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바보사랑

2008.04.23 20:2904.23

  "우리 엄마는 절대로 아파서는 안돼."

뚝 떨어진 그녀의 말이 나를 당황케한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새로 샀다는 10cm 힐을 신고 걸어가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던진 말은 티포트 속에서 나온 커피콩처럼 당황스러웠다. 지금 이상황에서 할 말이 아니지 않은가. 하다못해 "힐이 높아서 걷기 힘들어." 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녀가 그 다음에 한 말은, 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하고 그전의 말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이를 먹어도 안되고 아파서도 안되고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단 말이야."

팔월의 종로. 아스팔트길은 핫초콜릿처럼 검고 열정적으로 타오르고 있다. 핫초콜릿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은 포장이 반쯤 벗겨져 공사중이라는 것.

처음 신는다는 높은 굽의 새 구두를 신고 나오겠다고 그녀는 좋아하면서 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내 첫사랑이다. 어깨위에서 찰랑거리는 곱슬머리가 발랄하고 매력적인 스물두살 아가씨이다. 하얀 블라우스에 새까만 스커트, 빨간 구두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열여섯때부터 내 사랑이었고 지금도 내 사랑이며 앞으로 내가 사랑할 사람이다. 곤란한 점이 있다면 그녀의 남성편력이다.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데 그중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일까. 하긴 내가 뭐라고 말할 바는 못 된다. 나는 여자이고 그녀의 곁에서 그녀가 바라는 대로 든든한 남자로써 기둥이 되어줄 만한 사람이 되어줄 수는 없으므로. 사실 내가 여자이고 십년지기 친구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비하면, 그녀의 남성편력따위는 정말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지금처럼, 그녀가 새 구두를 신고 비틀거릴 때에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곁에 서 있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넘어질 때에 손을 뻗쳐 받쳐준다면 "어머 얘 징그럽게 왜 그래!" 하고 그녀는 손을 뿌리칠 것이므로. 그녀가 넘어질 것 같은 울퉁불룽한 것이 나타날 시기에 맞추어 적절하게 옆에 서 있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내게 기댈 수 있도록.

'걱정하지 마,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어.'
'네가 싫어한다고 하면 네 곁을 떠나겠지만, 네가 원하는 한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 들이키는 깊은 숨처럼 그 말을 나는 삼켰다. 응, 이런 말을 하면 너는 부담스러워 할 거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겠다. 그저 내 속에 가득이 담아둘 뿐이라고. 열여섯때 처음 하이힐을 신었을 때에 너는 내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길을 걸었다. 나는 175cm, 너는 158cm. 귀여운 너는 안으면 내 품에 쏙 들어와 버린다. 넌 그것이 싫다고 내 키를 10cm만 나누어 달라고 조르곤 했다. 나누어줄 수 있다면 주었으리라. 발목이건 무릎이건 깎아서 줄 수 있는걸. 단지 문제는 현대 의학 기술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법이 있다면 좋으련만. 아니, 내게 마법이 있다면 키를 나누어주겠다고 원치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랑을 잊도록 하는 약을 원할 것이다.

너는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이며 나를 갖고 휘두른다. 나의 월급날이 되면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전화해서 백화점에서 만날 날을 잡는다. 내 팔에 매달려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나를 위한 것을 고르는 것 마냥 너를 위한 것을 고른다. 그렇게 가방과 구두를 사고 나면 비싼 요릿집에서 식사를 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더이상 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댓가로 너에게 돈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다. 응, 나는 오늘 말할 것이다. 나는 이제 바빠서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이라고. 너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독하지 않다.

나는 사랑을 잊도록 하는 약을 직접 만들어 삼키려 한다.

자주 가던, 쿠션이 푹신한 카페로 간다. 키큰 내가 앞서가면 내 엉덩이가 적나라하게 보인다고 얘는 내가 먼저 계단을 올라가는 걸 싫어한다. 그녀가 먼저 올라가도록 살짝 비켜서는 내 옆을 스치며 그녀가 말한다.

