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모델 에이전시? 모델 에이전시를 샀다고?”
비명을 지르며 문을 박차고 쳐들어온 여자.
슬슬 올 줄 알았다. 스튜어트는 씨익 웃었다.

사무실은 화려하다. 고급스러운 붉은 카펫이 자리한 바닥에 놓인 오크나무 책상과 책장. 사무실이라기보다 응접실에 가까운 인테리어는 누가 봐도 돈을 바른 티가 난다.

“환불해 버려!”
“안돼. 편의점에서 파는 생리대가 아니라고. 이미 계약도 마쳤고.”

거만하게 앉아,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구두를 신은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허버트 그룹의 창업자이자 CEO인 닐 허버트의 유일한 손자 스튜어트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몸이다. 실제로 이렇게 거만한 짓을 자주 해본 것은 아니지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마침 고등학교에서는 연극 서클에 있었고 말이지.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호리호리한 미인. 초록빛 눈동자를 빛내면서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 냉정하게 주식을 사고파는 월가의 커리어우먼인 그녀는 회색 정장에 회색 하이힐을 신고 있다. 그 하이힐로 스튜어트의 발을 걷어차서 책상아래로 내리게끔 한 후, 앨리스는 얼굴을 들이대며 말을 건네었다.

“너, 모델들을 노리고 있는거야? 경영 상태는 봤어? 그 회사는 말야-”
“여자와 담배와 술은 많을수록 좋지.”
“됐어! 너와는 절교야!”
  
쾅.
문을 닫아버리고 돌아간다.
많이 화낼수록 좋다.
다정한 그녀가 화를 내는 건 싫지만, 뭐어, 이정도는 어쩔수 없지.

.
.
.


앨리스가 일어나는 시각은 오전 4시. 뉴욕의 증시를 확인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일어나서 아침 신문을 본다. 타임즈를 펼치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커피를 올리고 와서 베이글을 입에 물고 있다가-그대로 내뿜어 버릴 뻔했다.

낭비꾼 외손자를 축출하다- 라는 표제였다.
무능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던 닐 허버트다. 스튜어트와 함께 고등학교 졸업파티의 퀸과 킹으로 선발되었을 때 잠깐 본 적이 있다. 엄격해 보이는 할아버지였지. 실력우선주의자인 완고한 노인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미움받은 것이다. 스튜어트가 무리한 투자를 한 끝에 상속권을 박탈당했다고, 신문에 써 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소식을 어째서 신문에게 들어야하는 거야? 아, 그렇다. 절교하기로 했지.

앨리스는 벌떡 일어났다.
속옷위에 바로 코트를 걸치고서, 일할 때 신는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녹색 시보레에 몸을 실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을 때, 아직도 베이글을 입에 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이 나갔나보다.

그대로 사무실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다. 거기에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분명, 그는 그 대궐같은 집에서 쫓겨났을 테니까.

고급스러운 목제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새로 단 것이 확연한, 주변의 콘크리트 흰 벽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런 조각된 나무문이다.
24시간 맥도널드 점원이 강도를 당하는 이 험악한 세상에, 문을 잠가놓지 않고 자는 그 배짱에 기가 막혔지만 일단 감사하며 들어갔다.

스튜어트 엘리엇은 잠들어 있다. 할아버지에게 쫓겨나도, 입에서 은수저를 뽑혀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갈색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채 붉은 카페트 위에서 팔다리를 쭉 뻗고 행복하다는 듯이 자고 있다.

하이힐 굽으로 툭툭 건드리자, 부잣집 도령답게 예민한 스튜어트는 바로 일어났다.

“아, 뭐야.”
“뭐긴! 나야!”
“아, 어. 나 이 모델 에이전시 망했어. 할아버지도-”
“알아! 신문에서 읽었어!”
“그래서 이제는 부자가 아니야.”

앨리스는 스튜어트를 꼭 껴안았다. 바닥에 앉은 채인 그를 안은 채 긴 흑발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그의 어깨로 흘러내린다. 그는 그대로 앉아 있다. 그리고 앨리스가 말을 꺼냈다.

“상관없어. 나랑 결혼해 줄래?”
“어?”
“매일 나에게 아침을 만들어 줘. 넌 어차피 일 해도 곧 말아먹을 테니까 가사를 해. 내가 일할테니까.”
“그거 영광인데.”

스튜어트는 앨리스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며 대답했다. 긍정의 대답이다.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다른 손으로 어깨를 안는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에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너 하나쯤은 먹여살릴 수 있으니까.”

새벽 5시에 겨울 코트를 입고 쳐들어와 로맨틱하지 않은 청혼을 하는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스튜어트는 씨익 웃었다. 그는 도박을 했다. 앨리스가 과연 자신에게 돌아올 것인지, 아닌지. 앨리스는 한 번 그를 떠난 적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세상모르고 잘난척하는 부잣집 아들은 싫다며 자신을 떠났다. 그렇지만 가까운 친구로 계속 남아 있었다.

문을 열어두고, 그녀 아닌 이를 전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경비원을 세워두고서 사흘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분명 찾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대로 끝날 관계일테니까, 그건 또 그것대로 좋았다.

돈이 떠났을 때 앨리스가 그의 곁에 남아있을 것인가, 아닌가.
장래와, 평생과 사랑을 건 위험한 도박을 했고 스튜어트는 이겼다.

그래, 완고한 할아버지는 분명 그의 결혼을 기뻐하며 도로 받아들여주실 것이다. 아니면 나중에 손자라도 안고 찾아가면 되겠지.

그때쯤이면 앨리스도 할아버지와의 화해를 기뻐해 줄 것이다. 쓸데없이 방만 남는 큰 집에 산다고 화를 내거나 하지도 않겠지. 그녀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자. 집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따로 고용하면 된다. 앨리스가 일하고 돌아오는 걸 기다리면서, 책이라도 읽자.

앨리스를 기다리는 건 분명 즐거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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