에 오르고는 잠깐 멍하니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던 텐타에 불쑥 찾아와서는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젊음과 때때로 왕복선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줬다. 우리 공동체의 법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잘난 규칙들을 강요한다. 저들은 남의 가치를 존중할 줄 모른다. 아무리 세련된 척 웃어대어도 렉슬리는 그런 세르칸일 뿐이다. 어떻게 한다. 그래 자료를 내자. 자료를 발표하면 다이스케린은 이용 가치가 없어진다. 남는 건 발견자에 대한 예우뿐이다. 예우를 핑계삼아 텐타로 돌아가 이상의 끝을 맺자.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지만 렉슬리는 다이스케린을 연단에 세울 계획 같은 걸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자르딘과는 좋게 지냈지만 텐타로 떠나기까지 즐겁게 시간을 보내려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에 불과했다.
평소처럼 렉슬리는 초광속 우주선을 몰고 가끔 싸움을 하고 별들을 헤매어 인재와 무기를 모으며 여러 동지들과 토론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장 격렬한 토론의 와중에서도 그녀는 다이스케린에 관한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다. 무너져 가는 적을 보며 쾌재를 울리다가도 그 생각만 나오면 어딘지 울적해지곤 했다. 자르딘이 아무리 잘 싸워도 그에 대한 믿음은 옅어져갔다. 나에게는 스카웃 제의가 밀려 있어. 다이스케린, 정말 예쁘지 않아. 그런 말들이 때때로 머리 속을 울리며 그녀의 자아를 텅 비워 냈다. 질투가 늘어날수록 평소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던 자르딘의 행동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던 것인지 파악되어갔다.
렉슬리는 결단을 내린다.
텐타에서 떠난 지 일주일도 체 되지 않은 때 렉슬리는 블라스터를 집어들고 다이스케린의 방으로 향한다. 다이스케린을 없애야겠어. 그리고 블랙홀 발전소에 던져 넣을 거야. 블랙홀 발전소가 있음으로 해서 똑같아지는 쓰레기와 다른 물질들의 존재론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는데 그걸 스스로가 이용하려 들 줄은 몰랐다. 한 아름다운 세르칸을 없애러 가는 것이라 여기니 마음이 무겁다. 다이스케린의 해맑은 영혼을 모든 구조들 가운데서도 가장 저열한 것에 속하는 블랙홀의 탐욕스런 아가리에 바쳐야 하다니.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렉슬리는 더 더욱 반쪽 짜리 에너지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에너지주의에도 철학이 있지. 에너지만이 대체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에너지의 한낱 거품일 뿐. 그러기에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그러기에 에너지만이 결코 양도되지 않는 절대적인 사용 가치를 가진다. 복제는 대체의 일종일 뿐이다. 무한 경쟁 속에서 한때의 이해타산으로 복제 기술이 버려졌기에, 렉슬리는 블라스터를 들고 다이스케린에게로 갈 수가 있다.
나름대로 내 삶을 걸었어. 그만하면 공정한 거 아냐. 렉슬리가 합리화와 함께 문을 세차게 연다. 다이스케린은 허리까지 오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 아무렇게나 굽이치는 시내처럼 흘려대며 침대 위에 길게 누워 있다. 나른하게. 폐허처럼. 마음놓고. 말하자면 텐타처럼. 렉슬리가 다이스케린에게 블라스터를 겨눈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갑자기 시야가 뒤흔들린다. 렉슬리가 붕 떠 반대쪽 벽에 가 부딪쳐 미끄러지듯 떨어진다.
자르딘이 외친다.
<무슨 짓이야, 렉슬리!>
렉슬리가 일어나 자세를 재빨리 추스르며 블라스터를 겨눈다. 방아쇠가 당겨지면 격렬한 진동이 극저온의 실내 공기를 찢어발기며 초속 2만 5천 km로 총탄을 발사할 것이다. 자르딘도 똑같은 기종의 블라스터를 재빨리 꺼내든다. 두 세르칸은 다이스케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블라스터를 맞겨눈다. 자르딘의 반응이 조금 느리긴 했지만 두 세르칸 모두에겐 아직 서로를 해칠 마음이 없다. 사실 총싸움이라면 자르딘 쪽이 더 능숙하다.