"우리 엄마 암이래."

그녀를 168cm로 만들어 주는 마법의 구두. 그녀가 구두를 신어도 나는 아직 한참 위에 있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목아프다 했기 때문에 나는 힐을 신지 않는다. 플랫힐을 신고 선 나를,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우리 엄마가 암이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계단의 힘을 빌어 나보다 한참 위에 선 그녀의 아래에서, 어쩐지 나는 기가 막혔다. 얘의 엄마는 얘와 달리 정이 많고 나를 자기 딸처럼 아껴주시는 속넓은 분이시다. 그분이 암이시라고?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햇빛이 뜨겁고 뜨겁게 내리쬐는 이 여름날 암이라니. 태풍이 오고 장마가 몰아치는 때에 번개라도 치면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이것이 현실이다. 하늘은 푸르고 너무나도 아름다우며 태양은 한밤중에 잘못 켠 형광등처럼 뜬금없이 뜨겁기만 하다. 그리고 그분이 암에 걸리셨단다.

"그런데 넌 지금 여기 나와 있어? 새 구두를 신고?"
"방금 알았다구!"

북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름답지 않은  목소리.
자그마한 새가 높은 톤으로 지저귀는 것처럼 하이톤에 쨍알쨍알대는, '여자 목소리'라는 것이 명확한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변하는 것은. 그녀가 중학교 때 중간고사에서 낙제한 이후로 처음 듣는다. 기절할 만큼 싫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냈다. 그녀가 추가시험을 봐야하게 되어서 나는 방학내내 매일 그녀의 집에 같이 가서 화학숙제를 도와주곤 했다.

"문자가 왔단 말야!"

그녀는 여전히 계단 위에 서 있다. 핸드폰을 내밀었다.
발송자는 모르는 번호로 찍혀있다.

[샘아름병원입니다. 김명희님의 검사결과가 암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수술비 2000만원을 갖고 방문해 주십시오.]

"...."

나는 잠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고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도 그 문자는 그대로 있었다.

"이걸 믿냐! 믿는거냐!"

그러고보니 최근에, 사이트가 해킹당해서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일이 잦았다. 얘도 그렇게 개인정보를 유출당했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보이스피싱도 아니고, 이런 어설픈 문자를 믿는 거냐? 아니,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아? 아니, 이건 돈 문제가 아니다. 악질적인 장난에 가깝다. 계좌번호도 뭐도 없으니 사기라고는 할 수 없지.

잠시나마 흥분했던 것이 바보 같았다. 그녀는 아 그래? 하고 눈가의 눈물을 비볐다. 나에게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게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모르는 척하며 문자를 보낸 이를 욕하였다. 얼그레이티가 다 식어버리고 치즈케익이 굳어버릴 때까지, 그렇게 그 사람을 욕했다.

백치미에도 레벨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백치미는 레벨 99. 육삼빌딩보다 높고 7호선 지하철보다 깊다. 나는 역시 그녀의 곁에 있어야겠다.
이런 악질적인 장난을 하다니. 초등학생도 아닌데 이걸 믿다니. 그 두 가지가 겹칠 일도 별로 없는데. 그녀는 물가에 내놓은 아기 같아서 눈을 떼고 있으면 안된다. 그녀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나는 역시 그녀의 곁에 있어야겠다. 그녀의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뒤에서 누군가 카페에 올라가려고 머뭇거리고 있어, 나와 그녀는 일단 계단을 올라가 2층의 카페로 간다. 항상 앉던 창가 자리로 가며, 어쩐지 그녀가 살짝 웃는걸 본것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 웃음은 희미한 봄 아지랑이처럼 곧 사라져버려서 잘못 본 것인가 싶기도 하였다.