자르딘이 말한다.
<너 다이스케린을 죽이려 한 거 맞지. 이유나 들어보자>
<우리가 세르칸이라는 걸 잊지 마. 양자 블랙홀은 뇌에 박혀 있고 갱생 의식을 할 줄 알며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이 우주 속에 갇혀 있다는 인식 아래 사는 게 지금의 세르칸이야. 다이스케린의 정보는 그런 세르칸을 다시금 에너지주의의 늪 속으로 빠뜨려 버릴 거다. 세르칸의 행동 반경이 아무리 넓어져도 세르칸일 수 있으려면 그들이 양적 팽창을 아무리 해도 질적으로는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해. 수 천 만 년 지나 찾아가도 여기가 내 고향이구나 할 수 있도록. 그러려면 뭔가를 선을 넘어서까지 바꾸려는 욕망을 통제하고 그 뒤에도 잘못이 생기지 않았나 살피면서 서로가 서로를 다잡아야 해. 끊임없고 고통스러운 내면화 작업이지.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이 강력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인식은 몇몇 에너지주의자를 되돌렸고 덕분에 나나 너 같이 고향 별 밖에 모르던 이들이 이만치 출세할 수 있게 되었어. 괜찮은 잠재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너무나 값쌌던 세르칸이 낡은 무기나 공장과 가끔 궁합이 맞았던 덕분으로 비싸졌기 때문에 벌어진 피치 못한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너나 나에게는 소중하잖아. 지금 이대로 머무르고 싶어.
다이스케린은 수많은 법을 가진 공동체가 평화롭게 흩어져 가끔씩 담소나 나누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에너지주의가 어떤 곳에서 똬리를 틀 줄 모르는데 말이지. 뜻 맞는 이들끼리 외따로 떨어져 자신들만의 법을 지키겠다는 건 에너지주의를 우주에 강제하려는 자도 할만한 생각이야. 기득권에게 그들 자신의 도덕성을 통한 정의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생각이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에너지주의 만큼이나 기술을 통제했는데. 그런 애와 위험한 정보를 계속 내버려두어야 하는 거야? 너랑 내가 이런 것 때문에 블라스터를 겨누고 있어야 되는 거니?>
<그 정보 때문에 세르카니아는 활력 넘칠 수 있잖아>
<질적인 개선은 나도 바라는 거야. 그리고 이루어지고 있어. 멸망할 그 날까지 나는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을 다이스케린의 텐타처럼 꾸려가고 싶어. 그러려면 물론 질적인 개선도 필요해. 하지만 저 멀리 다른 우주로 가면 에너지주의는 반드시 나타나. 저 정보가 이미 쓸모 없어진 정보일지도 몰라. 77억 년 전이니까 두 우주의 접속이 다시 끊겼을 수도 있어. 그렇지만 정보가 알려지면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해가면서 원정이 행해질 거야.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세르카니아 초은하단은 더더욱 피폐해져.
그래서 난 두 우주 사이에 내 다른 초광속 우주선과 함께 반물질 폭탄을 보냈어. 지금쯤 터졌겠지. 설령 두 우주가 붙어있었더라도 다시 쪼게 졌을 지도 몰라. 그렇다면 생겼을 사상의 지평선은 두 우주의 죽음을 더 빠르게 하겠지만 내 결정을 후회 안 해. 난 텐타를 파괴해서 빛을 어지럽히기까지 했어. 전파 망원경도 이젠 없지.