.
.
.
.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175cm, 나는 158cm. 작고 귀여워 보이는 것은 싫다. 너와 대등한 관계, 대등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힐을 신는다. 10cm 힐은 역시 아직 무리일까. 그렇지만 설령 20cm짜리 구두를 신는다고 해도 나는 그녀와 대등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어깨 안에 폭 안기는 나는 조그마한 강아지 같아 볼품이 없다.

그녀는 나를 떠나려고 한다. 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지만 딱히 그녀와 사귈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녀가 내 곁에서 떠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 보았지만 그녀만큼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이는 없다. 그녀는 내가 제대로 된 남자를 사귀지 않는다고 내 남자 취향에 대해 품평하지만, 내가 그것을 기쁘게 듣고 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나는 마치 그녀가 내게 쏟는 관심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연기를 한다.

그녀는 나를 갖고 싶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갖지 못하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귀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린아이가 일단 손에 넣은 장난감에는 그대로 질려 버리는 것처럼. 그렇지만 그런 마음으로 십몇년이나 곁에 있을수는 없겠지. 나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시험해 볼 수도 있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로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내 곁에 있어주는 것.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의지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내가 손을 뻗어서 너를 잡아볼 마음은 없다.

힐을 신고 휘청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그리고 너는 내 곁에 있지. 너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 곁에 와 있다. 네가 먼저 손을 뻗어 부축하면 부끄럽다고 화를 내는, 뺨이 붉어진 걸 들킬까봐 큰 소리를 내는 나를 신경쓰며, 절대로 먼저 손을 뻗지는 않고서 내 옆에 있다. 그래서  새 힐을 신을 때에는 반드시 그녀를 만나야 한다. 그녀가 아니고서는 나를 지탱해줄 만한 사람이 없다.


나의 어설픈 연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겠지. 어쩌면 너도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도 말하지 않겠지. 지금의 이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귀엽고 이쁜 머리가 빈 여자고, 너는 그걸 묵묵히 받아주는 마음 넓은 친구다. 나는 너 이외의 누구에게도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지 않는다. 어쩌면 난 매번 너를 시험하는 걸지도 모른다. 언제 네가 질려서 날 떠나버릴까 하고.

네가 무언가 말하려 한다. 너의 표정에 굳은 결의가 보인다. 아, 나는 이 표정을 본 적이 있다. 너는 이제 날 떠나려 한다.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연락을 끊은 다음 혼자서 마음을 정리하고, 오롯이 서려 한다. 안돼, 너는 그런 식으로 나를 떠나서는 안된다. "어떤 말을 지껄여도, 난 상처입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겨울이다. 너는 공부를 잘하고 나는 못해. 그런 네가 내 곁에 있는건 내 자랑이었고 기쁨이었다. 네가 합격한 학교는 나로서는 절대로 못 갈 곳이었다. 그게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마치 내가 합격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잘났다고 쏘아붙였다. 왜 나는 축하해준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안정권으로는 지나치게 낮게, 내가 합격한 학교에도 썼다. 그렇지만 결국은 자신이 합격한 명문 학교로 갔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니 미안하다고 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쏘아붙여 버렸고 너는 상처를 입었다.

네가 상처입은 것은 분명 수없이 더 많을테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그날 교통사고를 당했다. 찻길에 뛰어든 건 나다. 너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너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 너에게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어.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빠른 속도로 문자를 보낸다. 받는 번호는 나 자신, 보내는 번호는 지역번호 080으로 아무거나 찍는다.  
곧 나는 너에게 말을 던질 것이다. 너보다 높은 자리에서, 바보처럼 심각하게 가련한 나를 연기해야지-

이런 바보같은 문자를 보고 믿을 사람이 있으리라고 정말로 생각한다면.
넌 정말로 바보다. 내 말은 뭐든지 믿는 바보.

그렇게 해서 네가 내 곁에 있도록, 너를 묶어둘 것이다. 네게 말을 꺼낼 시간을 주지 않고서. 그 외의 방법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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