공공 기물을 멋대로 썼으니 앞으로는 지금처럼 살수도 없겠지. 우리 체제는 에너지주의 앞에서는 너무나 절망적이야. 자르딘, 제발 도와 줘>
다이스케린은 어느새 깨어 있다. 공포감에 다이스케린은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렵다. 렉슬리의 사상에 공감 안 가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렉슬리가 다이스케린에게 공감하는 딱 고 만큼이었다. 텐타가 부서졌다는 건 공포감보다도 더한 충격으로 그녀를 잡아챈다. 렉슬리, 어쩌면 그렇게도 믿음이 없을 수가 있니. 깨워서 블라스터를 들이대는 방식으로조차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는 거니. 그래, 그럴 수밖에. 렉슬리는 존재하는 모든 걸 다잡으려고 하니까. 지금까지는 아무 가치도 없던 에너지에 의미가 부여되어, 스스로의 기득권에 상처를 입히게 되었으니 렉슬리로서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이스케린은 가만히 있으면서 그 자세 그대로 조금씩 몸에 힘을 넣어 간다. 렉슬리는 다이스케린이 움직이는 즉시 방아쇠를 당길 것 같다. 지금이야 자르딘과 대치 상태여서 사실상 움직임이 0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상황이 바뀐다면 렉슬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다. 할 말을 다한 렉슬리는 자르딘을 바라다보기만 한다. 이러고 있자 갑자기 고향별에서의 추억이 되새겨진다. 두 세르칸은 어릴 때부터 조금은 친구처럼 조금은 앙숙처럼 지내왔다. 두 세르칸의 입가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옅은 미소가 그려진다. 동업이라는 죄로 가득 찬 미소가.
다이스케린이 온 힘을 다해 몸을 퉁겨 렉슬리에게 안기듯 덤벼든다. 세르칸 가운데서 거의 최상급에 속하는 강한 몸을 가진 렉슬리였지만 자르딘과의 대치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넘어져 버린다. 렉슬리가 스스로 달려든 사냥감에 미소를 짓는다. 다이스케린을 붙잡아 공중에 슬쩍 집어던져 자르딘의 시야도 가리고 블라스터를 잡은 손도 자유롭게 한다.
극심한 진동이 방안을 돌며 메아리친다. 렉슬리의 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녀는 자르딘을 얕보았다. 또는 너무나 믿었다. 다이스케린이 공중에서 나폴 나폴 떨어져내려 자르딘의 품안에 얼싸 안긴다.
<떨고 있군요>
<다이스케린, 일단 이 우주선을 나가요. 이젠 쓸모도 없어요. 렉슬리랑 궁합이 잘 맞는 우주선이었거든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자르딘과 다이스케린은 함께 작은 우주선을 타고 렉슬리의 거함 밖으로 나간다. 공감하는 동료를 잃은 고대의 거함은 끝내 버려져 우주를 떠돌 것이다. 다이스케린은 조종을 하는 자르딘 뒤에서 말한다.
<이제 어떻게 할거죠, 자르딘?>
자르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이스케린을 보면 미칠 것 같다. 자르딘이 답한다.
<일단 발표하세요. 한 번 모험을 떠나요. 렉슬리는 참으로 멍청합니다. 그런 걸 아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요. 설령 다이스케린이 죽었더라도 저는 더듬거리며 그 우주를 찾아갔을 겁니다>
다이스케린이 제 옆에 있는 자르딘의 블라스터를 집어들고는 머리에 쏜다. 자르딘의 머리가 부서져 날아간다. 그래도 양자 블랙홀을 바탕 삼은 체계는 세르칸이 볼 수 없는 자리로 날아갈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시 한 발이 발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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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1.11 첫 번째 완성. 2000.07.05에 리메이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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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lim 08.04.26 01:34 댓글 수정 삭제
    오랫만이세요. 전 녹색.. 그게 제일 인상깊었어요. 어찌 보면 흔한 소재를 흔하게 다루지 않았었죠. 그것도 올려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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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그라토 08.04.26 19:39 댓글 수정 삭제
    sulim//다른 분이나 다른 소설과 혼동하신 건 아닐런지...;; 전 녹색으로 시작되는 글을 쓴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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